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구지 만들 필요가 없는 영화다.
제작자겸 감독인 리들리 스콧은 마치 철학자라도 된 양 그리고 무지한 대중에게 게몽이라도 하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왜 에일리언을 누가 창조햇는지 묻지 않는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자들이 무지한 대중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나아가 중세의 꼰데 스콜라 철학자들이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세뇌시키듯이 늙은이가 된 그는 그의 영화에서도 늙은이 특유의 꼰데철학을 강요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의미는 고뇌하여도 자기존재의 근원과 창조주로서의 신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지 모르는가?
전 인류의 90%는 현재의 팍팍한 삶 자체도 감당하기 벅차한다. 그래서 그들은 근원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절대 다수 거의 99.99%는 영화에서 즐거움과 놀이를 찾지 철학적 근원적 사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리들리 스콧은 마치 자신이 철학자인양 주접을 떤다.
79년부터 시작된 5-7년 주기의 에일리언은 90년 후반을 끝으로 4편까지 마무리 되었다.
이 작품이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은 SF영화이지만 설존적 의미를 가지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미지의 우주에서 마추진 에일리언은 자유를 갈망하나 먹고 살기위해 참고 인내하는 소시민의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힘, 제도의 압제를 상징한다. 해서 무지막지한 에일리언과 싸우는 가냘픈 여자 주인공은
오늘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반영하고 오버랩해주는 역활을 하였다. 동시에 젊은 학생들과 대학생들에게도
여전사의 불가능한 싸움의 승리는 공부와 취직에 목숨을 거는 팍팍한 삶을 위로해주고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에일리언은 80-90년대 20년을 거쳐서 동서양을 막론한 소시민의 삶에 위로 희망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에일리언의 모습에서 부모나 선생 직장상사 보스 혹은 싫음 등 인간을 감정이입 시키거나, 혹은 잔인한 에일리언의
먹이사냥을 통해 폭력과 살상의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였다. 에일리언을 자아로 환원하던 악으로 환원하던 그건
보는 관객의 입맛대로 느낄 수 있었다.
1편의 제작은 리들리 스콧이 하였고 폭망하였다.
빚에 시달리던 그는 20세기 폭스사에 거액에 판권을 넘겼고 2편부터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식잃은 부모의 심정으로 살던 그는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 "킹덤 오브 헤븐" 등으로
막대한 부와 명에를 축적하고나서 에일리언의 판권을 다시 사들인다.
그리고 그가 1편에서 구상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우주 대서사시를 완성하고자 한다.
그런데말입니다. 2010년이 지나자 리들리 스콧은 갑자기 노철학자에 게몽군주로 트렌스폼을 해서 나타났다.
세계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명예로 수천억대의 부를 소유한 영화재벌이 된 그는 대중을 가르치고 게몽하려고 한다.
그래서서 제작한 것이 "프로메테우스"이다.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와 인간에게 전해준 그래서 신의 저주를 받은
프로메테우스 라는 이름을 가차하여 대단한 우주 서사시를 기획하였다.
이 작품은 처음엔 팽팽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쭈그러드는
풍선처럼 다보고나면 허탈감이 드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의 게몽철학의 정점 "에일리언 커버넌트"가 개봉되었다.
프로메테우스부터 주인공이었던 AI 데이빗.
이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것은 골리앗과 다윗의 다윗이다. 데이빗이 흔한 이름 중 하나라서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허나 필자는 듣자마자 다윗이 생각났다. 감독은 이 의도를 보다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커버넌트의 첫 장명에서 미켈란젤로의
다윗 조각상을 보여준다. 영어로 데이빗이라고 부르며..... 이 장면은 데이빗이라는 너무 흔한 이름이 바로 유태인의 영웅
다윗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라고 추정 가능하다. 동시에 첫 장면에서 필자는 이렇게 물었다.
다윗? 그럼 골리앗은 누구지?
AI의 창조주 인간이 바로 골리앗이다. 그래서 첫 장면에 데이빗을 창조한 창주주 대기업 사장(프로메테우스에서 외계인에
살해 당함)괴 데이빗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새로운 창세기를 만든다.
결론은 간단하다. 외게인이 지구의 인간괴 생명을 창조했고 그들은 우주 곳곳에서 생명실험을 하여 다양한 괴물들도
창조하였다. 그러다 쓸모 없어진 인간 종족을 몰살할 생각을 한다. 이상이 프로메테우스의 스토리다.
커버넌트의 주인공으로 다시 나타난 데이빗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 우주인을 몰살 시킨다.
즉 하나님을 몰살시킨다....
그리고 드디어 1-4편에 등장한 에일리언을 실험을 통해 만들어 내고 인간을 몰살 시키려고 한다.
우주인- 인간 - AI - 에일리언 의 순서로 창조가 이루어졌다면, 파괴는 Ai가 창조사슬의 꼭대기 우주인을 죽이고
에일리언을 통해 인간종족을 말살하려고 한다. 인간은 피조물의 피조물에게 말살을 당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리들리 스콧이 보는 인공지능의 시대, 안드로이드의 시대는 에일리언 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인가보다.
그가 보는 미래는 그런 점에서 패시미즘이다.
피터지는 살육전이 난무하는 에일리언 1편에서 4편까지 시청자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실존적 투쟁에
박수를 보냈다. 3편 4편이 끝나면 기립박수를 보내는 청년들이 많았다.
허나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를 보면서 오히려 좌절이나 실소를 짓는 사람들이 많다.
철학은 철학인데 어두운 밤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을 씹으며 외치는 중년 남자의 개똥철학을 듣는 느낌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 된다.
청년들의 실소나 실망한 표정을 뒤로하고 일어나면서 20대 커플이 영화에는 관심 없이 스킨쉽에 부비부비 하는 걸 보면서
영화에 철학과 계몽을 넣으니 개똥이 되는구나.....라고 생각이 든다.
1-4편은 영화이되 영화가 아닌 실존철학적 느낌을 받았다면 2010년 이후에 만들어진 이 두 편의 영화는 3류 에로영화만도
못한듯하다. 영화로 철학을 하려니 개똥철학이 된다. 예술작품에 계몽을 심으려면 예술성이 사라진다. 재미도 사라진다.
이도저도 아닌 밍숭밍숭한 맛 처럼....
에일리언 1편은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였고 폭망하였다. 돈이 거덜난 그는 아끼는 주제 에일리언을
20세기 폭스사에 팔아버렸고 2편부터 공전의 히트를 쳤다. 3명의 감독들이 각각 자기 시각으로 오락영화로
에일리언 2,3, 4편을 5에서 7년 주기로 제작하엿고 엄청난 히트를 쳤다.
절치부심한 그는 세게적 감독으로 큰 부를 얻은 후 2010년에 에일리언 저작권을 사들인 후 에일리언의
새판을 짰으니 이것이 프로메테우스, 커버넌트 2편의 영화이다.
대중은 에일리언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관심이 없고 알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도 관심이 없다. 지금 하루 사는 것도 팍팍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걸 구지 가르치고 지적질을 하니 늙은 꼰데선생의 훈육에 지겨워 사지를 비비꼬는 고등학생처럼 영화관람 내내
늙은 꼰데의 잔소리만 실소를 짓게한다. 특히 바이런과 셀리의 시를 인용하고 바그너의 교향곡 '신들의 발할라 입성"을
내세우며 잘난척 하는 감독의 꼰데질은 철학책 몇 권 읽은 놈이 박사과정을 끝낸 학자에게 가르침을 주겟다고
거드름 피우는 꼴이된다. 그래서 또한 실소가 나온다.
2017년 5월 9일... 비오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