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영어로는 Palm Sunday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 가에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한복음 12:13)”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성지 순례하면서 우리를 안내하던 피터 마리노라는 친구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왜 성경에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출애굽기 3:8, 민수기 14:8, 신명기 6:3, 여호수아 5:6)”이라고 했는지 아느냐고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 젖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은 양을 치고, 양에게서 젖을 얻는 땅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겠는데,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은 금방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 말을 들으니까 종려나무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열매에 꿀이 들어있는 Date Palm이라는 종려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그런 종려나무가 많아서 꿀이 흔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 본 도시 중에 특히 여리고는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나무의 도시라고 할만했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도로 연변에 모인 무리들이 그렇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치던 그 날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참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이 이 문제에 대한 궁금증을 이렇게 풀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곧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스가랴 9:9)” 이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고 합니다.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태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서 스가랴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들의 복음서에 그렇게 기록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타신 것은 말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말은 전쟁과 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전쟁 시에 왕들은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평화 시에는 나귀를 탔던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환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는 왕중의 왕이시요, “Lord of Lords”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힘으로, 무력으로 점령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 인생을 점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그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빌립보서 2:10-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말씀은 단순히 그가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작은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그 어마어마한 사건 때문에 그는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33년이라는 길지 않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주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때 십자가를 진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흉악한 강도나,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죽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에도 두 사람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의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는 이 예수라는 사람을 직접 심문했습니다. 빌라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도 예수를 심문했고, 유대 왕 헤롯도 예수를 직접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민은 예수라는 사람을 고소한 사람들은 있는데,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고소한 사람들의 말도 서로 맞지 않아서 그들의 말은 죄를 입증할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죄 없는 이 나사렛 사람 예수를 방면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관습을 잘 알고 있던 빌라도는 그들의 관습대로 예수를 방면하고, 그대신 바라바라는 흉악한 사람을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구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아니, 로마의 총독이 그의 권한으로 사람 하나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그것도 죄가 없는 사람 하나를 살릴만한 힘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안 된다고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성난 군중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신하가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결국 그들의 소리에 빌라도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꼭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의 막강한 권력으로도 살릴 수 없는,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이유가 있는 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의 섭리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섭리는 다른 것 아닙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섭리라면, 누구도 그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는 신이 정해 놓은 운명대로,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합니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나사렛 예수는 평소에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는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 결정한대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운명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중에 유다라는 사람이 자기를 배반할 때도 그는 다른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가지만, 나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누가복음 22:22, 마태복음 26:24, 마가복음 14:21).”
우리는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 이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충격”이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고 경험했던 그 엄청난 일들을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누구인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글로바(Cleopas)라는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길을 가면서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 빛은 어두웠습니다. 이들은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글로바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당신도 예루살렘 쪽에서 오는 것 같은데,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일 밖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누가복음 24:18)?”
예수님에 대한 일은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제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난 후, 그의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런즉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2:36).”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3-4).”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제부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고,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이제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미 성경에 예정해 놓으신 것이었다고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예정해 놓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 짐을 그에게 지게 하셨습니다(4-6절).”
특히 마지막 6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져야 할 모든 죄를 그에게 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개역 성경에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The Lord laid on him the sins of us al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그에게 얹어 놓는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그들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속죄 예식을 행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숫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여 그 죄를 숫염소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백성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진 이 숫 염소를 광야로 내 보냈습니다(레위기 16:21-22). 이 염소는 광야를 헤매다가 곧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예식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 말씀과 크게 다릅니다. 이제는 염소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모두 대신 짊어질 나의 종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후 이렇게 고백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요한복음 1:29)!”
이 말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주고 있을 때, 그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한 말입니다.
바울은 그가 발견한 구원의 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히브리서 10:20에는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A new and living way opened for us)”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the living Stone, 베드로전서 2:4)”이라고, 그분을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그분에 대해 여러분이 고백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부활하셨기에 저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