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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삼한시대에 신라(사로국)는 형산강 유역인 경주분지내에서 사로 6촌으로 진변한 24국중에 하나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삼한시대 이후 신라의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알아 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해 일찍이 조선조 실학자 다산 정약용선생은 그의 저서 <변진별고>에서 “신라는 여전히 풍속이 거칠고 어두웠으며 문자가 없으므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할 때는 백제에 붙어 따라가기도 하고 혹은 가라(가야)에 붙어 따라가기도 하였다.
중국의 사서에 그러한 사실이 있으므로 분명하게 증명한다.”라고 하였으며 신형식(이화여대)교수도 “신체호는 신라를 ‘해동 최약국’으로 설명하였다. 백제가 강대한 대국이었던 반면,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약한 나라였으므로 신라가 크게 발전한 뒤에도 왜의 계속적인 침입이 있었다고 한다.....
주지하다 싶이 신라는 가장 후진적이고 취약한 나라였다. 따라서 3-4세기에는 항상 백제나 왜의 침략 대상이 되었으므로 복호, 미사흔의 비극적 인질사건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만열(전국사편찬위원장)박사도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경주를 중심으로 진한지역을 통합하여 고대 국가로 성장한 신라는 일찍이 고조선 계통의 문화를 수입한 관계로 그 영향이 컸다.
그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유물에서 확증되는 사실이다. 신라는 제 16대 내물왕 (356-401년)대에 와서야 고대국가로서 성격이 확립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이우태(국사편찬위원)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첫 왕인 혁거세는 기원전 57년에 즉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의심하는 견해가 있었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그 발전이 늦은 신라의 건국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신라 중심의 우월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중환 (동아대)교수는 “<삼국지> 기록에 의하면 3세기 후반까지 아직 신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고 진한 12국 가운데 ‘사로’라는 이름만 보이는데, 삼한사회가 70여국의 부족국가로 나누어져 있음이 명백한 만큼 아직 신라라는 국가의 기반이 잡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한은 유이민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을 받들지 못하고 항상 마한인으로 왕을 삼았다고 하였고, 삼한의 진왕은 마한의 월지국에 있었다고 전한다” 라고 하였으며,
천관우(사학자)도 “사로국 영역은 파사왕대만 해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북은 다벌국(영일군 흥해), 남은 굴화아촌에(울산)에 걸치는 반경 7,80리에 불과했다.”라고 말하였다. 선석열(부산대)교수도 “사로국이 5개 유력 소국에 거론되지 않는 점을 보면 삼한 제 소국 중에서도 유력세력이 아니었고,
사로국의 왕도 중심 읍락인 국읍의 주수로서 잡거하고 있는 읍락을 제대로 제압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가장 뒤늦게 발전한 신라가 언제 어떻게 사도벌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단 말인가”라고 조희승 (사학자)는 반문하였으며,
김정학(서울대), 윤석효(한성대)교수도 “신라는 경주를 정점으로 고분의 규모도 광대하고 부장품도 풍부하였으나 그 외의 인근지역에서는 가야의 각지역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고총 고분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고 하였다.
김두철(부산대)교수도 “신라는 먼저 본거지인 경주분지 내에서 정치적 통합이 있었으며, 다음으로 낙동강 동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를 멸망시키므로서 영남 전역에 대한 영역의 확장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변진조에 보면 변진한 24개국을 열거하여 소개하였는데 창녕의 불사국이 첫머리 두 번째에 기록한데 비하여 사로국은 끝에서 두 번째에 기록한 것을 보면 삼한시대에서 초기 가야시대에는 사로국이 국세가 열악했음을 진작케 한다.
신형식(이화여대)교수는 그의 저서 <신라통사>에서 “신라가 중국문헌에 나타난 것은 7세기초에 나온 양서로부터이다.
양서(梁書)의 내용을 보면 신라는 중국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도망온 진나라의 유망민이 세운 나라로 ‘마한 통제하의 약소국이었다. 따라서 국가적 자립이 불가능하여 법흥왕 8년(521년) 양나라에 조공한 것도 백제에 의존할 정도로 고유문자조차 없는 후진국이다”라고 하였다.
문화적으로 보아도 김태식(홍익대)교수는 “4세기경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서 가야지역에서는 섭씨 1000씨 탄소 함량이 거의 없는 순도 높은 철정을 생산했으나 반면에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4세기 이래 주조된 쇠도끼를 보면 탄소 함량이 많아 탈탄 과정을 거쳐야 할 정도였다. 그만큼 가야지역의 제철 기술이 신라지역보다 선진적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하였으며, 조희승(사학자)은 “부산 오륜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중 토기를 포함해 총 192점 중에서 철기가 88점으로 46%나 되었다.
반면 신라 경주의 미추왕릉 지구의 고분군에서는 출토된 총 유물 339점에서 철기는 39점으로 철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11.5%에 불과 하였다.
또한 무기와 농공구 등 생산도구의 원재료로 쓰이는 철정 역시 오륜대 고분군에서 11점이나 출토되었으나 미추왕릉 지구의 21기 무덤에서는 단 1점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2 -3세기 경의 가야의 철생산 수준과 발전상을 가늠케 한다.”라고 하였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신라사관에 젖어 창녕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대해 오석문은 그의 저서 비밀의 왕국 비화가야에서 “흔히 사람들은 비화가야가 홀로 낙동강의 동안에 있으며 신라와 가까웠기 때문에 일찍 신라화 되었을 것이라고 추리하나,
비화가야시대 계림국(신라)은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만큼 크고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잘못된 역사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한 현세인들의 신라사관적 시각으로 볼 때 야기되는 신라 우위 비교의 단편적인 생각일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4세기에 백제가 낙동강 유역 가야 7국을 공략할 때에도 신라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으며 5세기 벽두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시에도 상당기간 신라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사실을 보아서도 당시의
신라는 삼국중에 가장 약소국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역사적 상황을 보아 가야시대 중후기에 해당되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창녕지역까지 진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2003년판의
<창녕군지>에 우리 창녕지역이 삼한시대 때부터 신라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기록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기록임이 거듭 확인된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