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8-25절) 사람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가정을 하숙(下宿)집이라고 합니다. 전부 밖에서 뛰기에 바쁘고, 밖에서 무언가 배우려고 하고, 밖에서 돈 벌려고 하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 둘러앉아 식사를 하거나. 회의를 할 시간의 여유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가정에서 어떤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이 하숙집으로 변하면서 생긴 현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서야 할 위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재앙을 통하여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가정 안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앉아야하는지, 그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있을 곳에 있어야 인간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좀 모자라는 사람을 보면, 항상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을 돌아다닙니다.
그런 사람은 한 학년 올라갈 때도 꼭 다른 반에 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내 역할은 무엇이며,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 있어야 하고, 아내는 아내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필요해서 찾으면, 없어서 찾는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고,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자기가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하는데 애완견 등 동물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리매김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며, 남자와 여자가 서야 할 자리는 어떤 것인가*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Ⅰ.동물의 이름을 지으라.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 사람은 두 명밖에 없고, 동물은 많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동물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사람을 임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런 위치만 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어떤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2:19절)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러분,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의 정체(正體)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짓기 전에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사물(死物)입니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것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어떻게 만나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즉 털이 복실복실하고 이상하게 생긴 것이 있는데, 이름이 없어요. 그러면 이것이 성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이름이 정해지면, 항상 정체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스컹크는 귀엽지만 냄새가 지독하다는 것을 알고, 멀리서 사랑할 수 있으며, 개(犬)는 개답게, 돈(豚)는 돼지답게 대할 수 있습니다. 한번 이름을 정해 놓으면, 그 사람은 항상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것을 만든 사람이 그것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카페 닉네임을 나비, 찐빵, 흉(凶)한 용솟음, 헐크 등 이상한 가명으로 가입하여 혼란 스럽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만드시고 *하늘*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늘은 영원히 하늘입니다. 정체불명의 유리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엄청난 특권(特權)을 주셨습니다. 즉 우리가 새와 짐승들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마치 만든 것과 같은 위치에서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른지, 그것의 특징(特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름을 지어 주고도 잊어버려서*네 이름이 뭐였지? 돼지였나. 곰이었나?* 한다면, 그것은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정해놓으면, 그 특징(特徵)을 기억해야 하고, 항상 그 정체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에게 동물들과 뛰 놀거나, 약한 동물들을 돌봐주는 일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일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즉 토끼와 숨바꼭질하거나. 토끼와 거북이를 경주시키는 일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관찰(觀察)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류(分流)하고 나서, 그 정체(正體)를 하나씩 하나씩 밝히고, 정복(征服)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너는 돼지야, *너는 곰이야, 너는 사슴이야*하고 하나씩 하나씩 명확하게 규명(糾明)해 나가는 작업을 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전체를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을 분류해서 하나씩 이름을 붙여 나가지 않으면 이름을 붙혀 놓고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한 번은 거북이 이름을 짓고, 다음에는 개구리 이름을 짓고, 다음에는 토끼 이름을 짓고....이러면 거북이이지, 개구리인지, 토끼인지, 뒤섞여서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무언인가 특징이 있어요. 즉 물에서도 놀고, 땅에서도 노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 이것은 파충류 족이다. 털 있는 것들은 이쪽 집합! 물속에서 노는 것들은 저쪽 집합! 털 있는 것들도 순서대로! 곰, 너는 왜 거기서 얼쩡대고 있어? 넌 이쪽이고 뿔 달린 것들은 저쪽이야. 주머니 달린 것들은 여기 모여!*
그러고 나서 하나씩 하나씩 이름을 짓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름을 지을 수가 없어요. 몇 만 종 되는 것의 정체를 어떻게 명확하게 밝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신 것은 그냥 덤벼 들어서 *곰하고 놀고. 약한 동물들을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관찰하게 하시고, 그것을 분류하게 하시고, 하나씩 규명해 나가도록 이름 짓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에게 시키시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정말 엄청난 정보(情報)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즉 대학교 3,4학년이 되면 컴퓨터도 해야지요, 운전도 해야지요, 영어도 해야지요,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미련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닥치는 대로 책 읽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있는 데 서 있으면 안 되고, 곰이 있는 자리에 가서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지식이 많고, 할 일이 많은데, 닥치는 대로 배우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합니까? 닥치는 대로 일하는 사람은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도 제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몸이 부서져라 일 해도 나오는 결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것은 무조건 배우고, 무조건 일하고, 무조건 덤벼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관찰(觀察)해야 합니다.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돼요. 화가(畫家)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십시오. 캔버스에 손을 안댑니다. 몇날 며칠을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구상(構想)이 잡히면, 덤벼드는 겁니다. 현명한 사람은 처음에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옆에서 욕을 하든, 춤을 추든, 나팔을 불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머릿속에 캐비닛이 생깁니다. 커다란 프레임(frame)이 생깁니다.
즉 *이것은 여기 넣고, 이것은 저기 넣고....* 이렇게 하면, 아무리 많은 정보가 오더라도, 아무리 많은 일이 있더라도 다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 정신적인 프레임(frame)이 크면, 클수록 많은 정보와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힘만 세다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정보가 많아도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있는 정신적인 틀 속에 집어넣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습니다.
컴퓨터 놔두고 뭐합니까? 정보가 너무 많으면, 컴퓨터 한 번 돌리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정보가 적은 것은 사례로 연구하면 됩니다. 정보가 많으냐 적으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이며, 내가 이것에 어떻게 덤벼 들어서 소화하고 지배할 것인가가 문제지요.
누가 무슨 주장을 했다고 해서 거기에 목숨 걸고 따라가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아무나 왜 목숨 걸고 따라갑니까? *아, 이 사람은 이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지만 저런 문제도 있을 수 있겠다. 아, 저 사람은 또 저런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구나.....*
이렇게 머릿속에 있는 캐비닛 안에 다 집어넣어 버리면, 여기에 쏠렸다. 저기에 쏠렸다. 하거나, 이 사람 따라갔다 저 사람 따라갔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물(事物)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자기의 눈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하나씩 규명하는 작업이 우리의 직장 일이고, 공부입니다. 왜 학생들이 공부에 그냥 덤벼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일을 할 때, 무조건 일에 덤벼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인 문제가 무엇이며, 나는 이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나는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규명하기 전에 왜 덤벼듭니까? 그래서 선생을 잘 만나야 합니다.
선생(先生)이 어떤 사람입니까?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지요. 선생은 머릿속에 틀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선생을 잘못만나면, 고생만 죽도록 하고, 얻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고생한 것은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습니다.
아담이 동산에서 그 동물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선생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성경이 우리의 선생이 되어 주십니다. 성경을 읽을 때, 답답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이 좋은 말씀을 실생활과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일이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선생으로 삼아서 계속 읽어 보십시오. 성경에 질문해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저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제가 지켜야 할 법도가 무엇입니까?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떡이나 돈을 주시는 대신에 큰 틀을 하나 주십니다. 거기에 다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물건이 많아도 다 들어갑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다 들어갑니다. 쓸데없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면 됩니다. 현명한 설교자는 자기가 연구한 것을 다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 예화는 너무 아깝고,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니까 집어넣고* 이러다가 설교를 망치는 거예요.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나가면서 다른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설교에서 예언적인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려지가 않아요.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뼈대를 가지고 완전히 추려야 합니다. 확 추려 내고, 나머지는 버리는 거예요. 즉 *동창회도 아깝고,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친구이고* 그러니까 죽을 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이 거대한 정보의 세계에서 욕심 때문에 자신의 방향과 위치를 잃는 것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고, 정보가 너무 쏟아져요. 그래서 아무것이나 붙들고 힘을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약간만 상황이 바뀌어도 해결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이 세상에서 돈이나 벌고, 일이나 죽도록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아무리 동물이 많아도 그리고 그 동물들 중에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아도 모두 우리의 지각(知覺)으로 하나씩 하나씩 규명해 나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덤벼드니까 세상 살기가 힘든 겁니다.
오늘날의 어려움은 사람들에게 기준(基準)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선악(善惡)의 기준이 명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자녀를 맡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글 쓰는 법 같은 것은 누구나 다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니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선악(善惡)의 기준(基準)입니다. 즉 *이것 나쁜 것이야 이것은 하면 안 돼, 이것은 해*이 기준(基準)을 부모가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큰 틀입니다.
악(惡)한 동기로 일한 것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악(惡)한 자와 협력한 것은 나중에 보면 반드시 비싼 대가(代價)를 지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비싼 대가를 지불하지 않게 하려면, 선악(善惡)의 기준(基準)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 부모들이 정신이 없어요. 가르쳐 줄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너도 나도 아이들을 속셈학원에 보내는 속셈을 모르겠어요. 속셈학원에 보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악(善惡)의 기준(基準)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즉 *악한 자와 가까이 하지 마라. 교만한 자에게 무엇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마라.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끝이 좋지 않다. 하나님이 절대로 너를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이야기해 주어야합니다.
부모가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라고 하는 것은 나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은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말씀만 붙들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게 되어 있어요. 책임지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언약을 어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붙들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교회를 넓히느냐, 어떻게 하면 사람을 늘리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몸부림치며, 붙들 것은 *어떻게 하면 말씀이 더 말씀되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하면 안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간섭(干涉)하실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갈 데까지 가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신실(信實)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약삭빠르게 생활하면 안 됩니다. 즉 *하나님, 우리는 돌대가리 어린 양이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매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갈 길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십니다. 육성(肉聲)으로 들릴 정도로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우리 각 셀(cell)공동체는 앞으로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저버리면, 다른 많은 물질적인 축복이 온다고 해도,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버리는 순서가 무엇이냐? 하면, 그가 물질에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다른 것을 쳐서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안 돼요. 돌아와서 오직 말씀만 붙들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크게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구원은 큰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보다 다른 것이 앞설 때, 굉장히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꼭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각 셀(cell)공동체가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산다는 것은 *빅 처치(big church)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 온 힘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손은 분명히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의 가치관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경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갈등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잠 못 이루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자녀들은 제대로 삽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보다 분명히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망칩니다. 이미 한국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이런 교인들 때문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성경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내 온 힘을 쏟을 때, 자녀가 제대로 큽니다. 그걸 본 자녀들이 기도하고 위기의 순간이오면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예배 시간에 졸기나 하고, 집에 가면 교회 욕이나 하면, 그 자녀들은 위기의 순간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욕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고, 자녀의 신앙을 박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자녀들은 자기 문제에 빠져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혈기(血氣)로 일을 해결하지 않도록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혈기(血氣)로 하면, 반드시 손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문제의 전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부분만 가지고 흥분하며, 화를 내고 있을 뿐이며, 전체적인 윤곽을 알고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혈기(血氣)와 분노(忿怒)를 다스리고, 계속 기도함으로써 기다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이 곧바로 돈을 주지 않고, 시험 문제의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대한 정보와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사고의 틀과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있는 지혜를 주며, 선악(善惡)을 분별하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악(惡)한 사람과 교제하면, 몸에 신호가 옵니다. 비상경보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즉 *이 교제는 나를 굉장히 위험하게 만드는구나.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구나*하는 것을 자기가 느낍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직감(直感)으로 느끼는 거예요.
Ⅱ.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位置)를 정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대단히 특별하게 부각(浮刻)시키시고, 인도하시고, 남자를 만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남자가 혼자 존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2:18절)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만드실 때, 다 쌍쌍으로 만드셨습니다. 즉 암컷과 수컷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남자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자를 계속 혼자 있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만드시지 않고, 남자만 덜렁 먼저 만드셨을까? 사람을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급했기 때문에 *일단 하나라도 만들고 보자*하고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가 독처(獨處)하게 하심으로써 여자가 얼마나 필요하며, 여자가 없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전한지. 철저히 깨닫게 하기 위하여 여자 없이 남자만 만드신 것입니다.
가끔 부인들이 이런 불평을 합니다. 즉 *내가 없어져 봐야 이 식구들이 내 소중함을 알아*이것은 굉장히 성경적인 불평입니다. 그런데 없어지려고 해도 갈 데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계속 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없어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늦게 등장시키셨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인지 모르지만. 남자는 여자 없이 동산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물론 불편한 것을 몰랐지요.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요.
그러나 동물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남자는 심각한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을 보니까 전부 둘씩입니다. 하나를 불렀는데, 둘이 오고, 하나를 보냈는데, 둘이 갑니다. *왜 너희 둘은 같이 가냐?* *우리는 한 쌍이거든요*
그렇게 다 둘씩인데, 아담만 혼자였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동물들을 보니 다른 짐승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아주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만 혼자였어요. 아무리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 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빈틈이 있겠습니까마는 무언가 허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뵈어도 좀 이상합니다. *남자가 저렇게 혼자 있으면 안 되는데.....*하는 말씀을 자꾸 하십니다.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하나님도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남자는 좀 혼자 있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노총각으로 있다가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를 못 만나서 애쓰다가 드디어 결혼한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너무 아내를 사랑해서 하루에 열 번씩 전화합니다.
노총각으로 지내면서 여자의 존재가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히 키가 크네, 작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까? 또 요리 솜씨 운운 하는 이야기가 어디서 나와요?
너무 일찍 결혼하면 부인이 소중한 줄 모릅니다. 아담이 혼자 있을 때, 어느 정도로 외로웠느냐? 하면, 뼈에 사무칠 정도였습니다. 그 사무친 뼈로 여자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돕는 배필(配匹)*은 약(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아마 여자 분들은 이 부분에서 불만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즉 *하나님도 결국은 남성 위주구나. 왜 여자를 겨우 *돕는 배필*이라고 하시지?* 여기서 *돕는 배필*은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배필이라는 뜻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돕고 여자가 남자를 도와서 서로가 완성된 인격체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돕는 배필*이지, 여자만 헌신적으로 빨래하고. 다리미질하고. 밥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부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남자들한테 *왜 결혼하려고 합니까?* 물으면 *빨래하기 싫어서*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세탁소에 보내야 해요.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불행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5:28-29절)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남자의 가장 큰 사명은 사업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해서 참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사람에게는 회장, 사장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위대한 남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서로 모자라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돕고. 보완함으로써 완전한 인격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남자나 *하나님이 왜 남자를 만드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여자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보완한다.*는 말은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중 하나는 성격적인 보완입니다.
완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성격적으로 조금씩 부족합니다. 즉 한쪽이 발달한 사람은 다른 쪽이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즉 꼼꼼한 사람은 대인관계가 부족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을 대충대충 합니다.
이렇게 부부는 서로 성격적으로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찾을 때 보면, 자신과 성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즉 꼼꼼한 사람은 덜렁덜렁한 사람을 원하고, 덜렁덜렁한 사람은 꼼꼼한 사람을 원합니다.
이렇게 꼼꼼하기도 하고, 덜렁대기도 하고,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일을 챙기기도 하니까 빈틈이 없습니다.
물론 같은 성격끼리 만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경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성격일 때는 사실 자신들의 문제를 잘 모릅니다. 똑같으니까요. 그리고 서로 싸우다가 지칩니다.
좋을 때는 굉장히 좋아서 다른 집보다 몇 배 큰 능력을 발휘하지만, 안 좋을 때는 훨씬 못합니다. 남편의 훈련은 아내가 시킵니다. 즉 어머니가 못 바꾼 것을 아내는 매일 잔소리해서 바꿉니다. 또 아내의 훈련은 남편이 시킵니다.
그래서 부부는 상대방의 충고를 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즉 *그래 나는 부족해 반쪽이야, 그러니까 한 10년은 잔소리를 듣자*하면서 결혼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적(性的)인 의미에서의 보완입니다. 양성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性)을 하나씩만 주셔서 서로가 결합해야 성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부가 성적으로 결합해야 자녀가 생기고,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부부의 몸에서 중요한 사실은 자기 몸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몸은 상대방의 것입니다. 즉 남편의 몸은 아내의 것이고,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몸을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성적으로 요구할 수 있고, 실제로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에게 이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즉 아내가 매일 피곤하게 돌아오는 남편에게 *오늘은 좀 싱싱하게 들어와 봐요*하는 것은 주님의 권위로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 날은 무조건 싱싱하게 들어와야 해요. 이것은 성령의 명령입니다.
자기 몸이라고 해서 마구 상하게 하면, 결국 다른 한쪽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남편이 병들면 누가 책임집니까? 아내가 책임지고, 다 감당해야 합니다. 아내가 병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병들면 안 되는 거예요.
부부의 몸은 각각 자기 몸이 아닙니다. 한쪽 배우자가 죽었을 때, 다른 한쪽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사별(死別)의 고통은 남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장 큰 충격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면, 어떤 어려움도 이깁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고, 남편이 아내를 책임지는 가정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어요.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이깁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뱀이 파고들면서 가정이 엉망이 된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질서를 깨뜨리면 안 됩니다.
또 부부는 영적(靈的)으로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다 신앙이 좋으면 정말 좋지만, 그런 가정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유아 세례 받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유아세례 받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신앙적으로 큰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쪽이 시험에 들면, 다른 쪽이 돕고, 한쪽이 약(弱)해지면, 다른 쪽이 기도로 지켜 줌으로써 영적(靈的)으로 보완해서 사탄의 역사를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입니다.
이 세상의 지위(地位)나 재산(財産)은 놀이터에 있는 그네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타고 놀다가 때가 되면, 가야 합니다. 직책(職責)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고, 재산(財産)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누구든지 거기 그네에 한번 앉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확실히 아내의 것이고, 아내는 남편의 것입니다. 자식(子息)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크면 다 떠납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만큼은 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확실히 세워 주어야 해요. 남편한테는 *병신 같은 게 .....*하면서 무시하고, 자식한테는 먹을 것 챙겨 주고, 과외 시키다가 나중에 자식이 떠나면, 결국 그 병신하고 둘이 남는 거예요. 너무 심한 말 같습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돈이나 직책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되면, 이미 이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기게 되어 있어요. 어려움이 겹쳐 올 때, 아내가 말합니다.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남편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책임 지겠소.* 그러면 이깁니다. 분명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는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에 같이 서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세상 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업적을 남겼는가? 를 묻지 않으십니다. 남편에게는 *너는 아내를 얼만큼 채워 주었는가?* 물으십니다. 아내에게는
*너는 남편을 얼만큼 채워 주었는가?*물으십니다. 결혼은 인륜대사(人倫大事)입니다.
여러분, 어릴 때부터 결혼을 놓고 기도하세요. 결혼을 잘한 사람은 이 세상을 이긴 겁니다. 사회적인 직책이나 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눈을 부릅뜨고 덤벼듭니까? 결혼만 잘하면 됩니다.
서로를 얼마나 완성시켜 주었느냐?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가 중요합니다. 모자라는 이웃을 많이 채워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큰 상(賞)을 주십니다.
신앙이 좀 떨어지는 남편을 많이 보완해서 신앙이 생기게 했을 때, 더 큰 상(賞)을 주십니다. 그러니, 청년들도 자꾸 공부만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채워 줄 대상을 찾으세요.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대사(大事)입니다.
Ⅲ.하나님이 세우신 결혼
셋째로 하나님이 결혼을 축복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로 하여금 여자가 없는 외로움과 아품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 후에, 가장 아플 때, 그를 수술하셔서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속이 쓰리고 아플 때, 어느 뼈가 아픕니까? 갈비뼈지요.
2:21-22절)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것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뼈 하나를 꺼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술입니다. 수술할 때는 꼭 깊이 잠들게 하고, 어디 하나를 잘라 내더라고요.
하나님이 여기에서 최초의 수술을 하셨습니다. 여자를 만들려면, 남자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그만큼 여자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수술을 하셨습니까? 앞으로 올 세대의 모든 남자들에게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여자를 제대로 만들려면 네가 한 번 크게 죽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수술하셔서 가장 아픈 뼈를 빼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가 아무 희생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당신 왜 훌륭한 아내가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중요한 부분에 칼을 대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즉 야망(野望)을 포기해야 해요. 자신의 취미(趣味)를 포기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바꾸고, 인생관을 뜯어고쳐야 아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빗대가 어떤 뼈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갈빗대는 속에 있는 중요한 기관을 다 싸고 있습니다. 그 안에 심장도 있고, 허파도 있고, 콩팥도 있고 다 있습니다.
갈빗대가 부러져 버리면, 안에 있는 것이 다 터집니다. 아내를 두들겨 패는 사람은 자기 갈빗대를 부수는 것과 같아요.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는 것은 아내는 남자의 심장과 같고, 간과 같고, 콩팥과 같고, 그 모든 내장과 같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상처를 입으면 안 돼요. 딸이 자랄 때에도 상처 입지 않도록 돌보아 주는 것이 아버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자가 상처 받으면 남자의 내장이 썩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에서 남자에게 우선권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자가 자기 발로 *내 짝이 어디 있느뇨?*하면서 남자를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자기 발로 못 찾아갑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격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순서에서 남자가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선 여자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여자는 없습니다.
성낼 때, 말고는 다 아름다워요. 그리고 여자는 감정(感情)이 풍부합니다. 행복은 감정으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행복을 체험합니다. 여자가 행복해하는데, 남자가 행복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힘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여자에게는 아름다움과 풍부한 감정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따뜻합니다. 차가운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원래 따뜻합니다. 또한 여자는 섬세(纖細)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오래 참습니다. 여자만큼 오래 참는 남자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여자가 간호사를 하는 것이 참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한테 간호사를 시키면, 주사도 아무데나 놓고,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발로 차면서 *좀 참아라, 이놈아*할 겁니다.
그런데 여자는 얼마나 오래 참는지 몰라요. 섬세(纖細)해요.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감정(感情)이 풍부합니다. 이렇게 여자는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남자를 머리로 삼아서 눌러놓지 않으면, 잘못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엉뚱한 데에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를 머리로 눌러서 여자가 감정과 따뜻함과 상상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았을 때, 이 여자가 자기의 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23절)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바치는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입니다. 즉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보면 심장에서 나온 시(詩)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말은 *나의 가장 소중한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여자를 *이솨* 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자를 뜻하는 *이쉬*에서 모음(母音)하나만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똑같다*는 뜻입니다. 남녀는 대등합니다. 끝에 있는 어미만 다를 뿐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결혼의 대 원칙(原則)을 선포합니다.
2:24절)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중요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법도(法度)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은 감정(感情)의 문제나 애정(哀情)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法道)입니다. 혹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입니다. 즉 신(信).불신(不信)을 막론하고, 결혼은 하나님의 법(法)으로서 인위적(人爲的)으로 나누지 못합니다.
사람의 성(性)관계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한번 성(性)으로 결합하면 인격적(人格的)으로 결합한 것이며, 뗄 수 없는 책임(責任)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은 간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이혼(離婚)이 많이 생기는 것은 결혼 자체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탓입니다. 남녀가 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法則)입니다.
한번 결혼한 것은 성격적(性格的)인 이유이든, 다른 이유이든, 뗄 수가 없습니다. 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부모를 떠나기 전까지 남녀는 엄격한 부모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성 개방시대*라고 해서 개방해 주면 안 됩니다.
절대로 개방(開放)해 주면 안 됩니다. 물론 본인들은 싫지요. 좀 더 많은 자유(自由)를 누리고 싶고, 좀 더 늦게 들어오고 싶지요.
그러나 성(性)은 폭탄(爆彈)과 같습니다. 이것이 한번 터지면, 가정이 다 날아가 버려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 눈물이 맺히는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야곱의 딸 디나 사건입니다.
디나가 멋도 모르고, 밖에 나갔다가 추장 아들한테 겁탈당하는 바람에 그 마을 전체가 몰살(沒殺)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나이가 되어서 떠나기까지 부모는 감독(監督)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몇 시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다 확인해야 합니다.
남자라고 해서 풀어 주면 안 돼요. 남자라고 풀어 주면, 남의 딸에게 그런 아픔을 줍니다. 부모는 아들이 남에게 절대로 그런 아픔을 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그때부터는 간섭(干涉)하지 말고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남자가 정신적으로 부모를 떠나야 결혼이 성립됩니다. 어떤 남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모든 것을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서른이 되었든, 마흔이 되었든, 그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청소년 때부터 *네가 알아서 해라*하면서 분리시키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라고 매일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간 재고. 감독해 버릇하면, 한평생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얼마나 큰 고통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식의 아내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이 되면 *중요한 문제는 네가 결정해라. 공부도 네가 알아서 해. 대학 떨어지면, 재수를 하든, 삼수를 하든, 네가 알아서 해. 성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 네가 결정해라*하면서 자꾸자꾸 떠나보내야 합니다.
결혼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는 항상 균형(均衡)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독신(獨身)의 기회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언급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독신(獨身)으로 사는 경우에는 다음의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자신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또는 결혼의 의사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도 주님이 짝을 주시지 않는 경우입니다. 혹은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와 일찍 사별(死別)해서 재혼(再婚)할 기회가 없었거나, 배우자가 부정(不淨)을 저질러서 이혼(離婚)하고 떠난 경우입니다.
대개 여성들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독신(獨身)으로 지내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恩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의 큰 긍휼(矜恤)이 있으며, 하나님이 친히 부모가 되어 주셔서 그 기도를 절대적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신(獨身)의 자매들에게는 주님이나 남을 섬기는 일에서 대단히 탁월한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자매라고 해도 일단 결혼하면, 남편과 자식에게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독신(獨身)으로 지내는 형제나 자매에게는 남을 섬기는 일에서 특별한 자유(自由)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즉 독신자(獨身者)들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약(弱)한 부분에 유혹(誘惑)을 받을 수 있고, 그 약(弱)한 부분은 항상 약점(弱點)으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고집(固執)이 생길 수 있고, 아집(我執)과 편견(偏見)이 생길 수 있으며,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지나치게 비판적(批判的)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공동체 안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약(弱)한 부분을 보완(補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독신(獨身)은 귀한 은사(恩師)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불 같은 정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정욕(情慾)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욕(情慾)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이 불같은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수많은 일과 지식(智識)과 정보(情報)가 있습니다. 여기에 무조건 덤벼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관찰(觀察)하고, 분류(分流)하고, 정리(情理)해서 하나씩 하나씩 장악(掌握)해 나가고, 필요 없는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즉 필요 없는 교제(交際), 필요 없는 정보(情報), 필요 없는 물건(物件)은 모두 다 버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아주 균형(均衡)을 잘 잡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덤벼들지 마세요. 기도하세요. 성경을 보세요. 그러면 큰 틀이 생깁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서기 3.000년이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이 틀 안에 다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돕는 배필(配匹)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전부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내 몸이라고 해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결혼(結婚)하기 전에도 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몸을 잘 간직하십시오.
결혼하고 나서도 사업상의 이유나, 다른 이유로 몸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배우자에게 굉장한 아픔을 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책임질 때,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고,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결혼에는 하나님의 큰 비밀(祕密)이 있습니다. 특히 남자를 수술해서 가장 아픈 뼈를 꺼내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여기에 얼마나 큰 결혼의 비밀(祕密)이 있는지 모릅니다.
남자의 아픔과 희생(犧牲)이 없이는 바람직한 아내 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습관(習慣)을 수술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 직장 생활에 매달려 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큰 원칙(原則)을 어기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찬송가 552장 *아침 해가 돋을 때*
율법서(모세 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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