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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량(見乃梁)은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 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이다. 길이는 약 3km, 폭은 약 180m, 400m까지 이다. [1] 임진왜란 때 한산 대첩의 주요 배경이자, 현재는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걸쳐 있는 곳이다. 거제대교는 1971년 4월 8일 준공된 연육교로 갈아 740m, 너비 10m, 높이 53m의 다리이다. 70년대 초반 조선소의 건설로 인구와 물동량이 늘어나자, 신거제대교를 1999년도 4월 20일에 준공하였다. 신거제대교는 4차선의 길이 940m, 폭 20m, 높이 20m로 건설되었다.
역사[편집]견내량은 고려시대에는 고려 의종이 1170년 - 1173년까지 만 3년간 거제도로 유배되어 전하도(殿下渡☞?島)로 불렸고, 임진왜란 때는 옥포해전과 한산해전의 주요 배경지가 되었다. 특히 한산해전은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견내량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 그리고 안골포 전투를 벌이는 시발점이 되었다.[2] 임진왜란 주요해전의 배경[편집]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은 한 번이라도 패하면, 수로의 주도권을 놓칠 수 있는 절제절명(수정☞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므로, 해협과 만을 낀 수륙 합동 작전을 위한 유인작전과 공방전을 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의 배경이 된 곳은 이러한 좁은 해협과 거센 물길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육지와의 사이에서 바다의 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교량이 서 있다.
같이 보기[편집]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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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선 2척,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 진무성
[간략정보]
1566(명종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사규(士赳). 호는 송계(松溪). 고려조의 문인으로 유명한 화(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참판 인해(仁海)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의협심이 많으며, 글을 배우면서도 무예를 좋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군관으로 있으면서 그 해 6월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부터 공을 세우고 용명을 날렸다. 육상에서 진주전투가 있을 때에도 정탐 연락의 임무를 띠고 적의 진중을 왕복하여 수훈을 세웠다.
1597년원균(元均)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고 적의 재침으로 수군이 열세에 몰렸을 때에도 동요하지 않고 화공으로 적선을 무찔러 애국충절의 기개를 보였다. 뒤에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34세가 되던 1599년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고, 유원진첨사(柔遠鎭僉使)·경흥부사·통제영우후(統制營虞候) 등의 무관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있은 뒤에 장재(將才)가 거듭 인정되어 다시 북방요지 구성군수에 임명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흥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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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잘보았습니다. 지금도 눈만돌리면 견내량이 보여요
그래요.^^ (일가님) 생각하면서...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