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군의 항일역사 발굴·기록 … 후손 찾아 명예 회복에 앞장
예산 한 푼 없이 군지 제작하며 항일·독립운동 관심…연구 계기
인제군 최병헌 향토 사학자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묵묵하게 인제군의 항일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후손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72년 인제군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최 향토 사학자는 1978년도 비예산 사업으로 군지를 제작하며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만큼 얻는다는 진리처럼 최 향토사학자는 이때부터 지역 역사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인제신문사는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를 바로 세우고 찾고자 했던 선조들의 민중 항거를 찾아 기사를 연재한다. 성낙규 기자
최병헌 향토사학자
인제지역에서 항일운동을 듣기 위해 지난 10월 19일 최병헌 향토사학자를 인제 시내 자택에서 만났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벽면에는 수많은 책이 잘 정리돼 꽂혀있고, 한편에는 큰 모니터 두 개가 컴퓨터와 연결돼 있다. 테이블에는 연구자료에 활용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독서경을 통해 모아온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기자는 ‘명예도 없고 보수도 없는 향토사학자로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최 향토사학자는 “1972년도 인제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어.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오래전 군수로부터 군지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때 공보실 1년 예산이 3만4천원이었어, 지원은 받지 못했고 당시 기린고등학교에서 인제 고등학교로 온 전용권 교감선생이 집필하는데 (인제군) 지원해 주라고 하는데 예산이 없어 지원 못했지. 그때 최 향토사학자는 인제 항일역사 인물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쌓여가는 역사 자료들을 임시정부, 의병활동, 만세운동, 항일운동으로 구분해 자료를 정리하고 놓친 부분이 없는지 매일 독서경으로 꼼꼼하게 읽는다. 주로 그 당시 판결문을 읽는다고 했다.
“요즘은 개인정보가 강화돼 재판 기록을 찾는다 해도 이분의 출생지 확인이 어렵다(동명이인 가리기).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라 제 3자가 열람하기란 쉽지 않고, 아주 오래전 일이라 그분들의 가족을 찾는 일은 더 어려운 실정이다”고 말했다. 많은 나이임에도 발굴에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김종철 열사는 인제군 방동리 출신이면서 1910년대 인제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다, 핍박이 심해지자, 경북 봉화로 잠시 자리를 옮겨 항일 운동을 이어가신 분인데, 정작 인제군은 그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지만, 경북에서 그분을 지역 자원으로 발굴해 발표했다”라며 “명백한 인제 지역출신 항일운동가가 타지역에서 활동한 내역으로 발표되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사명감을 가지고 끝까지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인제군독립운동가 찾기 본부 창립, 항일·독립운동가 105명 발굴
그는 지난 2019년 인제군독립운동가 찾기 본부를 창립했다. 그해 12월 독립운동가 98명과 인제지역 의병활동을 발굴 정리해 <인제의 독립운동>을 펴냈고, 2020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해 ‘독립운동가 찾기 조사 연구보고회’를 개최했다. 다음 해인 2021년 4월 인제지역 항일 독립운동 투사 합동추모식과, 5월 인제교육지원청에서 독립운동가 찾기 협력 회의를 했다.
같은 해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김종철 열사의 출생지인 기린면 방동리에서 독립운동 역사 찾기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어 10월에는 인제하늘내린센터에서 ‘인제항일독립운동사 발표회’가 개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발굴한 독립운동가는 93명으로 기존 관리되어 온 12명을 포함해서 총 105명으로 늘어났다. 서훈자는 기존의 서훈자 8명과 새로 서훈된 7명을 포함해 모두 15명으로 확대됐다. 훈격으로는 독립장 1명 애국장 4명. 애족장 3명. 건국포장 2명. 대통령표창 5명이다. 그러나 후손을 찾지 못해 전수가 안 된 채 보훈처에 보관된 것이 12건이어서 최병헌 향토사학자는 안타까워했다.
정원팔 항일 투쟁
정원팔(鄭元八, 1874~1964)은 인제군 서화면 서흥리가 본적이며 주소는 인제군 북면 원통리다.
그의 활동내역은 연일인(延日人)으로 1874년 10월 16일 인제군 서화면 서흥리에서 순보/順甫와 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하 상세한 내용은 전해 오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해방 후에는 인제읍 덕산리 늪둔지(현주소는 원통9리)에 살았다고 한다. 손녀 연옥/淵玉(1936~)의 증언에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아주 잘 생기셨는데, 양손에 화상이 심하고 열 손가락이 절단 된 것이 항상 궁금하여, 어릴 때 물어봤더니 왜놈들과 싸우다가 화포에 다쳤다고 했어요.”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곁들여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아버지는 늘 하시는 말씀이 무슨 골패(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던 신표를 두고 하는 말로 추정)를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시며 항상 아쉬워하셨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였다.
연옥/淵玉의 남편 기환/基煥(1937~)도 “나도 그렇게 들었어. 지금 저 사람은 처가 쪽에서 나이가 제일 많으니까 이런 이야기도 기억해서 조금 알지 동생들은 아무것도 몰라.”라고 맞장구를 쳤다.
<폭도에관한편책>에 의하면 ‘1908년 3월 15일에 이준명/李準明. 정원팔/鄭元八이 함께 의병 수명을 인솔하여 북면 하동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 의병장 민긍호가 체포된 후 이강년을 의병장으로 삼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준명 .정원팔 의병대는 1908년 3월 한 달 동안 인제 △가면리(加面里)△남면 유목정(楡木亭) △상수내리(上水內里) △관대리(冠垈里) △마무리(馬頭里) △기린면 엄수동(嚴水洞) △현창리(縣倉里) △사평동(寺坪洞) 등을 비롯하여 북면 설악산을 중심으로 요소요소에서 교전을 치렀으니, 인제 전 지역이 전장화(戰場化) 되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집에는 1908년 5월 4일 자로 ‘이강년. 이준명. 정원팔 등 이하 260명이 창암점 남방 약 20리 지점에 있는 오세암에 머물던 중 적의 공격을 받았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6집 독립운동, 민족주의 운동편. 의병운동 부(附)1. 조선폭도토벌지 제5편 제3장 기3에는‘1908년 5월 4일 리강년이 금강산 부근과 린제 부근으로 근거를 옮겨 활동하고 있었던 바 이날 리강년· 리준명· 정원팔 이하 의병 260명이 오세암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제천 쪽으로 후퇴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1908년에는 <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항쟁> 의병항일전에 나오는 전국의병장(全國義兵將) 도별조사표(道別調査表)를 보면 이준명과 더불어 이강년 의병대장 휘하 부장(副將)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金正明), 1967) 제1권 189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제1권 546면.
전봉엽 독립운동 투쟁
전봉엽(全奉葉, 1902. 11. 19 ~ ?)은 인제군 남면 신풍리 559번지가 본적이고 춘천군 북산면 조교리가 주소다. 활동내용을 살펴보면 전봉엽은 전봉엽(全鳳葉). 전봉업(全鳳業)이라고도 쓰며, 자가 중임(中任)이다. 전봉엽은 마남룡과 함께 1921년 9월 한말 의병으로 활동하던 친인척이 되는 마정삼의 아들 마만봉· 마뇌병· 마도현. 안이순. 안귀봉 등과 더불어 박영관의 아들 박순구 등이 그들의 부친이 일본군토벌대에 의해 피살당한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경을 살해할 목적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소위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26년 5월 7일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自隱里)에서 군자금으로 현금 105원과 물품 다수를 모금하였으며,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도 마남룡. 김석규. 안이순 등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는 등 춘천. 홍천. 인제 등지를 오가며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28년에 체포돼 마도현과 함께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렀다.
2022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포장(建國褒章)에 서훈했다.
성낙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