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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
인지학적 공동체 형성 (GA257)
제1강
슈투트가르트, 1923년 1월 23일
사사키 요시유키 번역(쇠여울 재역)
과거 10년에 걸쳐서 도르나흐에 건설된 괴테아눔은 이제 거기에는 없습니다. 인지학 협회의 활동에 있어서, 그 건물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끔찍한 상실이었을 거예요! 작년 섣달 그믐날의 끔찍한 화재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그 상실의 크기, 그 슬픔의 무게가 얼마나의 것인지를 알고 싶으면 괴테아눔이 협회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재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괴테아눔의 초석이 도르나흐에 놓여진 1913년에 이르기까지는 그 지부가 어디에 설립하든, 인지학 협회는 인지학 운동을 수호하는 것으로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협회는 그 중심이 되는 건물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슈투트가르트의 협회는 그 자체로 건물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아마 여기 계시는 협회원들은 인지학 협회 전체가 그 자신의 집이 되는 건물과 함께 무엇을 잃었는지를 특히 절실히 느끼실지도 모른다. 여기 슈투트가르트의 협회원들은 몇년에 걸쳐서 자신들의 건물 속에서 그 활동을 수행한다는 혜택을 얻어 왔거든요, 그 경험으로부터 자신들이 소유한, 인지학 운동에 걸맞게 꾸밀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건물의 안에서 활동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인지학 협회가 도르나흐의 건조물 속에 그 중심을 확립하도록 재촉을 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까지 그 활동을 수행하는 유일한 길은 — 지금 말했지만 슈투트가르트 경우는 예외지만 — 집회를 연다는 것뿐이었어요. 오늘날의 인간 진화가 필요로 하는 인간과 정신세계의 결합의 가능성을 전한다는 것은 말에만 기대야 했답니다. 물론 그 목적 때문에 구어에 의존한다는 것은 인지학 운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장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 깊은, 없어서는 안 될 것임에 변함이 없죠. 하지만 우리는 괴테아눔이라는 건물과 함께 또 다른 길이 열렸습니다. 그 중에서 모색된 순수 예술적인 형태 속에서 세상일반으로 향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지학이 말을 매개로 제공하려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도르나흐의 괴테아눔에서 지각할 수 있는 예술적인 형태에 대해서도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다는 것은 맞는데요, 그래도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들은 것을 통해서 내적인 활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시각에 의해서 사물에 접근하는 편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도르나흐의 건물로, 오늘의 인류가 저 정도까지 필요로 하는 정신성을 전한다는 가능성이 크게 퍼졌습니다. 괴테아눔은 그 시각화된 형태에서, 그리고 볼 수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 일찍이 말해진 말을 통해서 정신 세계의 비밀을 배우게 만든 사람들보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그 비밀을 말했습니다. 그 건물과 그것을 기초하는 곳의 인지학을 편견 없이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선의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 인지학은 교파주의적 색채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시대의 위대한 과제, 즉 이제 인류에게 입수 가능한 새로운 정신적인 빛의 방사를 거론하며 우리의 문명과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그것을 구현하는 일에 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의 적극적인 증명을 괴테아눔 속에서 찾았습니다. 아마, 편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면 임대된 강당 안에서 개최되는 많은 회합 중에는 교파 주의적인 음색을 갖는 것도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르나흐에 서는 건물, 그리고 거기에서는 모든 상징주의와 우화의 흔적이 주의 깊게 회피되어 인지학적인 충동은 순수 예술에만 한정되는데, 그 같은 건물을 선의인 사람들이 볼 때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인지학은 뭐랄까 신기한 것, 바뀐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폭넓은 층에 어필할 무언가를 키운다,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온갖 노력의 영역에서 보편적 인간적인 의미를 갖는 방식으로 현대를 보람찬 것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하듯이 사람들에게 보여야 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그 아픈 폐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괴테아눔은 인지학 운동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도를 그 건물의 세부에까지 침투시키려 시도했습니다. 우리는 순수 예술을 달성하려고 고투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런 노력이 깊은 의미에서 인지학적인 충동의 일부가 된 때문입니다. 이렇게 괴테아눔은 인지학 협회 자체에 특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협회의 고상한 이상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일은 거의 10년에 걸쳐 그런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내기는 하룻밤에 충분했다.
이들 두 문장을 늘어놓고 얘기한다는 것, 그것은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지학 운동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이 결정적인 수단을 걷잡을 수 없을 방식으로 잃는다는 것에 비하면 과거 10년에 걸친 일이나 걱정에 대해 보고되어 온 모든 사실들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괴테아눔이 잃어버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정말 느낀 사람이면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재건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그 건설이 시작된 10년이 지났다는 것, 그리고 인지학 운동이 적을 만드는 성질의 것임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합니다. 슬픔에 잠겼던 이런 날들에서 우리는 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겪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파멸은 또 괴테아눔이 가지고 있던 많은 진정한 친구들이 인지학 운동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밝힌 것입니다. 라고 하지만, 제가 감사를 가지고 받은 협회원으로부터의 메시지 — 그 중에서 그들은 그 슬픔과 고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와 함께 협회 밖에 머물고 있다지만 우리의 파멸적인 상실의 때에 공감의 뜻을 나타내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메시지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에 즈음해서 우리의 목표에 대한 많은 온정이 드러났습니다.
괴테아눔을 세운 것은 실제로, 사랑했는데 그것은 끝에 있어서도 또 사랑의 표시 아래 서고 있었습니다. 1913년 건축 착수에 이르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그 운동에 몸을 바친 사람들 측에서 무한으로 봉사하는 정신만이 그 건설을 가능한 것입니다. 물질적, 정신적인 봉사와 노동 봉사 등 헤아리기 어려운 양의 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운동에 관한 수많은 친구들이 그 건축을 실현하기 위해서, 도르나흐에서 힘을 합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헌신적인 태도를 가지고 함께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서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써래"로 고르는 기간에 건설 속도는 상당히 느린 것이 됐다고는 하지만 함께 일하던 멤버들의 협조적인 인지학적 정신에 대하여 어떤 불이행도 없었습니다. 도르나흐의 건축 현장은 서로 교전하는 많은 유럽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로 사랑에 찬 동료 의식 속에서 함께 일하는 생각, 그리고 수행하는 자리에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교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죠. 전시 하의 여러 국민 사이에 실행된 적의의 파동을 조사하러 온 역사가들은 이 건물에 깃든 사랑이 거기에 서는 것을 볼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혐오가 휘몰아치고 있을 때 도르나흐에서는 진정한 사랑 — 그것은 정신에 주는 사랑입니다 —이 탁월하게 그 건물 안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인지학이 담당하는 이름은 정당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다른 것이 그럴 것 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제시할 것, 그것이 이용하는 말은 추상적 이론으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인지학적인 생각은 다른 모든 종류의 학문이 과거 3,4세기 동안 생각을 형성하여 온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다른 곳에서 그러는 것과 달리 의도되어 있습니다. 인지학적인 생각은 사랑에 의해서 형성된 그릇인 인간 존재는 그 내용에 주어지듯 정신적 세계에 심리적으로 호출될 것입니다. 인지학은 참다운 인간성이라는 빛을 사랑의 각인을 맡은 사고 속에 빛나기 시작해야 합니다. 즉 지식은 단순한 형태로든 인간은 그 형태 속에서 그의 마음속에 살면서 거기서 인간의 사고를 비추게 된 세계정신이란 빛을 그 마음속으로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인지학은 사랑의 힘에 의해서만 정말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을 그 진정한 본성에 맞는 방식으로 받을 때에는 그것은 사랑을 발생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난 적의의, 바로 가운데에 있어 사랑이 지배하는 장소를 도르나흐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지학적 진실을 표현하는 말은 모두 오늘 다른 장소에서 말하는 듯한 말과 달리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사람들이 정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정말 엄숙한 소원입니다.
도르나흐에 섰던 건물은 이 엄숙한 정신 속에서 지어졌다. 사랑이 그 안에 체현된 것입니다. 그 같은 사랑이 괴테아눔의 화재의 밤을 통해서 새로운 것으로 알려진 희생 속에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존재했던 것은 사랑으로 변용된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괴테아눔의 화재보다 더 깊은 정신적 측면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 놀라운 재액을 바로 우주가 막지 못한 것은 왜일까? "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파멸을 예견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 권리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질문은 위대한 비교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이다, 단순히 그것들을 인지학 운동에 대해서 이용하기 위한 무기로 주조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즉시 보고되는 것 없이 그것들을 거론할 여지가 우리에게는 남지 않았다는 이유에 따라서도 그것들을 논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다 깊은 정신적 사실에로 내가 진행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로 주조된 것이 쓴 적을 불러내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비웃고, 모욕, 그리고 적대감이라는 진정한 후폭풍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진실의 의도적 왜곡은 언제든지 우리의 반대자의 대부분에 특징적인 것입니다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특히 전형적인 것으로 적은 어느 모퉁이에서라도 기어 나와서 그 비극적 자체에 대한 의도적인 부정적 진실을 뿌리고 있습니다. 화재 현장에 있던 우리의 친구들은 그들의 있는 힘을 다하여 바로 구할 수 없었을 것을 구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악의에 찬 자들은 예를 들어 화재는 협회원들이 정말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드러냈던 그들은 불이 자연스럽게 사라져 주도록 기원하며 서성이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을 할 만큼 나쁜 취미였어요. 이는 그 화재에 관련하여 우리가 입는 모욕과 비웃음의 하나의 아주 사소한 예에 불과합니다.
나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우리는 끊임없이 크게 될 것의 반대를 고려해야 하게 될 것, 그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최우선 의무에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적은 무슨무슨 뿔이 수그러들지 같다는 것을 들어야 하는 것은 항상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것은 환상에 아첨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경향에 따른 것이며, 불행히도, 너무 심하게 우리 사이에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리가 직면해야 했던 이 끔찍한 불행에는 적어도 협회원을 그 환상에서 치유하고, 인지학 운동을 전진시키려면 그들의 마음과 정신의 힘의 모든 것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라고 할 것도 다른 괴테아눔을 짓겠다는 소망이 표명된 지금 우리는 그 배후에 존재하는 강력하고 정력적인 인지학 협회 없이 재건하여도 무태이다는 사실에 대해서 특별히 의식적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건에 의미 있다는 것은 그 책임이란 무엇인지를 완전히 의식하고 자기 의식적이고 강력한 인지학 협회가 그 배후에 서서 있을 때뿐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인지학 협회의 기초란 무엇인가를 우리는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엄숙한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는 그 책임에 관한 의식적인 강력한 인지학 협회를 어떻게 마음에 그린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1918년까지는 인지학 협회는 현재 인류에게 꼭 필요하다는 지도적인 협회원들에 의해서 믿어지던 정신적 흐름을 포함하는 곳의 용기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인지학의 마음에서 자란 것, 즉 인지학의 사고, 감정, 그리고 의지로 자란 것이 그 유일한 부가적인 요소였던 것입니다. 나는 도르나흐의 건물 —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인지학 운동의 표현이었습니다 —에 대해서만 말씀했지만 그것은 그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인지학의 바른 마음에서 생겨 왔던 거죠.
하지만 인지학은 분리주의적 집단의 관심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파주의와는 서로 양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그 중심에서 솟아나는 것은 무엇이고, 모든 생활의 여러 영역에 있고 보람찬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의 전쟁의 일시적인 종식에 이어 방문한 어려운 시대를 통해서 그 운동의 친구들은 그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탁월한 사물의 비극적인 양상을 볼 때마다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충동이 얼마나 필요불가결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1919년 이후에 인지학 운동에서 자란 것들의 대부분은 만약 인지학이 앞선 시대에 다녀온 것인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면 그렇게 되었을 것의 특징과 매우 다른 특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인지학의 영향이 느껴지도록 요청되고 있는, 그리고 인지학에 의해서 동기 부여한 그 운동의 친구들이 보람찬 방식으로 활동적으로 해온 그들의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다,라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업이 실제로는 직접 인지학적 정신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병행하여, 그리고 자칫 외적인 사건에 의해서 그와 무관하게 세우고 수행된다는 것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919년 이후 비 인지학적이라 부를 수 없지만, 만약 인지학 운동이 1918년에 이르기까지 추구했던 같은 과정을 걷고 있으면 탁월하였을 정신과는 다른 종류의 정신 속에서 수행되는 상당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로 내가 의무로서 해야 할 이들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나를 오해하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인지학 운동과는 다른 실체로서 존재했다지만 그것과의 밀접한 결합 속에서 발생하게 된 대처인 Der Kommende Tag 같은 대처를 언급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형의 기업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발 제 말을 다소 물질적 영역에서의 이들 대응 운운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라고 할 것도 그들은 인지학 운동과 완전히 조화한 선에 따라서 전진하려는 각각의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으로 언급하려는 것은 그저 인지학 협회 자체, 협회에서 그리고 협회를 위한 기능에 관한 것뿐입니다.
인지학 협회 안에 그 일부가 계속 연결되고 있는 이 인지학 운동은 그 보편적인 인간성이라는 특징을 여기 슈투트가르트에서 특히 명확히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신적인 그룹의 프로그램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폭넓은 인간 본성의 전체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된 것입니다.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인지학의 보편적인 인간성이라는 특징에 관한 증명이 여기 슈투트가르트에서 발견된다,라는 것으로 아마 알 것입니다. 그 일은 어떤 하나의 영역, 즉 발도르프 학교 교육에 대해서 특히 말할 것입니다. 그 증명은 발도르프 학교가 인지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설립된 조직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는 문제를 풀려고 설립된 조직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교육이 인간의 성장에 가장 많이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인지학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나타내야 합니다. 교파와 당파의 경우 보편적인 인간의 고찰에 근거한 학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는지도 모릅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추구되는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특징을 너무 세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인지학자라면 인지학이라는 이름에는 전혀 구애 받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에 집착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목표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의미에서 기능하는 것밖에 못합니다. 어떤 파벌과 당파가 학교 설립에 나선다고 해도 예를 들면 "7일째의 재림파"나 그에 비슷한 사람을 개발하기 위한 교파적인 학교를 설립하겠지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인지학의 본질에 어긋납니다. 인지학이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조직뿐입니다. 그것이 인지학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지학 운동을 파벌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관찰안이 없는가, 악의가 있는 경우입니다. 라고 하는 것도, 여기 슈투트가르트의 발도르프 학교는 인지학이 보편적인 인간에 관여하는 것의 적극적인 증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협회 내부의 각 써클도 이 같은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발도르프 학교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그 설립의 정신 전체가 협회에 대해 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 정신이 인지학 협회 혹은 인지학 운동에 관련한 향후 어떤 설립에 있어서도 모범으로 일하고 있어야 합니다. 도르나흐의 괴테아눔, 그리고 발도르프 학교와 그 절차는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인지학적 활동은 어떻게 수행되는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그 설립의 경위부터 그 자체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예로서 Der Kommende Tag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음의 언급 속에서 서술할 조직 속에 그것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는 인지학 운동 자체에서 인지학적 방법으로 열리고,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내 코멘트를 한정할 생각입니다. 인지학 운동은 발도르프 학교에서 그것이 좁은 파벌적 자기중심적인 정신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매우 보편적인 인간의 정신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다니는 학생들이 어떤 배경에서 왔는지를 이제 식별할 수 없는, 그들은 그리 보편적인 인간성을 발달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발도르프 학교의 경우 그것이 인지학에 근거했는지를 듣는 것은 남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올바르게 교육되어 있는지,라고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인지학이 작용할 때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으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즉 인지학이 여러 분야에서 올바르고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력적으로 키우는 영역, 그 구성원들이 인지학 협회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자각한 영역 − 그것은 그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하여 오는 것 때문입니다 −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제야, 인지학은 문화나 문명의 여러 영역에서 파생되는 이들의 대부분의 적절한 부모일 수 있습니다. 인지학 협회는 인지학을 정말 키우려 하는 가장 깊고 신성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을 하나로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일에는 몇 가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어려움은 1919년 이후 이곳 슈투트가르트에서도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한편 발도르프 학교는 지금까지 제가 논의한 같은 진정으로 인지학적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한편 우리는 바로 이 케이스 속에서 부모로서의 인지학 협회와 거기서 파생한 활동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나고 힘든 일에 있느냐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자세히 말씀 드리면 아마 이 점에 대해서도 아실 것입니다.
다음 발언은 1919년 이후 인지학에 관련해서 발생하여 온 여러 가지 운동의 가치를 생각하여 보자는 의도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인지학 협회에 그것들의 영향에 대해서 뿐입니다만 아무도 내 말을 가치 판단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인지학 협회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언급하려는 사업은 그 책임자들에 의해서, 반드시 "신이 준 땅으로 그대의 마지막 오랜 세월 나날을 위해 너의 부모를 공경하다"라는 십계의 정신의 현대적인 감정이라고 할 만한 정신을 가지고 항상 배려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 프로젝트에서 활동하는 정신들은 많은 경우 —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 인지학 협회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협회에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 회원들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더라도 그 친부모가 된 원천을 항상 걱정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 활동의 협회에 대한 영향은 바람직한 것일까요? 해당 인물들이 전문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을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과격한 말투가 될지도 모르지만,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뛰어난 발도르프 학교 교사, 즉 인지학 운동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인간에의 대처로서 발도르프 학교의 정신에 완전 조화된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정신에서 발도르프 학교 교사로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는 인지학을 가르치는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인지학적 정신에서 스스로를 형성하고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발도르프 학교 교사는 하나의 협회원으로서 반드시 협회에 따르고 올바르다고 여겨진 것을 하지 않아도 학교에 대한 가장 뛰어난 공헌을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Der Kommende Tag의 우수한 담당자인데, 그 조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인지학 협회의 필요에는 거의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도 있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 모 기관인 부분의 실체에 대해서 거기서 파생한 모든 자식 간을 적절하게 키우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 훼손한다는 것은 더없이 불안, 인지학 운동에 있어서 정말 깊은 걱정이 됩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 상황이 특정 분야에 만연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괴테아눔의 전전번의 강의에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한 같은 것을 나에게 말하라고 강요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 운동은 3개월 반 전에 나 자신의 협력과 조언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라 그것을 다소 비판하려는 의도는 내겐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게 잘 갔다면 그건 나에게 가장 깊은 기쁨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확실히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출발부터 3개월 반 됐을 때 나는 종교계 새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지학도에게, 물론, 거기에는 그 운동에 깊은 유대를 가진 인지학자를 담고 있지만, 당시 도르나흐에서 말했던 같은 것을 말해야 했어요. 제가 많은 말을 사용하여 말해야 했던 것은 물론 아이를 크게 기뻐해라. 하지만 엄마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주의와 관심에 대해서도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주의와 관심은 종교 개혁 운동에 의해서도 내야 하지만, 특히, 인지학 협회원이 그것을 지고 있습니다.
만약 협회가 얕볼 일이 있었다면, 만약 인지학도들이 인지학 운동과 함께 성장하여 온 우리의 동료가, 그로부터 파생한 운동에 가장 좋은 조언자이거나인 도움 손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찾아온 것을 마침내 발견했던, 인지학 중에서는 결코 찾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자신들이 그 구성원인 인지학 협회에 등을 돌리는 것이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에 대한 관심에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어머니가 무시돼서는 아이의 번영도 없다는 것에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종교 개혁 운동에 참가하는 인지학도들이 인지학 협회원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발도르프 학교 교사가 그 길에서는 제일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협회에는 거의 기여하지 않는 경우에 바로 우리가 직면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거예요. 이 사실은 거의 들키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1919년 이후 겪어 온 것은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유기체 삼원화 조합이 좋은 의도를 갖고 설립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비 인지학적인 사회 집단인 삼원단에 대한 공청회의 기회를 놓친 책임은 대체로 이 조합에 있고, 그것이 한 짓이라면 삼원 충동을 인지학 운동에 전념한 것이지만, 그 운동은 이미 그 기초가 되는 모든 것에 침투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삼원단 속의 전혀 외적으로 공적인 표현이 훨씬 못 미칠 정도로 깊이 그것에 침투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열심히, 정력적으로 임해 온 몇몇 인지학도들이 그것보다 가치가 낮은 협회원이 되는 것을 본다는 슬픈 경험을 해왔습니다.
과거 4년에 걸친 우리의 운명은 그런 것이겠지요. 상황이 있는 그대로 기술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괴테아눔을 재건하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강한 정력적인 인지학 협회가 있어야 비로소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슈투트가르트가 광범위한 활동의 훌륭한 시작의 땅인 것, 그것이 얼마나 뜻 깊은 현상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다음처럼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리고 여러분에게는, 내가 이 장엄하고 슬픔에 찬 기회에 이러한 기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을 곱새기라 말하고 싶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발도르프 학교의 예로 돌아갑시다. 책이나 강의에서 말을 써서 인지학을 넓히는 것, 그리고 인지학 협회 자체의 번영을 돌보는 일의 차이를 파악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책과 강의 같은 수단에 의해서 인지학을 확산을 위해서 인지학 협회가 필요하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아닙니다. 협회의 도움 없이 인지학은 바로 이들 수단에 의해서 크게 넓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지학을 구성하는 곳의 것은 그것을 포함하는 인지학 협회가 없으면 완전한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일급 발도르프 학교 교사일 뿐만 아니라 말과 펜에 의해서 인지학을 넓히는 데도 제일급의 사람이면서도 협회와 인지학에서 비롯된 그 동료와의 관계에 정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발도르프 학교, 그리고 양쪽 모두의 분야에서 기대 이상으로 빛나는 성과를 올리는 교수진이 있으면서, 그 구성원들이 협회의 진정한 관심과 그것을 키우는 것에서 손을 뗀다는 것 등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슈투트가르트에 와서 지금 이야기한 두 분야에서 최고의 일을 했는데, 인지학 협회를 육성하고, 그 발전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말을 그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원단을 위해 정력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그들이 활동적으로 될수록 인지학 협회 활동은 적어져 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 개혁 운동에 종사하는 유능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분야에서 다시 힘의 원천이 협회부터 잃어버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입은 잴 수 없는 큰 상실 때문에 특히 심각한 불안의 원천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서 가능한 한 명백한 말로 얘기할 필요가 생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협회에서 어떻게 일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좀 더 충분히 특징짓고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기술해야 하겠습니다. 과거 4년간 협회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거기에는 두개의 다른 면을 가진 전개가 있었습니다. 이 이중의 방법에 의한 발전은 내가 마음에 안은 운동과 협회의 양쪽에게 특징적인 것입니다. 나는 학생 혹은 젊은이들의 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떠올리고 봅시다. 그 시점에서는 그것은 "더 차원 높은 교육을 위한 인지학적 조합"이라고 불렸어요. 이들 사안은 살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 명확히 규정된 형태로 처박기 어렵지만, 해보기로 합시다. 그 창설자들(특히 그 대부인 로만보스)이 다소간 의식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목적은 여러가지 과학 분야의 연구에 대해서 인지학이 보람찬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운동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느낀 터의 추세를 바꾸는, 변용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운동은 반에서 배우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정신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채용된 프로그램은 그런 방식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 실제로는 그로부터 잠시 후지만 다른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대항적인 운동이라 부를 생각은 없지만, 그것은 최초의 운동과는 다른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은 여기 슈투트가르트에서 다수의 젊은 학생들이 보편적인 인간성, 즉 정신적 − 교육학적 울림을 지닌 인간성에 대한 관심을 기르기 위해서 모였을 때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지학의 영향을 직접 교실에 가져가기보다는 그것을 전혀 다른 환경, 즉 인간의 오의의 존재, 그 마음, 그 정신, 그 사고방식 전체로 가져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격한 말투가 되는데 그것은 교실에서 이용되는 말에 다른 색깔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를 위한 충동이 그 오의의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현재의 젊음을 경험할 수 있음과 함께 다른 종류의 감정을 마음에 품고 늙음을 경험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학생이라고 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있어, 인지학이라는 보편적인 인간 정신에서 창안된 그들의 인간성을 교실 안에도 반입하는 것도 있었잖아요. 이들 젊은 학생들의 관심은 교실 가운데 조우하는 학문적인 문제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젊은 인간에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도, 장소는 같지만 문제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지학 협회가 그 일을 적절히 실시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각각의 탐구와 고투에서 거기에 도움을 요구하는 각자의 오의의 존재로 이어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은 마음을 갖고 있을 때뿐입니다.
나의 저서 "더 고차원의 세계 인식과 그 획득"속에서 찾는 다양한 수행 중에는 어느 일정한 명확한 시간 경과 속에서 실천될 6개의 수행이 있지만 그 하나는 완전히 편견 없는 마음의 상태의 육성입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인지학 협회 전체가 이들 6개의 덕을 육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 획득을 향해서 노력하자는 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지학 협회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인간성까지 닿을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조금 전에 이곳에 와서 협회가 여기에 관여하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놓고 있고 필요한 관계를 수습하는 것을 찾아냈는데 그 사실에 의해서 협회의 문제의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조금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의도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이 예에 의해서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협회에 있어서 인생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에 주의를 향하여 봅시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유능한 협회원들은 매우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여 왔습니다. 정말 최대한의 내적, 외적인 자제를 가지고 말하고 싶은 것은 협회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를 받지 않은 일류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협회 내부에서 여러 가지 과학 분야를 발전시킨다는 책임을 지고 왔습니다. 그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협회는 순전히 인간으로서 사람들에 접근해야 했어요. 한 사람이 다른 인간에게 말을 건네듯이, 그 오의의 마음에서부터 사람들과 대화하게 한정할 수밖에 없어 여러 분야 전체에 가지를 펼치는 것은 정말 불가능했습니다. 그 제일의 사명은 다른 분야의 육성에 진입하기 이전에 인간의 마음의 세계 속에 일정한 장소를 쟁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지학은 문화와 문명의 모든 측면을 보람찬 것에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협회의 당연한 결과로서 과학자들이 나타나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한 협회원이 일류의 과학자이면서 협회의 기본적 요구를 무시한다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지학적 통찰을 화학 물리 또는 다른 분야에 최고로 칭찬해야 할 방식으로 적용하는 과학자가 인지학자로서는 비좁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들 분야에서 유능한 과학자들이 얼마나 그 힘의 모든 것을 부모 협회에서 올리고 그 육성의 도움을 하지 않는지 우리는 봤어요. 이들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에는 아직 그 출신 분야인 화학과 물리의 잔향이 있어 협회에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인지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화학, 물리, 생물학 그리고 법학은 아직 보편적인 인간과 하나의 실로 꿴다 하더라도 그 결합은 정말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부모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협회가 15년 동안 그 충심으로 순수한 인지학을 육성하지 않았다면 과학자들이 일할 곳은 거기에는 발견되지 않았겠죠. 인지학은 그들이 필요했던 것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인지학의 그들의 과학에의 공헌에 보답하고 협회를 육성함으로써 그것에 보답하려면 얼마나 많은 도움이 필요로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돌아볼 일입니다.
아마, 그럼으로써 광범위한 활동에서 뭔가 일어나는 일을 더 자세히 보면 함께 하나의 사실, 하찮은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하찮은 것만은 아닌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기 위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19년 이후 인지학은 많은 아이를 만들어 내어 왔는데 아이들은 그 어머니를 심하게 무시하여 온 것입니다.
자, 우리는 우리를 하고 도르나흐에 남겨진 괴테아눔의 폐허를 암담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게 했던 그 무서운 화재와 마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또 최근 그 가입자 명단이 상당히 길어지고 왔다고는 하지만 내적인 안정성을 손상시키므로 그 자체가 얼마인지 폐허와 비슷한 인지학 협회로 돌아오게도 됩니다. 물론 우리는 지부 집회를 연다거나 인지학에 대해서 듣거나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만약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한 문제를 더 잘 생각해서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들고 있는 것은 다 우리의 적에 의해서 즉각 척결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저의 말이 아픔과 슬픔의 말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이전부터 여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 되었습니다. 내가 기술한 사건, 그리고 이에 더불어 생긴 모든 것에 의해서, 내 말은 슬픔과 아픔의 말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지만 그 말은 괴테아눔의 건축에 마음으로부터의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그 화재 시에는 그것을 도우려던 사람들에 대한 제 감사의 표현만큼이나 깊은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아픔의 표현은 먼 곳에서, 혹은 인근에서 온 협회원들이 이 곳 보여 온 모든 따뜻한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누군가를 탓하고 비판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요구하는 우리의 책임을 의식하는 일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협회, 인지학 협회를 계속하기 위한 마음과 정신의 힘을 불러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자, 종교 개혁자, 과학자, 젊은이의 그룹, 노년과 중년의 그룹에 눈을 돌리게 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지학적 공동체가 아니면 안 되며 그것은 자신과 거기서 파생한 공동체를 키우는 원천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도르나흐에 피어올랐던 불꽃은 우리의 바른 마음을 태웠지만 그 같은 불길이, 우리는 어쨌든 인지학적으로 협동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오늘은 이 소원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특별한 영역에서도 그 부모가 아랑곳하지 못하겠다면 그 힘의 원천이 없어질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계에 있을 법한 어려움으로, 친부모는 전혀 완전히 그 자손인 부분의 저 아이들에게서 종종 잊혀져 왔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 인정해야죠.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리는 무서운 적의에도 불구하고 늦기 전에 라고 하는 것도,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만, 우리가 우리의 방식을 바꾸면, 우리는 아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인지학 협회에서 인지학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진화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 그 하늘의 세계로 스미는 정신의 빛과 인간 사이에 하나의 관계를 구축한다는 게 그 주된 공통 과제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도르나흐의 화재 불꽃을 우리의 마음으로 느꼈지만 바로 그 불꽃이 아직 시간이 있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대비하도록 촉구한 것은 이 의식이며, 이 사명입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를 실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동시에, 오늘 제가 상심에서 드려야 했던 것을 여러분은 충분한 무게로 받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이 작용하는 힘과 의지를, 특히 인지학 운동에 결집하겠다는 의지를 일깨우세요. Der Kommende Tag, 발도르프 학교, 종교 개혁 운동, 그리고 기타 활동에 있어서 뛰어난 공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누구도 개인적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특별한 분야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도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노인도 젊은이도 중년의 사람도 그것들을 창출하고 키운 부모 협회, 모든 전문가가 그 중의 일원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과 힘을 합쳐야 할 부모 협회를 모두가 마음에 걸어 주세요. 우리 한가운데에서 크게 번영했던 지나친 특수화는 그 부모가 충분히 신경쓰지 못하면 다시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르나흐의 불길이 인지학 협회에 도움이 된다며 우리의 의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진지하게 일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타오르게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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