그런데, 지리산 피아골에 일본목련이 있다니...필시 일제 때 식재한 것이기 쉬우리라.
글에 의하면 표고막터에서 삼홍소 사이에 있는 조림지를 지도를 통해 보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60F375B4462AE07)
*지도
연곡사 매표소 - 직전마을(버스종점) - 표고막터 --- 삼홍교 - 피아골 대피소가 되겠다.
표고막터에 대해서 더 자료를 찾을 것도 없이,
일제 때 표고를 인공재배하고 저장하던 창고터일 것이다.
한라산 남쪽에도 일제때 광범위한 표고 재배 농장이 있어서, 산막들은 등산객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제주도민들은 재배기술과 설비를 이용해서 생산 및 주로 홍콩으로 수출을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75A3E5B4468622E)
최초의 표고버섯 인공재배자 중 한명인 후지타 간지로는 1909년 제주도 표고농장 여행을 하면서
'제주도 여행일지 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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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일본목련 재배지의 상태는 이렇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988E3D5B446D5601)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D023F5B446D3E2B)
*사진출처
혹시 몰라 팩트를 체크하기 위해 국립공원에게 문의했더니, 기록은 없다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일제 때 육림했다고 한다.
일본목련을 해방된 한국이 심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이겠다.
이 나무들이 일본때 식재한 것임을 알지도 못할 등산객들이 나무에 못된 짓을 상당히 많이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C90385B446E3F34)
'천하명승 지리산기(병 지리산탐승안내)' 로 지리산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인 1960년 책이다.
책에는 두개의 지도가 삽입되어 있는데 --> 더 읽으시려면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84F3E5B446FBA04)
당시에만 해도 연곡사까지가 아니라 화개장터로 가는 외곡리3거리까지만 신작로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연곡사 위에 보면, 건물표시와 함께 연습림 작업장(演習林 作業場)이라 적혀 있다.
이 연습림 작업장은 이후 지리산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게 되는데....-> 더 읽으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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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연곡사에서 약 6km쯤 피앗골(직전(稷田)계곡)을 더듬어 올라가면
옛날 왜정시대의 소위 일본 동경대 연습림사무소가 건설됐던 피앗골(稷田洞)에 이르게 된다.
해방전 이곳에는 훌륭한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으며 표고작업장의 시설도 상당히 좋았었는데,
이곳 역시 여순사건 당시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이곳 일대의 임상미 계곡미는 절가무쌍이다.
저자는 일제 때 피아골에 대해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이임에 틀림없다.
알다시피 천왕봉 근처에는 일본 쿄토대 연습림(연구림)이, 노고단 주변은 동경대 연습림이 있었다.
글에서 보다시피 '표고작업장의 시설도 상당히 좋았다'라며 표고막터가 일제떄 유래함을 알게된다.
그리고...
'해방전 이곳에는 훌륭한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으며 ' 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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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건물들이라... 이 건물들이 도대체 어디에 쓰던 물건인고?
나는 이 건물들이 단순히 연습림 사무실과 연구실들일 리가 없다고 본다.
연습림은 압록강변처럼 벌목공장이 아니라 삼림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곳이라 정해졌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노고단 정상에 선교사 휴양소가 거대하게 건립되어 있었다.
철따라 놀러다니는 걸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닥치고 열공만 했을 리 있겠나.
피아골 동경대 연습림에는 모르긴 몰라도, 휴양지가 있었다고 추측된다.
책에서는 '이곳의 임상미(林相美)와 계곡미는 절가무쌍(絶佳無雙)'이라며 숲과 계곡을 찬탄한다.
일본인들과 시절 좋은 조선인들은 엽습림 속의 '훌륭한' 건물들에 묵으면서,
봄날 '일본목련' 꽃을. 여름에는 피서겸 물놀이를, 가을에는 단풍구경(觀楓)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피아골을 통해서 지리산을 올랐을 것이다.
화엄사가 국가대표 유원지로 번잡한 것과 비교되어,
피아골에는 국보와 보물도 많은 연곡사가 있어 호젓한 명승지 유람의 성격도 함께 했을 것이다.
피아골도 '우리가 원컨 윈치않건' 이런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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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피아골에 관한 우리의 관심사는 대체로 이러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AB2345B44662631)
우리는 유리겔라인양 일제치하 45년동안 지리산을 진공계에 이전시켰다.
그 결과 일제 때 피아골의 모습을 궁금해 하는 이 조차 없다.
'산이 무슨 죄가 있노' '산을 돌리도'
억울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일제가 되면서 '근대관광'이 시작되었다.
양반들만 찾던 화엄사와 지리산은 일제 때부터 서민들에게도 오픈되어 그 아름다움은 공유되었다.
따라서 조선이 아니라 일제 때 지리산이 어떠했는지를 찾는 것은,
결국 '모두의 산, 시민의 산'으로서 지리산을 바라보는 한 관점이기도 하겠다.
한편,
첫댓글 정말 잘봤습니다~~~^^
파타고니아님...이렇게 소통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등산박물관 어인말씀 귀한자료 감사드립니다~~^^
귀중한 자료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모모님...말씀 감사드립니다...
눅눅한 장마에 옛날 사랑방 이야기식으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일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정상석도 많이 교체하더군요.
그러나 남해 구미산 소요산이란 두개의 정상석이 있더군요.
특히 경주 남산엔 대누가 없는 불상이 여러곳 있는데
일제때 우리의 기를 꺽기 위해서 일본본놈 들어 불상의 머리를 잘랐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좀 복사하겠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두개의 정상석이 있는 곳도 있군요.
산을 관리(?)하는 분들의 곤혹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지리산에 빨치산 악명떨쳤던곳이기도 하지요
일본에대한경개심도 중요하지만
북괴에대햐 경각심은 더커야합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