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예술의 현실과 방향을 찾아서>
진도 수묵화의 원형과 ‘신성한 미로’
박남인
다시 ‘고향으로 부는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 ‘높고 쓸쓸한 바람’과 시와 천상의 컬렉션을 꿈꾸는 공간과 만나게 된다.
컬렉션을 읽는다. 세상은 이제 끊임없는 ‘오징어 게임’같은 독화법(讀畫法)을 요구한다. 마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거리에서 쓰러지는 시들. 음유는 반지하방에 밀폐된 창문 안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림을 보고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나와 다른 한 경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영혼의 울림과 공명을 만나는 것이다.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상 화폐’와 같은 자화상들이 도시의 골목을 유령처럼 걷는다. 한 사내가 그들의 지친 그림자의 허물어지는 윤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빠른 붓질과 또는 크로키같은 연필로 잡아 넣는다. 그가 석주(石柱) 박종석이다. 사는 집은 광주 설연(雪連)산방이다.
석현(石峴) 박은용에 이어 호남 의병지사 김도숙의 삶과 예술을 깊이있게 담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를 보내왔다. 한 예술가가 내가 아닌 다른 예술가를 그도 한 시대가 죽순밭 바람으로 비켜가는 시간을 불러내 그린다는 것. 석주 화백은 그렇게 금남로를 80년대를, 호남의 30년대를 다시 불러내 성찰과 담론을 지속한다.
그는 말한다. 고백하고 분노하고 다시 정좌한다.
석주는 “시 서 화에는 그 사람의 삶과 사상이 녹아있다. 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평소 그 사람이 품격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거시적 역사의 나열이 아닌, 온몸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더욱 치열한 구국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힌다.
“뒤돌아보면, 역대 유명화가들이 모두 중앙출신이 아니듯 지방예술계의 홀대는 제살깎아먹기와 같다.” 진실은 참혹하지만 힘의 원천이다. 시와 그림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 내일을 기리워하는 몽유(夢遊)의 길이 아니다. 함부로 시대와의 불화따위로 거리두기를 자랑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존의 프레임이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 머릿 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깊은 밤, 흐린 주점 탁자 위에 나의 창문 밖에는 밤새 화두와 같은 함박눈이 내린다. 산 속에서 기침을 콜록거리는 노승의 중얼거림이 대나무숲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추풍부가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말하지 않는 것도 틀렸다 한다. 월면불(月面佛)이 서쪽도 동쪽도 아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마당을 지나 법정의 빈 의자에 잠시 꿈에 잠긴다. 혼자서 가라. 빌어먹을 걸승의 혼잣소리가 몇 개의 눈꽃을 털어낸다.
나는 시골 지자체의 지역신문사 편집과 기사조형하기와 연간집에 글을 싣는 지역예술가, 아웃사이더도 아닌 그저 그런 ’통속한 잡지‘를 장식하는 3류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늘 자살을 꿈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의 경계는 연옥계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그 연옥의 장미덩쿨 문 앞.
나의 시는 어떤 울타리다. 탱자나무에 피는 꽃. 깊은 마당을 서성거리는 흰 옷의 초조한 얼굴의 유배자, 리비도 또는 풍자와 낫의 흰 광채를 담지 못한다. 진도아리랑이 나를 손짓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나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리비도의 충동이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의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나게 된다. 진도아리랑 가사는 그렇게 탄생되고 이제 밭두렁을 넘어 공연장을 출렁거린다.
예술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단절이자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다. 김 훈의 최근 안중근은 바로 그 펙트의 관점이지 현실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예술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단위”라는 말로 서술된다. 특정 시기를 가로지르는 예술작품들의 상호 공명과 침투, 나아가 그것들이 함께 형성하는 어떤 미학적 배치와 사회적 존재의의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예술이라는 족쇠의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
따라서 예술이 산출하는 진리란 그 내재성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사건, ‘코뿔소의 코처럼 혼자사 가라’는 곧 새롭게 나타난 특이성과 그 관계의 그물을 가리킨다.
길을 잃은 자들에게 성채처럼 다가오는 언덕 위의 미술관. 솔개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는 연말을 맞이하여 특별 기획전으로 지난 11월 20일부터 2022년 12월16일까지 우리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하고 있는 남초 김복용 서예가와 일촌 김성룡 한국화가 두 분의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진도현대미술관에서 각각 전시하였다.
특히 두 원로작가는 전라남도 문화재단과 진도군(군수 김희수)의 후원으로 진도현대미술관( 교동리)에서 초대하여 각각 약45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는 한국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늘 고뇌의 정점에서 전시를 연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미술관, 하나의 위대한 왕조의 번영과 사라짐이때로는 신화가 되고 울주 반구대 암각화처럼 걸어나오는 역사. 미술관에는 귀신이 산다. 월면불과 공양식을 묻는 노파가 산다. 지역 예술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하는 것은 마치 병 속의 새를 꺼내는 일과 같다. 줄탁동시를 이룰 때 새는 새로운 세상으로 부화되어 날아간다. 정양 화백은 그렇게 ‘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장구포 수로에 젖는 노을을 마주한다. 지산면과 진도읍과 임회면이 경계를 이루는 묘한 곳이다. 국민가수 복바구니 송가인의 앵무리가 바로 앞이다.
“진도를 예술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음악 미술 서예 등 진도에는 다른 군보다 훨씬 많은 미술관이 존재합니다.” 어느 때는 맞고 지금은 맞지 않기도 하다. 지도내 미술관, 박물관을 올 해는 더 확장시킨다는 복안이다. 김희수 군수가 신년사에서 밝혔다. 운림산방 내 역사관을 옮기고 전시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듯하다. 소전미술관, 장전미술관, 나절로미술관, 동심원, 우초의 작은 갤러리. 그리고 남도전통미술관. 옥산 ㄱ미옥진, 금봉 박행보, 정정 박항환 화백.
그 중 진도현대미술관은 광부가 침침한 수 천미터 암굴 속에서 광맥을 찾듯 보름에 한번씩 다른 작가의 전시회를 열어 눈 명창이 다 된 문화메니아 눈을 호강시켜주고 있으며, 전국의 여러 작가를 초빙하여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과 마음을 한층 세련되게 해준다.
나는 이곳에서 진도 격동기에 태어나 가족을 잃고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석현 박은용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라 이미 제주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치선생 장남 허 은 대미산의 유작 ‘귤수소조(제주인의 최초 초상화)’와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려주는 또 다르 ㄴ수작에 나는 마약같은 ‘포옹’의 전이를 느껴야 했다.
일촌 김성룡씨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한 방문객이 차분히 아름다운 그림을 구경하고 방명록에 ”멋지요~ 참 좋소.“ 라고 글씨를 써 놓고 갔다. ”75세 되신 분이 다양하게 작품을 하였고. 엄청난 대작을 보여줘서 감명 받았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지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의 자기개발 기회와 창작활동의 기회를 북돋아주고 두 작가들의 창작역량 강화를 위해 전시할 수 있는 기회와 전시 공간 등을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 지원하는 동시에 이곳을 찾는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는 다양한 장르의 시각예술작품을 선보여주고 아울러 우리지역 주민들과의 문화욕구를 충족과 함께 두 분의 작가가 전시를 해 그 의미가 크다.
이번 전시 중에는 작품 관람은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서예 및 한국화를 직접 체험하고 관람객의 가훈 쓰기와 한국화 체험 등의 재능기부 행사를 두 분의 작가가 실시하여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을 함께 나누어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이러한 전시를 통하여 원로작가이지만 꾸준히 작업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선보이고 귀감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예향진도가 늘 전시 공간의 확보문제로 또 문인의들 창작 발료 지면의 제한은 우리 스스로를 ‘예향’으로서의 품격과 삶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천상의 화두로부터 벗어나가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남농 허건은 전남 진도 출생하였으며,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 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농사법은 자경농이었지만 금강산 마하연까지 발품을 팔았다. 벽에 달라붙은 거대한 밭.
진도는 이제 가볍고 쓸쓸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걷는다. 서울은 너무 밀식하여 영혼의 심폐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푸른 죽음의 하데스로 젊은 청년들을 수장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외롭고 궁핍한 쉬이 오지않는 ‘오래된 미래’를 사경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시중유화의 전범을 재인식케 하는 남초 김복용 작 백련강(종이에 먹)과 일가에서 일촌을 꿈꾸는, 일촌(日村) 김성룡작 귀로는 우리에게서 멀어진 원형의 자연 회귀를 그리워한다. 월면불 일면월(日面佛)이 떠오른다.
고향 진도를 자주 찾는 화가로는 단연 전정 박항환화백을 들 수 있다. 그에게서 사살ㄹ 했던 임농 하철경 화백은 아직도 산사와 고택을 다니며 사생을 게을리 않는다. 지인이 자전적 소설까지 냈다. 포산 박태우, 동외 정명돈, 정양 박주생 우초 박병락 등이 머문다.
작가 김성룡은 50년간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종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양조형 방식과는 다른 정신세계와 시대흐름을 반영하는 친근함을 주는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가로운 전가(田家)를 둘러싼 산야는 푸르고 맑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당연히 대량생산으로 피폐한 농촌과 다른 원시 두메공동체를 그린다. 그림도 유기농 시대다. 옥주인지사람(沃州仁智人)을 즐겨 쓴다.
진도는 옥주(沃州)였다. 삶이 곧 지난한 개옹 뻘길이었다. 질척한 노래였다. 진도아리랑 초기 원형의 가사들은 자기부정이라는 사회공동체 도덕 규범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뜨거운 자의식의 발현으로 천연스럽게 사내를 부른다. 누구의 욕망인지 열망인지 달빛이 휘청거린다.
진도아리랑은 고도의 전술이다. 강강술래와 함께 의병(疑兵)전술의 한 민속에 더 이상 거칠 수 없는 본능적인 남녀상열지사가 강한 힘을 탄다. “바람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라는 현실적인 바램이 원무를 돌며 꽃향기를 풍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깨달음이 따로 있냐. 늙은 스님네야 탁발 공양도 못 나가고 시아버지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철면불도 한 겨울에 땀을 흘린다는데 ‘씹도 못하는 입으로 똥꼬를 달라’고 하는 이빨 빠진 시아버지.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라고 하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설두는 마조가 남긴 말이 쓰디 쓴 활구(活句)임을 깨닫고 스스로 게송을 붙였다. 마조의 일면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재개발지구의 혹리수가 판치는 밤세상을 바라보는 달. 천국의 계단을 꿈꾸며 반지하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영화대본 작가들. 배를 쥐며 배고픔에 감기약과 배탈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기증, 주인에게 보내는 쪽지가 유언이 되는 세상. 금강안(金剛眼)의 수사관은 늘 헤어짐을 위한 결심만을 할 뿐이다. 사생취의할 생은 구겨지고 해풍 따위에 말라져 갈아 엎어진다.
故 조세희 작가는 생전에 '난쏘공'이 유효한 사회 담론이 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도시 재개발로 밀려난 하층민들의 삶이 1970년대의 이야기로만 머무르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 굴레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의 분홍빛 꿈과,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참사는 계속된다. 이 모두가 철면불의 강성노조 돈오돈수때문일까?
여귀산으로 돌아온 일휴 김양수 거사는 선화시를 즐겨 한다. 여백을 매우 중시한다. 참구하는 선방의 적염이 스민다. 양산 불보사찰 통도사에서 ‘아 매화불이다’고 소리없이 외쳤다.
그의 선화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다. 아제 누구도 소리를 새기지 않는다. 이철수도, 떠나간 오윤의 칼노래에도 피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가들은 어디로 가는가. 티브이를 틀면 화인열전은 계속된다.
김호석은 강원도 오지 광산으로 가 이마에 자등명을 달았다. 자화상이 비쳤다. 폐부 안에 도사린 안락과 기름진 창자 속이 비로소 까맣게 번들거리며 보였다. 새벽 공사판 거푸집 위에 시멘트로 굳어진 한 사내의 몸뚱어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휴전선이 곳곳에 철조망을 내리고 있다. 월드컵이 열리고 라다크에 어린이 학교가 세워진다.
‘오래된 미래’와 낡은 집의 오랑캐꽃을 그리는 화가.
일면불 월면불이여, 2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를 위해 몇 번이나 창용굴에 내려갔던가? 성인들은 백성들에게 불을 피우는 법과 농사를 가르치고 나아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에 지켜야 할 충효의 예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진도 아낙네는 소죽끓이는 부삭 앞에 비땅을 들어 땅을 치며 “일면불 월면불이여, 삼황오제는 이 무슨 물건인고?” 아리랑타령을 내던질 뿐이다. 따땃한 아랫목의 동지섣달 홀로새는 밤을 위하여.
해와 달 처럼 무정불이 부처라면, 중생을 위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친 삼황오제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설두의 이 한 질문은 우뢰와 같은 할이다. 산과 강에 무심한 사람이 어찌 임금의 덕을 칭송하랴. 톳발을 잡아당기다 죽고 경운기 트렉터 바퀴에 깔려 죽고 스카이 공사판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무의촌 병원에서 산대도 못 잡아보고 가는 인생 꿈과 같은 세상을 노래하지 않고 어찌 살겠는가.
자 아리랑시로 들어가보자. 시어머니 죽우라고 충원충수 했더니 친정어미 죽었다고 기별이 왔네 씨엄씨 선산에 봉황새 울고 시동세 내동세 태갈보가 나간다.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 열흘만 불어라. 앞산의 딱다구리는 없는 구멍도 뜷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찾네. 물속에 노는고기 잡힐듯해도 못잡고 저처녀 마음도 알듯말듯 못잡네. 접시가 깨지면 두 동강이 나고요 삼팔선이 깨지면 남북통일이 된다네. 임도 눕고 나도 누우면 등잔위 저불은 누가 끌까. 데려가오 날 데려 가오 우리님 뒤따라서 나는 가네. 치어다 보니 만학천봉 내려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요새는 팽목항이나 물김매는 바다로 가사가 건너간다.
우리의 시대는 곧 ‘소유’라는 분배방식이 속삭임이 많은 천사들을 앞장 세워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잉여’는 이미 예술을 범람해 낙원의 강(탐진치)을 오염시켰다. 마치 수묵이 종이와 비단에 스며들듯이. 그림에는 고유의 숫자가 새겨지고 시의 운율과 혁명의 향기를 잃어버렸다. 천정화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고 영혼의 이상향을 찾는 대항해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탁발을 잃은 그대여! 이제 사원에서는 원숭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퍼스트 레이디가 미술관의 컬렉터겸 기획자가 된다. 조각불이 화덕속으로 내던져진다. 아바타는 디자인을 입는다.
수묵은 강물이다. 서예 또한 불립문자다. 강물도 회룡하는 흐름이 하늘 은한수와 닿는 그런 강물이다. 가장 간결하기 위하여 천변만화와 계절과 달빛과 광야의 시인과 만나지 않았는가.
올 해는 진도군이 목포시와 함께 국제수묵 비엔날레 전시를 한다. 또 다시 화가들은 선택을강요받는다. 왜 예술가가 ‘죄수의 딜레마’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직도 벽을 나오지 못하는 담쟁이잎이 수북이 매달린다. 눈은 내리고 배추색은 해마다 다르다. 갈아엎기 전의 배추들의 뿌리는 시립다. 더 하얗다. 얼굴은 새벽바람에 푸르딩딩한 짠한 때깔을 보인다. 왜 멧돼지는 길길이 날뛰는 것일까. 무엇에 길들여 사는 지 모르는 사람들의 군상이 겨울 속으로 숨는다. 흐린 날의 주모가 석유난로를 끈다. ‘덕불고’와 인지위덕(忍之爲德) 표구액자가 춥다. 일학에 가면 야천(野泉)의 월면도가 오래 걸려있다.
소동파는 마힐 거사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 말했다.
마힐의 시를 맛보면 그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
味摩詰之詩(미마힐지시) 詩中有畵(시중유화) 觀摩詰之畵(관마힐지화) 畵中有詩(화중유시)
코로나 독감으로 내내 박물관이 휴관 중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도 문을 닫으니, 소요할 곳도 마땅한 곳이 없다.
왕유의 시 <산속(山中)>을 읽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왕유를 말할 때 소동파의 평을 드는 까닭을 수긍하게 된다니.
형계(荊溪)는 흰 바위가 드러나고,/이 추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은 비가 오지 않는데,/ 푸른 안개가 사람 옷을 적신다.
‘왜 우리는 수묵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사실 화가 자신에게 던지는, 한 시대와 삶을 보듬고 풀어야 하는 ‘즐거운 편지’공안이다.(박남인 문화 오피니언)
진도 수묵화의 원형과 ‘신성한 미로’
다시 ‘고향으로 부는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 ‘높고 쓸쓸한 바람’과 시와 천상의 컬렉션을 꿈꾸는 공간과 만나게 된다.
컬렉션을 읽는다. 세상은 이제 끊임없는 ‘오징어 게임’같은 독화법(讀畫法)을 요구한다. 마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거리에서 쓰러지는 시들. 음유는 반지하방에 밀폐된 창문 안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림을 보고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나와 다른 한 경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영혼의 울림과 공명을 만나는 것이다.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상 화폐’와 같은 자화상들이 도시의 골목을 유령처럼 걷는다. 한 사내가 그들의 지친 그림자의 허물어지는 윤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빠른 붓질과 또는 크로키같은 연필로 잡아 넣는다. 그가 석주(石柱) 박종석이다. 사는 집은 광주 설연(雪連)산방이다.
석현(石峴) 박은용에 이어 호남 의병지사 김도숙의 삶과 예술을 깊이있게 담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를 보내왔다. 한 예술가가 내가 아닌 다른 예술가를 그도 한 시대가 죽순밭 바람으로 비켜가는 시간을 불러내 그린다는 것. 석주 화백은 그렇게 금남로를 80년대를, 호남의 30년대를 다시 불러내 성찰과 담론을 지속한다.
그는 말한다. 고백하고 분노하고 다시 정좌한다.
석주는 “시 서 화에는 그 사람의 삶과 사상이 녹아있다. 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평소 그 사람이 품격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거시적 역사의 나열이 아닌, 온몸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더욱 치열한 구국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힌다.
“뒤돌아보면, 역대 유명화가들이 모두 중앙출신이 아니듯 지방예술계의 홀대는 제살깎아먹기와 같다.” 진실은 참혹하지만 힘의 원천이다. 시와 그림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 내일을 기리워하는 몽유(夢遊)의 길이 아니다. 함부로 시대와의 불화따위로 거리두기를 자랑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존의 프레임이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 머릿 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깊은 밤, 흐린 주점 탁자 위에 나의 창문 밖에는 밤새 화두와 같은 함박눈이 내린다. 산 속에서 기침을 콜록거리는 노승의 중얼거림이 대나무숲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추풍부가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말하지 않는 것도 틀렸다 한다. 월면불(月面佛)이 서쪽도 동쪽도 아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마당을 지나 법정의 빈 의자에 잠시 꿈에 잠긴다. 혼자서 가라. 빌어먹을 걸승의 혼잣소리가 몇 개의 눈꽃을 털어낸다.
나는 시골 지자체의 지역신문사 편집과 기사조형하기와 연간집에 글을 싣는 지역예술가, 아웃사이더도 아닌 그저 그런 ’통속한 잡지‘를 장식하는 3류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늘 자살을 꿈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의 경계는 연옥계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그 연옥의 장미덩쿨 문 앞.
나의 시는 어떤 울타리다. 탱자나무에 피는 꽃. 깊은 마당을 서성거리는 흰 옷의 초조한 얼굴의 유배자, 리비도 또는 풍자와 낫의 흰 광채를 담지 못한다. 진도아리랑이 나를 손짓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나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리비도의 충동이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의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나게 된다. 진도아리랑 가사는 그렇게 탄생되고 이제 밭두렁을 넘어 공연장을 출렁거린다.
예술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단절이자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다. 김 훈의 최근 안중근은 바로 그 펙트의 관점이지 현실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예술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단위”라는 말로 서술된다. 특정 시기를 가로지르는 예술작품들의 상호 공명과 침투, 나아가 그것들이 함께 형성하는 어떤 미학적 배치와 사회적 존재의의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예술이라는 족쇠의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
따라서 예술이 산출하는 진리란 그 내재성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사건, ‘코뿔소의 코처럼 혼자사 가라’는 곧 새롭게 나타난 특이성과 그 관계의 그물을 가리킨다.
길을 잃은 자들에게 성채처럼 다가오는 언덕 위의 미술관. 솔개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는 연말을 맞이하여 특별 기획전으로 지난 11월 20일부터 2022년 12월16일까지 우리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하고 있는 남초 김복용 서예가와 일촌 김성룡 한국화가 두 분의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진도현대미술관에서 각각 전시하였다.
특히 두 원로작가는 전라남도 문화재단과 진도군(군수 김희수)의 후원으로 진도현대미술관( 교동리)에서 초대하여 각각 약45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는 한국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늘 고뇌의 정점에서 전시를 연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미술관, 하나의 위대한 왕조의 번영과 사라짐이때로는 신화가 되고 울주 반구대 암각화처럼 걸어나오는 역사. 미술관에는 귀신이 산다. 월면불과 공양식을 묻는 노파가 산다. 지역 예술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하는 것은 마치 병 속의 새를 꺼내는 일과 같다. 줄탁동시를 이룰 때 새는 새로운 세상으로 부화되어 날아간다. 정양 화백은 그렇게 ‘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장구포 수로에 젖는 노을을 마주한다. 지산면과 진도읍과 임회면이 경계를 이루는 묘한 곳이다. 국민가수 복바구니 송가인의 앵무리가 바로 앞이다.
“진도를 예술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음악 미술 서예 등 진도에는 다른 군보다 훨씬 많은 미술관이 존재합니다.” 어느 때는 맞고 지금은 맞지 않기도 하다. 지도내 미술관, 박물관을 올 해는 더 확장시킨다는 복안이다. 김희수 군수가 신년사에서 밝혔다. 운림산방 내 역사관을 옮기고 전시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듯하다. 소전미술관, 장전미술관, 나절로미술관, 동심원, 우초의 작은 갤러리. 그리고 남도전통미술관. 옥산 ㄱ미옥진, 금봉 박행보, 정정 박항환 화백.
그 중 진도현대미술관은 광부가 침침한 수 천미터 암굴 속에서 광맥을 찾듯 보름에 한번씩 다른 작가의 전시회를 열어 눈 명창이 다 된 문화메니아 눈을 호강시켜주고 있으며, 전국의 여러 작가를 초빙하여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과 마음을 한층 세련되게 해준다.
나는 이곳에서 진도 격동기에 태어나 가족을 잃고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석현 박은용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라 이미 제주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치선생 장남 허 은 대미산의 유작 ‘귤수소조(제주인의 최초 초상화)’와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려주는 또 다르 ㄴ수작에 나는 마약같은 ‘포옹’의 전이를 느껴야 했다.
일촌 김성룡씨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한 방문객이 차분히 아름다운 그림을 구경하고 방명록에 ”멋지요~ 참 좋소.“ 라고 글씨를 써 놓고 갔다. ”75세 되신 분이 다양하게 작품을 하였고. 엄청난 대작을 보여줘서 감명 받았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지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의 자기개발 기회와 창작활동의 기회를 북돋아주고 두 작가들의 창작역량 강화를 위해 전시할 수 있는 기회와 전시 공간 등을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 지원하는 동시에 이곳을 찾는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는 다양한 장르의 시각예술작품을 선보여주고 아울러 우리지역 주민들과의 문화욕구를 충족과 함께 두 분의 작가가 전시를 해 그 의미가 크다.
이번 전시 중에는 작품 관람은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서예 및 한국화를 직접 체험하고 관람객의 가훈 쓰기와 한국화 체험 등의 재능기부 행사를 두 분의 작가가 실시하여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을 함께 나누어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이러한 전시를 통하여 원로작가이지만 꾸준히 작업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선보이고 귀감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예향진도가 늘 전시 공간의 확보문제로 또 문인의들 창작 발료 지면의 제한은 우리 스스로를 ‘예향’으로서의 품격과 삶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천상의 화두로부터 벗어나가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남농 허건은 전남 진도 출생하였으며,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 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농사법은 자경농이었지만 금강산 마하연까지 발품을 팔았다. 벽에 달라붙은 거대한 밭.
진도는 이제 가볍고 쓸쓸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걷는다. 서울은 너무 밀식하여 영혼의 심폐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푸른 죽음의 하데스로 젊은 청년들을 수장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외롭고 궁핍한 쉬이 오지않는 ‘오래된 미래’를 사경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시중유화의 전범을 재인식케 하는 남초 김복용 작 백련강(종이에 먹)과 일가에서 일촌을 꿈꾸는, 일촌(日村) 김성룡작 귀로는 우리에게서 멀어진 원형의 자연 회귀를 그리워한다. 월면불 일면월(日面佛)이 떠오른다.
고향 진도를 자주 찾는 화가로는 단연 전정 박항환화백을 들 수 있다. 그에게서 사살ㄹ 했던 임농 하철경 화백은 아직도 산사와 고택을 다니며 사생을 게을리 않는다. 지인이 자전적 소설까지 냈다. 포산 박태우, 동외 정명돈, 정양 박주생 우초 박병락 등이 머문다.
작가 김성룡은 50년간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종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양조형 방식과는 다른 정신세계와 시대흐름을 반영하는 친근함을 주는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가로운 전가(田家)를 둘러싼 산야는 푸르고 맑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당연히 대량생산으로 피폐한 농촌과 다른 원시 두메공동체를 그린다. 그림도 유기농 시대다. 옥주인지사람(沃州仁智人)을 즐겨 쓴다.
진도는 옥주(沃州)였다. 삶이 곧 지난한 개옹 뻘길이었다. 질척한 노래였다. 진도아리랑 초기 원형의 가사들은 자기부정이라는 사회공동체 도덕 규범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뜨거운 자의식의 발현으로 천연스럽게 사내를 부른다. 누구의 욕망인지 열망인지 달빛이 휘청거린다.
진도아리랑은 고도의 전술이다. 강강술래와 함께 의병(疑兵)전술의 한 민속에 더 이상 거칠 수 없는 본능적인 남녀상열지사가 강한 힘을 탄다. “바람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라는 현실적인 바램이 원무를 돌며 꽃향기를 풍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깨달음이 따로 있냐. 늙은 스님네야 탁발 공양도 못 나가고 시아버지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철면불도 한 겨울에 땀을 흘린다는데 ‘씹도 못하는 입으로 똥꼬를 달라’고 하는 이빨 빠진 시아버지.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라고 하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설두는 마조가 남긴 말이 쓰디 쓴 활구(活句)임을 깨닫고 스스로 게송을 붙였다. 마조의 일면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재개발지구의 혹리수가 판치는 밤세상을 바라보는 달. 천국의 계단을 꿈꾸며 반지하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영화대본 작가들. 배를 쥐며 배고픔에 감기약과 배탈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기증, 주인에게 보내는 쪽지가 유언이 되는 세상. 금강안(金剛眼)의 수사관은 늘 헤어짐을 위한 결심만을 할 뿐이다. 사생취의할 생은 구겨지고 해풍 따위에 말라져 갈아 엎어진다.
故 조세희 작가는 생전에 '난쏘공'이 유효한 사회 담론이 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도시 재개발로 밀려난 하층민들의 삶이 1970년대의 이야기로만 머무르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 굴레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의 분홍빛 꿈과,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참사는 계속된다. 이 모두가 철면불의 강성노조 돈오돈수때문일까?
여귀산으로 돌아온 일휴 김양수 거사는 선화시를 즐겨 한다. 여백을 매우 중시한다. 참구하는 선방의 적염이 스민다. 양산 불보사찰 통도사에서 ‘아 매화불이다’고 소리없이 외쳤다.
그의 선화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다. 아제 누구도 소리를 새기지 않는다. 이철수도, 떠나간 오윤의 칼노래에도 피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가들은 어디로 가는가. 티브이를 틀면 화인열전은 계속된다.
김호석은 강원도 오지 광산으로 가 이마에 자등명을 달았다. 자화상이 비쳤다. 폐부 안에 도사린 안락과 기름진 창자 속이 비로소 까맣게 번들거리며 보였다. 새벽 공사판 거푸집 위에 시멘트로 굳어진 한 사내의 몸뚱어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휴전선이 곳곳에 철조망을 내리고 있다. 월드컵이 열리고 라다크에 어린이 학교가 세워진다.
‘오래된 미래’와 낡은 집의 오랑캐꽃을 그리는 화가.
일면불 월면불이여, 2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를 위해 몇 번이나 창용굴에 내려갔던가? 성인들은 백성들에게 불을 피우는 법과 농사를 가르치고 나아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에 지켜야 할 충효의 예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진도 아낙네는 소죽끓이는 부삭 앞에 비땅을 들어 땅을 치며 “일면불 월면불이여, 삼황오제는 이 무슨 물건인고?” 아리랑타령을 내던질 뿐이다. 따땃한 아랫목의 동지섣달 홀로새는 밤을 위하여.
해와 달 처럼 무정불이 부처라면, 중생을 위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친 삼황오제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설두의 이 한 질문은 우뢰와 같은 할이다. 산과 강에 무심한 사람이 어찌 임금의 덕을 칭송하랴. 톳발을 잡아당기다 죽고 경운기 트렉터 바퀴에 깔려 죽고 스카이 공사판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무의촌 병원에서 산대도 못 잡아보고 가는 인생 꿈과 같은 세상을 노래하지 않고 어찌 살겠는가.
자 아리랑시로 들어가보자. 시어머니 죽우라고 충원충수 했더니 친정어미 죽었다고 기별이 왔네 씨엄씨 선산에 봉황새 울고 시동세 내동세 태갈보가 나간다.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 열흘만 불어라. 앞산의 딱다구리는 없는 구멍도 뜷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찾네. 물속에 노는고기 잡힐듯해도 못잡고 저처녀 마음도 알듯말듯 못잡네. 접시가 깨지면 두 동강이 나고요 삼팔선이 깨지면 남북통일이 된다네. 임도 눕고 나도 누우면 등잔위 저불은 누가 끌까. 데려가오 날 데려 가오 우리님 뒤따라서 나는 가네. 치어다 보니 만학천봉 내려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요새는 팽목항이나 물김매는 바다로 가사가 건너간다.
우리의 시대는 곧 ‘소유’라는 분배방식이 속삭임이 많은 천사들을 앞장 세워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잉여’는 이미 예술을 범람해 낙원의 강(탐진치)을 오염시켰다. 마치 수묵이 종이와 비단에 스며들듯이. 그림에는 고유의 숫자가 새겨지고 시의 운율과 혁명의 향기를 잃어버렸다. 천정화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고 영혼의 이상향을 찾는 대항해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탁발을 잃은 그대여! 이제 사원에서는 원숭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퍼스트 레이디가 미술관의 컬렉터겸 기획자가 된다. 조각불이 화덕속으로 내던져진다. 아바타는 디자인을 입는다.
수묵은 강물이다. 서예 또한 불립문자다. 강물도 회룡하는 흐름이 하늘 은한수와 닿는 그런 강물이다. 가장 간결하기 위하여 천변만화와 계절과 달빛과 광야의 시인과 만나지 않았는가.
올 해는 진도군이 목포시와 함께 국제수묵 비엔날레 전시를 한다. 또 다시 화가들은 선택을강요받는다. 왜 예술가가 ‘죄수의 딜레마’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직도 벽을 나오지 못하는 담쟁이잎이 수북이 매달린다. 눈은 내리고 배추색은 해마다 다르다. 갈아엎기 전의 배추들의 뿌리는 시립다. 더 하얗다. 얼굴은 새벽바람에 푸르딩딩한 짠한 때깔을 보인다. 왜 멧돼지는 길길이 날뛰는 것일까. 무엇에 길들여 사는 지 모르는 사람들의 군상이 겨울 속으로 숨는다. 흐린 날의 주모가 석유난로를 끈다. ‘덕불고’와 인지위덕(忍之爲德) 표구액자가 춥다. 일학에 가면 야천(野泉)의 월면도가 오래 걸려있다.
소동파는 마힐 거사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 말했다.
마힐의 시를 맛보면 그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
味摩詰之詩(미마힐지시) 詩中有畵(시중유화) 觀摩詰之畵(관마힐지화) 畵中有詩(화중유시)
코로나 독감으로 내내 박물관이 휴관 중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도 문을 닫으니, 소요할 곳도 마땅한 곳이 없다.
왕유의 시 <산속(山中)>을 읽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왕유를 말할 때 소동파의 평을 드는 까닭을 수긍하게 된다니.
형계(荊溪)는 흰 바위가 드러나고,/이 추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은 비가 오지 않는데,/ 푸른 안개가 사람 옷을 적신다.
‘왜 우리는 수묵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사실 화가 자신에게 던지는, 한 시대와 삶을 보듬고 풀어야 하는 ‘즐거운 편지’공안이다.(박남인 문화 오피니언)
진도 수묵화의 원형과 ‘신성한 미로’
다시 ‘고향으로 부는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 ‘높고 쓸쓸한 바람’과 시와 천상의 컬렉션을 꿈꾸는 공간과 만나게 된다.
컬렉션을 읽는다. 세상은 이제 끊임없는 ‘오징어 게임’같은 독화법(讀畫法)을 요구한다. 마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거리에서 쓰러지는 시들. 음유는 반지하방에 밀폐된 창문 안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림을 보고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나와 다른 한 경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영혼의 울림과 공명을 만나는 것이다.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상 화폐’와 같은 자화상들이 도시의 골목을 유령처럼 걷는다. 한 사내가 그들의 지친 그림자의 허물어지는 윤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빠른 붓질과 또는 크로키같은 연필로 잡아 넣는다. 그가 석주(石柱) 박종석이다. 사는 집은 광주 설연(雪連)산방이다.
석현(石峴) 박은용에 이어 호남 의병지사 김도숙의 삶과 예술을 깊이있게 담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를 보내왔다. 한 예술가가 내가 아닌 다른 예술가를 그도 한 시대가 죽순밭 바람으로 비켜가는 시간을 불러내 그린다는 것. 석주 화백은 그렇게 금남로를 80년대를, 호남의 30년대를 다시 불러내 성찰과 담론을 지속한다.
그는 말한다. 고백하고 분노하고 다시 정좌한다.
석주는 “시 서 화에는 그 사람의 삶과 사상이 녹아있다. 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평소 그 사람이 품격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거시적 역사의 나열이 아닌, 온몸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더욱 치열한 구국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힌다.
“뒤돌아보면, 역대 유명화가들이 모두 중앙출신이 아니듯 지방예술계의 홀대는 제살깎아먹기와 같다.” 진실은 참혹하지만 힘의 원천이다. 시와 그림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 내일을 기리워하는 몽유(夢遊)의 길이 아니다. 함부로 시대와의 불화따위로 거리두기를 자랑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존의 프레임이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 머릿 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깊은 밤, 흐린 주점 탁자 위에 나의 창문 밖에는 밤새 화두와 같은 함박눈이 내린다. 산 속에서 기침을 콜록거리는 노승의 중얼거림이 대나무숲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추풍부가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말하지 않는 것도 틀렸다 한다. 월면불(月面佛)이 서쪽도 동쪽도 아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마당을 지나 법정의 빈 의자에 잠시 꿈에 잠긴다. 혼자서 가라. 빌어먹을 걸승의 혼잣소리가 몇 개의 눈꽃을 털어낸다.
나는 시골 지자체의 지역신문사 편집과 기사조형하기와 연간집에 글을 싣는 지역예술가, 아웃사이더도 아닌 그저 그런 ’통속한 잡지‘를 장식하는 3류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늘 자살을 꿈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의 경계는 연옥계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그 연옥의 장미덩쿨 문 앞.
나의 시는 어떤 울타리다. 탱자나무에 피는 꽃. 깊은 마당을 서성거리는 흰 옷의 초조한 얼굴의 유배자, 리비도 또는 풍자와 낫의 흰 광채를 담지 못한다. 진도아리랑이 나를 손짓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나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리비도의 충동이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의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나게 된다. 진도아리랑 가사는 그렇게 탄생되고 이제 밭두렁을 넘어 공연장을 출렁거린다.
예술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단절이자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다. 김 훈의 최근 안중근은 바로 그 펙트의 관점이지 현실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예술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단위”라는 말로 서술된다. 특정 시기를 가로지르는 예술작품들의 상호 공명과 침투, 나아가 그것들이 함께 형성하는 어떤 미학적 배치와 사회적 존재의의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예술이라는 족쇠의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
따라서 예술이 산출하는 진리란 그 내재성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사건, ‘코뿔소의 코처럼 혼자사 가라’는 곧 새롭게 나타난 특이성과 그 관계의 그물을 가리킨다.
길을 잃은 자들에게 성채처럼 다가오는 언덕 위의 미술관. 솔개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는 연말을 맞이하여 특별 기획전으로 지난 11월 20일부터 2022년 12월16일까지 우리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하고 있는 남초 김복용 서예가와 일촌 김성룡 한국화가 두 분의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진도현대미술관에서 각각 전시하였다.
특히 두 원로작가는 전라남도 문화재단과 진도군(군수 김희수)의 후원으로 진도현대미술관( 교동리)에서 초대하여 각각 약45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는 한국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늘 고뇌의 정점에서 전시를 연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미술관, 하나의 위대한 왕조의 번영과 사라짐이때로는 신화가 되고 울주 반구대 암각화처럼 걸어나오는 역사. 미술관에는 귀신이 산다. 월면불과 공양식을 묻는 노파가 산다. 지역 예술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하는 것은 마치 병 속의 새를 꺼내는 일과 같다. 줄탁동시를 이룰 때 새는 새로운 세상으로 부화되어 날아간다. 정양 화백은 그렇게 ‘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장구포 수로에 젖는 노을을 마주한다. 지산면과 진도읍과 임회면이 경계를 이루는 묘한 곳이다. 국민가수 복바구니 송가인의 앵무리가 바로 앞이다.
“진도를 예술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음악 미술 서예 등 진도에는 다른 군보다 훨씬 많은 미술관이 존재합니다.” 어느 때는 맞고 지금은 맞지 않기도 하다. 지도내 미술관, 박물관을 올 해는 더 확장시킨다는 복안이다. 김희수 군수가 신년사에서 밝혔다. 운림산방 내 역사관을 옮기고 전시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듯하다. 소전미술관, 장전미술관, 나절로미술관, 동심원, 우초의 작은 갤러리. 그리고 남도전통미술관. 옥산 ㄱ미옥진, 금봉 박행보, 정정 박항환 화백.
그 중 진도현대미술관은 광부가 침침한 수 천미터 암굴 속에서 광맥을 찾듯 보름에 한번씩 다른 작가의 전시회를 열어 눈 명창이 다 된 문화메니아 눈을 호강시켜주고 있으며, 전국의 여러 작가를 초빙하여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과 마음을 한층 세련되게 해준다.
나는 이곳에서 진도 격동기에 태어나 가족을 잃고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석현 박은용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라 이미 제주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치선생 장남 허 은 대미산의 유작 ‘귤수소조(제주인의 최초 초상화)’와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려주는 또 다르 ㄴ수작에 나는 마약같은 ‘포옹’의 전이를 느껴야 했다.
일촌 김성룡씨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한 방문객이 차분히 아름다운 그림을 구경하고 방명록에 ”멋지요~ 참 좋소.“ 라고 글씨를 써 놓고 갔다. ”75세 되신 분이 다양하게 작품을 하였고. 엄청난 대작을 보여줘서 감명 받았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지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의 자기개발 기회와 창작활동의 기회를 북돋아주고 두 작가들의 창작역량 강화를 위해 전시할 수 있는 기회와 전시 공간 등을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 지원하는 동시에 이곳을 찾는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는 다양한 장르의 시각예술작품을 선보여주고 아울러 우리지역 주민들과의 문화욕구를 충족과 함께 두 분의 작가가 전시를 해 그 의미가 크다.
이번 전시 중에는 작품 관람은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서예 및 한국화를 직접 체험하고 관람객의 가훈 쓰기와 한국화 체험 등의 재능기부 행사를 두 분의 작가가 실시하여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을 함께 나누어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이러한 전시를 통하여 원로작가이지만 꾸준히 작업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선보이고 귀감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예향진도가 늘 전시 공간의 확보문제로 또 문인의들 창작 발료 지면의 제한은 우리 스스로를 ‘예향’으로서의 품격과 삶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천상의 화두로부터 벗어나가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남농 허건은 전남 진도 출생하였으며,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 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농사법은 자경농이었지만 금강산 마하연까지 발품을 팔았다. 벽에 달라붙은 거대한 밭.
진도는 이제 가볍고 쓸쓸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걷는다. 서울은 너무 밀식하여 영혼의 심폐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푸른 죽음의 하데스로 젊은 청년들을 수장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외롭고 궁핍한 쉬이 오지않는 ‘오래된 미래’를 사경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시중유화의 전범을 재인식케 하는 남초 김복용 작 백련강(종이에 먹)과 일가에서 일촌을 꿈꾸는, 일촌(日村) 김성룡작 귀로는 우리에게서 멀어진 원형의 자연 회귀를 그리워한다. 월면불 일면월(日面佛)이 떠오른다.
고향 진도를 자주 찾는 화가로는 단연 전정 박항환화백을 들 수 있다. 그에게서 사살ㄹ 했던 임농 하철경 화백은 아직도 산사와 고택을 다니며 사생을 게을리 않는다. 지인이 자전적 소설까지 냈다. 포산 박태우, 동외 정명돈, 정양 박주생 우초 박병락 등이 머문다.
작가 김성룡은 50년간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종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양조형 방식과는 다른 정신세계와 시대흐름을 반영하는 친근함을 주는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가로운 전가(田家)를 둘러싼 산야는 푸르고 맑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당연히 대량생산으로 피폐한 농촌과 다른 원시 두메공동체를 그린다. 그림도 유기농 시대다. 옥주인지사람(沃州仁智人)을 즐겨 쓴다.
진도는 옥주(沃州)였다. 삶이 곧 지난한 개옹 뻘길이었다. 질척한 노래였다. 진도아리랑 초기 원형의 가사들은 자기부정이라는 사회공동체 도덕 규범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뜨거운 자의식의 발현으로 천연스럽게 사내를 부른다. 누구의 욕망인지 열망인지 달빛이 휘청거린다.
진도아리랑은 고도의 전술이다. 강강술래와 함께 의병(疑兵)전술의 한 민속에 더 이상 거칠 수 없는 본능적인 남녀상열지사가 강한 힘을 탄다. “바람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라는 현실적인 바램이 원무를 돌며 꽃향기를 풍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깨달음이 따로 있냐. 늙은 스님네야 탁발 공양도 못 나가고 시아버지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철면불도 한 겨울에 땀을 흘린다는데 ‘씹도 못하는 입으로 똥꼬를 달라’고 하는 이빨 빠진 시아버지.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라고 하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설두는 마조가 남긴 말이 쓰디 쓴 활구(活句)임을 깨닫고 스스로 게송을 붙였다. 마조의 일면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재개발지구의 혹리수가 판치는 밤세상을 바라보는 달. 천국의 계단을 꿈꾸며 반지하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영화대본 작가들. 배를 쥐며 배고픔에 감기약과 배탈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기증, 주인에게 보내는 쪽지가 유언이 되는 세상. 금강안(金剛眼)의 수사관은 늘 헤어짐을 위한 결심만을 할 뿐이다. 사생취의할 생은 구겨지고 해풍 따위에 말라져 갈아 엎어진다.
故 조세희 작가는 생전에 '난쏘공'이 유효한 사회 담론이 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도시 재개발로 밀려난 하층민들의 삶이 1970년대의 이야기로만 머무르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 굴레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의 분홍빛 꿈과,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참사는 계속된다. 이 모두가 철면불의 강성노조 돈오돈수때문일까?
여귀산으로 돌아온 일휴 김양수 거사는 선화시를 즐겨 한다. 여백을 매우 중시한다. 참구하는 선방의 적염이 스민다. 양산 불보사찰 통도사에서 ‘아 매화불이다’고 소리없이 외쳤다.
그의 선화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다. 아제 누구도 소리를 새기지 않는다. 이철수도, 떠나간 오윤의 칼노래에도 피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가들은 어디로 가는가. 티브이를 틀면 화인열전은 계속된다.
김호석은 강원도 오지 광산으로 가 이마에 자등명을 달았다. 자화상이 비쳤다. 폐부 안에 도사린 안락과 기름진 창자 속이 비로소 까맣게 번들거리며 보였다. 새벽 공사판 거푸집 위에 시멘트로 굳어진 한 사내의 몸뚱어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휴전선이 곳곳에 철조망을 내리고 있다. 월드컵이 열리고 라다크에 어린이 학교가 세워진다.
‘오래된 미래’와 낡은 집의 오랑캐꽃을 그리는 화가.
일면불 월면불이여, 2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를 위해 몇 번이나 창용굴에 내려갔던가? 성인들은 백성들에게 불을 피우는 법과 농사를 가르치고 나아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에 지켜야 할 충효의 예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진도 아낙네는 소죽끓이는 부삭 앞에 비땅을 들어 땅을 치며 “일면불 월면불이여, 삼황오제는 이 무슨 물건인고?” 아리랑타령을 내던질 뿐이다. 따땃한 아랫목의 동지섣달 홀로새는 밤을 위하여.
해와 달 처럼 무정불이 부처라면, 중생을 위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친 삼황오제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설두의 이 한 질문은 우뢰와 같은 할이다. 산과 강에 무심한 사람이 어찌 임금의 덕을 칭송하랴. 톳발을 잡아당기다 죽고 경운기 트렉터 바퀴에 깔려 죽고 스카이 공사판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무의촌 병원에서 산대도 못 잡아보고 가는 인생 꿈과 같은 세상을 노래하지 않고 어찌 살겠는가.
자 아리랑시로 들어가보자. 시어머니 죽우라고 충원충수 했더니 친정어미 죽었다고 기별이 왔네 씨엄씨 선산에 봉황새 울고 시동세 내동세 태갈보가 나간다.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 열흘만 불어라. 앞산의 딱다구리는 없는 구멍도 뜷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찾네. 물속에 노는고기 잡힐듯해도 못잡고 저처녀 마음도 알듯말듯 못잡네. 접시가 깨지면 두 동강이 나고요 삼팔선이 깨지면 남북통일이 된다네. 임도 눕고 나도 누우면 등잔위 저불은 누가 끌까. 데려가오 날 데려 가오 우리님 뒤따라서 나는 가네. 치어다 보니 만학천봉 내려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요새는 팽목항이나 물김매는 바다로 가사가 건너간다.
우리의 시대는 곧 ‘소유’라는 분배방식이 속삭임이 많은 천사들을 앞장 세워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잉여’는 이미 예술을 범람해 낙원의 강(탐진치)을 오염시켰다. 마치 수묵이 종이와 비단에 스며들듯이. 그림에는 고유의 숫자가 새겨지고 시의 운율과 혁명의 향기를 잃어버렸다. 천정화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고 영혼의 이상향을 찾는 대항해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탁발을 잃은 그대여! 이제 사원에서는 원숭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퍼스트 레이디가 미술관의 컬렉터겸 기획자가 된다. 조각불이 화덕속으로 내던져진다. 아바타는 디자인을 입는다.
수묵은 강물이다. 서예 또한 불립문자다. 강물도 회룡하는 흐름이 하늘 은한수와 닿는 그런 강물이다. 가장 간결하기 위하여 천변만화와 계절과 달빛과 광야의 시인과 만나지 않았는가.
올 해는 진도군이 목포시와 함께 국제수묵 비엔날레 전시를 한다. 또 다시 화가들은 선택을강요받는다. 왜 예술가가 ‘죄수의 딜레마’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직도 벽을 나오지 못하는 담쟁이잎이 수북이 매달린다. 눈은 내리고 배추색은 해마다 다르다. 갈아엎기 전의 배추들의 뿌리는 시립다. 더 하얗다. 얼굴은 새벽바람에 푸르딩딩한 짠한 때깔을 보인다. 왜 멧돼지는 길길이 날뛰는 것일까. 무엇에 길들여 사는 지 모르는 사람들의 군상이 겨울 속으로 숨는다. 흐린 날의 주모가 석유난로를 끈다. ‘덕불고’와 인지위덕(忍之爲德) 표구액자가 춥다. 일학에 가면 야천(野泉)의 월면도가 오래 걸려있다.
소동파는 마힐 거사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 말했다.
마힐의 시를 맛보면 그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
味摩詰之詩(미마힐지시) 詩中有畵(시중유화) 觀摩詰之畵(관마힐지화) 畵中有詩(화중유시)
코로나 독감으로 내내 박물관이 휴관 중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도 문을 닫으니, 소요할 곳도 마땅한 곳이 없다.
왕유의 시 <산속(山中)>을 읽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왕유를 말할 때 소동파의 평을 드는 까닭을 수긍하게 된다니.
형계(荊溪)는 흰 바위가 드러나고,/이 추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은 비가 오지 않는데,/ 푸른 안개가 사람 옷을 적신다.
‘왜 우리는 수묵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사실 화가 자신에게 던지는, 한 시대와 삶을 보듬고 풀어야 하는 ‘즐거운 편지’공안이다.(박남인 문화 오피니언)
다시 ‘고향으로 부는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 ‘높고 쓸쓸한 바람’과 시와 천상의 컬렉션을 꿈꾸는 공간과 만나게 된다.
컬렉션을 읽는다. 세상은 이제 끊임없는 ‘오징어 게임’같은 독화법(讀畫法)을 요구한다. 마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거리에서 쓰러지는 시들. 음유는 반지하방에 밀폐된 창문 안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림을 보고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나와 다른 한 경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영혼의 울림과 공명을 만나는 것이다.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상 화폐’와 같은 자화상들이 도시의 골목을 유령처럼 걷는다. 한 사내가 그들의 지친 그림자의 허물어지는 윤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빠른 붓질과 또는 크로키같은 연필로 잡아 넣는다. 그가 석주(石柱) 박종석이다. 사는 집은 광주 설연(雪連)산방이다.
석현(石峴) 박은용에 이어 호남 의병지사 김도숙의 삶과 예술을 깊이있게 담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를 보내왔다. 한 예술가가 내가 아닌 다른 예술가를 그도 한 시대가 죽순밭 바람으로 비켜가는 시간을 불러내 그린다는 것. 석주 화백은 그렇게 금남로를 80년대를, 호남의 30년대를 다시 불러내 성찰과 담론을 지속한다.
그는 말한다. 고백하고 분노하고 다시 정좌한다.
석주는 “시 서 화에는 그 사람의 삶과 사상이 녹아있다. 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평소 그 사람이 품격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거시적 역사의 나열이 아닌, 온몸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더욱 치열한 구국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힌다.
“뒤돌아보면, 역대 유명화가들이 모두 중앙출신이 아니듯 지방예술계의 홀대는 제살깎아먹기와 같다.” 진실은 참혹하지만 힘의 원천이다. 시와 그림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 내일을 기리워하는 몽유(夢遊)의 길이 아니다. 함부로 시대와의 불화따위로 거리두기를 자랑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존의 프레임이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 머릿 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깊은 밤, 흐린 주점 탁자 위에 나의 창문 밖에는 밤새 화두와 같은 함박눈이 내린다. 산 속에서 기침을 콜록거리는 노승의 중얼거림이 대나무숲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추풍부가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말하지 않는 것도 틀렸다 한다. 월면불(月面佛)이 서쪽도 동쪽도 아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마당을 지나 법정의 빈 의자에 잠시 꿈에 잠긴다. 혼자서 가라. 빌어먹을 걸승의 혼잣소리가 몇 개의 눈꽃을 털어낸다.
나는 시골 지자체의 지역신문사 편집과 기사조형하기와 연간집에 글을 싣는 지역예술가, 아웃사이더도 아닌 그저 그런 ’통속한 잡지‘를 장식하는 3류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늘 자살을 꿈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의 경계는 연옥계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그 연옥의 장미덩쿨 문 앞.
나의 시는 어떤 울타리다. 탱자나무에 피는 꽃. 깊은 마당을 서성거리는 흰 옷의 초조한 얼굴의 유배자, 리비도 또는 풍자와 낫의 흰 광채를 담지 못한다. 진도아리랑이 나를 손짓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나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리비도의 충동이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의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나게 된다. 진도아리랑 가사는 그렇게 탄생되고 이제 밭두렁을 넘어 공연장을 출렁거린다.
예술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단절이자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다. 김 훈의 최근 안중근은 바로 그 펙트의 관점이지 현실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예술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단위”라는 말로 서술된다. 특정 시기를 가로지르는 예술작품들의 상호 공명과 침투, 나아가 그것들이 함께 형성하는 어떤 미학적 배치와 사회적 존재의의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예술이라는 족쇠의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
따라서 예술이 산출하는 진리란 그 내재성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사건, ‘코뿔소의 코처럼 혼자사 가라’는 곧 새롭게 나타난 특이성과 그 관계의 그물을 가리킨다.
길을 잃은 자들에게 성채처럼 다가오는 언덕 위의 미술관. 솔개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는 연말을 맞이하여 특별 기획전으로 지난 11월 20일부터 2022년 12월16일까지 우리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하고 있는 남초 김복용 서예가와 일촌 김성룡 한국화가 두 분의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진도현대미술관에서 각각 전시하였다.
특히 두 원로작가는 전라남도 문화재단과 진도군(군수 김희수)의 후원으로 진도현대미술관( 교동리)에서 초대하여 각각 약45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는 한국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늘 고뇌의 정점에서 전시를 연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미술관, 하나의 위대한 왕조의 번영과 사라짐이때로는 신화가 되고 울주 반구대 암각화처럼 걸어나오는 역사. 미술관에는 귀신이 산다. 월면불과 공양식을 묻는 노파가 산다. 지역 예술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하는 것은 마치 병 속의 새를 꺼내는 일과 같다. 줄탁동시를 이룰 때 새는 새로운 세상으로 부화되어 날아간다. 정양 화백은 그렇게 ‘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장구포 수로에 젖는 노을을 마주한다. 지산면과 진도읍과 임회면이 경계를 이루는 묘한 곳이다. 국민가수 복바구니 송가인의 앵무리가 바로 앞이다.
“진도를 예술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음악 미술 서예 등 진도에는 다른 군보다 훨씬 많은 미술관이 존재합니다.” 어느 때는 맞고 지금은 맞지 않기도 하다. 지도내 미술관, 박물관을 올 해는 더 확장시킨다는 복안이다. 김희수 군수가 신년사에서 밝혔다. 운림산방 내 역사관을 옮기고 전시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듯하다. 소전미술관, 장전미술관, 나절로미술관, 동심원, 우초의 작은 갤러리. 그리고 남도전통미술관. 옥산 ㄱ미옥진, 금봉 박행보, 정정 박항환 화백.
그 중 진도현대미술관은 광부가 침침한 수 천미터 암굴 속에서 광맥을 찾듯 보름에 한번씩 다른 작가의 전시회를 열어 눈 명창이 다 된 문화메니아 눈을 호강시켜주고 있으며, 전국의 여러 작가를 초빙하여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과 마음을 한층 세련되게 해준다.
나는 이곳에서 진도 격동기에 태어나 가족을 잃고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석현 박은용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라 이미 제주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치선생 장남 허 은 대미산의 유작 ‘귤수소조(제주인의 최초 초상화)’와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려주는 또 다른 수작에 나는 마약같은 ‘포옹’의 전이를 느껴야 했다.
일촌 김성룡씨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한 방문객이 차분히 아름다운 그림을 구경하고 방명록에 ”멋지요~ 참 좋소.“ 라고 글씨를 써 놓고 갔다. ”75세 되신 분이 다양하게 작품을 하였고. 엄청난 대작을 보여줘서 감명 받았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지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의 자기개발 기회와 창작활동의 기회를 북돋아주고 두 작가들의 창작역량 강화를 위해 전시할 수 있는 기회와 전시 공간 등을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 지원하는 동시에 이곳을 찾는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는 다양한 장르의 시각예술작품을 선보여주고 아울러 우리지역 주민들과의 문화욕구를 충족과 함께 두 분의 작가가 전시를 해 그 의미가 크다.
이번 전시 중에는 작품 관람은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서예 및 한국화를 직접 체험하고 관람객의 가훈 쓰기와 한국화 체험 등의 재능기부 행사를 두 분의 작가가 실시하여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을 함께 나누어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이러한 전시를 통하여 원로작가이지만 꾸준히 작업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선보이고 귀감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예향진도가 늘 전시 공간의 확보문제로 또 문인의들 창작 발료 지면의 제한은 우리 스스로를 ‘예향’으로서의 품격과 삶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천상의 화두로부터 벗어나가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남농 허건은 전남 진도 출생하였으며,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 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농사법은 자경농이었지만 금강산 마하연까지 발품을 팔았다. 벽에 달라붙은 거대한 밭.
진도는 이제 가볍고 쓸쓸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걷는다. 서울은 너무 밀식하여 영혼의 심폐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푸른 죽음의 하데스로 젊은 청년들을 수장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외롭고 궁핍한 쉬이 오지않는 ‘오래된 미래’를 사경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시중유화의 전범을 재인식케 하는 남초 김복용 작 백련강(종이에 먹)과 일가에서 일촌을 꿈꾸는, 일촌(日村) 김성룡작 귀로는 우리에게서 멀어진 원형의 자연 회귀를 그리워한다. 월면불 일면월(日面佛)이 떠오른다.
고향 진도를 자주 찾는 화가로는 단연 전정 박항환화백을 들 수 있다. 그에게서 사살ㄹ 했던 임농 하철경 화백은 아직도 산사와 고택을 다니며 사생을 게을리 않는다. 지인이 자전적 소설까지 냈다. 포산 박태우, 동외 정명돈, 정양 박주생 우초 박병락 등이 머문다.
작가 김성룡은 50년간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종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양조형 방식과는 다른 정신세계와 시대흐름을 반영하는 친근함을 주는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가로운 전가(田家)를 둘러싼 산야는 푸르고 맑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당연히 대량생산으로 피폐한 농촌과 다른 원시 두메공동체를 그린다. 그림도 유기농 시대다. 옥주인지사람(沃州仁智人)을 즐겨 쓴다.
진도는 옥주(沃州)였다. 삶이 곧 지난한 개옹 뻘길이었다. 질척한 노래였다. 진도아리랑 초기 원형의 가사들은 자기부정이라는 사회공동체 도덕 규범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뜨거운 자의식의 발현으로 천연스럽게 사내를 부른다. 누구의 욕망인지 열망인지 달빛이 휘청거린다.
진도아리랑은 고도의 전술이다. 강강술래와 함께 의병(疑兵)전술의 한 민속에 더 이상 거칠 수 없는 본능적인 남녀상열지사가 강한 힘을 탄다. “바람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라는 현실적인 바램이 원무를 돌며 꽃향기를 풍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깨달음이 따로 있냐. 늙은 스님네야 탁발 공양도 못 나가고 시아버지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철면불도 한 겨울에 땀을 흘린다는데 ‘씹도 못하는 입으로 똥꼬를 달라’고 하는 이빨 빠진 시아버지.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라고 하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설두는 마조가 남긴 말이 쓰디 쓴 활구(活句)임을 깨닫고 스스로 게송을 붙였다. 마조의 일면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재개발지구의 혹리수가 판치는 밤세상을 바라보는 달. 천국의 계단을 꿈꾸며 반지하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영화대본 작가들. 배를 쥐며 배고픔에 감기약과 배탈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기증, 주인에게 보내는 쪽지가 유언이 되는 세상. 금강안(金剛眼)의 수사관은 늘 헤어짐을 위한 결심만을 할 뿐이다. 사생취의할 생은 구겨지고 해풍 따위에 말라져 갈아 엎어진다.
故 조세희 작가는 생전에 '난쏘공'이 유효한 사회 담론이 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도시 재개발로 밀려난 하층민들의 삶이 1970년대의 이야기로만 머무르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 굴레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의 분홍빛 꿈과,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참사는 계속된다. 이 모두가 철면불의 강성노조 돈오돈수때문일까?
여귀산으로 돌아온 일휴 김양수 거사는 선화시를 즐겨 한다. 여백을 매우 중시한다. 참구하는 선방의 적염이 스민다. 양산 불보사찰 통도사에서 ‘아 매화불이다’고 소리없이 외쳤다.
그의 선화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다. 아제 누구도 소리를 새기지 않는다. 이철수도, 떠나간 오윤의 칼노래에도 피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가들은 어디로 가는가. 티브이를 틀면 화인열전은 계속된다.
김호석은 강원도 오지 광산으로 가 이마에 자등명을 달았다. 자화상이 비쳤다. 폐부 안에 도사린 안락과 기름진 창자 속이 비로소 까맣게 번들거리며 보였다. 새벽 공사판 거푸집 위에 시멘트로 굳어진 한 사내의 몸뚱어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휴전선이 곳곳에 철조망을 내리고 있다. 월드컵이 열리고 라다크에 어린이 학교가 세워진다.
‘오래된 미래’와 낡은 집의 오랑캐꽃을 그리는 화가.
일면불 월면불이여, 2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를 위해 몇 번이나 창용굴에 내려갔던가? 성인들은 백성들에게 불을 피우는 법과 농사를 가르치고 나아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에 지켜야 할 충효의 예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진도 아낙네는 소죽끓이는 부삭 앞에 비땅을 들어 땅을 치며 “일면불 월면불이여, 삼황오제는 이 무슨 물건인고?” 아리랑타령을 내던질 뿐이다. 따땃한 아랫목의 동지섣달 홀로새는 밤을 위하여.
해와 달 처럼 무정불이 부처라면, 중생을 위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친 삼황오제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설두의 이 한 질문은 우뢰와 같은 할이다. 산과 강에 무심한 사람이 어찌 임금의 덕을 칭송하랴. 톳발을 잡아당기다 죽고 경운기 트렉터 바퀴에 깔려 죽고 스카이 공사판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무의촌 병원에서 산대도 못 잡아보고 가는 인생 꿈과 같은 세상을 노래하지 않고 어찌 살겠는가.
자 아리랑시로 들어가보자. 시어머니 죽우라고 충원충수 했더니 친정어미 죽었다고 기별이 왔네 씨엄씨 선산에 봉황새 울고 시동세 내동세 태갈보가 나간다.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 열흘만 불어라. 앞산의 딱다구리는 없는 구멍도 뜷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찾네. 물속에 노는고기 잡힐듯해도 못잡고 저처녀 마음도 알듯말듯 못잡네. 접시가 깨지면 두 동강이 나고요 삼팔선이 깨지면 남북통일이 된다네. 임도 눕고 나도 누우면 등잔위 저불은 누가 끌까. 데려가오 날 데려 가오 우리님 뒤따라서 나는 가네. 치어다 보니 만학천봉 내려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요새는 팽목항이나 물김매는 바다로 가사가 건너간다.
우리의 시대는 곧 ‘소유’라는 분배방식이 속삭임이 많은 천사들을 앞장 세워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잉여’는 이미 예술을 범람해 낙원의 강(탐진치)을 오염시켰다. 마치 수묵이 종이와 비단에 스며들듯이. 그림에는 고유의 숫자가 새겨지고 시의 운율과 혁명의 향기를 잃어버렸다. 천정화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고 영혼의 이상향을 찾는 대항해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탁발을 잃은 그대여! 이제 사원에서는 원숭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퍼스트 레이디가 미술관의 컬렉터겸 기획자가 된다. 조각불이 화덕속으로 내던져진다. 아바타는 디자인을 입는다.
수묵은 강물이다. 서예 또한 불립문자다. 강물도 회룡하는 흐름이 하늘 은한수와 닿는 그런 강물이다. 가장 간결하기 위하여 천변만화와 계절과 달빛과 광야의 시인과 만나지 않았는가.
올 해는 진도군이 목포시와 함께 국제수묵 비엔날레 전시를 한다. 또 다시 화가들은 선택을강요받는다. 왜 예술가가 ‘죄수의 딜레마’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직도 벽을 나오지 못하는 담쟁이잎이 수북이 매달린다. 눈은 내리고 배추색은 해마다 다르다. 갈아엎기 전의 배추들의 뿌리는 시립다. 더 하얗다. 얼굴은 새벽바람에 푸르딩딩한 짠한 때깔을 보인다. 왜 멧돼지는 길길이 날뛰는 것일까. 무엇에 길들여 사는 지 모르는 사람들의 군상이 겨울 속으로 숨는다. 흐린 날의 주모가 석유난로를 끈다. ‘덕불고’와 인지위덕(忍之爲德) 표구액자가 춥다. 일학에 가면 야천(野泉)의 월면도가 오래 걸려있다.
소동파는 마힐 거사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 말했다.
마힐의 시를 맛보면 그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
味摩詰之詩(미마힐지시) 詩中有畵(시중유화) 觀摩詰之畵(관마힐지화) 畵中有詩(화중유시)
코로나 독감으로 내내 박물관이 휴관 중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도 문을 닫으니, 소요할 곳도 마땅한 곳이 없다.
왕유의 시 <산속(山中)>을 읽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왕유를 말할 때 소동파의 평을 드는 까닭을 수긍하게 된다니.
형계(荊溪)는 흰 바위가 드러나고,/이 추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은 비가 오지 않는데,/ 푸른 안개가 사람 옷을 적신다.
‘왜 우리는 수묵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사실 화가 자신에게 던지는, 한 시대와 삶을 보듬고 풀어야 하는 ‘즐거운 편지’공안이다.(박남인 문화 오피니언)
그곳에 가면 ‘높고 쓸쓸한 바람’과 시와 천상의 컬렉션을 꿈꾸는 공간과 만나게 된다.
컬렉션을 읽는다. 세상은 이제 끊임없는 ‘오징어 게임’같은 독화법(讀畫法)을 요구한다. 마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거리에서 쓰러지는 시들. 음유는 반지하방에 밀폐된 창문 안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림을 보고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나와 다른 한 경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영혼의 울림과 공명을 만나는 것이다.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상 화폐’와 같은 자화상들이 도시의 골목을 유령처럼 걷는다. 한 사내가 그들의 지친 그림자의 허물어지는 윤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빠른 붓질과 또는 크로키같은 연필로 잡아 넣는다. 그가 석주(石柱) 박종석이다. 사는 집은 광주 설연(雪連)산방이다.
석현(石峴) 박은용에 이어 호남 의병지사 김도숙의 삶과 예술을 깊이있게 담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를 보내왔다. 한 예술가가 내가 아닌 다른 예술가를 그도 한 시대가 죽순밭 바람으로 비켜가는 시간을 불러내 그린다는 것. 석주 화백은 그렇게 금남로를 80년대를, 호남의 30년대를 다시 불러내 성찰과 담론을 지속한다.
그는 말한다. 고백하고 분노하고 다시 정좌한다.
석주는 “시 서 화에는 그 사람의 삶과 사상이 녹아있다. 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평소 그 사람이 품격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거시적 역사의 나열이 아닌, 온몸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더욱 치열한 구국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힌다.
“뒤돌아보면, 역대 유명화가들이 모두 중앙출신이 아니듯 지방예술계의 홀대는 제살깎아먹기와 같다.” 진실은 참혹하지만 힘의 원천이다. 시와 그림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 내일을 기리워하는 몽유(夢遊)의 길이 아니다. 함부로 시대와의 불화따위로 거리두기를 자랑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존의 프레임이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접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 머릿 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깊은 밤, 흐린 주점 탁자 위에 나의 창문 밖에는 밤새 화두와 같은 함박눈이 내린다. 산 속에서 기침을 콜록거리는 노승의 중얼거림이 대나무숲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추풍부가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말하지 않는 것도 틀렸다 한다. 월면불(月面佛)이 서쪽도 동쪽도 아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마당을 지나 법정의 빈 의자에 잠시 꿈에 잠긴다. 혼자서 가라. 빌어먹을 걸승의 혼잣소리가 몇 개의 눈꽃을 털어낸다.
나는 시골 지자체의 지역신문사 편집과 기사조형하기와 연간집에 글을 싣는 지역예술가, 아웃사이더도 아닌 그저 그런 ’통속한 잡지‘를 장식하는 3류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늘 자살을 꿈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의 경계는 연옥계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그 연옥의 장미덩쿨 문 앞.
나의 시는 어떤 울타리다. 탱자나무에 피는 꽃. 깊은 마당을 서성거리는 흰 옷의 초조한 얼굴의 유배자, 리비도 또는 풍자와 낫의 흰 광채를 담지 못한다. 진도아리랑이 나를 손짓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나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리비도의 충동이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의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나게 된다. 진도아리랑 가사는 그렇게 탄생되고 이제 밭두렁을 넘어 공연장을 출렁거린다.
예술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단절이자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다. 김 훈의 최근 안중근은 바로 그 펙트의 관점이지 현실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예술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단위”라는 말로 서술된다. 특정 시기를 가로지르는 예술작품들의 상호 공명과 침투, 나아가 그것들이 함께 형성하는 어떤 미학적 배치와 사회적 존재의의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예술이라는 족쇠의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
따라서 예술이 산출하는 진리란 그 내재성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사건, ‘코뿔소의 코처럼 혼자사 가라’는 곧 새롭게 나타난 특이성과 그 관계의 그물을 가리킨다.
길을 잃은 자들에게 성채처럼 다가오는 언덕 위의 미술관. 솔개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는 연말을 맞이하여 특별 기획전으로 지난 11월 20일부터 2022년 12월16일까지 우리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하고 있는 남초 김복용 서예가와 일촌 김성룡 한국화가 두 분의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진도현대미술관에서 각각 전시하였다.
특히 두 원로작가는 전라남도 문화재단과 진도군(군수 김희수)의 후원으로 진도현대미술관( 교동리)에서 초대하여 각각 약45여점의 다양한 서예와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는 한국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늘 고뇌의 정점에서 전시를 연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미술관, 하나의 위대한 왕조의 번영과 사라짐이때로는 신화가 되고 울주 반구대 암각화처럼 걸어나오는 역사. 미술관에는 귀신이 산다. 월면불과 공양식을 묻는 노파가 산다. 지역 예술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하는 것은 마치 병 속의 새를 꺼내는 일과 같다. 줄탁동시를 이룰 때 새는 새로운 세상으로 부화되어 날아간다. 정양 화백은 그렇게 ‘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장구포 수로에 젖는 노을을 마주한다. 지산면과 진도읍과 임회면이 경계를 이루는 묘한 곳이다. 국민가수 복바구니 송가인의 앵무리가 바로 앞이다.
“진도를 예술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음악 미술 서예 등 진도에는 다른 군보다 훨씬 많은 미술관이 존재합니다.” 어느 때는 맞고 지금은 맞지 않기도 하다. 지도내 미술관, 박물관을 올 해는 더 확장시킨다는 복안이다. 김희수 군수가 신년사에서 밝혔다. 운림산방 내 역사관을 옮기고 전시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듯하다. 소전미술관, 장전미술관, 나절로미술관, 동심원, 우초의 작은 갤러리. 그리고 남도전통미술관. 옥산 ㄱ미옥진, 금봉 박행보, 정정 박항환 화백.
그 중 진도현대미술관은 광부가 침침한 수 천미터 암굴 속에서 광맥을 찾듯 보름에 한번씩 다른 작가의 전시회를 열어 눈 명창이 다 된 문화메니아 눈을 호강시켜주고 있으며, 전국의 여러 작가를 초빙하여 아름다운 그림으로 눈과 마음을 한층 세련되게 해준다.
나는 이곳에서 진도 격동기에 태어나 가족을 잃고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석현 박은용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라 이미 제주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치선생 장남 허 은 대미산의 유작 ‘귤수소조(제주인의 최초 초상화)’와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려주는 또 다르 ㄴ수작에 나는 마약같은 ‘포옹’의 전이를 느껴야 했다.
일촌 김성룡씨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한 방문객이 차분히 아름다운 그림을 구경하고 방명록에 ”멋지요~ 참 좋소.“ 라고 글씨를 써 놓고 갔다. ”75세 되신 분이 다양하게 작품을 하였고. 엄청난 대작을 보여줘서 감명 받았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지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분들의 자기개발 기회와 창작활동의 기회를 북돋아주고 두 작가들의 창작역량 강화를 위해 전시할 수 있는 기회와 전시 공간 등을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에서 지원하는 동시에 이곳을 찾는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는 다양한 장르의 시각예술작품을 선보여주고 아울러 우리지역 주민들과의 문화욕구를 충족과 함께 두 분의 작가가 전시를 해 그 의미가 크다.
이번 전시 중에는 작품 관람은 물론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서예 및 한국화를 직접 체험하고 관람객의 가훈 쓰기와 한국화 체험 등의 재능기부 행사를 두 분의 작가가 실시하여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을 함께 나누어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이러한 전시를 통하여 원로작가이지만 꾸준히 작업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선보이고 귀감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예향진도가 늘 전시 공간의 확보문제로 또 문인의들 창작 발료 지면의 제한은 우리 스스로를 ‘예향’으로서의 품격과 삶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천상의 화두로부터 벗어나가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남농 허건은 전남 진도 출생하였으며,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 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농사법은 자경농이었지만 금강산 마하연까지 발품을 팔았다. 벽에 달라붙은 거대한 밭.
진도는 이제 가볍고 쓸쓸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걷는다. 서울은 너무 밀식하여 영혼의 심폐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푸른 죽음의 하데스로 젊은 청년들을 수장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외롭고 궁핍한 쉬이 오지않는 ‘오래된 미래’를 사경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시중유화의 전범을 재인식케 하는 남초 김복용 작 백련강(종이에 먹)과 일가에서 일촌을 꿈꾸는, 일촌(日村) 김성룡작 귀로는 우리에게서 멀어진 원형의 자연 회귀를 그리워한다. 월면불 일면월(日面佛)이 떠오른다.
고향 진도를 자주 찾는 화가로는 단연 전정 박항환화백을 들 수 있다. 그에게서 사살ㄹ 했던 임농 하철경 화백은 아직도 산사와 고택을 다니며 사생을 게을리 않는다. 지인이 자전적 소설까지 냈다. 포산 박태우, 동외 정명돈, 정양 박주생 우초 박병락 등이 머문다.
작가 김성룡은 50년간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종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양조형 방식과는 다른 정신세계와 시대흐름을 반영하는 친근함을 주는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가로운 전가(田家)를 둘러싼 산야는 푸르고 맑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당연히 대량생산으로 피폐한 농촌과 다른 원시 두메공동체를 그린다. 그림도 유기농 시대다. 옥주인지사람(沃州仁智人)을 즐겨 쓴다.
진도는 옥주(沃州)였다. 삶이 곧 지난한 개옹 뻘길이었다. 질척한 노래였다. 진도아리랑 초기 원형의 가사들은 자기부정이라는 사회공동체 도덕 규범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뜨거운 자의식의 발현으로 천연스럽게 사내를 부른다. 누구의 욕망인지 열망인지 달빛이 휘청거린다.
진도아리랑은 고도의 전술이다. 강강술래와 함께 의병(疑兵)전술의 한 민속에 더 이상 거칠 수 없는 본능적인 남녀상열지사가 강한 힘을 탄다. “바람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라는 현실적인 바램이 원무를 돌며 꽃향기를 풍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깨달음이 따로 있냐. 늙은 스님네야 탁발 공양도 못 나가고 시아버지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철면불도 한 겨울에 땀을 흘린다는데 ‘씹도 못하는 입으로 똥꼬를 달라’고 하는 이빨 빠진 시아버지.
‘해의 얼굴을 한 부처님! 달의 얼굴을 한 부처님!’ 일면불의 수명은 천팔백세라고 하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낮 하루밤이라고 쓰여 있다. 설두는 마조가 남긴 말이 쓰디 쓴 활구(活句)임을 깨닫고 스스로 게송을 붙였다. 마조의 일면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재개발지구의 혹리수가 판치는 밤세상을 바라보는 달. 천국의 계단을 꿈꾸며 반지하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영화대본 작가들. 배를 쥐며 배고픔에 감기약과 배탈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기증, 주인에게 보내는 쪽지가 유언이 되는 세상. 금강안(金剛眼)의 수사관은 늘 헤어짐을 위한 결심만을 할 뿐이다. 사생취의할 생은 구겨지고 해풍 따위에 말라져 갈아 엎어진다.
故 조세희 작가는 생전에 '난쏘공'이 유효한 사회 담론이 되지 않길 바랐다고 한다. 도시 재개발로 밀려난 하층민들의 삶이 1970년대의 이야기로만 머무르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 굴레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의 분홍빛 꿈과,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참사는 계속된다. 이 모두가 철면불의 강성노조 돈오돈수때문일까?
여귀산으로 돌아온 일휴 김양수 거사는 선화시를 즐겨 한다. 여백을 매우 중시한다. 참구하는 선방의 적염이 스민다. 양산 불보사찰 통도사에서 ‘아 매화불이다’고 소리없이 외쳤다.
그의 선화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다. 아제 누구도 소리를 새기지 않는다. 이철수도, 떠나간 오윤의 칼노래에도 피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화가들은 어디로 가는가. 티브이를 틀면 화인열전은 계속된다.
김호석은 강원도 오지 광산으로 가 이마에 자등명을 달았다. 자화상이 비쳤다. 폐부 안에 도사린 안락과 기름진 창자 속이 비로소 까맣게 번들거리며 보였다. 새벽 공사판 거푸집 위에 시멘트로 굳어진 한 사내의 몸뚱어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휴전선이 곳곳에 철조망을 내리고 있다. 월드컵이 열리고 라다크에 어린이 학교가 세워진다.
‘오래된 미래’와 낡은 집의 오랑캐꽃을 그리는 화가.
일면불 월면불이여, 2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를 위해 몇 번이나 창용굴에 내려갔던가? 성인들은 백성들에게 불을 피우는 법과 농사를 가르치고 나아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에 지켜야 할 충효의 예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진도 아낙네는 소죽끓이는 부삭 앞에 비땅을 들어 땅을 치며 “일면불 월면불이여, 삼황오제는 이 무슨 물건인고?” 아리랑타령을 내던질 뿐이다. 따땃한 아랫목의 동지섣달 홀로새는 밤을 위하여.
해와 달 처럼 무정불이 부처라면, 중생을 위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친 삼황오제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설두의 이 한 질문은 우뢰와 같은 할이다. 산과 강에 무심한 사람이 어찌 임금의 덕을 칭송하랴. 톳발을 잡아당기다 죽고 경운기 트렉터 바퀴에 깔려 죽고 스카이 공사판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무의촌 병원에서 산대도 못 잡아보고 가는 인생 꿈과 같은 세상을 노래하지 않고 어찌 살겠는가.
자 아리랑시로 들어가보자. 시어머니 죽우라고 충원충수 했더니 친정어미 죽었다고 기별이 왔네 씨엄씨 선산에 봉황새 울고 시동세 내동세 태갈보가 나간다.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 열흘만 불어라. 앞산의 딱다구리는 없는 구멍도 뜷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찾네. 물속에 노는고기 잡힐듯해도 못잡고 저처녀 마음도 알듯말듯 못잡네. 접시가 깨지면 두 동강이 나고요 삼팔선이 깨지면 남북통일이 된다네. 임도 눕고 나도 누우면 등잔위 저불은 누가 끌까. 데려가오 날 데려 가오 우리님 뒤따라서 나는 가네. 치어다 보니 만학천봉 내려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요새는 팽목항이나 물김매는 바다로 가사가 건너간다.
우리의 시대는 곧 ‘소유’라는 분배방식이 속삭임이 많은 천사들을 앞장 세워 지배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잉여’는 이미 예술을 범람해 낙원의 강(탐진치)을 오염시켰다. 마치 수묵이 종이와 비단에 스며들듯이. 그림에는 고유의 숫자가 새겨지고 시의 운율과 혁명의 향기를 잃어버렸다. 천정화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고 영혼의 이상향을 찾는 대항해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탁발을 잃은 그대여! 이제 사원에서는 원숭이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퍼스트 레이디가 미술관의 컬렉터겸 기획자가 된다. 조각불이 화덕속으로 내던져진다. 아바타는 디자인을 입는다.
수묵은 강물이다. 서예 또한 불립문자다. 강물도 회룡하는 흐름이 하늘 은한수와 닿는 그런 강물이다. 가장 간결하기 위하여 천변만화와 계절과 달빛과 광야의 시인과 만나지 않았는가.
올 해는 진도군이 목포시와 함께 국제수묵 비엔날레 전시를 한다. 또 다시 화가들은 선택을강요받는다. 왜 예술가가 ‘죄수의 딜레마’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직도 벽을 나오지 못하는 담쟁이잎이 수북이 매달린다. 눈은 내리고 배추색은 해마다 다르다. 갈아엎기 전의 배추들의 뿌리는 시립다. 더 하얗다. 얼굴은 새벽바람에 푸르딩딩한 짠한 때깔을 보인다. 왜 멧돼지는 길길이 날뛰는 것일까. 무엇에 길들여 사는 지 모르는 사람들의 군상이 겨울 속으로 숨는다. 흐린 날의 주모가 석유난로를 끈다. ‘덕불고’와 인지위덕(忍之爲德) 표구액자가 춥다. 일학에 가면 야천(野泉)의 월면도가 오래 걸려있다.
소동파는 마힐 거사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 말했다.
마힐의 시를 맛보면 그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
味摩詰之詩(미마힐지시) 詩中有畵(시중유화) 觀摩詰之畵(관마힐지화) 畵中有詩(화중유시)
코로나 독감으로 내내 박물관이 휴관 중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도 문을 닫으니, 소요할 곳도 마땅한 곳이 없다.
왕유의 시 <산속(山中)>을 읽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왕유를 말할 때 소동파의 평을 드는 까닭을 수긍하게 된다니.
형계(荊溪)는 흰 바위가 드러나고,/이 추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은 비가 오지 않는데,/ 푸른 안개가 사람 옷을 적신다.
‘왜 우리는 수묵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사실 화가 자신에게 던지는, 한 시대와 삶을 보듬고 풀어야 하는 ‘즐거운 편지’공안이다.(박남인 문화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