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대 제일의 권신이었던 화신의 이야기, 공왕의 이야기, 그야말로 청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숨소리까지 들려오는 이 화려한 화원으로 이제 들어갑니다. 삼박사일 간의 북경 황실원림 답사의 막바지입니다...
* '일좌공왕부(一座恭王府) 반부청대사(半部淸代史)', 한 채의 왕부 건물에 스며 있는 절반의 청 제국의 역사, 화신과 공친왕 혁흔의 이야기의 끝은 저물어가는 청나라의 어지러운 결말입니다. 우리와는 같은 듯 달랐던 그 끝모습입니다.
* 마지막날의 마지막 코스, 공왕부화원을 이제 들릅니다.
세째날의 황망한 에피소드와 함께, 마지막날 일정으로 급하게 조정되었던 공왕부화원 일정만 남은 가운데, 방선반장에서 화려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홀홀히 나서서 북해 호숫가를 걸으며 마지막 황실원림과 작별합니다. 이제 하나 남은 사가원림, 그것도 가장 잘 남은 대표적인 원림, 공왕부화원을 이제 십찰해(什刹海)로 만나러 갑니다.
비록 원림을 만끽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우려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호기롭게 도전해봅니다. 원림 내에 서양문(西洋门), 어필 “복(福)”자 비석, 실내 대희루(大戏楼)를 특히 공왕부(恭王府) 삼절(三绝)로 꼽기도 한다는데, 과연 다 찾아낼 수 있을까요 ??
여기도 사가원림치고는 상당히 넓어서 작전이 필요했습니다. 일단 집중과 선택을 위해 안 그래도 볼거리가 많았을 주택부분은 불가피하게 건너뛰고, 북쪽 절반의 화원을 집중적으로 보기로 의논하고, 우선 최대한 빨리 입장하여 주택부를 지나쳐, 화원의 경계를 이루는 동서로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담장앞에서 우선 모여 라피오님의 설명을 듣기로 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공왕부 저택을 하나하나 더 꼼꼼히 살펴보는 기회가 있을 줄 알고@@
북경 도처에 명멸했던 여러 친왕부(亲王府)에는 청대(清代) 왕부(王府)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적용되었고, 흔히 대문 다섯칸, 정전 일곱칸, 후전(后殿) 다섯칸, 후침(后寝) 일곱칸, 좌우로는 배전(配殿)을 두는 형식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부저(府邸)에는 후화원(后花园)도 딸려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왕부(王府)가 퇴락하여 옛모습을 찾기 어려운데, 오직 공왕부(恭王府)이 북경에서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가장 뛰어난 청대(清代) 왕부(王府)였고, 저명한 학자였던 후인지(侯仁之) 선생은 이 곳을 가리켜, “一座恭王府,半部清代史”라 일컫기도 했으며, 사합원(四合院) 양식으로는 가장 큰 건축물입니다.
공부삼아 북경 시내 여기저기 보석처럼 남아있는, 아니면 보석자욱처럼 흔적만 있는 왕부 건물들 중 도면을 찾은 20 곳을 살펴봅니다. 축척도 서로 다르고 옛날 도면이기도 해서 비교가 조금 쉽지는 않지만, 배치상 대개 비슷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1. 공왕부(恭王府) - 개방/북경시(北京市) 서성구(西城区) 십찰해(什刹海) 전해(前海) 서가(西街) 17호(17号) - 바로 우리가 들르게 될 왕부입니다.
공왕부(恭王府) 화원(花园)은 공왕부(恭王府) 후면에 조성된 화원(花园)으로 일명 췌금원(萃锦园)으로 불리며, 1777년에 혹은 1775년 전후, 화신(和珅)이 서산(西山)과 황궁에 모두 가까우면서도 수려하고, 물이 풍부한 곳을 골라 비싼 값에 사들여 저명한 저택인 화제(和第)를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하고, 고증에 의하면 명대(明代) 옛 원림을 중수하여 지어졌다고 하는데, 남북으로 150미터, 동서 170미터, 2.8 헥타르의 너른 터에, 총 31 채나 되는 고건축물이 들어서 있고, 이 원림의 새 주인이 된 공친왕(恭亲王)은 백명의 장인을 모아 원림을 더 화려하게 조성하였는데, 강남원림(江南园林)의 기교와 예술, 북방건축(北方建筑)의 품격을 융합한 위에, 서양건축의 요소까지 결합하여, 북경 백좌 왕부(王府) 중 으뜸이라 불렸고, 왕족들의 사가원림들이 즐비했던 십찰해(什刹海) 일대에 현존하는 왕부원림(王府园林) 중에서도 정수로 손꼽혀, '십찰해의 진주(什刹海的明珠)라 불렸습니다. 조설근(曹雪芹)의 소설 '홍루몽(红楼梦)'에 등장하는 대관원(大观园) 저택의 원형으로도 손꼽힐 정도로, 청제국 시절의 전형적인 귀족 저택과 원림입니다.
왕조의 전성기부터 쇠퇴기까지 같이 한 유서깊은 유적지이기도 하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왕부 한 곳을 두고 청 제국 역사의 절반(一座恭王府,半部清代史)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부지의 전반부는 웅장한 중국 전통 양식의 저택이고, 후반부는 수려한 고전원림이며, 전체 6만 평방미터입니다.
화신(和珅)은 특히 '복(福)'과 발음이 같은 박쥐, '편복(蝙蝠)' 글자를 쓰기를 좋아했고, 저택 내에 글자, 조각, 장식 등 9,999 개의 박쥐 상징을 두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심지어 화원의 가장 뒤편 석산 위에는 박쥐가 날개를 편 모양의 복청(福厅)을 지었을 정도입니다.
건축이 정교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안에는 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골동품과 진귀한 고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진당(晋唐)이래의 서화명작이 120종이상 있었을 정도이며, 그 중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유목첩(遊目帖), 왕헌지(王獻之)의 아군첩(鵝群帖)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서진(西晋) 육기(陸機)의 평복첩(平復帖)도 있었다고 합니다.
공왕부에는 삼절(三绝)이라 하여, 화원 안에 서양문(西洋门), 강희(康熙) 어필의 '복(福)' 자비, 그리고 유일한 실내 대희루 건물인 대희루(大戏楼)가 있습니다.
1799년 가경제(嘉庆帝)가 화신(和珅)의 집, 화신부(和珅府)를 몰수하고 화신(和珅)을 사사되었는데, 저택 가장 안쪽에는 창호가 88개, 108개의 방을 가진 2층 건물인 장보루(藏宝楼)가 있어 화신이 진기한 보물을 소장했다고 하고, 그 안에 쌓아둔 백은이 청 조정의 15년치 재정수입에 맞먹는 8억냥에 달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건륭제의 막내아들이자 가경제의 동복 아우, 저택은 사랑했지만 나라는 사랑하지 않았던, 황17자 경희친왕 영린에게 하사되면서 경왕부(庆王府)가 되었고, 1831년 함풍제(咸丰帝) 즉위 후, 30여년이 지나 3대 경군왕인 혁채가 부패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해 가산과 저택이 몰수되었습니다.
함풍제가 즉위한 후 1851년 함풍제의 아우이자 도광제의 황6자인 공친왕(恭亲王) 혁흔(奕䜣)에게 하사되어 저택을 넓혀 공왕부(恭王府)가 되었습니다. 동치제 때에는 혁흔(奕欣)의 아들 재영(载滢)에게 넘어갔다가, 1929년 보인대학(辅仁大学)으로 팔렸지만, 동치 및 광서연간 중수 당시의 풍모를 유지하고 있고, 특히 산수(山水)부분은 건륭연간의 풍격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예 부지에 칭화대학이 들어서버린 돈왕부나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티베트 불교 사원이 된 옹왕부 등 여러 왕부들이 헐리거나 개조당한 것과 달리 공왕부는 오늘날에도 북경에서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왕부로 꼽힙니다.
2. 옹친왕부(雍亲王府) - 개방/북경(北京市) 동성구(东城区) 옹화궁대가(雍和宫大街) 12호(12号)
옹정제(雍正帝)가 즉위 전에 머물렀던 왕부로, 지금은 티벳 불교 사원이 되었고, 옹화궁(雍和宫)으로도 불립니다. 옹정제(雍正帝)가 붕어한 후, 기와를 녹색유리기와에서 황색유리기와로 바꾸었습니다. 건륭제가 이 곳에서 태어나 황제 둘이 난 곳이라 하여(龙潜福地), 자금성의 품격을 갖추었습니다. 1744년 청 제국의 티벳 불교 전체를 관장하는 관사가 되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옹정제의 비밀조직, 혈적자(血滴子)가 여기 머물렀다고도 하고, 또한 그 용도에 맞게 티벳불교 사원으로 바꿨다는 말도 있습니다.
3. 순친왕부(醇亲王府) 남부 - 개방/북경시(北京市) 서성구(西城区) 후해북안44호(后海北沿44号)
순친왕부(醇亲王府)는 두군데가 있는데, 남쪽에는 서성(西城) 태평호(太平湖) 호반에 있었던 남부(南府)이고, 원래 송친왕부(荣亲王府)였다고 하고, 북쪽에는 후해(后海) 북쪽 호반에 있었던 북부(北府)입니다. 강희제 때 대학사(大学士)였던 납란명주(纳兰明珠), 그리고 그의 맏아들이자 저명한 시인이었던 납란성덕(纳兰性德)의 저택이었다가 1872년 순친왕(醇亲王) 혁현(奕譞)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순친왕부(醇亲王府)에서도 두 명의 황제가 나왔는데, 혁현(奕譞)의 아들 광서제(光绪帝)가 남부(南府)에서 태어났고, 또한명은 혁현의 손자 선통제(宣统帝)가 북부(北府)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제국의 마지막 두 황제가 이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친왕부(醇亲王府) 화원(花园)는 송경령(宋庆龄)이 이 곳에서 살았고, 현재는 국가종무국(国家宗教局) 관할입니다.
4. 순친왕부(醇亲王府) 북부 - 개방/북경시(北京市) 서성구(西城区) 포가가43호(鲍家街43号)
북부는 순친왕(醇亲王) 혁현(奕譞)의 가장 이른 시기의 왕부로 나중에 광서제가 태어나, 잠룡저(潜龙邸)라 불렸으며, 예법에 따라 광서제가 즉위하면서, 순친왕이 집을 나와, 이 곳은 후해(后海) 순친왕(醇亲王) 북부(北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중앙음악학원(中央音乐学院)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5. 부군왕부(孚郡王府) - 이전 이친왕부(怡亲王府)
이친왕(怡亲王) 윤상(胤祥)의 이친왕부(怡亲王府)였다가, 1851년 부군왕(孚郡王) 혁성(奕成)의 소유가 되면서 부군왕부(孚郡王府)가 되었습니다. 옹정제가 유일하게 신임했던 형제였던 혁성(奕成)을 화순이친왕(和硕怡亲王)으로 봉하고 왕부를 하사하였습니다. 1730년 이친왕(怡亲王)의 임종에 닥쳐 옹정제가 급히 방문하였으나, 지켜보지 못했고, 크게 슬퍼하며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왕부를 현량사(贤良寺)로 삼았습니다. 6살된 함풍제의 아홉번째 동생 혁혜(奕譓)를 부군왕(孚郡王)으로 봉하였었는데, 1864년 이 저택이 부군왕(孚郡王)에게 하사되면서 부왕부(孚王府)가 되었습니다. 이에, 구야부(九爷府)라 불리기도 합니다.
6. 장친왕부(庄亲王府) - 서사북태평창(西四北太平仓)이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음
청 태조의 동생 서이합제(舒尔哈齐)가 택친왕(泽亲王)으로 봉해졌다가 강희제의 열여섯째 아들 윤록(允禄)이 이어받으면서 장친왕(庄亲王)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았습니다.
7. 순친왕부(淳亲王府) - 개방/동성구(东城区) 동교민항(东交民巷) 정의로서측(正义路西侧) 5호원(5号院)
강희제의 일곱번째 아들 윤우(允佑)의 부택(府宅)이었는데,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순친왕(淳亲王)이 되어 하사되었습니다. 순친왕은 나면서부터 병약하여, 황위쟁탈전에 벗어나 있었고, 권력을 탐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여 매양 옹정제가 칭찬했다고 합니다. 1860년 왕부는 영국대사관이 되었고, 의화단 수만명의 공격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침탈할떄까지 한달간 버티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8. 정친왕부(郑亲王府) - 서성대목엄(西城大木厂), 현재 대목엄(大木仓)
청 태조 동생 서이합제(舒尔哈齐)의 여섯번째 아들 숙왕(叔王) 제이합랑(济尔哈朗)의 부저(府邸)였습니다. 1748년 불경을 이유로 작위를 박탈하여 건륭제의 명으로 제이합랑(济尔哈朗)의 동생인 비양무(费扬武)의 후손 손덕패(孙德沛)에게 하사되었습니다. 이때 원림을 지었는데 세간에 혜원(惠园)이라 불리며 왕부 화원 중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천주교교당이 되었다가, 중국대학(中国大学)에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저택만 남아있습니다.
9. 도패륵부(涛贝勒府) - 서성(西城) 유음가로서(柳阴街路西)
강희제 열다섯번째 아들 윤우(允嵎)가 살았던 유왕부(愉王府)였다가 1902년 순친왕(醇亲王) 혁현(奕譞)의 일곱번째 아들 재도(载涛)가 종군왕(钟郡王) 혁합(奕詥)의 후사를 이어 패륵을 계승하여 유왕부(愉王府)에 머물면서 도패륵부(涛贝勒府)라 불리웠습니다. 북평(北平)의 삼대 절충양식 저택 중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10. 평서왕부(平西王府) - 개방/창평정가장(昌平郑家庄)
북경성 바깥에 있는 유일한 왕부이며, 강희제의 첫 태자였던 윤잉(胤礽) 소유였는데, 공개적으로 태자를 공표한 마지막 태자이기도 했습니다. 윤진(胤禛)이 옹정제로 즉위하면서, 홍석(弘皙)에게 하사되었고, 윤잉(允礽)은 경산(景山)에 유폐되었습니다. 이친왕(理亲王)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이친왕부(理亲王府)이라고도 불렸지만, 나중에 홍석에게 하사되었기 때문에 홍석부(弘皙府)가 되었습니다. 창평(昌平)에 있어 평석부(平皙府)라고도 불렸고, 나중에는 평서부(平西府)가 되었고, 2005년에 중건되었습니다.
11. 순승군왕부(顺承郡王府) - 마선호동(麻线胡同) 옛 터
예친왕(礼亲王) 대선(代善)의 손자이면서 만청시대 철모자왕(铁帽子王)의 한 명이었던 늑극덕혼(勒克德浑)의 부저였다가 장작림(张作霖)의 대수부(大帅府)가 되었습니다. 이후, 전국정협변(全国政协办)이 사용했고, 20세기말에는 조양공원(朝阳公园) 동쪽으로 옮겨지어졌고, 고급사교장으로 바뀌었습니다.
12. 화친왕부(和亲王府) - 동서십조로구(东四十条路口), 철사자호동(铁狮子胡同)
원래 윤당(胤禟)의 구패자부(九贝子府)였고, 공친왕(恭亲王)의 상녕부저(常宁府邸)였습니다. 윤당(胤禟)이 공친왕부(恭亲王府)를 나눠 주패자부(做贝子府), 나머지는 만도호(满都护)의 패륵부(贝勒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옹정제의 다섯번째 아들 홍주(弘昼)에게 하사되어, 지금의 화친왕부(和亲王府)가 되었습니다. 청말에 원래 건물은 허물어지고, 3층누각을 세워 육군부 및 해군부가 들어섰다가, 청나라가 망한 후, 총통부, 국무원, 총리부 등이 들어섰고, 현재는 인민대학(人民大学) 청사연구소(清史研究所)가 있습니다.
13. 신이친왕부(新怡亲王府) - 개방
옹정제가 즉위할 때, 유일하게 반대하지 않았던 열세번째 형제 윤상(胤详)을 화순이친왕(和硕怡亲王)으로 봉하면서, 하사되었습니다. 왕부는 총 세 군데가 있고, 각각 구부(旧府), 신부(新府)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구부는 왕부정(王府井) 수부원(帅府园)에 있었고, 윤상(胤详)이 죽기전까지 머물렀고, 이후 현량사(贤良寺)가 되었습니다. 1755년 빙잔호동(冰盏胡同)으로 옮겨갔고, 이홍장(李鸿章)이 북경에 들어왔을 때 이 곳에 머무르기도 했다고 하네요. 1980년대에 교위소학(校尉小学)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신부(新府)는 조양문(朝阳门) 내대가로북(内大街路北)에 있었는데, 일곱번째 아들 홍효(弘晓)가 머물렀고,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켜 재원(载垣)이 제거되면서, 도광제 일곱번째 아들 혁혜(奕譓), 즉 부군왕(孚郡王)에게 하사되었습니다.
1864년 이친왕(怡亲王)작위를 회복하면서 이미 살고 있었던 녕군왕부(宁郡王府)가 세번째 이친왕부(怡亲王府)가 되었습니다.
14. 극근군왕부(克勤郡王府) - 석부마대가(石驸马大街), 지금의 선무문(宣武门) 안
극근군왕부(克勤郡王府)는 순치연간에 지어져 대선(代善)의 맏아들 악탁(岳托)이 평군왕(平郡王)으로 봉해지며 하사받았습니다. 그의 측실은, 홍루몽(红楼梦)의 저자 조설근(曹雪芹)의 고모부 조인(曹寅)의 장녀였습니다. 현재는 북경제이실험소학(北京第二实验小学)이 들어서있습니다.
15. 예친왕부(睿亲王府) - 북경시(北京市) 동성구(东城区) 외교부가31호(外交部街31号)
예친왕부(睿亲王府)도 두군데였는데, 한 곳은 동화문대가(东华门大街) 남쪽 보도사(普渡寺) 일대에 있었는데 예친왕(睿亲王)이 북경에 들어왔을 때 머문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외교부가(外交部街)에 있는데 건륭제 때 새로이 지은 저택입니다. 예친왕은 즉, 섭정왕 도르곤인데, 청 태조의 열네번째 아들로, 청 태종의 동생이며, 1636년 팔대철모자왕(八大铁帽子王)의 한명이었습니다.
신부(新府)는 500개 이상의 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로에는 자금성을 빼닮은 화려한 저택이, 서로에는 왕부화원, 동로에는 사당과 주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16. 숙친왕부(肃亲王府) - 처음에 동성어하교(东城御河桥) 동쪽에 있다가, 의화단의 난 후, 북신교(北新桥) 선판호동(船板胡同)으로 옮겨감
'공왕부(恭王府)의 방, 예왕부(豫王府)의 담장, 숙왕부(肃王府)의 은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꽤 유명했던 왕부였는데, 청 태종의 맏아들 호격(豪格)의 부저였는데, 왕실 규정을 따르지 않고 지어졌습니다. 원래 도광제 대의 대학사(大学士) 보흥(宝兴)의 저택이었다가 내무부 대총관 송록(荣禄)이 살았고,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이천여명의 피난민이 숙왕부로 도망쳐왔었고, 일본과 영국 대사관 군대가 방어를 위해 왕부건물을 요구하여 사용하였었고, 전쟁중에 폐허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17. 성친왕부(诚亲王府) 혹은 곤패자부(棍贝子府) - 북이환적수담의원(北二环积水潭医院) 자리
원래는 명대 경원(镜园) 옛터였다가, 청이 들어서면서, 강희제 세번째 아들 성친왕(诚亲王) 윤지(允祉)의 신부(新府)가 되었고, 가경제는 이 저택을 딸인 장정고륜공주(庄静固伦公主)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손인 곤포찰포(棍布札布)가 패자(贝子)를 계승하면서 이 저택 또한 곤패자부(棍贝子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1956년 북경(北京) 적수담병원(积水潭医院)으로 이용되었습니다.
18. 나왕부(那王府) - 보초호동(宝钞胡同) 안 국상호동갑2호(国祥胡同甲2号)
몽고 화석친왕(和硕亲王) 나언도왕부(那彦图王府)로 1960년대엔 유치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일부 유흥업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19. 화경공주부(和敬公主府) - 북경시(北京市) 동성구(东城区) 장자충로7호(张自忠路7号)
건륭제 세번째 딸 고륜화경공주(固伦和敬公主)가 혼인하면서 하사되었습니다.
20. 순패륵부(洵贝勒府) - 북경(北京) 서단(西单) 북대가110호(北大街110号)
순현친왕(醇贤亲王) 혁제(奕第)의 일곱번째 아들이자, 섭정왕 재풍(载沣)의 동생인 재순(载洵)이 1902년 단군왕(端郡王) 혁(奕)의 후사를 이으면서 패륵(贝勒)이 되어, 순패륵부(洵贝勒府)가 되었습니다. 선통제를 도와 섭정왕으로 해군대신이 되었으며, 팔국연합군의 침략 때 훼손되었습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우리의 곁에는 일요일 이른 오후를 즐기러, 고단한 주중의 스트레스를 풀러,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러 구름같이 공왕부로 몰려든 인파들이 쉴새없이 지나칩니다... 역시나 중국의 한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공원 한가운데, 그것도 주말이라, 예상은 어느정도 했지만, 여기도 인파가 장난이 아닙니다... 얼마전에 수능(중국의~)이 끝난 터라,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단위로도 나들이 나왔을 그런 주말이었습니다.
화신(和珅,1750-1799)은 청나라 만주(滿洲) 정홍기(正紅旗) 사람으로 뉴호록씨(鈕祜祿氏)고, 자는 치재(致齋)입니다.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일찍 죽어 갖은 고생을 했지만, 머리가 영민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아부를 잘했다고 하고, 10세에 만주족 관리 자제들 학교인 함안궁관학에 합격했으며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가지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 경전에도 통달하여 오성흠(1729~1803), 오성란(?~1810) 등 스승들에게 총애를 받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친위대의 한낱 젊은 교위(校尉)에 불과했던 화신의 입신양명의 시작은 꽤 드라마틱했습니다.
어느날 건륭제가 출궁을 준비하던 중, 출궁할 때 이용하는 황개(黃蓋, 햇빛 등을 가리기 위한 양산의 일종)를 찾지 못해 건륭제의 안색이 좋지 않자, 겁이 난 시종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결국 의장을 책임진 당사관이 불려왔습니다. 그런데, 불려온 젊은 교위의 외모가 출중하고, 언변도 청산유수라 황개 일은 깜박하고는 이름을 물으니, 젊은 교위가 화신이라고 대답하자 건륭제는 이어 다른 일을 물어보았는데 답변이 유창하여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하네요. 이에, 문책받았어야 할 화신은 오히려 친위대를 총관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자기 곁에서 시중을 드는 어전시위(御前侍衛)가 되었습니다.
또 하루는, 건륭제가 순행에 나갔을 때, 어떤 지방의 부고에 비축해 놓은 전곡을 몽땅 털렸다는 상주문을 듣고 진노하여 시위들에게 이런 글을 내렸습니다.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과 보옥이 궤 안에서 망가졌다면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다른 시위들은 어떻게 대응할 지 몰라 우와좌왕했고, 오직 화신만이 황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는,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과 보옥이 망가졌다면 그것들을 관리하는 자는 자신의 과오를 변명할 수 없사옵니다."
라고 하였는데, 즉슨 논어(論語) 계씨(季氏) 제십육 第十六의 해당 내용에 대해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 달아놓은 주소까지 꿰고 답한 것이었습니다.
...
‘且爾言過矣’者, 爾, 汝也.
'且爾言過矣'에서, 爾는 너이다.
汝為季氏輔相, 而歸咎於季氏, 自是汝之言罪過矣.
네가 '季氏'의 재상이 되어 허물을 '季氏'에게 돌리니, 본디 너의 말이 잘못이다.
‘虎兕出於柙 龜玉毀於櫝中 是誰之過與’者, 此又為輔相之人作譬也.
'虎兕出於柙 龜玉毀於櫝中 是誰之過與'에서, 이는 또 재상이 된 자를 위해 비유를 든 것이다.
柙, 檻也. 櫝, 匱也. 虎兕, 皆猛獸, 故設檻以制之.
'柙'은 가두는 우리이고, '櫝'은 궤짝이다. '虎'와 '兕'는 다 맹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만들어 가둔다.
龜玉, 皆大寳, 故設匱以藏之.
거북과 옥은 다 큰 보물이다. 그러므로 궤를 만들어 간직한다.
若虎兕失出於檻, 龜玉損毀於匱中, 是誰之過與.
만약 '虎'와 '兕'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거북과 옥이 궤 속에서 훼손된다면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言是典守者之過也. 以喻主君有闕, 是輔相者之過也.
이는 맡아서 지키는 자의 허물이다. 군주에게 잘못이 있으면 바로 재상인 자의 허물임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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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강자가 전유를 정벌하려고 하자, 공자는 계강자의 재상 염유와 자로가 주군을 잘못 보필한 과오가 있음을 지적한 부분인데, 송대 학자 형병(932~1010)이 여기에 위와 같이 주소를 달았고, 건륭제의 느닷없는 질문에도 화신은 논어 주소의 내용까지 암기하여 말함으로써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1780년에는, 화신은 어명을 받고 운남성으로 가서 운귀총독(云贵总督) 이시요(李侍堯, ?~1788)의 독직 사건과 하급 관리들의 부패를 적발하여 이를 2개월 만에 말끔하게 일소하여 황제에게 더욱 신임을 받았고, 또 지방 관아의 적폐를 청산하는 시책을 올려 이를 건륭제가 칭찬하면서 화신에게,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직책인 호부상서를 제수했습니다. 이때부터 화신은 재부를 움켜쥐기 시작했습니다.
이무렵, 사절로 북경과 열하를 들른 박지원이 목격한 서른한 살의 화신의 모습이 열하일기에 담겨 있습니다.
熱河日記/太學留舘錄
열하일기/태학유관록
十二日戊午。
12일 무오(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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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日極熱。環觀如堵。其中多晶頂。未知何許官員也。
이 날은 몹시 더웠으나, 주위는 구경꾼들로 빽빽했다.
그 중 정수리에 여러 개 수정꼭지를 단 관원(官員)이 있었는데, 누구인지는 몰랐다.
有一少年出門而去。人皆辟易。其少年乍停武。有所言於從者。顧視甚猛。皆肅然慴伏。
한 청년이 문을 나서니, 모두 그를 피했다. 그가 잠시 멈추고 종자(從者)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돌아보는 모습이 몹시 사나워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잠자코 있었다.
有二卒持鞭來辟人。回子坐者。勃然起立。唾二卒面。一拳打倒。少年官流睨而去。
두 군졸이 채찍을 갖고 와서 사람들을 몰아내니, 앉아있던 회족 한 명이 성내며 일어나 두 군졸의 뺨을 때리고 한 주먹으로 때려 눕혔다. 그 청년 관원은 눈을 흘기며 가버렸다.
問之。晶頂者。乃戶部尙書和珅也。
물어보니, 수정꼭지를 단 이는 호부상서(戶部尙書) 화신(和珅)이라 하였다.
眉目明秀。俊峭輕銳。而但少德器。年方三十一云。
눈매가 곱고 준수한 얼굴에 기운이 날카로웠으나, 덕어 없어보였고, 나이는 이제 서른하나라 했다.
珅本起自鑾儀司衛卒。性狡黠。善迎合。五六年間驟貴。統領九門提督。
난의사(鑾儀司) 호위 군졸 출신으로, 성격이 몹시 교활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대여섯 해 만에 갑자기 귀한 자리를 얻어서 구문(九門)을 통령하는 제독이 되었다.
與兵部尙書福隆安。常侍左右。貴振朝廷。
병부 상서(兵部尙書) 복융안(福融安)과 함께 황제의 좌우에 늘 붙어 있으므로, 그 세력이 조정에 떨쳤다.
發李侍堯納海明賄金。籍于敏中家。出阿桂視河。皆和珅有力焉。今歲春夏間事也。
이시요(李侍堯)가 해명(海明)의 뇌물 먹은 것을 적발하여 우민중(于敏中 청 건륭 때의 고관)의 집을 몰수하고 아계(阿桂)를 내친 것이 모두 화신의 공이었고, 모두 올 봄여름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人皆側目而視云。
사람들이 함부로 바로 보지 못했다.
皇帝方以六歲皇女。約婚於珅之幼子。
황제가 갓 여섯 살 된 딸을 화신의 어린 아들과 약혼시켰다.
皇帝春秋高。多躁怒。左右數被鞭撻。
황제가 늙어서 성격이 점차 조급해져 자주 노여워하여 좌우로 매질해대기 일쑤였다.
而最愛此女。故帝方盛怒時。宮人輒抱置幼女於帝前。帝爲霽威怒云。
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그 딸이 있어, 번번이 황제가 크게 성낼 때면 궁인들은 이 어린 딸을 안고 와서 황제 앞에 놓으면, 황제가 노여움을 거두곤 했다 한다.
...
아직까지는 건륭제 치세의 3대 명신이라 꼽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화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도 건륭제로부터 풍신은덕(豐紳殷德, 1775-1810)이라 하사받았습니다. 건륭제는 65세에 얻은 열 번째 공주이자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1775-1823)를 가장 총애했는데, 생모가 비빈이었던 화효공주에게 화석(和碩) 대신 고륜(固倫)이라는, 황제의 정실부인인 황후의 소생에게만 하사하는 칭호를 하사했을 정도였습니다.
화효공주는 건륭제를 닮아 영특했을 뿐만 아니라 무예도 뛰어났는데, 하루는 공주가 남장을 하고 부친과 함께 한 사냥 중, 달리는 사슴을 화살 단 한 발로 명중시킨 모습을 보고, 건륭제는 기뻐하며 "네가 황자였다면 짐은 너를 황태자로 책봉했을 것이다."라고 공주를 칭찬했을 정도입니다. 1777년에 건륭제는 내심 화신의 아들 풍신은덕을 배필로 정했다고 하는데,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을 화신의 집안에 시집보냄으로써 그에 대한 변함없는 총애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1789년 풍신은덕과 고륜화효공주가 열다섯 살 나이에 성대한 혼인 예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고, 이로써 황제와 화신은 사돈이 된 화신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남은 시간을 보고, 인파를 보면, 아무래도 몇 군데 모여서 설명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해보입니다. 자칫하면 중국 타지에서 길을 잃는 불상사, 혹은 비행기를 놏치는 불상사를 겪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의논하여, 결국, 설명은 처음 한번만 하기로 하고, 자유롭게 둘러보고 난 후 시간을 정해 모여 공항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모쪼록 큰 시간낭비없이 최대한 원림을 만끽할 수 있기를...
최대한 요약해서 설명을 마친 우리는 삼삼오오 내키는 걸음걸음, 중국 최고(最高)의 왕부 화원을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늘그막의 건륭제는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하며 간언을 멀리하였고, 이를 간파한 화신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건륭제에게 아부하여, 강희제와 옹정제보다도 더 위대한 황제라고 끊임없이 추켜세웠고, 특히나 건륭제의 생모 숭경황태후(1692~1777)의 국상 때는 자기 어머니를 잃은 듯이 여러 날을 침식을 끊고 통곡하여 건륭제에게 환심을 샀습니다. 여기서 십전노인이라 함은,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십전무공(十全武功)을 쌓은 것을 짐짓 자랑하는, 겸손한 듯 오만한 별칭입니다. 1747년부터 1792년까지 열 번의 정벌을 승리로 이끈 그 전공을 친히 '어제십전기(御制十全记)'에 담고 자신을 그 주인공인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했습니다.
또한, 건륭제가 감행한 여섯 차례 남순은, 명목상으로는 조부인 강희제를 본받은 '관민(觀民)'을 위함이었지만, 실은 강남의 절경을 마음껏 즐기고 호화로운 연회로 황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함이었고, 특히 모후였던 숭경황태후가 살아있을 적에는 그 수준이 더욱 화려하여, 그 막대한 자금과 인력에, 국고를 탕진한다는 비난을 거셌습니다. 이에 화신은 조정 대신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황제의 사치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 줄 방법을 모색한 끝에 1780년 의죄은(議罪銀)이라 하여,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은자를 상납하면 금액에 따라 죄를 경감해 주는 제도를 만들어, 그 경비를 조달할 수 있도록 꼼수를 썼습니다. 젊은 시절의 분별력이라면 경계했을 화신의 수완에 오히려 감탄한 건륭제는 불어나는 내탕금에 대만족했지만, 그 은자를 상납하기 위해 결국 백성의 고혈을 짜내기에 이르렀고, 이 제도는 건륭 후반기에 이르러 온 나라에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795년 건륭 60년, 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윤2월 17일자 기사에 이런 언급이 있었습니다... 화신이 죽기 4년 전의 일입니다...
回還書狀官鄭尙愚進聞見別單曰:
연경에서 돌아온 서장관(書狀官) 정상우(鄭尙愚)가 올린 문견 별단(聞見別單)에 따르면,
"...
商賈之交結官長, 出入衙門, 自是彼中之禁法,
장사꾼들이 관청의 책임자들과 결탁하여 관가를 드나드는 행위는 원래 저쪽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而昨春兩淮間, 汪肇泰、洪廣順往來鹽政司, 多有不法, 爲法官所摘發, 將抵重律。
그런데 지난해 봄에 회서(淮西)와 회남(淮南) 사이에서 왕조태(汪肇泰)와 홍광순(洪廣順)이란 자가 염정사(鹽政司)를 왕래하며 불법을 많이 저지르다가 법관에게 적발되어 장차 중률(重律)을 적용받게 되었는데,
肇泰、廣順願納銀贖罪, 各罰銀十萬兩, 以爲日後之戒。
조태와 광순은 은을 바치고 속죄(贖罪) 받기를 원하자 벌금으로 각각 은 10만 냥씩 부과해 후일의 경계로 삼게 하였습니다.
罰銀納內務府充公用, 大臣卽和珅,
그리고 벌금은 내무부(內務部)에 바치게 해 공적인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그 대신(大臣)이 바로 화신(和珅)이었습니다.
和珅伎倆, 稱以富國强兵, 專尙損下益上, 故富民怨之。
그런데 화신이 재간을 부리며 부국 강병(富國强兵)을 핑계로 오로지 아래에서 거두어들여 위를 살찌우는 것만을 일삼아 부유한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방인의 눈에도 귀에도 이미 훤했던 화신의 어지러운 소문들, 그의 명을 재촉했던 물욕이 결국 그의 끝을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원림을 둘러보는 첫 관문은 서양문입니다. 바로 이문을 지나 공왕부 화원을 답사하기 시작합니다. 헌데 허둥지둥 대다보니 제대로 담은 사진이 없어, 다른 분의 사진을 퍼옵니다...
원림 전체에 복(福) 자가 많이 붙여져 있어서 독특합니다... 복을 부르고 싶었으나, 실상 이 원림과 저택의 주인은 딱히 그럴 수 있는 권세에도 혹은 욕심 때문에, 혹은 시대가 허락하지 않아서 그 끝이 그리 고요하지 못했습니다.... 강남원림을 많이 닮았음에도 조금씩은 가산을 쌓은 모습도 새롭고, 유관(榆关)을 지은 것도 신기합니다... 그 색다름은 일부분 북방원림(北方园林)의 특징으로도 보일 법도 합니다.
공왕부화원(恭王府花园)은 남북축을 기준으로 대칭적인 배치를 하여 전체 원림을 중로(中路), 동로(东路), 서로(西路)로 구획하여 조성되어 있습니다. 남북축으로, 원문(园门), 비래봉(飞来峰), 복지(蝠池), 안선당(安善堂), 방지(方池), 가산(假山), 요월대(邀月台), 녹천소은(绿天小隐), 복청(蝠厅) 등이 이어지는데, 비교하자면, 중로(中路)구역은 건축과 산수가 기본적으로 대칭이지만, 동(东), 서로(西路)는 모두 산체(山体)는 대칭이지만, 건축은 비대칭입니다. 남면, 동면, 서면에 각각 2곳의 산, 중로 뒤쪽에 있는 산 한 곳이 중룡(中龙)으로 상징된다고 하네요.
바로 이 장벽을 지나쳐서 화원 서로에 진입했지만, 아쉽게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어 다른 분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장성을 넘은 만주족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자 하는 이 상징물이 버젓이 중원의 수도, 북경 한가운데 왕부 화원 입구에 놓여 있네요...
이런 점은 강남원림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특징이다 싶습니다...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묘향정이 있습니다.
시간도 그렇고 인파도 그렇고 제대로 사진에 담지 못해, 역시 다른 분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2층8각 정자인 이 묘한 모습의 묘향정(妙香亭)을 지나 드디어 본격적으로 서로를 답사하기 시작합니다.
서로(西路)는 산수(山水)가 주인데, 서로(西路)가 시작되는 부분은 비래봉(飞来峰)이 서쪽으로 이어지면서 시작되고, 남쪽 끝에는 두 산이 이어지는 곳에 50미터 길이의 유관(榆关)이라는 계곡이 만들어져 있는데, 곧 산해관(山海关), 장성(长城)을 상징하여, 즉, 청조(清祖)가 산해관(山海关)을 지나 중원(中原)을 차지한 업적을 기리는 것일테고, 유관(榆关) 앞에는 서로(西路)의 중심인 대방지(大方池)가 있는데, 그 동남쪽으로는 복하(福河)와 이어지며,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어 그 위에 관어대(观鱼台)가 있고, 이는 장자(庄子)의 호상관어(濠上观鱼)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연못 서쪽에 서산(西山)이 있고, 동쪽으로는 회랑이 중로(中路) 적취암(滴翠岩)의 곡랑(曲廊)으로 이어집니다.
서로(西路)는 물이 중심이고, 그 가운데에 호심정(湖心亭)인데, 세칸 건물이고, 자료를 찾아보면 연못 서쪽 가에 능도경(凌倒景), 남쪽가에는 완운거(浣云居), 그리고 북쪽가에는 다섯칸 건물, 화월영롱(花月玲珑)과 해당헌(海棠轩), 그 외에도 우자령(雨者岭), 양운정사(养云精舍), 산신묘(山神庙)도 있었다고 하는데, 너무 서둘러서 둘러봤는지 아쉽게도 담은 사진이 그닥 없네요@@ 연못만 담은 거 같은@@ 다른 분의 사진에서 엿보는 능도경의 모습이 참 이국적인 정취네요...
1798년 가경 3년, 정조실록 48권, 정조 22년 3월 22일자 기사입니다.
...
一, 太上皇容貌氣力, 不甚衰耄, 而但善忘比劇, 昨日之事, 今日輒忘,
1. 태상황의 용모와 기력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다만 최근 들어 건망증이 심해져 어제 일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고
早間所行, 晩或不省, 故侍御左右, 眩於擧行,
아침에 했던 일도 저녁에 혹 잊어버리곤 하여, 좌우에 모시는 신하들이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而和珅之專擅, 甚於前日, 人皆側目, 莫敢誰何云。
이로 인해 화신(和珅)의 전횡 또한 더욱 심해져 사람들이 모두 곁눈질을 할 뿐, 감히 그를 힐문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
화신은 실제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듯, 화신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았고, 자신의 비리나 치부가 적힌 상소문은 건륭제가 못 보도록 빼돌리고 자신을 탄핵하지 못하도록 대신들을 포섭하였고, 나중에는 국가 예산을 횡령하고 뇌물을 모으는 등의 엄청난 횡포를 부렸습니다.
젊은 건륭제는 부패를 엄단했지만, 노년의 건륭제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화신이 부리는 전횡에 대해서는 알아도 모르는 척했는데, 화신이 매년 건륭제한테 막대한 선물을 바쳤으며 건륭제가 원하는 일이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계(阿桂)와 같은 중신(重臣)이 수보(首輔)로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했다고 하니.... 언관 조석보(曹錫寶)가 그의 가노(家奴)를 탄핵하고, 윤장도(尹壯圖)가 각성(各省)의 창고가 텅 비었다며 따졌지만, 모두 역으로 화를 입었습니다.
건륭제는 태자 영염(永琰), 인종(仁宗), 가경제(嘉慶帝)에게 선위하였고, 가경제는 1799년 건륭제가 죽자마자 화신을 건륭제의 장의도감(황제의 국상을 책임지는 직위)으로 두었다가 신하들이 화신을 탄핵하고 비리를 고발하면서 비로소 화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축재와 비리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먼저 파직시킨 뒤, 그를 체포하였고, 대죄(大罪) 20조를 들어 이복누이 고륜화효공주(화신의 며느리)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사(賜死), 즉 자결할 것을 명했으며, 그의 자산을 몰수했습니다. 화신부를 수색하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화신의 재산 목록이 무려 8억 냥이 넘었고, 이는 10년 혹은 20년간의 청나라 조정의 수입액과 맞먹는 액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신의 재물은 이후 조정이 아니라 황실재산, 내탕금으로 귀속되어 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러자 민간에서는 “화신이 거꾸러지니 가경의 배가 부르네.(和珅跌倒,嘉庆吃饱。)”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합니다.
낚시라도 하면 참 좋겠는데, 물고기 대신 사람이라도 낚일 듯한 이 인파@@ 이래저래 너무 빡빡했던 답사일정에 이나마 둘러볼 시간이 주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이제 슬슬 호심정을 둘러보고는 중로의 요월대와 복청을 둘러봐야 합니다. 맘이 자꾸 급해집니다...
이제 공왕부 역사의 두번째 장입니다... 화신의 가산이 국고가 아닌 황실 자산으로 몰수되면서 화신이 살던 북경의 대저택도 황실 자산으로 귀속되었고, 건륭제의 막내아들이자 가경제의 동복 아우인 황17자 경의친왕 영린에게 하사되어 경왕부(庆王府)가 되었습니다. 화신의 아들인 풍신은덕(丰绅殷德)은 건륭제의 딸인 고륜화효(固伦和孝) 공주와 결혼하였던 덕에, 화신(和珅)이 죽고나서도 공왕부(恭王府)에 머물 수 있었으며, 1810년 죽었습니다. 이 때, 건륭제의 열입곱째 아들이었던 경군왕(庆郡王)은, 풍신은덕(丰绅殷德) 부부와 공왕부(恭王府)에 같이 살았으며, 1820년 병으로 죽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나 3대 경군왕인 혁채가 부패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해 가산 몰수 조치가 내려지면서 저택 역시 다시 황실에 귀속되었는데, 함풍제가 즉위한 후 1851년 함풍제의 아우이자 도광제의 황6자인 공친왕 혁흔이 물려받아서 이 저택은 이제 공왕부(恭王府)로 불리게 됩니다.
혁흔(奕䜣, 1833-1898), 공친왕(恭亲王)은 1833년, 도광(道光)제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그와 비슷한 넷째 아들 혁저(奕詝)와 함께 황자들 중 도광제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혁흔과 혁저는 어려서부터 늘 함께 공부하고 무예를 익혔다고 합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광제가 황위 계승자를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 두 아들을 놓고 차마 결정하지 못하고 엄청나게 고민하다, 병이 심각해지자 비로소 두 황자를 불러들여 직접 대면한 다음 황위 계승을 결정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두 황자는 각자 사부에게 어떻게 하면 부친의 호감을 살 수 있는지 상의했고, 혁흔의 사부 탁병염은 황제가 군사에 관한 일을 물을 경우를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반면 혁저의 사부 두수전은 나랏일에 관한 것보다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쳤는데, 이를테면 그는 혁저에게 "치국에 관한 식견이라면 황자께서는 혁흔 황자를 따르지 못합니다. 황상께서 만약 당신의 병이 깊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 아무 말 하시지 말고 그냥 바닥에 엎드려 울기만 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고 하네요.
혁저는 사부가 일러주는 대로 실수 없이 그렇게 행동했고 도광제는 매우 기뻐하며 혁저가 듬직하고 효성스럽다고 생각하여 그를 계승자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혁흔의 정치적 재능은 청나라 통치자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것같고, 이 때문에 많은 역사적 가정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1850년, 혁저가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함풍제입니다. 함풍제는 혁흔을 공친왕에 봉했습니다. 형에게 제위를 내줬지만 "선황께서 물려준 백홍도를 차고 다녀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을 정도로 능력은 높이 평가받아 함풍제 즉위 초부터 군기처와 몽고도통을 겸직하며 종친 관련 업무까지 도맡았던 혁흔이었지만, 사실상 옹정제 시절의 황8자 염친왕 윤사와 같은 신세가 되어, 언제라도 트집잡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불안한 처지였습니다.
그나마 정태비에게 친모 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자라 효성도 지극했던 함풍제 덕에 함풍제의 치세 전반기에는 그럭저럭 지냈지만, 모친상 때문에 경황이 없었던걸 잘 알면서도 함풍제가 어머니 장례 때문에 근무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군기대신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2차 아편전쟁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도 조정에서 톈진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자 영불 연합군은 북경을 신나게 두들겼고, 함풍제가 열하로 몽진하면서, 그간 서양 오랑캐라면서 서양인들을 멸시하던 대신들도 황제를 따라 열하로 도망가버려, 공친왕은 베이징에서 남은 외교 업무를 전담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혁흔은 영시위내대신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내각대학사 숙순 등의 권신들이 무능으로 원명원이 박살나는 것을 넘어 망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참화를 막기 위해 굴욕적이기만 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조정은 공친왕의 북경 잔류파와 열하 몽진을 따라간 열하파로 쪼개지게 되었는데, 공친왕은 스스로 청나라판 토목의 변을 꾀한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용퇴를 청했으나, 황제는 열하에서 정무를 뒷전으로 밀어놓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며 현실도피에 빠졌고, 자연히 조정의 실권은 내각대학사 숙순이 아닌 공친왕의 몫이 되었습니다. 서양과 싸워야 한다는 적극적인 주전파의 입장에 있었던 공친왕은 이 기회에 국가 개혁을 시도하려 예부나 이번원과는 별개로 서양 열강과의 근대적 외교와 외국어, 과학기술 등의 신식 교육을 추진하는 신설기관을 제창했으니, 그것이 바로 총리각국사무아문, 일명 총리아문이었고, 이것이 양무운동(洋务运动)의 시작이었습니다.
저 멀리 시화방(诗画舫)이 보입니다. 이 모습을 뒤로 하고, 이제 중로를 둘러볼 시간입니다... 시간도 그렇게 1/3은 흘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중로(中路)는 명실공히, 화원(花园)의 주 영역으로, 화원(花园)의 정문과 전면에 있는 왕부(王府)와 횡으로 나뉘어 있고, 화원 중심축 최남단에는 서양 건축 양식의 한백옥석(汉白玉石)으로 만든 아치형 문, 서양문에서 시작하여, 문을 들어서면 독락봉(独乐峰)이 서 있는데, 높이 5미터의 태호석(太湖石)이며, 독락봉(独乐峰)을 지나가면, 해도학교(海渡鹤桥)를 건너 대청(大厅)인 안선당(安善堂)이 나타납니다. 당시 공친왕(恭亲王)이 이 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안선당(安善堂)을 지나가면 원림의 주산인 적취암(滴翠岩)이 나타납니다. 산 위에는 요월대(邀月台)라고 부르는 평지가 나타나고, '녹천소은(绿天小隐)'이라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만...
허둥지둥 둘러보는 걸음에 카메라가 미처 못 따라갔네요... @@ 다른 분의 사진에 담긴 독락봉과 적취암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대신하고, 그렇게 바쁜 걸음으로 오직 회랑을 오르락 내리락 훑기 바쁩니다...
1861년 8월 22일, 함풍제가 열하(熱河, 지금의 하북성 승덕)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함풍제는 죽기에 앞서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숙순(肅順) 등 여덟 명의 대신에게 찬양정무대신이 되어 어린 황자 재순(載淳)을 보좌하며 조정을 총괄하도록 하고, 동도당과 어상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각각 동태후와 동치제에게 주어, 실질적인 정무는 보정대신들이 돌보되 최종 결정은 황제와 태후가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숙순 측은 "대청제국의 천하를 어찌 여자가 다스릴 수 있는가?"하였고, 서태후는 "역대 왕조의 전례가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하면서 서로 대립했으며, 그 사이에서 혁흔은 일약 북경 정변의 열쇠를 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혁흔은 문상을 구실로 북경에서 열하로 왔습니다. 숙순 등은 예감이 좋지 않아 혁흔과 자안·자희 두 태후가 만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혁흔은 "황제의 영령 앞에서 곡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는데, 명분상으로도 이치에 맞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열하로 달려온 진짜 의도를 감추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숙순 일파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어, 혁흔과 함께 영전으로 가서 두 태후를 만났는데, 만나는 도중에도 숙순 일파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혁흔과 태후들을 감시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두 태후는 태감을 시켜 함풍제에게 드리는 양고기 죽을 한 사발 혁흔에게 갖다 주라는 명령을 내렸고, 태감은 작은 목소리로 혁흔에게 이 음식은 극식(克食, 제사 음식)이니 조심스럽게 받들어야 한다고 속삭였습니다. 혁흔은 틀림없이 이 죽에 밀모와 관련된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옆방에서 이 죽을 다 먹었으나 처음에는 별다른 것을 찾지 못했고, 하지만 태감이 아무런 까닭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고 판단한 혁흔은 다시 그릇을 살폈는데, 그릇 바닥에 종이가 붙어 있었고, 혁흔은 그것을 소매에 감추었는데, 숙순 등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혁흔은 그 편지를 꺼내 보았는데, 예상대로 두 태후가 보낸 밀지였고, 그 내용은 숙순 일파가 권세만 믿고 교만방자하게 신하된 마음을 저버렸으니 북경으로 돌아오는 즉시 잡아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면 혁흔을 보정왕에 임명하고 두 태후가 수렴청정에 임할 것이라는 내용도 함께 있었습니다.
북경으로 돌아온 혁흔은 겉으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밑으로는 적극적으로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어사 동원순이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건의하는 글과 함께 8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 때문에, 혁흔이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는, 조정 안팎이 뒤숭숭했고, 동원순이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대신들은 혁흔의 태도를 지켜봤습니다. 혁흔과 아주 친한 대신들은 혁흔에게 두 태후의 의도를 조정 신하들에게 공개하라고 건의했지만, 혁흔은 아주 두려운 표정으로, "안 됩니다! 안 됩니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즉각 숙순을 비롯한 8대신에게 전해졌고, 이들은 대세가 이미 자신들 쪽으로 기울었다고 믿었는데, 바로 이때, 혁흔은 비밀리에 두 태후의 밀지를 보군통령 인수와 신기영도통 덕목초극기포 등에게 알리고, 또 서태후에게 진작에 투항한 승보에게 편지를 써서 군대를 이끌고 태후의 어가를 맞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 살이었습니다.
재원과 단화 등은 두 태후와 어린 재순을 수행하여 먼저 환궁했고, 숙순 등 보정대신들은 다른 길로 함풍제의 영구를 뒤따라 호송했는데, 11월 1일, 태후가 북경에 도착해 혁흔을 만난 바로 다음날 정변이 터졌습니다. 8대신은 체포되었고, 3일 혁흔은 의정왕에 봉해졌습니다. 8일, 8대신 중 숙순·재원·단화 세 사람이 처형되었고, 이어 두 명의 태후는 수렴청정에 들어갔습니다.
원림 여기저기에는 '福'자나 '蝠'자가 참 많이 있습니다. 건륭제가 말년에 그렇게 좋아 여기저기 써주기도 했다는 그 글자처럼 만세를 이을 것 같았던 청 제국은 그가 죽고, 60년을 더 못가고 북경 일대의 황실원림을 제물로 돌이키지 못할 망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혁흔은, 제국주의 국제관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신중하지 않으면, 열강들에 의해 찢기고 심지어는 전쟁으로 멸망할 수 있는 위태로운 청 제국에게는 평화를 천명할 수 밖에 없다고 봤고, 제2차 아편전쟁에 대해서도 역사를 거울로 삼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급한 것과 덜 급한 것을 따져서 무력 충돌을 피했어야 했다고 여겼으며, 외교수단을 통해 가능한 전쟁을 피하는 쪽이 현명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혁흔은 만약을 위한, 전쟁을 위한 준비를 대단히 중시했습니다. 평화를 위한 협정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서방 열강의 침략적 본성에 대해 혁흔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1868년 혁흔은 각 성의 책임자들에게 일시적 평화로 영구적인 안정을 이룰 수 없다며, 평화로울 때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근 30년을 이어진 양무운동의 주창자이자 주동자로서, 혁흔은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이례적인 탁월한 식견을 보이며 맹활약했습니다. 군사 방면에서는 '서양인들의 장점을 모조리 다 배우는' 방안을 찾아야 하며, 또 서양인들의 침략 의도를 막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서양의 선진 생산기술과 군사장비가 다름 아닌 선진 과학문화의 기초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실, 그들의 기술이 모두 천문이나 수학 등 기초과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꾸준하게 공부하지 않고 겉만 배워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고, 외국어 교육을 위한 동문관(同文館)을 창설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중국 근대교육의 출발이었고, 이어서 유학생들을 계속 외국으로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중국의 운이었습니다.
서태후는 양무에 힘쓰는 혁흔과 그 수하 총리아문 관리들을 매국노로 매도하는 오제격리 왜인(烏齊格里 倭仁)을 동치제의 사부로 맡기며 혁흔을 견제하기에 골몰했습니다. 공친왕은 1865년에 서태후에게 간언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의정왕의 지위를 박탈당해 실각하였다가, 다시 복귀하였고, 1873년에는 동치제가 원명원의 복원 공사를 발안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1874년 동치제에 의해 작위가 강등당할 뻔했지만, 서태후의 주선으로 철회되기도 하였습니다. 1875년 동치제가 승하하고 조카 광서제가 즉위할 때도 여전히 정권에 머무르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고, 1884년에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공친왕은 군기대신·총리아문대신에서 파면되었고, 후임으로는 각각 순친왕과 사촌동생인 경친왕이 되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총리아문과 총리해군의 명을 받아 외교와 군무를 통괄하고 다시 군기처대신이 되어 전쟁을 치르고 전후의 정국(政國)을 만회해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맞이했고, 4년 후인 1898년 65세의 나이로 북경 근처 계대사(戒台寺)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그렇게 동치중흥(東治中興)도 더는 이끌어갈 사람도 동력도 사라졌습니다...
일본에게 패전한 후 더욱 급진적인 변법자강운동에 기울어진 광서제에게 간언하여 옹동화 등의 급진개혁파를 견제하는 한편, 보수파를 등에 업은 서태후에게 퇴위 압박으로 맞서던 광서제의 대립을 중재하면서 서태후를 진정시키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몇 년 못가 혁흔이 죽음으로 결국 양파의 대립은 표면화하면서, 무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청 제국을 향한 조종이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관건을 오직 한사람의 행적만으로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면서 무모한 공부겠지만, 분명 혁흔의 죽음은 그럼에도 많은 이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을 만큼, 화려했던 마지막 불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유명한 복(福)자 비석을 부리나케 찾아봅니다. 적취암(滴翠岩) 아래 비운동(秘云洞)이라 명명된 동굴, 그 안을 들어가보면 강희제 친필 '복(福)' 자 비석이 있다는 라피오님의 전언이 전파되면서 비로소 가산 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원체 유명한 명소였던지, 그 안에 들어가보려는 중국인들이 줄을 서있네요@@ 허걱... 그냥 지나치기엔 다시 올 걸음도 예상안되고, 조금 기다리면 될 것도 같고 하여, 우리는 삼삼오오 내려가서는 줄을 서서 동굴 속을 들어가봅니다...
젊은 시절 강희제가 중병에 걸린 할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목욕재계 후 복(福)자를 친필로 쓰고, 그 앞에서 3일 밤낮으로 기도하자 할머니가 쾌차하여 그 후로도 십수년을 더 장수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 훗날 건륭제가 강희제의 친필 福자가 새겨진 비석을 화신에게 하사하며 화신의 인생이 활짝 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비석에 전해집니다... 중국인들에게 그렇게 인기높은 건륭제가 하사한 비석이니 오죽할까 싶고, 북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우리들에게야, 하버드 동상 구두를 만져대는 그 모습과 별단 다르지는 않겠다 싶었네요^^;;
이제 남은 구역은 동로인데, 아직 1/3이 남았네요@@ 시간은 그보다는 좀 덜 남았고, 맘이 급해져서 그런지, 더 제대로 찍힌 사진이 없네요@@ 동로(东路)의 중심 건물은 뭐니뭐니 해도 실내에 지어진 대희루(大戏楼) 중 가장 큰 대희루(大戏楼)인데, 685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남쪽으로 1미터 가량 높이의 희대(戏台), 그리고 이신소(怡神所)가 있는 그런 건물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원래 자세히 둘러볼라치면, 수화문(垂花门)부터 들어가야 했겠는데, 어찌하다보니, 수화문에서 나오면서 동로 답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꼼꼼하게 못 보긴 했지만, 곡경통유(曲径通幽), 음향취월(吟香醉月), 종소포(踨蔬圃), 유회정(流怀亭), 수청월(垂青樾), 초향경(樵香经) 등이 있었음을 기록해둡니다.... 복청(蝠厅)도 있었다는데, 사진에도 남아 있지 않고, 아쉽긴 하네요...
이렇게 생겼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더 느리게 돌아볼 수도 있었는데, 싶기도 하고, 공부삼아 다른 분의 사진의 모습을 남깁니다.
청이 망하고, 공왕부의 운명은 급전직하합니다. 마구잡이로 처분된 진귀한 서화골동품만 해도 2,000 건에 달하고, 공왕부마저도 팔려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공왕부의 문화재가 각 경매장에 나타나곤 한다고 하네요...
80년전 혁흔이 들어갔던 공왕부의 마지막 주인 부위(溥偉)는 할아버지를 닮아 청왕조의 복벽을 꿈꿨습니다. 건물과 화원, 그리고 수많은 골동품과 서화를 팔아치우면서까지 제국의 부활을 염원했지만, 본인은 1912년 청도(靑島)로 피난간 후 돌아오질 못했고, 1936년 10월 10일 56세의 마지막 공친왕 부위(溥偉)는 장춘(長春)의 신화여사(新華旅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혁흔의 장남 재징은 1885년 자식없이 병사하자, 서태후는 의지(懿旨)를 내려, 차남 재형의 장남 부위(차남은 부유)를 재징의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합니다. 1898년 혁흔이 사망한 후, 부위가 공친왕를 승계하였습니다. 1912년, 부의가 청제퇴위조서(淸帝退位詔書)를 반포하여, 청왕조는 망했고, 부위, 양필(良弼)등은 종사당(宗社黨)을 만들어 대청의 황제제도로 복귀할 것을 기도합니다. 부위는 청도로 도망쳐서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 일본낭인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와 함께 복벽을 도모하였고, 그 경비를 모으기 위해, 이 마지막 공친왕은 공왕부의 문화재, 저택과 토지를 팔기 시작합니다.
공친왕부 문화재를 가장 많이 사들였던 일본의 골동품상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는 처음 공왕부를 들러 골동품을 보고는, "저택은 상당히 컸다. 예를 들어, 창고에도 여의를 넣어두는 여의창고, 서화를 넣어두는 서화창고, 고동기를 넣어두는 동기창고, 이렇게 수십동이 있었다. 공왕부의 대관가(大管家)는 콩이나 쌀을 집는 것처럼 두 손으로 주보를 한무더기 쥐고서 나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 주겠는가?'"
1913년 2월 27일, 28일 그리고 3월 1일의 3일동안 야마나카상회는 뉴욕에서 '공왕부소장품경매회'를 개최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모두 536건이 경매되었고, 그중 옥기가 250여건, 청동기가 110여건, 자기가 130여건, 27.6만여달러 어치에 달했습니다. 당시 경매거래금액으로 최고기록이었습니다. 같은 해, 야마나카는 런던에서도 공왕부 문물 210건을 경매하였고, 총 두번에 걸쳐 천 건에 달했다는 말도 있고, 이리저리 추산해보면 공왕부에서 매수한 문물골동품은 도합 2000 여건가량 되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또다른 기록으로는, 부위가 경비조달을 위해, 1913년 5월, 일본낭인 무네카타 고타로(宗方小太郞)를 시켜 북경의 요코하마 쇼킨은행(橫濱正金銀行)과 협상하여, 베이징 왕부토지를 저당잡히고 50만냥을 대출받았는데, 그 와중에 오간 서신에, "공친왕이 이전에 서화골동소장품을 팔아서 얻은 금액이 약 40만냥이다"이란 언급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점점 돈이 모자랐던 부위는, 은행 대출이 거절당하면서 북경 천주교회 서십교교당에서 돈을 빌렸는데, 고리대로 인해 상환이 어려웠던 부위는 처음 빌렸던 35,000원이 20여만원까지 불어나자 감당하지 못했고, 3년여간의 재판으로 더욱더 늘어난 28만원의 부채로 인해 결국, 왕부의 앞부분 저택을 저당잡혔고, 후원을 동생들이 쓰도록 했고, 1932년 보인대학(輔仁大學)은 채무를 대신 상환하는 댓가로 공왕부 저택의 재산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후, 두 동생 부유, 부혜는 살 집을 매입하기 위해 15만원에 그 나머지 화원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금마저도 몇년을 허비하다가 다 날리고 결국, 공왕부는 1932년에 이르면 저택과 화원 모두 매각되었습니다.
보인대학(辅仁大学)에 매각된 이후, 공왕부는 교사 및 숙사로 이용되었다가, 북경예술사범학원(北京艺术师范学院) 교사 및 중국예술연구원(中国艺术研究院)에서 사용하기도 했고, 1982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 1988년 화원(花园) 구역이 먼저 일반에 개방되었고, 2009년 부저(府邸) 구역이 마저 개방되었습니다.
모이면서 시간을 체크하는 실수로 약간의 소동이 있었고, 조금은 조바심을 내긴 했지만, 그래도 전원 무사히 거의 약속시간, 약속장소에 모여 버스로 이동합니다....
이제 삼박사일 답사를 마무리하고 북경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만 남았네요... 북경의 혼잡한 교통을 감안하면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서둘렀고, 노련한 버스기사와 가이드분 덕분에 무사히 북경 공항에 도착합니다. 원래는 세째날 일정이었던 공왕부화원을 마지막날 소화하느라 간당간당하게 마무리되었던 터라, 초반에는 조마조마했는데, 체증이 예상보다 덜 하기도 했고, 기사분의 노련한 운전솜씨 덕에 아무렇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네요.. 감사~~!!
다사다난했던 삼박사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공항 데스크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홀가분하네요... 아쉬웠던 점들, 다행이었던 점들, 이런 저런 얘기도 하면서, 다음에는 어떤 답사가 좋을까 하는 얘기도 하다보니, 어느덧 작별의 시간입니다.
가이드분과도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그렇게 두시간을 날아온 인천공항에서도 모두들 아쉬운 인사를 하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만, 그 뒤로 3년을 내리 이렇게 강제로 두문불출하게 될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다시 늦게나마 후기를 지각 갈무리하고 또 기약없이 다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두들 감사했습니다 !!! See you aga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