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은 도쿄도 세타가야구(世田谷区) 가미노게(上野毛)에 있는 미술관으로 1960년 개관하였고, 일본 및 동양 고미술품을 중심으로 국보 5건, 중요문화제 50건을 포함한 5,000 여 건의 소장품을 자랑한다.
국보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絵巻)를 소장한 곳으로 이름높은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은 도큐(東急, 도쿄급행전철, 東京急行電鉄) 창업주인 고토 게이타(五島慶太, 1882-1959)의 미술 컬렉션을 보존 및 전시하기 위해, 작고한 다음해인 1960년에 도큐(東急)를 비롯, 케이한 급행전철(京浜急行電鉄), 오다큐 전철(小田急電鉄), 케이오전철(京王電鉄, 당시는 케이오 제도전철, 京王帝都電鉄)에서 출자하여 개관하였다.
자칭, 고쿄우로우(古経楼)라 불렀던 고토(五島)의 컬렉션은, 나라시대 고사경(古写経)을 수집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경전, 선승묵적(禅僧墨蹟) 등의 서적류, 이후 회화, 도자기류 명품도 다수 입수하였다. 호쾌한 경영 스타일로 '강도 세이타(強盗慶太)'로도 유명했던 고토(五島)는 고미술품 수집에도 집념을 불태웠는데, 명품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絵巻), 무라사키 시키부 닛키 에마키(紫式部日記絵巻)는 전쟁 전 대 수집가였던 마스다 타카시(益田孝, 1848-1938)의 소장품으로, 전후 기업가이자 도쿄 코카콜라보틀링의 창업자였던 다카나시 니사부로(高梨仁三郎, 1904-1993)의 소장품이 되었다가, 미술관 공개를 결심했던 고토(五島)가 컬렉션을 보완하기 위해 작고 직전 입수하게 된 문화재이다.
미술관의 부지는, 고토(五島) 저택 부지의 일부가 제공되었고, 정원을 포함 6,000평에 달한다. 건물은 요시다 이소야(吉田五十八, 1897-1974)의 설계로, 전통양식인 신덴즈쿠리(寝殿造)의 요소를 현대건축에 도입한 기법으로 지어졌다. 특히 건물의 색깔을 고심했는데, 완성하는데 60일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1961년 제2회 건축업협회상을 수상했다. 전시관의 앞뒤로는 무사시노(武蔵野)의 모습을 간직한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정원에는 대일여래(大日如来), 육지장(六地蔵) 등, 이즈(伊豆), 나가노(長野) 지역 철도사업 당시 인수한 석불이 배치되어 있고, 산책로에는 메이지(明治) 시대에 지어진 다실 고쿄우로우(古経楼) , 고토(五島) 옛 부재를 활용하여 지은 류우레이세키(立礼席), 후지미테이(冨士見亭) 등이 있다. 또한, 대만총독(台湾総督) 및 체신대신(逓信大臣) 등을 역임했던 덴 겐지로(田健治郎, 1855-1930)의 고택이 남아 있는데, 정원 내의 다실은 그 일부이다. 전시실은 2개인데, 상설전시는 없이, 수시로 기획전이 열리고 있으며, 중요문화재인 목조 애염명왕좌상(木造愛染明王坐像)은 상설 전시되고 있다.
또한, 이 곳에는 고토(五島)가 1949년에 창설한 다이토큐 기념문고(大東急記念文庫)가 자리잡고 있는데, 전시인 1942-45년에 걸쳐, 도쿄 서남부의 사철을 광역 통합하여 성립되었던 당시의 도쿄 급행전철(東京急行電鉄, 통칭 다이도큐, 大東急)이 전후, 현재와 같이 도큐(東急), 케이오(京王), 오다큐(小田急), 케이큐(京急), 그리고 도큐백화점(東急百貨店)으로 분리 재편성되었던 것을 기념하여, 다섯 회사의 공동출자로 성립되었다.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의 개관에 맞춰 1960년 가미메구로(上目黒)에서 이전했다. 미술관 착공 이후 갑자기 이전이 결정되면서 건물 좌측 설계를 급히 변경하여 서고와 연구실이 추가되었다. 장서의 주축은, 고토(五島)의 장남 고토 노보루(五島昇, 1916-1989)의 장인 쿠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1869-1965)가 와다 츠나시로(和田維四郎, 1856-1920)의 권유로 수집하였던 쿠하라문고(久原文庫)로, 고토(五島) 측에서는 이를 일괄 매입하여, 다시 여기에 이노우에 미치야스(井上通泰, 1867-1941)의 장서를 추가한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의 고전적 약 25,000 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 3건, 중요문화재 32건이 포함되어 있다. 문고 소장품은 일반공개되지 않으나, 그 중 회화, 서적 등은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 전시에 수시로 소개되고 있다.
개관 50주년에 맞춰 2010-2012년에 걸쳐 휴관 후, 다이도큐문고(大東急記念文庫)와 함께 대대적으로 증개축을 하였으며, 기존 건물 외관을 최대한 남기면서 내진 보강공사를 진행하였으며, 동 개축은 2013년도 굿디자인상을 수상하였다.
2024년 5월 11일-6월 16일에 걸쳐 근대 일본화전(近代の日本画展)이 열리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대 일본화 소장품 중에서, 화조화(花鳥画)를 중심으로 하시모토 가호우(橋本雅邦, 1835-1908), 가와바타 교쿠쇼우(川端玉章, 1842-1913), 요코야마 다이칸(横山大観, 1868-1958),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 1873-1957), 야스다 유키히코(安田靫彦, 1884-1978), 마에다 세이손(前田青邨, 1885-1977), 가와바타 류우시(川端龍子, 1885-1966), 가나시마 케이카(金島桂華, 1892-1974) 등, 메이지(明治)에서 쇼와(昭和)에 걸쳐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 40점을 선정 전시한다. 다이도큐 기념문고(大東急記念文庫) 창립 75주년 기념전시로 일본의 고대-중세의 역사자료도 동시 전시예정이다.
국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絵巻)
헤이안(平安) 시대인 11세기, 관백(関白)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의 딸인 츄우구우 아키코(中宮彰子, 988-1074)를 섬겼던 뇨보(女房), 즉 시종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973-1014?)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쓰면서,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생애를 주축으로 헤이안 시대의 귀족 세계를 묘사했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絵巻)는, 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그림으로 묘사한 에마키(絵巻)로, 모노가타리(物語)가 성립되었던 그 150년 후인 12세기에 생겨났으며, 현존하는 일본의 에마키(絵巻)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54첩의 각 첩에서 1-3장면을 골라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대응하는 모노가타리(物語) 본문을 필사한 고토바가키(詞書)를 각 그림 앞에 붙여, 고토바가키(詞書)와 그림(絵)을 교대로 이어붙이는 형식이었으며, 원래는 10권 분량의 에마키(絵巻)였다고 추정하지만, 현재는 54첩 전체의 1/4 정도, 권수로는 4권 분량이 현재 남아 있다.
에도시대 초기, 3권이 오와리 도쿠가와(尾張徳川) 가문에, 1권이 아와 하치스카(阿波蜂須賀) 가문에 전래되어 왔던 것이 확인되고 있으나, 그 유래는 불분명하다. 도쿠가와 가장본(徳川家本)은 현재 아이치 도쿠가와 미술관(愛知・徳川美術館)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하치스카 가장본(蜂須賀家本)은 에도시대 말기에 민간에 유출되어, 현재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이 소장하고 있다. (스즈무시(鈴虫) 2장면, 유기리(夕霧), 미노리(御法)의 3첩 분량). 두 소장본 모두, 1932년, 보존을 위해 고토바가키(詞書)와 그림(絵)을 분리하여 두루마리 형태에서 오동나무 재질의 액자로 표구하였다. 고토바가키(詞書), 그림(絵) 모두 작자불명이며, 고토바가키(詞書)의 필체에 따라 5 부분으로 나눠 제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림(絵)의 작자를 헤이안 시대의 뛰어난 궁정화가 후지와라노 타카요시(藤原隆能, ?-1126?74?)로 보는 전승에 근거하여 본 에마키(絵巻)를 타카요시 겐지(隆能源氏)라고도 부른다.
스즈무시 일(鈴虫一) :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제 38첩 스즈무시(鈴虫)의 첫번째 장면으로, 히카루 겐지(光源氏)는, 치임대신(致任大臣)의 아들, 가시와기(柏木)와의 불의(不義)에 고민하여 출가한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처이자 스자쿠인(朱雀院)의 딸, 온나산노미야(女三宮)가 살고 있는 로쿠죠인(六条院) 일부를 자연의 들처럼 만들어 방울벌레를 풀어놓는다. 운치가 더해진 정원을 바라보는 시녀들. 창살 울타리 옆 선반에, 불공을 위해 꽃과 물을 올리는 스님.
스즈무시 이(鈴虫二) :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제 38첩 스즈무시(鈴虫)의 두번째 장면으로, 히카루 겐지(光源氏)와 그의 아들 유기리(夕霧), 이복동생인 하타루미야(螢宮)가 머무는 곳에, 레이제이인(冷泉院)으로부터 달맞이 연회를 초대받아, 그들은 급히 들른다. 젊은 날 겐지(源氏)와 후지츠보(藤壺) 사이에 뜻하지 않게 태어난 출생의 비밀도 있어, 젊은 나이에 왕위에서 물러난 레이제이인(冷泉院). 기둥에 기대어 마주앉은 겐지(源氏). 피리와 생황을 연주하는 악공은 옷자락은 난간에 걸쳐놓았다.
유기리(夕霧) :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제 39첩 유기리(夕霧). 가을밤,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아들, 유기리(夕霧)가 故 가시와기(柏木)의 처, 오치바노미야(落葉宮)의 어머니, 이치죠노미야스도코로(一条御息所)로부터의 편지를 읽으려고 하고 있다. 거기에, 그 편지를 오치바노미야(落葉宮)에서 유기리(夕霧)에게 써보낸 연서(恋書)로 오해한 유기리(夕霧)의 처, 쿠모이노카리(雲居雁)가, 질투한 나머지, 등 뒤에서 몰래 다가와 빼앗으려 한다. 장지문 뒤에서 귀기울이며 서있는 2명의 시녀들. (모노가타리(物語) 본문에는 이 모습에 대한 기술은 없다.)
미노리(御法) :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제40첩 미노리(御法).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총애하는 아내인 무라사키노우에(紫上)가 중병에 걸려, 겐지(源氏), 그와 아카시노우에(明石上)의 딸인 아카시노츄우구우(明石中宮)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려 한다. 생명의 덧없음을, 정원이 피는 싸리나무(萩) 꽃에 맺힌 이슬에 비유하며, 세 사람은 와카(和歌)를 읊으며 주고 받는다. 이윽고, 무라사키노우에(紫上)의 병세는 갑자기 나빠져, 겐지(源氏)에게 작별을 고하며 옆으로 누운지 얼마 되지 않아, 아카시노츄우구우(明石中宮)의 손을 잡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국보 무라사키 시키부 닛키 에마키(紫式部日記絵巻)
무라사키 시키부 닛키 에마키(紫式部日記絵巻)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헤이안시대인, 1008년 7월-1010년 1월까지의 1년반 가량의 기간에 남긴 일기이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의 딸이자 이치죠 일왕(一条天皇, 980-1011)의 중궁(中宮)이었던 아키코(彰子, 988-1074)를 섬겼던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아키코(彰子)의 두번의 왕자 출산, 그 축하연의 화려한 모습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자였던 미치나가(道長)를 둘러싼 다양한 헤이안 귀족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일기문학의 걸작이다. 무라사키 시키부 닛키 에마키(紫式部日記絵巻)는, 이를 약 250년 후인 가마쿠라(鎌倉) 시대 전기에 에마키(絵巻)로 만들었다. 원래는 전체 10권 정도의 두루마리로 추정되고 있으며, 에도시대 이전의 전래과정은 불분명하며, 현재는 그 1/4에 해당하는 4권 분량이 전해지고 있고,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 이외에, 오오사카 후지타미술관(大阪・藤田美術館),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 개인소장이 있다. 고토바가키(詞書)의 필자는 가마쿠라 시대의 노가키(能書) 고쿄우고쿠 셋쇼우(後京極良経, 1169-1206), 에(絵)의 필자는 가마쿠라 시대의 에시(絵師) 후지와라노 노부자네(藤原信実, 1176-1265)로 전해지고 있지만, 출처는 불분명하다.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이 소장하고 있는 삼단(三段) 분량은, 1920년 나고야(名古屋)의 모리카와 간이치로(森川勘一郎, 1887-1980)가 발견한 전체 5단 중 제1, 2, 4단째 내용에 해당한다. 1932년, 마스다 돈노우(益田鈍翁, 1848-1938)가 구입할 때 5단째 내용을 잘라 모리카와 가문(森川家)에 남겨놓았고 (현재 모리카와 가장본), 그 다음해 돈노우(鈍翁)는 3단째 내용을 잘라 족자로 만들었으며 (현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남은 3단 분량은 그 다음해에 액자로 만들어, 종전 이후, 다카나시 가문(高梨家)을 거쳐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이 소장하게 되었다.
고토본(五島本) 제 1단 : 1008년 10월17일 밤, 승진 사례를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藤原道長)의 딸, 츄우구우 아키코(中宮彰子, 988-1074)에게 올리고자, 후지와라노 타나노부(藤原斉信, 967-1035)와 후지와라노 사네나리(藤原実成, 975-1044)가, 내시(内侍)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를 방문하는 장면. 왼쪽에는 크게 정원이 보이고, 건물을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옛 모리카와 가장본(旧森川家本) 5단 중 제 1단.
고토본(五島本) 제 2단 : 1008년 11월 1일, 왕자 탄생 50일 째 되던 날의 축하연 모습. 쿠치키(朽木) 문양의 궤장(几帳)으로 나뉜 신덴(寝殿) 내부에, 아츠히라 친왕(敦成親王, 이전의 고이치죠 일왕, 後一条天皇, 1008-36)을 품은 츄우구우 아키코(中宮彰子, 988-1074)의 모습과, 머리를 올린 정장으로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이 보인다. 마츠쿠이츠루(松喰鶴) 문양의 깔개 위에 고배(高坏)를 놓고, 식사를 차린다. 옛 모리카와 가장본(旧森川家本) 5단 중 제 2단.
고토본(五島本) 제 3단 : 1008년 11월 1일, 의식(儀式) 후 연회의 모습. 시녀의 부채를 들어 농담을 건네는 후지와라노 아키미츠(藤原顕光, 944-1021), 초벌 잔을 들고 사이바라(催馬楽), 미노야마(美濃山)를 부르는 후지와라노 타나노부(藤原斉信, 967-1035) , 시녀복장의 옷깃, 겹쳐 입은 소맷단의 색을 관찰하는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実資, 957-1046),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를 찾는 후지와라노 킨토우(藤原公任, 966-1041) 등의 생생한 모습과 표정이 보인다. 옛 모리카와 가장본(旧森川家本) 5단 중 제 4단.
고토 케이타(五島 慶太, 1882-1959)는 실업가, 정치가, 관료이며, 도큐전철(東急電鉄)의 실질적인 창업자이다. 나가노(長野) 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졸업후, 9년간 관료생활 후, 현재의 도큐(東急) 도요코선(東横線)의 전신, 무사시전기철도(武蔵電気鉄道) 상무로 취임했다.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하면서, 이케가미 전기철도(池上電気鉄道, 현재의 도큐이케가미선, 東急池上線)와 다마가와 전기철도(玉川電気鉄道, 훗날의 도큐 다마가와선, 東急玉川線)를 비롯한 수많은 경쟁기업을 인수, 합병하면서 차례차례로 매입하여, '고토케이타(強盗慶太)'란 별명을 얻었다. 한편, 기업가로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한신급행철도(阪神急行電鉄, 현재의 한큐전철, 阪急電鉄)의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와 나란히, '서쪽엔 고바야시, 동쪽에는 고토(西の小林・東の五島)라고 불렸으며, '피스톨 츠츠미(ピストル堤)'라고 불렸던 세이부 그룹(西武グループ)의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 1889-1964)와는 앙숙이었다.
나가노현(長野県) 치이사가타군(小県郡) 도노도무라(殿戸村, 현재의 아오키무라, 青木村)에서 경작하던 고바야시 키쿠에몬(小林菊右衛門)・스에(寿ゑ)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3년 아오키 진죠 소학교(青木尋常小学校, 현재의 아오키 촌립 아오키 소학교, 青木村立青木小学校), 1895년 우라사토 진죠 소학교(浦里尋常小学校) 고등과(高等科), 현재의 우에다 시립 우라사토 소학교(上田市立浦里小学校)를 졸업했다. 부친의 제사업(製糸業) 실패 등으로 집안 사정은 어려웠지만, 부친을 설득하여 케이타(慶太)는 나가노현(長野県) 진죠 중학교(尋常中学校) 우에다 분교(上田支校, 현재의 나가노현 우에다 고등학교, 長野県上田高等学校)에 입학했다. 집에서 왕복 4시간 걸려 통학했다고 한다. 중학교 3년을 마치고, 나가노현(長野県) 진죠중학교(尋常中学校) 마츠모토 본교(松本本校, 현재의 나가노현 마츠모토 후카시 고등학교, 長野県松本深志高等学校)에 친구였던 오오이 신지로(大井新次郎, 훗날의 다마가와엔(多摩川園)의 원장)과 함께 마츠모토(松本)의 지인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통학하여, 수료하였다.
케이타(慶太)는 상급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단념하고 아오키 소학교(青木小学校)의 대용교원(代用教員)이 되었다. 그럼에도 1902년 여름에는 상경하여 도쿄 고등상업학교(東京高等商業学校)에 도전하지만, 영어 때문에 불합격하고, 1903년에 학비가 필요없는 도쿄 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学校)에 합격하여, 대용교원(代用教員)을 그만두고 영문과에 진항하였다. 여러 과목을 배웠지만, 인생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하고, 유일한 인생의 지침으로 회상하는 것은 교장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 1860-1938)가 평소에 내뱉었던 '까짓것(なにくそッ)'이란 말이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졸업후, 1906년 영어교사로 미에현(三重県) 욧카이치 시(四日市) 시립상업학교(市立商業學校)에 임용되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최고학부 진학을 위해 1907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정치학과(政治学科) 선과( 選科)에 입학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법학부 본과에 전학하였다. 1911년 29세 나이로 대학을 졸업하였을 때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験)에 합격하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1860-1926)의 주선으로 농상무성(農商務省)에 들어가 공장법(工場法) 시행에 따라, 공장감독관(工場監督官)이 되었다가, 시행이 3년 늦춰지면서 철도원(鉄道院)으로 옮겼다.
철도원(鉄道院)에서는 문서과(文書課), 감독국(監督局), 총무과(総務課)를 거쳐 1919년에는 총무과장(総務課長)이 되었고, 1년반 정도 후, 무사시 전기철도(武蔵電気鉄道, 훗날 도쿄요코하마 전철, 東京横浜電鉄, 현재의 도큐도요코선, 東急東横線) 사장 고 세이노스케(郷誠之助, 1865-1942)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중, 철도 전문지식이 있는 상무 채용을 문의하기 위해 철도원(鉄道院) 차관에 조언을 구했는데, '재미있는 녀석이 있다'고 하며 고토(五島)를 소개해줬다. 이에 흥미를 느낀 고토(五島)는 1920년 철도원을 그만두고, 무사시 전기철도(武蔵電気鉄道) 상무로 취임했다.
마침,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를 포함 전원 도시 개발 및 전기철도 부설이 난항을 겪다가, 한신 급행전철(阪神急行電鉄, 훗날 한큐전철, 阪急電鉄) 총수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가 사업을 위임받아, 다마가와(玉川), 덴엔초후(田園調布) 방면 택지개발 및 철도사업을 진행했다. 메구로 가마타 전철(目黒蒲田電鉄) 설립을 처리할 겨를이 없었던 고바야시(小林) 대신 고토(五島)가 천거되어, 에바라전철(荏原電鉄)을 먼저 부설하고 부지를 매각한 후, 매각대금으로 무사시전철(武蔵電鉄) 부설하는 방안을 추진하여, 1922년 에바라 전기철도(荏原電気鉄道) 전무를 맡았고 (맡기 직전 사명을 메구로 가마타 전철, 目黒蒲田電鉄, 로 바꿨다.), 1924년에는 메카마 선(目蒲線)이 완전개통되었다. 마침 관동대지진의 피해가 막심했던 도쿄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이주가 늘어나던 시기와 맞물려 전철 운행 실적이 단번에 호전되었고, 그 이익으로 무사시 전철(武蔵電鉄) 주식 과반을 매수하여, 이름을 도쿄 요코하마전철(東京横浜電鉄)로 변경, 1927년에는 시부야역( 渋谷駅)-가나가와역(神奈川駅)을 연결하는 도요코선(東横線)을 개통시켰다. 이 노선은 고토(五島)가 가장 공을 들여 개통한 노선이었다.
쇼와 공황(昭和恐慌)의 여파로 실적이 악화되면서 고토(五島)는 예산즉결산주의(予算即決算主義)를 확립하여 평생이를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고토(五島)는 한큐(阪急)의 고바야시(小林)의 수법을 모방하여, 노선을 따라 오락시설, 백화점 등을 세워 전철 노선의 부가가치를 높였고, 거기에 대학 등 학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1924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던 도쿄 공업대학(東京工業大学)을 아사쿠사 구(浅草区) 구라마에(蔵前)에서 메가마전철((目蒲電鉄) 노선 내 오오오카야마(大岡山)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1929년에는 게이오기쥬쿠 대학(慶應義塾大学)에 히요시다이(日吉台) 부지를 무상제공하여, 1934년 히요시 캠퍼스가 개설되었다. 1931년에는 일본의과대학(日本医科大学)에 무사시 코스기 역(武蔵小杉駅) 인근 대지를 무상제공하였고, 1932년 도쿄부립 고등학교(東京府立高等学校)를 야쿠모(八雲)에 유치하였다. 1936년에는 아카사카구(赤坂区) 아오야마 기타마치(青山北町)에 있었던 도쿄부(東京府) 아오야마 사범학교(青山師範学校)에 자금을 지원하여 세타가야(世田谷)의 시모우마(下馬)에 유치하였다. 도요코선(東横線) 일대를 학원도시로 자리매김하게끔 많은 학교를 유치하면서, 통학 수요를 안정적인 이용객으로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토(五島)는 교육 분야에 특히 열의를 보여, 사재를 들여 도요코 상업여학교(東横商業女学校, 훗날의 도요코 학원(東横学園) 중학교, 고등학교, 여자단기대학)를 설립하였고, 계속하여 무사시 고등공과학교(武蔵高等工科学校)를 포함한 학교법인 고토육영회(五島育英会)를 설립하는 등 만년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이어나갔다. 한편, 사업을 확대하여 1933년에는 경쟁업체인 도쿄 가와사키 재벌( 東京川崎財閥) 산하 이케가미 전기철도(池上電気鉄道) 주식을 양도받았다.
1934년에는, 시부야역(渋谷駅) 앞에 이 지역 최초의 전철계 백화점인 도요코백화점(東横百貨店)을 개업하였다. 터미널 이용객에게 쇼핑을 유도하여 인기가 높았다고 하며, 백화점 옆에 본사 건물이 있었던 다마가와전기철도(玉川電気鉄道) 인수, 1936년 사장이 되었고, 1938년에 도쿄요코하마전철(東京横浜電鉄)에 흡수합병하였다. 1939년에는 메구로 가마타 전철(目黒蒲田電鉄)이 도쿄 요코하마 전철(東京横浜電鉄)을 합병하여 이름을 도쿄요코하마 전철(東京横浜電鉄)로 바꿨다.
고토(五島)는 간사이(関西)에서도 사업을 벌여, 1927-1944년에 걸쳐 긴키 일본철도(近畿日本鉄道, 긴테츠, 近鉄)의 전신인 오오사카 전기궤도(大阪電気軌道, 다이키, 大軌) 감사 및 다이키(大軌) 자회사인 산구 급행철도(参宮急行電鉄, 산큐, 参急) 이사를 맡기도 했다.
1938년 마에야마 히사키치(前山久吉) 소유 미츠코시(三越) 주식 양도 문제가 발생했다. 고토(五島)는 도요코백화점(東横百貨店)을 미츠코시(三越)와 합병 후 토요코(東横)를 미츠코시(三越)의 시부야(渋谷) 지점으로 할 생각에 10만주를 매입했다. 도요코백화점(東横百貨店) 직원연수를 의뢰했던 미츠코시(三越)가 이를 거절하자 이에 앙심을 품었던 거라는 얘기도 있으며, 미츠이재벌(三井財閥)의 가업이기도 한 미츠코시(三越) 인수를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미츠이은행(三井銀行)은 도요코(東横) 측에 융자를 정지하였고, 미츠이(三井)의 요청으로 미츠비시은행(三菱銀行)의 가토 타케오(加藤武男, 1877-1963)도, 게이오재벌(慶應閥) 측의 미츠코시(三越) 인수에 손을 대다가 비난받을 것을 우려해 대출을 정지했다. 고토(五島)는 거대 양대재벌인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재벌을 상대하는 상황이 되어, 자금조달상황이 악화되었다. 미츠이은행(三井銀行) 출신으로 게이오재벌(慶應閥)과 안면이 있었던 고바야시 이치죠(小林一三)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충고를 받아들여 인수를 단념했다.
1934년, 고토(五島)는 시부야(渋谷)-신바시(新橋) 간 지하철 건설을 위해 오쿠라구미(大倉組)와 도쿄지하철도(東京地下鉄道)와 협력하여 도쿄고속철도(東京高速鉄道)를 발족시켜 상무에 취임했다. 1938년에 시부야(渋谷)-토라노몬(虎ノ門) 구간을 개통했지만, 카도노 쥬쿠로(門野重九郎, 1867-1958) 사장과 도쿄역(東京駅) 연장을 두고 대립하여, 고토(五島)는 신바시(新橋)부터 도쿄지하철도(東京地下鉄道)를 통해, 당시 도쿄 제일의 번화가였던 우에노(上野) 및 아사쿠사(浅草)에 이르는 노선을 주장했다. 결국, 1939년 고토(五島)는 대일본전력(大日本電力) 사장 아나미즈 쿠마오(穴水熊雄, 1880-1958)로부터 도쿄지하철도(東京地下鉄道) 주식 45만주를 양수받아, 도쿄지하철도(東京地下鉄道) 하야카와 토쿠지(早川徳次, 1893-1980)를 퇴진시켰다.
1941년에는 육상교통 사업 조정법에 따라 제도 고속도교통영단(帝都高速度交通営団, 영단지하철, 営団地下鉄)이 설립되었고, 사철 2사의 과도한 경쟁을 막고 영단으로 단일화하는 안이 추진되어 결국 두 회사는 영단채로 대체되었지만,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되었다. 1942년 육상교통 사업 조정법에 따라, 이미 고토(五島)가 실질적으로 경영하고 있던 게이힌전기철도(京浜電気鉄道)와 오다큐전철(小田急電鉄)을 합병하여 도쿄급행전철(東京急行電鉄)을 발족, 다시 1944년에는 게이오전기궤도(京王電気軌道)를 합병하였다. 사가미철도(相模鉄道) 등 도쿄 서남부 전역의 사철망을 산하에 흡수해 다이도큐(大東急)로 통합되었다.
1943년 국책으로 시즈오카철도(静岡鉄道)가 설립되어, 고토(五島)는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지금도 시즈오카철도(静岡鉄道)는 도큐(東急)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1944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 운수 통신대신(運輸通信大臣)에 취임하여, 나고야역 교통문제 해결, 선원의 처우개선 등에 힘을 쏟았다. 종전후, 1947년에 도조(東條) 내각 각료였던 이유로 연합국 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1년에야 겨우 추방조치가 해제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사실상 실질적으로 회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추방해제 후에 도쿄급행전철(東京急行電鉄) 회장으로 취임해, 11억엔에 달했던 도에이(東映)의 빚을 해결하기 위해 스미토모은행(住友銀行)의 스즈키 코우(鈴木剛, 1896-1986) 행장과 협상하여 융자를 이끌어냈고, 여기에 도큐(東急) 전무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오오카와 히로시(大川博, 1896-1971)을 사장으로 파견하여, 3년만에 도에이(東映)는 재건되었다. 1953년에는 가나가와현(神奈川県) 북동부를 중심으로 한 다마(多摩) 전원도시개발에 착수하였다.
한편, 1955년 요코이 히데키(横井英樹, 1913-1998)의 시로키야(白木屋) 주식 매입 사건에 개입하여, 이후 도요코백화점(東横百貨店)을 흡수합병하여, 과연 '고토케이타(強盗慶太)'라는 악명을 떨쳤다. 죠우잔케이철도(定山渓鉄道) 등 홋카이도(北海道) 각지의 승합버스회사를 인수하여 홋카이도 개발을 추진했다. 이즈(伊豆) 관광개발에도 힘을 쏟아, 이토(伊東)-시모다(下田) 간 철도부설 (현재의 이즈급행선, 伊豆急行線)을 계획하여, 소위 '이즈전쟁(伊豆戦争)'을 벌이는 한편, 하코네(箱根) 관광 관련해서 일찍이 산하 오다큐(小田急)와도 '하코네야마 전쟁(箱根山戦争)'을 벌였고, 고토(五島)의 고향 나가노현(長野県)에서도 가루이자와(軽井沢) 개발을 둘러싸고 '쿠사카루전기철도(草軽電気鉄道)'를 도큐(東急) 산하로 매입하는 등, 세이부철도(西武鉄道)의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 1889-1964)와 각지에서 개발관련하여 대치하였다.
고토(五島)는 우에다 마루코 전철(上田丸子電鉄, 현재의 우에다교통, 上田交通)에 출자하였지만, 이미 병이 위중하여 더이상 경영에 관여하지는 못했다. (훗날 도큐의 계열회사가 되었다.) 죽기 직전인 1959년에 다시 요코이(横井)와 도요 정당(東洋精糖) 매수에 뛰어들어 치열한 인수전을 벌였지만, 고토(五島)는 그 와중에 병사하여, 이후 27일이후에 도요 정당(東洋精糖)는 매각되었다.
기업가로 평가는 엇갈리며, 강제적인 기업 합병으로 악명높았지만, 한편으로는 도에이(東映) 재건 노력, 하코네(箱根), 이즈(伊豆), 신슈(信州), 홋카이도(北海道) 개발, 센조쿠 전원도시(洗足田園都市), 전원 쵸우후(田園調布) 등으로 시작된 다마 전원도시(多摩田園都市) 개발 등, 대규모 사업 추진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경영의 스승이랄 수 있는 고바야시 이치조우(小林一三, 1873-1957)의 경영수법을 모방하여, 사철(私鉄) 경영을 기반으로 시부야역(渋谷駅)에 백화점을 설립하거나 전원도시 개발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학교를 대대적으로 유치하거나, 정치력을 적극적으로 사업 추진에 활용했던 점 등 차별성도 엿보인다. 반대로, 고바야시가 은밀하게 사업확대를 꾀했던 점은 따라하지 않았다.
고바야시나 라이벌이었던 세이부 철도(西武鉄道)의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와 마찬가지로 고미술품 수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소장품 공개를 위해, 사후 고토미술관(五島美術館)이 설립되었다. 도큐 그룹(東急グループ) 산하 도쿄도시대학(東京都市大学)에는, 고토(五島) 관련 경영수업이 운영되고 있다. 일본 경제 신문(日本経済新聞)에 연재되었던 나의 이력서 칼럼에 따르면, '... 우리집은 가난한 농가라고는 해도, 쳔여 호 남짓되는 산속 마을에서는 가장 부자였다..' 고 술회했다. 부친인 키쿠에몬(菊右衛門)은 독실한 불교신자, 특히 법화경(法華経)을 열독하여, 기상후, 취침전,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을 수백번이상 읽었다고 한다. 양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케이타(慶太)도 불교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철도원(鉄道院)으로 옮기기 전해인 1912년, 30세이던 케이타(慶太)는, 공학박사인 후루이치 코이(古市公威, 1854-1934)의 주선으로, 고쿄(皇居) 니쥬바시(二重橋)의 설계자이기도 한 공학박사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 1861-1931)의 장녀이자, 2살때 고토 소우베에(五島惣兵衛)의 양녀로 입적한 만치요(万千代)와 중매결혼하였다. 이 때,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의 조모의 집안으로 옛 누마다 번사(旧沼田藩士)였던 고토 가문(五島家)을 이어, 성도 고토(五島)로 바꾸었다. 이후 만치요(万千代)는 1922년 스페인 독감으로 갑작스레 죽었지만, 평생 복성(復姓)을 하지 않았다.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고토 노보루(五島昇, 1916-1989)는 도쿄 급행전철(東京急行電鉄) 사장,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장녀 하루코(春子)는 관료이자 정치가 소네 에키(曾禰益, 1903-1980)에 시집갔다. 차녀 미츠코(光子)는 요절했으며, 차남 스스무(進)는 도쿄제대(東京帝大) 졸업 후, 해국에 입대하여, 솔로몬제도 해전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