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서 우리는 한국 현대시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개관하고자 한다. 시는 아무런 전제 없이 한 편씩을 읽을 수도 있고 한 시인의 작품만을 모아 읽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앞뒤의 문학사적 연관을 살핌으로써 더 잘 이해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시를 어떤 연대기적 지식의 재료로만 생각하는 태도이다. 수많은 시인과 사조(思潮)의 이름을 머리 속에 빽빽하게 채워 넣어야 현대시의 흐름을 안 것이라는 믿음은 허망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중요한 시인이 활동했던 시기라든가 한 시대의 전반적인 경향 정도는 대강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한 간략해야 한다. 분명히 단언하건대,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나 시 비평가들 중 어느 누구도 고둥학교 참고서네 나오는 숱한 동인지 잡지들의 이름과 발행 연도, 시인들의 등장 시기, 모든 시집의 이름 그리고 그 밖의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다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훌륭하게 시를 연구 해설하고 가르칠 수 있다. 사전이나 기타 참고 자료가 도와 줄 수 있는 사항을 낱낱이 기억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게 정리된 현대시사의 대체적 흐름과 주요 경향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여기에 정리된 현대시사의 윤곽을 훑어 나가면서 단편적 지식보다는 전체의 줄기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권한다.
1. 현대시에로의 이행(移行)
한 시대가 지나가고 다음 시대가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내기까지의 사이에는 으레 과도기적 변화의 단계가 있는 법이다. 20세기 초기의 우리 시에도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으니 대략 1910년대가 이 무렵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전체를 종합하여 볼 때 다양한 모색과 변화의 움직임이 얽힌 시대이며, 조금 구체적으로 나누어 말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유형의 시적 조류가 공존, 갈등하였던 기간이다.
(1) 예전의 시가 문학의 계속 : 시조, 가사, 민요, 한시 등
(2) 예전의 시 형식을 빌려 새로운 시대의 사상과 경험을 노래한 작품들 : 개화기 가사, 의병가(義兵歌), 시대 비판적인 시조 등
(3) 새로운 노래와 시의 시도 : 창가, 신체시 등
이 중에서 (1)에 속하는 것들은 형태와 내용이 모두 앞 시대의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현대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한 역사적 의의는 없다. 우리가 눈여겨 볼 만한 것은 (2)와 (3)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1) 예전의 형식에 새로운 시대의 의식을
문학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 못지 않게 형식의 변화도 중요한 것이지만, 이 두 가지가 항상 나란히 발맞추어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특히 18세기 말에서 1900년대까지의 이른바 개화기는 심각한 역사적 격동기였으므로, 형식의 변화나 세련보다는 거기에 담기는 시대 정신이 더 급박하였다. 이러한 단계의 시는 대개 일단 전통적 형식을 그대로 빌리거나 약간 변형하여 이용하면서 새로운 이념, 경험을 담게 된다. 말하자면 옛 부대에 새 술을 담는 격이다. 그런 부류로서 나타난 것들을 손꼽아 보면 독립 신문의 애국가류, 대한 매일 신보의 우국가류, 의병 가사, 우국 시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독립신문(1896년 창간)의 애국가류이다. 독립신문의 애국가류들은 독자들이 보낸 작품들로서 대개 자주 독립을 찬양하고 나라를 위한 사랑과 새로운 문명의 희망을 노래했다. 형식을 보면 전통적인 가사의 네 마디 가락을 따랐으나 그 길이는 노래할 수 있도록 짧아졌고, 어떤 작품에는 후렴이 있기도 하다.
1905년에 창간되어 우리의 국권이 상실되는 1910년까지 치열한 비판 정신과 항일 의식을 발휘한 대한매일신보에는 우국가 또는 우국경시가(憂國警時歌, 나라를 근심하고 시대를 경계하는 노래)라고 불리는 독특한 가사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독립신문의 애국가들이 대체로 희망적인 분위기를 가졌던 데 비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가사들은 나라의 운명이 나날이 기울어 가던 당시의 실정으로 인하여 매우 침통하고 심각한 색채를 띠었다. 그 속에는 무능, 부패한 조정의 관리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침략자 일본에의 굳센 저항 정신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절실한 시대 문제를 담기 위하여 그 길이는 독립신문의 애국가들보다는 훨씬 길어졌고, 연을 나누어 풍자적 후렴구를 넣는 등 새로운 시도를 보였다.
이 밖에 대한매일신보 등에는 옛시조의 형식을 빌려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들을 더 많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1905년의 을사 강제 조약을 고비로 하여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 운동의 과정에서는 의병들의 신념과 투쟁 경험을 담은 의병 가사가 생겨났다. 그 형식은 예전의 가사와 같았으나 내용은 전혀 새로왔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오라 오라 돌아오라 창의소(倡義所)로 돌아오라
만일 만일 오지 않고 왜적에 종사하여
불행히도 죽게 되면 황천에 돌아가서
무슨 면목 가지고서 선황(先皇) 선조 뵈올소냐
2) 창가와 신체시
이러한 작품들이 나올 무렵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와 시 형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창가는 원래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불리던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문학상으로는 그 가사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창가는 대개 7 5조 등의 새로운 가락에 맞추어 지어진 노래 형태의 작품들은 모두 창가라 하게 되었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로 시작되는 권학가(일명 학도가)도 그 중의 하나이며, 최남선이 지은 장편 창가로는 '경부 철도 노래'와 '세계 일주가'가 유명하다.
그러나, 창가도 전통적인 가락과 조금 다르다 뿐이지 정형적인 리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자유시라고 할 만한 형태의 작품은 최남선이 {소년} 창간호(1908)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로 처음 등장했다. '신체시'라는 이름부터가 종래의 것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를 짓겠다는 그의 의식을 말해 준다. 그 첫 연은 다음과 같다.
처 -------ㄹ썩, 처 -------ㄹ썩, 척, 쏴 ---------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위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 -------ㄹ썩, 처 -------ㄹ썩, 척, 튜르룽, 콱
넓은 세계를 향한 소년의 정열을 북돋우고자 한 이 작품에는 아직 관념적이고 서투른 맛이 있어서 현대시의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최남선, 이광수 등이 여러 편의 신체시를 발표하는 동안 현대시에로의 성숙이 차차 준비되어 갔다.
2. 현대시에로의 진전 : 1910년대
191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 현대시에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앞에서 보았던 사회 비판적 이념과 계몽 의식을 가진 작품들이 사라진 점이고(1910년의 국권 상실 이후로 이러한 것은 떳떳하게 나타날 수 없었으므로), 다른 하나는 신체시에서 실마리가 보였던 자유시의 지향이 상당히 다듬어진 서정시의 형태로 전개된 점이다.
그러한 작품들을 우리는 동경의 한국 유학생 기관지였던 {학지광(學之光)}(1914,5년 무렵)과 한국 최초의 주간 문학 잡지인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1918)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의 흐름을 이어 뚜렷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주요한의 [불노리]({창조}창간호, 1919)이다.(종래에는 [불노리]가 최초의 근대 자유시라고 하여 왔으나, 적어도 시대적 선후 관계만을 따진다면 그것이 최초라고는 할 수 없음이 근간에 새로이 나타난 자료에서 밝혀졌다. 다만 '불노리'가 이 시기의 자유시를 대표할 만한 인상깊은 작품이어서 중요성이 크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의 지배를 따라
고요히 나는 혼자 있노라
야반(夜半)의 울림종(鍾) 소리에
내 가슴은 울리며 반향(反響) 나도다
나의 영(靈)이여!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나의 육(肉)이여!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돌샘, '이별'(학지광 3호, 1914) 중에서〉
이와 비슷하거나 좀더 나은 수준의 자유시는 {태서문예신보}에도 김억, 황석우의 작품으로 여러 편 나타난다. 주요한의 [불노리]는 그러므로 신체시 이후의 공백 상태에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1910년대의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서정적 자유시에로의 진전이 이룩된 결과 가능하였던 것이다.
3. 개인의 번민과 사회 의식 : 1920년대
1920년대에 들어서자 여러 문학 동인지가 창간되고 다수의 시인들이 등장하면서 우리 현대시는 본격적인 성장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1919년에 창간된 동인지 {창조}에 이어 {폐허}(1920년 창간), {장미촌}(1921년 창간), {백조}(1922년 창간) 등이 나왔고, 이와 함께 본격적인 문학 잡지 {조선문단}(1924년 창간)과 종합 잡지 {개벽}(1920년 창간) 등도 간행되어 문학 활동의 터전을 넓혔다.
이러한 시인과 발표 지면이 많았던 만큼 이 시기의 시는 경향도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집단적 현상으로는 ① 우울한 시대 의식과 개인의 절망을 노래한 낭만주의적 경향, ② 사회적 모순에 대한 투쟁을 내세운 경향파-프로문학의 입장, ③ 한동안 소홀히 되었던 전통적 시 형식인 시조을 현대적으로 되살리자는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1) 우울한 낭만주의
{창조}, {폐허}, {장미촌}, {백조} 등 1920년대 초기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오상순, 황석우,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변영로, 김억 등 시인들은 대체로 비슷한 주제와 분위기의 시를 썼다. 그들의 시에는 '어둠, 죽음, 잠, 이별, 눈물, 탄식' 등의 어휘들이 자주 등장하였으며, 동사로는 '쓰러지다, 파묻히다, 떨어지다, 잠기다, 무너지다' 등 파멸과 침체를 뜻하는 말들이 많았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시에 담긴 주제를 간추리면, 현실의 세계는 더럽고 속된 타락의 물결로 가득 차 있으며, 이상적인 삶은 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공간이나 죽음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경향을 낭만주의-특히, 우울하고 절망적인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중 일부 시인들은 상징주의(김억, 황지우)나 퇴폐주의(오상순) 등을 표방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들도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적 태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종화의 '흑방비곡(黑房悲曲)' 등이 이 흐름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 중 일부를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꿈 속에 잠긴 외로운 잠이
현실을 떠난 '빛의 고개'를 넘으려 할 때
빛에 무너진 잠의 님 없는 집은
가엾이 깊이 깊이 무너지도다
그리우는 그림자를 잠은 안고서
꽃피는 꿈길을 달아날 때에
바람에 불붙는 잠의 집 속에
'생(生)의 고통'은 붉게 타도다.
〈박용희, '꿈의 나라로'(백조 창간호, 1922) 중에서〉
이와 같은 우울한 낭만주의는 당시의 지식 청년들이 지녔던 이상과 암담한 현실 상황 사이의 절망적 분열을 반영한 것이다. 그들은 당대의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는 개인적 번민과 절망감을 노래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2) 투쟁적 사회 의식의 대두
1920년대 초기의 시인들이 이처럼 개인의 고통, 절망을 노래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학적 조류가 형성되면서 현실의 모순에 대한 투쟁 정신과 시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주장이 나타났다(1924). 그 선구적 인물은 김기진이었으며, {백조} 동인 시절에 우울한 낭만주의자였던 박영희가 여기에 열렬히 가담하고, 이상화도 시풍이 바뀌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같은 시를 썼다. 김기진 등은 지난날의 문학이 민중의 경험을 노래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의 개인적 고민만을 감상적으로 다룬 점을 비판하였다.
그 이듬해인 1925년에 신경향파(新傾向派)가 조직화된 단체인 카프(KAPF) 즉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이 결성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극도로 강경해졌다. 이에 따라 문학은 당연히 계급 투쟁에 봉사해야 한다는 이념적 요구가 압도하게 되었다. 카프라는 단체는 사회주의적 투쟁 이념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았던 만큼 그 요구 아래서 씌어진 작품들은 시에 필요한 구체적 경험과 갈등을 얻지 못하고 관념적인 흥분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3) 시조 부흥 운동
한편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926년 무렵부터 일부의 문학인들 사이에는 우리의 옛 시 형식 중에서 가장 풍부한 전통 양식인 시조를 현대적으로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지배 아래 점차 쇠퇴하여 가는 전통적 문화를 재인식하고 되살리자는 문화 운동의 일부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카프 계열의 문학인들이 주창한 계급 문학에 대하여 민족 문학의 방향을 내세우고자 한 움직임이었다. 그 중심 인물은 최남선, 이병기, 이은상 등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성공적이라 할 만한 작품들을 얼마간 내기는 하였으나, 시조가 현대시의 일부로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지에 관하여는 논쟁의 여지를 남긴 채 한정된 수의 시인들에게만 받아들여졌다.
4) 김소월과 한용운
위에서 살핀 조류들이 1920년대의 우리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당시의 시적 성과를 말할 수는 없다. 문학사에서는 어떤 사조나 운동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탁월한 성과를 이룬 이들이 흔히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대표적 시인인 김소월과 한용운이 바로 그 본보기이다.
김소월은 1934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1920년대 초에서 중엽까지 가장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민요의 맛과 가락을 살린 시를 즐겨 써서 '민요 시인'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불행한 생애를 살면서 삶의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노래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는 저급한 감상적 작품들도 더러 있지만, 그의 뛰어난 운율 감각, 섬세한 말씨, 날카로운 시적 감수성 등은 현대 서정시의 한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한용운은 [님의 沈默](1926)이라는 시집 한 권으로 1920년대 뿐 아니라 우리 현대시에서 가장 높은 경기를 이루었다. 승려이며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당시의 암담한 시대 상황을 노래하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심오한 종교적 정신과 시대 의식이 결합된 명작을 남겼다.
4. 다양한 시적 조류 : 1930년대∼1945년
1930년대에 와서 우리의 현대시는 더욱 다양한 조류로 분화되었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부적으로 본다면 그 간의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시에 축적된 경험과 관심이 그만큼 다채로운 가지로 뻗어 나갈 만하게 확대된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해 둘 점은 이 다양화의 흐름에서 시의 사회 의식과 현실 비판적 정신을 강조하는 경향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요인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있다. 그들은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등 새로운 전쟁을 해 나가기 위해 한반도 안의 위험 요소를 미리 없애 두려 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적 탄압이 강화되어 일체의 이념적 경향을 띤 움직임이 제약 받으면서 시에도 그 영향이 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의 우리 시단에서는 사회 현상보다는 개인의 문제, 도시 문명의 모습, 자연과 생명의 문제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류들이 확대되어 갔다.
1) 순수시의 경향
그러한 흐름으로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시문학}(1931년 창간)을 중심으로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등이 보인 '순수시'의 지향이다.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이 박용철과 김영랑이다. 박용철은 그 자신이 적지 않은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나 작품보다는 순수시 운동을 뒷받침하는 이론에서 더 중요한 활동을 보였다. 그가 내세운 이론에 어울리는 작품으로서의 뛰어난 성과는 김영랑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영랑은 우리말을 다루는 언어 감각에서 김소월 이후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섬세하고 은은한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북도에 소월, 남도에 영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김소월은 평안 북도, 김영랑은 전라 남도 출신이다.)
이들이 주창한 순수시란 시에서 일체의 이념적, 사회적 관심을 배제하고 오직 섬세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그윽한 서정성을 추구하는 시라는 뜻이었다. 그 결과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만 편중되면서 말을 다듬는 데에 빠졌다는 결함은 있으나, 이들에 의해 우리의 현대시가 시의 언어와 형식에서 좀더 세련된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2) 모더니즘
1930년대 중엽에 들어서면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어 불리는 일련의 실험적 경향들이 나타난다. 모더니즘이란 우리말로 번역하면 '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현대의 도시 문명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과 경험을 종래보다 지적이고도 참신한 방법으로 그려 내고자 하는 경향들을 가리킨다. 시에 있어서 지성 내지 지적인 태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지주의, 이미지 특히 시각적 이미지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이미지즘,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 상태와 혼란된 경험을 파격한 실험적 수업으로 작품화하려 한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이 모두 모더니즘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 이들은 시를 대하는 방법과 태도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서양의 현대시에 보이는 여러 새로운 경향을 흡수하면서 도시적 세계의 경험들을 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중에서 이미지즘을 내세운 시를 쓴 인물로 김기림, 김광균, 장만영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과거의 시가 감정과 음악성에 치우쳤다고 보고, 새로운 시는 지적인 태도와 시각성(즉, 이미지)을 중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의 시 한 편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길은 외줄기 꾸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김광균, '추일서정(秋日抒情)', 1940) 중에서〉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계열의 대표적 인물은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이다. 그는 암담한 식민지 시대의 현실과 개인적 파탄을 겪으며 불행한 생애를 보냈는데, [오감도] 등의 기이한 실험적 작품을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3) 생명파와 자연파
위에 말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들이 성행하는 동안 1930년대 후반 무렵부터 이와는 퍽 다른 경향을 가진 한 무리의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더니스트 시인들이 도시와 현대 문명을 강조하고 주지적, 실험적 경향에 몰두함으로써 만들어 낸 메마른 시 세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은 고뇌로 가득찬 삶의 문제, 사람의 생명과 우주적 근원의 문제, 조화로운 자연의 모습 등을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이 중에서 {시인부락}(1936년 창간)이라는 동인지에 모인 서정주, 함형수 등과 {생리}라는 동인지의 유치환 등을 합쳐서 보통 '생명파'라 하고,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함께 낸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을 '자연파'(또는 '청록파')라고 부른다.
'생명파(인생파)'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도시 문명보다는 생명의 깊은 충동과 삶의 의미, 고독, 고뇌 등의 주제를 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그들은 모더니즘 계열과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 것은 물론, 박용철, 김영랑 등의 순수 서정주의와도 성격을 달리하였다. 그들의 시에서는 대개 삶의 절박한 충동과 갈망의 빛이 떠돌았다. 서정주의 다음과 같은 작품은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여기에 등장하는 문둥이는 꿈틀거리는 삶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울부짖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자연파(청록파)'는 이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삶의 고뇌 자체를 노래하기보다는 고뇌에 가득찬 세계를 벗어나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이상적 삶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물론 그것은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 속에만 나타나는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시집이 된 '청록(靑鹿)' 즉, 푸른 사슴이라는 것부터가 실재하지 않는 상상적 동물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개인적인 특성의 차이를 지적한다면, 조지훈은 불교적인 분위기와 전통적인 것에의 향수가 짙었고, 박목월은 향토적인 자연의 세계를 즐겨 그렸으며, 박두진은 성서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모든 갈등이 해소된 자연의 세계를 희구하였다고 하겠다.
4) 어둠 속의 별들, 이육사 윤동주
이와 같은 우리 시의 흐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일제의 압박은 나날이 억세어져 갔다. 더욱이 일제가 1930년대에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전쟁을 벌인 데 이어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그들의 식민지 통치 정책은 더욱 가혹하여져 갔다. 그들은 우리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였을 뿐 아니라, 강압적 통치를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민족 문화를 말살하며 많은 지식인, 문학인들에게 이에 대한 협력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시인, 작가, 지식인들이 치욕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그들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일제를 위해 학도병으로 출정할 것을 권유했고,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시대에도 양심을 지키며 민족의 굽힐 수 없는 의지를 노래한 시인들이 있었다. 또, 아예 붓을 꺾고 숨어 버린 시인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인물로서 우리는 이육사와 윤동주를 생각하게 된다.
이육사는 시인이자 항일 투사로서 불굴의 의지와 웅장한 기상을 담은 시를 남겼다. '광야', '청포도', '절정' 등과 같은 작품에 넘치는 의연한 기품과 시적 균형은 그가 굳센 투사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육사가 남성적, 대륙적 기풍을 가졌음에 비하여 윤동주는 번민이 많은, 그러면서도 극도로 맑고 섬세한 심성을 가진 젊음이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두운 시대에 처하여서도 자신의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그 역시 이육사와 마찬가지로 해방이 되기 전 일제의 손에 옥사하였지만, 그 시혼은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살아 있다.
5. 해방 이후의 현대시
해방 이후의 우리 시는 당시의 사회 상황이 전체적으로 그러하듯이 여러 갈래의 지향이 뒤얽힌 가운데 매우 착잡한 양상을 보였다. 더욱이 이 시기는 이념의 대립, 정치적 갈등이 치열한 때였기에 시에 있어서도 창작의 성과보다는 우리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당시에 나온 시로서 값진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은 대개 해방 이전의 암흑기에 씌어져서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가 출판된 것들이었다.
그와 같은 혼란이 대략 정리된 이후의 상황은 크게 두 갈래의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1930년대의 순수시, 인생파, 자연파들의 뒤를 이은 비교적 온건한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의 뒤를 이은 실험적, 현대적 경향이다.
인생파, 자연파를 계승한 시적 흐름이 이 시기에 주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 중심이 되었던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김영랑, 신석정 등이 이무렵의 시단에서는 대표적인 중견 시인이 되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는 해방 이전의 작품 세계에 비하여 상당한 개인적 변모를 보인 경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기본적인 성격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시는 1920년대 이래 우리에게 익숙한 가락과 소재를 다루었고, 그러한 시세계에 친근한 독자들에게 잘 정돈된 정서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주제는 대개 삶의 의미, 자연의 질서, 사라져 가는 옛것에의 향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보다 규모가 작기는 했으나 1950년대 시단의 또 한 갈래 흐름을 이룬 것이 모더니즘이다. 50년대의 모더니즘은 시인들의 얼굴이 바뀌어 박인환, 김수영, 김경린, 송욱, 전영경, 김구용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해방과 6 25를 겪어 오는 과정에서 경험한 혼란, 불안, 상실감 등을 주로 노래하였고, 시의 방법에 있어서는 돌연한 이미지의 연결, 지적인 조작, 낯선 어휘와 사물들의 제시 등을 많이 사용하여 한편으로는 새로우면서도 적지 않게 실험적이고 난해한 시들을 썼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젊은 시인들 중 일부는 이러한 경향들을 비판하고 우리의 현실 상황과 민중들의 생활에 충실한 시를 요구하였다. 이 현상은 외부적으로는 독재 정권의 억압을 무너뜨린 4 19의 자극에 의한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50년대 시의 흐름이 그 나름의 전개 과정을 거쳐 반성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주장들 중에는 시의 사회 참여를 핵심적 명제로 제창한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흔히 '참여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이 중시한 점은 시인들이 사회 현실의 문제와 이웃들의 경험, 느낌 등을 절실하게 노래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자기만의 고립된 세계에서 말들을 섬세하게 다듬는 데 골몰하거나, 혹은 난해한 실험적 방법들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시인은 신동엽과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50년대까지는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였으나 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세계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신동엽은 때묻지 않은 힘찬 목소리로 민족의 역사적 상황과 민중들의 생활을 노래하면서 새로운 시 세계를 전개해 나갔다. 다음의 예는 짤막한 대로 이 경향의 시인들이 가진 목소리와 주제를 짐작하게 해 줄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중에서〉
60년대 이후의 우리의 시에는 이 밖에도 여러 경향이 혹은 서로 결합하고 혹은 반발하기도 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자세한 내용은 이 자리에서 무리하게 단순화하여 개관하기보다 독자들 스스로가 시를 읽는 힘을 기르면서 부딪쳐보도록 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시는 그것이 옛날의 것이든 오늘의 것이든 언제나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시인과 살아 있는 독자가 언어를 통해서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