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는 줄초상이 났다. 황제에 황태자까지 연달아 작고한 사태다. 그는 두 서씨황족이 죽은 다음에도 마땅히 그의 자리를 지켰다. 황제에 황태자까지 서거해도 더 이상 이 나라에 서씨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 둘이 아닌 서씨가 차지해 빈 황좌도 마땅히 채워졌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간은 거꾸로 돌아가지도 않고 순항이다. 새 하루를 맞이한 나라는 크게 들썩하다가도 언제 그랬냐 듯 차분하게 가라앉아버리고 만다. 남겨진 자들에게 죽음이란 게 그렇다. 일신에 큰 파동을 주는가 싶다가도 영원하지는 못하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리고 말면 산 사람들에겐 금방 잊히고 마는 죽은 자의 죽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간격은 날마다 멀어진다. 멀어지고 아주 멀어지다 이내 하루에서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일조차 지워버린다. 좋지 않은 날보다 좋은 날을 바라며 슬픔 대신 웃음을 얼굴에 매단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기억을 잃고 산 사람이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전부 다 기억할 수 없듯. 모든 기억은 영원하지 않다. 그가 죽은 일곱 명의 부인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아주 간혹 죽은 사람의 죽음에 빠져사는 사람도 있다. 기억이 워낙 강렬해 죽음에 빠져 살아서, 이승에 살았으면서도 죽은 사람이 된다. 서서히 산 사람도 죽음에 갉아먹힌다. 갉아먹힌 그 사람은 죽음을 일찍 맛본다. 미련하고, 미련하게. 그 미련하고 미련한 게 여덟 번째라 그를 즐겁게 한다. 그는 여덟 번째가 최대한 오래 살았음 소망한다. 여덟 번째가 이승에 발 붙여둘 수 있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도. 어느 것이 살아서 더 고초가 될 것인지에는 관심이 지대하다.
그는 어느 날부터 내당의 여덟 번째가 말을 하지 않는단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을 언제부터 하지 않고 있었단 걸 세세히 알진 못해도 그가 깨달은 날부터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저것도 죽은 자를 위한 추모하는 색다른 방식인가 싶어 별말 없이 며칠을 보내고 며칠은 부러 귀찮을 정도로 일상적인 말을 걸어봤다. 단 한 번도 그 입이 열려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말을 하지 않은 걸 짐작하고도 여러 번 말을 걸었다. 그사이에도 점점 겨울이 깊어가고 여덟 번째가 말을 하고 있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그가 혼자서 한 말이 도로 주워 담지 못하고 쌓여갔다. 슬슬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여덟 번째를 가만 바라보는 게 제법 질릴 정도로.
“부인 잘못은 없습니다.”
피사 것들이 부리는 종을 어찌 대하는 지야 알 바 없어도. 그는 부리는 종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정도야 잘 알았다. 주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은 주인의 부리는 그 종에게 있었을 뿐이고. 그 종이 잘못했으니 벌도 종이 오롯이 받으면 되었다. 불과 일각까지만 하더라도 여덟 번째가 부리는 어린 종에게는 잘못이 없었다만 지금은 있었다. 잘못한 종을 못 본 체하고 두면 계속 잘못을 저지를 뿐이라 그는 종의 잘못에 대해 자비롭지 않았다.
여덟 번째의 종인 어린 계집종이 무릎을 꿇고 눈물 잘못을 빌어온다. 저 어린 게 어찌나 간곡하게 비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던 사람이 잠깐 보아도 마음이 약해지게. 잘못을 해서 잘못한 만큼 빌어왔다. 그래 너도 네 잘못을 잘 아는구나. 잘 알고 있다면 무얼 하지. 그러게 처음부터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왜 잘못을 저질러선. 그렇지 않소, 부인. 그가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려보나 여덟 번째에게선 여전히 말이 없다. 한 번만에 입을 열기에는 저 종의 목숨값이 깃털처럼 훨씬 더 가벼운가 보았다. 기어이 네 주인이 너를 죽이려나 보다. 가엾기도 하지. 여덟 번째는 기어이 자신의 어린 계집종을 죽였다. 어린 계집종은 그때도 여덟 번째가 준 것들을 몸에 차고 있었다. 여덟 번째가 준 것은 계집종의 수의였나 보다. 여덟 번째가 준 것이 죽은 계집종의 피에 젖어들어간다.
종에게는 무덤이 없다. 들판이든 강가든 산이든 던져지는 그곳에서 썩어갈 뿐이다. 다른 종들의 무덤이 없었던 것처럼 어린 종도 그리 되어야 하나. 누구를 위해서였건 무덤 하나 없을 종에겐 대단한 호사기도 하다. 내당 앞의 빈 정원이 아이 하나가 들여갈 정도로 구덩이가 파였다가 다시 흙으로 덮혀졌다. 여덟 번째가 가족이 그리울 때마다 잘못한 어린 종이 보고플 때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되게 그가 또 마음을 썼다. 얼마나 다정한 부군이던가.
다정이 어디 그뿐이랴. 다른 어린 계집종들이 여덟 번째가 죽은 어린 계집종에게 준 물건을 착용하고서 다시 내당에 든다. 하나 죽은 계집종의 피가 묻은 물건을 차서 그럴까. 죽은 계집종에게 홀리거나 영혼을 차지해서 그러할까. 그 계집종들도 먼저 죽은 계집종들처럼 똑같이 잘못을 했다. 저 자리에다 누구를 가져다가 놓아도 몇 번이고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서. 그때마다 똑같이 저 정원에다 묻어주는 수고를 해야 했다. 열 손가락이 다 넘어가고야 여덟 번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들은 그 말이 무엇이든 간에 아주 반가운 말이다.
“그래요, 이번에도 부인 잘못은 없습니다.”
목이 쉴 정도로 내내 잘못과 용서를 비는 어린 계집종도 그만큼이나 여덟 번째의 말이 반가웠다. 다른 계집종과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살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짧은 찰나의 희망을 엿보나 그 무엇도 영원하진 못하다. 또 어린 계집종의 숨을 여덟 번째가 빼앗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이미 잘못한 종이었다. 잘못한 종을 아무런 벌도 주지 않아선 안 됐다. 넘어가면 또 똑같이 잘못할 테니. 하물며 똑같이 잘못한 다른 종들이 억울해서 영영 눈을 감질 못할 테니. 그의 예상보다도 좀 늦었다. 여덟 번째의 입을 열기까지는. 그 탓에 이미 꽤 많은 어린 계집종들이 죽어나가 버려 그도 몹시 안타까웠을 뿐이다. 그래도 이번의 일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여겼다.
마지막 계집종까지 죽여 여덟 번째가 그 입을 다신 닫지 못하도록.
모두가 알고 있다. 심지어는 여덟 번째가 죽였고 죽은 계집종들까지. 계집종들의 잘못은 여덟 번째가 저지른 잘못이다. 하나 아무도 그리 말하지 못했다. 그가 여덟 번째의 잘못이 없다 한 탓에.
겨울이 깊어진다는 말은 봄이 온다는 말이다. 이제 저 정원에는 봄이 오면 많은 꽃이 심길 것이다. 잘못을 저질러 저 땅에 묻은 사람이 워낙 많아 그 꽃들이 누구의 뼈와 살과 피로 향기 나게 자랄진 알 수 없어도. 그중 여덟 번째가 그리워하고 보고파할 얼굴들이 저곳에 있다. 여덟 번째는 분명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이승에 살아도 그리워하는 죽은 그들과는 같은 시취가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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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감사합니다 시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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