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삼회 10월모임"은 "2013 일본학과동문 추계야유회"와 겸하여 지난 일요일(10월13일)에 있었습니다.
오전 8시30분경에 서울 혜화동 방송대 정문에 집결하여 45인승 관광버스를 타고 철원으로 이동하여 예정된 일정대로 무사히 잘마쳤습니다.
일정은 공지한 바와같이 "방송대 정문출발 ~ 구리IC ~ 38선휴게소 ~ 삼부연폭포 ~ 신철원 ~ 고석정 임꺽정가든식당 중식 및 철의삼각전적관 관람 ~ 제2땅굴견학 ~ 철원평화전망대 ~ 철원두루미관, 월정역 ~ 노동당사 ~ 고석정 철의삼각전적관 ~ 서울 방송대 정문도착"이었습니다.
보다 많은 동문들이 함께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다소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하루의 시간이 아깝지 않고 영원한 추억으로 길이 간직하고도 남을정도로 소중함으로 가득한 "2013일본학과동문 추계야유회"였다는 솔직한 감회입니다.
우리 일삼회원 참가자는, 이홍식 회장님, 윤기호님, 김귀녀님, 이장노님 내외분, 박정윤님 등 6명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강원도 철원지역은 초행이라서 매우 기대가 부풀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육군에서 하신 분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해군을 복무하면서 삼면의 바다만을 끼고 유영했던터라 내륙의 철원지역은 당연히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하드라마 사극에서의 궁예왕이야기를 통하여 대강의 스토리를 아는 정도가 고작인 본인으로서는 물음표속의 철원에 대한 궁금증을 달래기 위하여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소소한 설명에까지 귀가 쫑긋하였고, 드넓은 철원평야지를 바라보면서는 속으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기 일쑤였습니다.
38선 이북의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스스로가 느끼고 말하고싶은 것은 그 얼마나 많을까, 차마 지면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이 번 "2013 일본학과동문 추계야유회 뒷이야기"를 두루마리 그림첩으로 애써 엮어봅니다.
우리는 흔히,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표현하고는 합니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며 곡식이 풍성하여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이겠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가을도 그동안의 아무런 노고가 없었다면 그저 빈 쭉정이의 허울좋은 가을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빈쭉정이의 그런 가을이 아닌 그야말로 단단히 여문 토실토실한 알맹이로 가득찬 풍성한 가을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이 좋은 아침을 나섰습니다.
여기서 저는 구태여 "풍성한 가을날"을 비유하여 "살찐 명마"를 인용해 봅니다.
"조조(曹操)의 시"중에 나오는 "명마(名馬)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일본 문예잡지인 "붕게이슌쥬(文藝春秋<문예춘추>)"에서 읽었던 내용을 잠시 인용하면서, 오늘의 "2013일본학과 추계야유회 철원안보투어"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합니다.
『 老驥(ろうき)は厩 (うまや)に伏(ふ)すも
志(こころざし)は千里(せんり)に在(あ)り
烈士(れっし)は暮年(ぼねん)なるも
壮心(そうしん)已(や)まず 』
<로키와 우마야니 후수모 / 코코로자시와 센리니 아리 / 렛시와 보넨나루모 / 소신와 야마주>
[명마(名馬)는 늙어서 마굿간에 누워지낸다 해도 그 기치는 천리(千里)를 달리고 있으며, 또, 진정한 용사(勇士)는 노년을 맞이해서도, 왕성한 기개를 결코 잃지않는 것이다]
대한민국해군을 제대한지가 벌써 25년도 훨씬 지나고 있는 저로서, 비록 이제는 예비군도 아닌 일반 국민에 지나지 않은 신분이지만, 그 때의 그 기상은 윗 시의 진정한 용사만큼이나 아직도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오늘의 이 행사에 걸맞는 우리들의 다소 긴장되고 마음속에 아로새겨질 그 어떤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잠시 군가 한 곡 정도 불러보면서 "철원안보투어"에 나서는 것도 괜찮겠지요?
"해군가(작사: 김찬호, 작곡: 이교숙)"입니다.
1.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
(후렴)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
2.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용사 살아도 또 살아도 정의와 자유
오대양 지켜야만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육군이나, 공군을 제대하신 분들은 각자의 소속군가를 부르시면 참 어울리겠지요.
혼자서 하는 넉두리라서인지 별로 흥미롭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좀 더 재밌는 구석을 찾아 여행을 떠나볼까요?
아래의 사진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본부교정이 새롭게 태어난 모습입니다.
약속시간보다 다소 빨리 도착하여 신축교정을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경관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정서가 질서와 어울림속에 가일층 새로워졌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할 뿐입니다.
방송대 신축건물 준공표지판을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방송대정문을 기준으로 좌우측에 이웃한 도심풍경을 파노라마모드로 담아보았습니다
KNOU서점앞으로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이 오늘 하루 일정을 위하여 우리들을 안전하게 인도해줄 아시아고속관광버스입니다
우리 차량은 정시보다 30여분 늦은 오전 9시경에 방송대정문을 출발하였습니다. 일요일 아침이라서일까, 서울시내도로는 비교적 한산하였습니다. 45인승 차량이지만, 오늘의 철원안보투어 참가자는 의외로 인원이 적어 28명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시내를 빠져나와 경기도 구리IC를 통과하는동안 잠시 협찬사 광고를 위한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에서 나는 아사이베리 열매와 그 상품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 번 행사의 이벤트라면 이벤트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목적지인 철원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들른 곳은 아래 사진의 38선 휴게소였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쾌적하고 청결한 맛은 못했지만, 38선경계비가 있는 의미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모두에게 흥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모두들 기념촬영과 함께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38선휴게소와 인접한 곳에 "6.25참전 유공자 기념비"가 있어 잠시 묵념하는 마음으로 카메라셔터를 눌러보았습니다.
38선휴게소가 위치한 주소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지역인데, 우리가 달리고 있는 도로이름은 "호국로"였습니다.
그런데, 38선 휴게소를 출발하면서 갑자기 마이크를 요청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13기 리기원 동문이었습니다. 벌써, 40여년 전의 군대생활 이야기이지만, 마침 그 때의 군복무지였던 이 지역을 통과하다보니, 문득 그 당시의 기억이 회상되었던 모양입니다.
때는 60년대 후반으로,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열악한 가운데 군대생활을 보내야만 했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저희들 또래는 5세 전후의 어린 시절이기도 하였습니다.
리기원 동문님의 말씀으로는 60년대 후반에 이 지역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제대를 하게 되었는데, 제대를 앞두고 일명 "1.21 청와대 기습사건(김신조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제 때에 제대를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북한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침투를 감행하여 수도권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략________ (31명중 김신조 생포, 28면 사살, 2명 도주)"
비록, 시간상 길게는 말씀을 못하셨지만, 당시의 기억들이 생생한 듯 잠시 상기된 어조로 당시의 감회를 말씀해 주시니, 그 무렵의 해군복무중이었던 나의 큰형님의 세라복 모습도 잠시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3기 리기원 동문의 60년대 후반 군대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게임박사 9기 석규호 동문이었습니다.
목적지 도착을 앞두고 정강균(2기) 회장님의 인사말과 함께 참가자들의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번 철원안보투어의 1일 담임교수는 현 학과장님이신 이경수 교수님이셨는데, 현금에 현물까지 찬조해 주셔서 모두의 박수로 고마움을 대신하였습니다.
또, 두 분의 일본분도 함께 하셨는데, 한 분은 올 7월부터 방송대에 객원교수로 오셨다는 야마다 아키코(山田 亜希子) 교수님이셨고, 한 분은 친구분인 사오토메 타쿠에이(早乙女 拓栄)님이었습니다. 두 분의 이름자가 자못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나름의 뜻풀이를 하여 외웠더니 금방 머릿속에 기억되기도 합니다.
야마다 교수님의 이름은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사람"으로, 사오토메님은 "1년의 수확을 위하여 모내기를 잘 하는 가문(사오토메<早乙女>의 사전적 의미가 못자리의 모를 내어 모심기하는 여인이라는 것에서)"으로 해서 각각 외워보기도 하였습니다.[^)^]
자기소개를 하는동안 벌써 버스는 아래 사진의 삼부연(三釜淵) 폭포에 도착하였고, 모두들 기암절벽과 단풍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며 탄성의 목소리를 자아냅니다.
모두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스마트폰 카메라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합니다.
절벽아래로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정말로 맑고 상쾌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생각같아선 퐁당 다이빙이라도 하고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참을 인(忍)자 세 번으로 그저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도로변 아래로 몇 개의 콘크리트단을 만들어 관람객들이 폭포를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도록 해놓았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그렇게 여유있는 시간은 할애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 조선후기의 화가) 선생께서 그린 진경산수화의 소재가 된 것이 널리 알려져 유명하게 되었다는 이 폭포는, 철원 8경에 들기도 하는데, 이 폭포를 안고 있는 산 이름은 명성산(922.6m, 鳴聲山,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망국의 슬픔으로 이 산에서 통곡을 하자 이 산도 따라서 같이 울었다는 전설에서 유래)입니다.
이 폭포는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기이한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보는 이의 눈길을 매혹합니다. 물이 낙하하는 세 곳이 모두 가마솥 모양으로 깊게 파여서 "삼부연(三釜淵; 세 개의 가마솥 연못)"이라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弓裔, ? ~ 918, 성은 김씨로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않은 궁녀, 901년에 후고구려 건국후에 918년까지 재위)가 철원을 도읍으로 삼을 때에 이무기 네 마리(2쌍)가 도를 닦고 살다가 그 중에 세 마리가 승천(昇天)하면서 3개의 바위 구멍을 만들었고, 이 3개의 바위 구멍(血淵;피가 고인 못)에 물이 고이면서 각각 "노귀탕, 솥탕, 가마탕"이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1747년에 71세의 겸재 선생은 세 번째로 금강산을 찾던 중에 이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폭포를 배경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린 것이지요. 그림속 폭포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하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겸재 선생이 금강산을 다녀올 때 마다 매번 금강산도첩을 남겼는데, "풍악기행(1712)"과 "해악전신첩(1747)"이 그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두 번째의 "해악전신첩"에 삼부연폭포의 그림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폭포의 맞은 편 2차선 도로변 위로는 비탈진 진입로가 약 60미터쯤 보이는데, 그 막다른 곳에 "행복한 절 부연사(釜淵寺)"라는 자그만 사찰이 있습니다. 폭포소리와 스피커로 울려나오는 목탁소리가 화음을 이루니 메아리로 들려오는 그 소리가 과히 네 마리의 이무기를 연상케도 합니다.
폭포를 마주보면서 오른 편으로는 그리 길지않아 보이는, 그리고 겨우 한 대의 차량이 통과할 정도의 작은 터널이 보이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오룡굴"이라 부르더군요. 도를 닦은 이무기는 네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더 있었던 것일까요?
이 터널을 지나면 폭포의 상류가 되는 "용화저수지"와 "용화동"이라는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삼부연폭포 주변의 자연을 파노라마모드로 연출한 것입니다. 자연경관이 매우 수려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철원의 대표적인 지형*지질유산입니다만, 여기서 잠시 폭포의 생성원리를 사전을 통하여 잠시 살펴봅니다.
이러한 폭포가 만들어지는 것은 보통 경사가 급변하는 지점(천이점<遷移點, Knick Point>)에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지형이며, 그 아래에는 큰 웅덩이인 폭호(瀑壺 ,Plunge Pool)가 발달한다. 폭호는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물의 힘에 의해서 자갈이 암반을 둥그렇게 갈아내면서(마식작용<磨蝕作用, Abrasion>) 형성된다.
높이 약 20m의 이 폭포는 명성산(870m) 중턱의 화강암 지대에 이러한 식의 가마솥 모양 폭호 3개가 만들어지는데, 이 것이 "삼부연(三釜淵; 3개의 가마솥모양 연못)"이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야마다 아키코 교수님, 13기 리기원 동문님, 그리고 필자인 3기 박정윤입니다
"삼부연(三釜淵) 폭포"의 유래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부연사(釜淵寺)로 오르는 비탈길입니다
삼부연폭포를 바라보면서 오른 편에 있는 오룡굴(五龍窟)의 모습. 이 터널을 통과하면 삼부연폭포의 수원지인 용화저수지와 용화동(龍華洞)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명성산 중턱의 삼부연폭포와 그 주변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폐부 깊숙히 심호흡을 하였더니 정신도 한층 맑아지고 기분도 상쾌해졌습니다. 생각같아선 도토리묵에 진한 토속주 한 잔씩 들이키면서 자연을 벗삼아 하루쯤 묵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배고픔을 달래줄 어느 곳을 향하여 철원평야를 가르며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하였습니다.
못다한 자기소개를 마저 마치고, 오늘 행사를 위해서 찬조하신 분들에 대한 소개와 또,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성산 기슭을 벗어나면서 곧이어 넓게 펼쳐진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는데, 생각보다 넓고 탁트인 것이 초행길의 이 내 마음을 얼마나 탄성케 하였던지요.
그런데,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달리는 중에 차창밖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는데, 차창유리가 왠지 이슬자국이 많아서 선명한 배경사진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맑고 높푸른 가을하늘 아래에서 함박같은 웃음속에 수확의 기쁨을 맘껏 누리고 있는 농부님들의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3차, 4차 산업이 주를 이루는 현대사회에서 1차산업인 농림어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농촌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분들이 있어 이 사회가 균형을 이룹니다.
사회가 아무리 발전하고 우주시대를 연다하여도, 비록 그 차지하는 비중도는 낮아질지라도 영원히 사장될 수 없는 것이 1차산업이고, 서비스업이 아무리 중요해지고 비중이 커진다고 해도 제조업이 영원히 사장될 수 없는 바와 같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좀더 숙고하는 마음으로 농촌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위의 내용에 덧붙혀 잠시 저의 짤막한 자서전적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누구나가 인생사에 희로애락은 다 갖는 것이지만, 저 또한 마찬가지의 우여곡절한 인생사가 있었습니다.
방송대에 일본학과가 개설된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이전의 일본유학에서 실패한 자기 인생의 목적달성을 위한 좋은 동기부여의 기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 IMF직후의 나라의 사정과도 겹치게도 되었습니다만, 그 당시에 나름의 세 가지 정도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농촌인 고향에서 잠시 농민의 신분이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 세 가지 목적을 잠시 소개한다면, 첫째는, 비록 명문대를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유로든지 일본유학에서 실패한 학업을 현실성을 감안하여 방송대를 통하여 최대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연로하신 어머님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모시면서 최소한의 효도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의도였고, 그 세 번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을 경시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이 진정으로 실천을 통해서 만인에게 각인될 수 있도록 하면서, 그와 더불어 미래의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닦고 갖추기 위한 기회로 삼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당시에 곧바로 실천에 옮긴 것이, 농촌생활에 편리한 모델의 승용차를 구입하고, 소값파동으로 인하여 폭락한 중소를 단 돈 70만원에 두 마리를 우시장에서 샀습니다. 물론, 이것은 방송대 수학중에 적당한 부업으로 괜찮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농사철이 되어 형님내외와 누나댁 일을 도우면서 본인 몫의 고추농사를 직접 경작하였습니다.
비록,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1년 정도를 참아내니 제법 좋은 결과가 나오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게 되었습니다.
소값은 불과 6개월만에 2~3배 이상으로 오르기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송아지를 낳아 네 마리가 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고추농사 또한 4년 연속 흑자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나름의 경작노하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아울러, 방송대 4년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이 좋은 세상에 자동차문화생활도 누려보시지 못할터인데, 출타시마다 어머님의 발이 되어드릴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효도할 수 있다는 마음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각설하면서, 우리들 차량은 또 철원평야를 질주합니다.
북쪽지역이라 벼수확은 거의 끝나가는 모습이고, 밭곡식을 수확하는 모습들이 풍성한 가을을 대변하는 한 폭의 그림입니다.
오전 9시경에 서울을 출발하여 중간에 3.8선 휴게소와 삼부연폭포를 경유하여 11시경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철원팔경중 한 곳인 고석정(孤石亭)입니다.
물론, 이곳이 이번 일본학과추계야유회의 주목적지는 아닙니다. 다만, 유서가 깊고 안보투어를 위해 중간기착지로써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철의삼각전적관을 비롯한 숙박과 관광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이 집중되어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곳에서 오붓한 점심식사시간을 갖고 정해진 시간에 오후의 안보투어가 이어질 것입니다.
철원군광광안내지도가 큼직하게 누구라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철원에 왔으니 철원팔경 정도는 알고가야 하지않을까. 이름 정도만이라도 잠시 적어봅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인 "고석정(孤石亭)", 한국의 나이아가라라 불리는 "직탕폭포", 오는 길에 들렸던 "삼부연(三釜淵) 폭포", 통일신라 경문와 5년(865) 도선국사가 지은 암자에서 비롯되었다는 "도피안사",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호에서 기원한 복계산의 "매월대폭포", 철원평야 안전영농 기반의 일환으로 1978년에 만들어진 "토교저수지", 한탄강 물줄기중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순담", 오늘 우리의 목적지중 하나인 1975년 3월 19일에 아군 지역에서 두 번째로 발견한 "제2땅굴"이 철원팔경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철의삼각전적관과 연계하여 넓게 만들어진 잔디구장에서 어느 단체인지는 모르지만 즐겁고 명랑한 모습으로 가을운동회를 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즐거운 점심식사가 이루어질 "임꺽정가든식당"입니다. 임꺽정과 유서깊은 관광명소라서 붙혀진 상호명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점심메뉴는 속칭 "38선비빔밥"이라나요?
비빔밥 하면 물론 전주비빔밥이겠지만, 강원도 청정고산지대에서 나오는 산나물채소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곳 "산채비빔밥"도 아주 맛이 별미였습니다.
오늘의 안전을 위해서 반주는 생략한다고 합니다. 아휴! 애주가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이 모두가 당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니 조금만 참아 주~셔~유---ㅎㅎ.
군것질 먹거리로 아침을 대체해서인지 모두들 식사시간이 경쾌하고 분주한 모습입니다.
식당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것이 오늘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안보투어"를 예감케 하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받어들여집니다.
맛있는 식사시간을 마치고 후식으로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십니다. 그러면서 식당 밖을 나오는데, 아름다우신 중년부인 한 분이 인사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안전한 철원안보투어를 위해서 가이드로 나오신 문화관광해설사이신 김명숙님이셨습니다.
상호인사가 이루어진 다음 잠시 15분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모두들 짧은 자유시간을 갖습니다.
저는 철의삼각전적관을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철의삼각전적관의 전면사진입니다.
6.25전쟁 때에 이 곳은 군사목적으로 상당히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방어하기에 최적조건을 갖추고 있어 빼았기면 다시 차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으로, 중부전선의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서 인천이나 원주까지 밀고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는 곳이었답니다. 그러한 이유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던 곳이었는데, 이 곳 철원을 수복한 것을 기념하여 본 "철의삼각기념관"을 세웠다고 합니다.
"안보견학프로그램"을 이 곳에서 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곳을 오늘의 중간기착지로 정한 중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전적관 내부의 관람은 무료로 이루어지는데, "통일관"이라 하여 북한과 관련한 다양한 실물자료와 사진들이 일목요연하게 잘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관람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않아 정신없이 디지탈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양이 좀 많은 듯 하여 부록으로 카페에 올리기 위해서 별도로 준비합니다.
또한, 철의삼각전적관 외부 전시로는 전차, 장갑차, 견인포, 비행기 등이 전시되어 있어 안보견학의 또 다른 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철의삼각전적관의 측면모습입니다.
측면 마당에는 주차장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전적관 내부 현관에 진열된 철원산지 특산품들을 사진으로 남겨봅니다
철의삼각전적관 1층 "통일관"전시실 입구 및 민원안내데스크입니다.
"철원안보투어"프로그램 참가희망 단체나 개인의 접수를 돕는 곳입니다.
"통일관" 전시실 내부의 모습입니다. 북한에 관한 많은 실물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의 그 날이 언제쯤이 될른지 모르겠지만, 가면 갈수록 언어와 문화 등 많은 것들의 이질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질화의 최소화를 위해서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다면 좋겠지요. 부록으로 개별사진의 모음집을 만들어 카페에 별도로 올립니다.
철의삼각전적관 정면에 펼쳐진 광장과 연계한 주변의 풍경입니다. 좌우측으로는 잘 가꾸어진 잔디정원 위에 전차 및 장갑차, 야포, 비행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철의삼각전적관 측면주차장에 인접해 있는 한탄리버스파호텔의 분수정원입니다.
가을날의 한낮 더위도 제법 따가운데 시원하게 물을 내뿜고 있는 분수정원을 바라보니 마음까지 시원해집니다. 단풍든 정원수와 조화를 이룬 분수대의 풍정이 제법 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 일행을 위해 수고해 주실 김명숙 문화관광해설사님께서 철원방문 축하인사와 함께 철원안보투어 일정을 소개하는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 차량은 해설사님의 안내대로 오후의 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해설사님의 목소리가 참 아름다우시니 듣기에 매우 편안합니다.
일반인 출입통제구역내를 견학하는 프로그램이라서 비교적 투어절차와 행동에 제약사항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오후의 일정은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월정역, 두루미전시관, 노동당사를 돌아보는 것인데, 일정이 매우 여유롭지 못한 듯 출발을 서둘러 버스는 이미 태봉로를 따라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며 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으로 진입중입니다.
철원평야를 지나가는동안 철원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 지역에 전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설사님을 통하여 흥미진진하게 전해 듣습니다.
철원은 특히 철새도래지로 유명한데, 버스의 창가로 보이는 하늘높이 날으는 수도 없이 많은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실로 장관입니다.
차체가 잠깐 흔들렸나요? 사진이 조금 흐릿합니다.
벼수확은 거의 끝나가는 모습입니다. 조생종은 벌써 수확이 끝나고 트랙타가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를 열심히 끌어모으며 겨울동안의 소의 먹이로 사용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하얀 비닐포장지로 커다란 드럼통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매우 이색적으로도 보입니다. 얼핏보면 몽골의 이동식 건축양식인 "빠오"로 착각할 정도로 그야말로 몽골의 드넓은 초원지 모습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한 다발씩 일일이 묶어서 한 곳에 높이 쌓아 비닐로 덮어놓고 겨우내 소의 여물로 사용하곤 하였는데, 지금은 기계화가 되어 비닐포장으로 자연발효까지 시켜서 소의 먹이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많은 소는 아니지만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근래에 본인도 소를 키워보면서 체험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중국대륙의 황사현상 등으로 가축의 전염병 등이 바람을 타고 오는데, 저렇게 포장을 해놓음으로써 가축의 전염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는 해설사님의 설명입니다.
차량이 철의삼각전적관을 출발해서 10여분 이상 지났을까요? 차창 오른 편으로 나즈막한 야산이 하나 나옵니다. 사방은 역시 평야지대입니다. 그런데, 그 산의 둘레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약간 큼직한 빨간색 삼각리본이 군데군데 매달려있습니다. 적혀있는 내용은 "접근금지, 지뢰지대(MINE)"이라 적혀있습니다.
철원지역이 신탁통치시절 북한에 예속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에 북한이 매설해놓은 지뢰가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고 통제구역으로 남아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설사님은 이것을 두고 제2의 전쟁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나도 전쟁을 위해 대비했던 대인 혹은 대물 지뢰들이 수도없이 세계 각지에 깔려있는 것을 제거하려면 또 한 번 지뢰와의 전쟁을 치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미국 국무부에서 "숨은 살인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전세계에 매설되어 있는 대인지뢰수에 대하여 최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전에 추정했던 수량보다 30~40% 줄어든 6,000만 ~ 7,000만개 정도라고 합니다.
아프카니스탄이나 캄보디아에서 근래에 지뢰제거문제에 대하여 많은 매스컴 보도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제2의 전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능한 많은 국가가 참여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제기구를 통하여 해결하여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수사불패 청성투혼(雖死不敗 靑星鬪魂; 비록 나 하나 죽을지라도 패하지 않는다는 청성부대의 투혼정신)" 이 뚜렷하게 적혀있는 이 곳의 검문소의 모습에는 초병이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민간인통제구역이 현 위치로부터 약 4km정도 후퇴해서 설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육군 제6사단 청성(靑星)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제6사단은 6.25전쟁 이전인 1948년 6월 충주에서 한국군 건군 모체인 제4여단 연대로 창설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사단으로 1966년부터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 곳 철원축선에 주둔하면서 철통같은 GOP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6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가장 먼저 북쪽 압록강 초산(3번국도 종점)까지 진격하여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대통령께 헌수하였으며, 중공군 대공세시에 이 지역의 용문산(1,157m) 전투에서는 중공군 3개 사단을 섬멸시켜 세계 전사(戰史)에서도 보기 드문 사주방어의 신화를 창조한 부대로 전군을 대신하는 명예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는 두루미로입니다.
철새도래지인 철원의 이곳에는 겨울철에 두루미가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두루미가 떼지어 먹이를 찾는 모습이 정말로 장관이라고 합니다.
평야지의 저 멀리 하얗게 보이는 것이 위에 설명한 소 먹이용 지푸라기사료입니다.
또, 도로변에 세워진 검정색의 그늘막은 두루미를 위한 시설이라고 합니다. 근처의 논 위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는 두루미가 통행하는 차량에 의해서 놀라지않도록 하기 위한 것과 겨울철의 많이 쌓인 눈으로 인해 먹이활동을 못하는 두루미에게 그늘막 안쪽으로 먹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철새의 보호를 위해서 인력으로 먹이를 제공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많은 것을 생각케 됩니다. 유년기 초중고교 시절만 해도 쌀밥은 고사하고 보리밥에 된장과 푸성귀를 넣어 비벼먹는 것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는데, 지금은 자연보호라는 명분으로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으니,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모했는지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잠시 카멜레온세상으로 명명해보기도 합니다.
아 참! 카멜레온도 그 몸색깔이 변하지 않는 종도 있다고 합니다~~~.
"355"라는 하얀글씨가 적힌 빨간 표지판은 항공기의 월북방지표식이라고 한다는군요. 155마일(약 249.5km) 휴전선 서쪽 끝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355"라는 번호는 그 순번이라고 합니다.
번호판 있는 곳에서 우회전을 하면서 우리의 목적지인 제2땅굴은 가까워집니다.
우회전 후에 5분여 지나는 곳에 도로 오른편으로 토교저수지가 보이면서 해설사님은 하나도 놓치지않고 저수지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해 줍니다. 인근에 양지리라는 마을이 있고, 이 저수지가 설치된 목적은 철원평야의 안전영농기반을 위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것으로 일명 전천후보(全天候洑)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여년 간에 걸쳐서 토축(土築)한 대규모 인공저수지랍니다. 저수지 면적은 338.84ha에 저수량은 16,568톤으로, 양지리, 대위리, 장흥리, 오덕리 일대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답니다.
철원안보관광의 중심지인 제2땅굴 진입도로변에 위치하여 수려한 호수경관을 형성하면서 겨울철에는 월동철새들의 잠자리가 되기도 하는데, 겨울철 이른 아침 7시경에 일제히 비상하는 기러기 떼의 군무(群舞)광경은 일대 장관을 이루면서 탐조관광객들의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한답니다.
토교저수지 인근에는 철새관조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집이 운영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드디어 일행은 토교저수지를 지나 제2땅굴이 소재하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골짜기의 산기슭을 깍아서 닦아놓은 주차장도 꽤 넓게 형성되어 있고 휴게실겸 땅굴전시관도 아담하게 잘 지어져 있습니다. 철책선 안쪽으로 초병들의 경계근무장면도 보입니다. 사진의 건물 뒷 편으로 우리가 견학할 제2땅굴의 입구가 있습니다.
해설사님으로부터 땅굴진입을 위한 제반 안전사항을 전해듣습니다.
제2땅굴 앞 작은 광장입니다.
사진의 왼 편으로 위령탑이 보입니다. 제2땅굴을 발견한 후에 북한군은 더이상 땅굴을 파지못하고 후퇴하면서 각종 지뢰와 뷰비트랩 등을 매설해놓았는데, 우리 군이 적의 남침용 지하갱도 작전중에 그것으로 인하여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으면서 8명이나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순국정신을 높게 기리기 위하여 세운 추모비입니다.
잠시 묵념하는 마음으로 추모비에 새겨진 전사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기억해 봅니다.
안내장병들의 도움으로 땅굴진입을 위해 안전모를 지급받아 머리에 씁니다. 정말이지 이 안전모가 없었더라면 땅굴안에서 머리를 움켜지며 들것에 들려 나왔을 것입니다. 높이가 겨우 2m정도로 낮은 편이기 때문에 바닥에 깔린 여러 안전시설에 의하여 더욱 낮아진 천정의 바위모서리에 자칫하면 받치기 일쑤이지요.
땅굴 끝을 마저 보고서 돌아나오는데, 한 꼬마아이가 안전모를 쓰지않은채 걸어들어옵니다. 왜! 안전모 착용않했느냐고 물으니 대답이 장관입니다. "자신의 키가 기준치 이하라서 쓰지않아도 된다고 해서라는군요". 다소 걱정이 되어 묻기는 했지만, 그도 그럴 듯 한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큭큭 웃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쓰는 것이 좋겠지요. 걸려서 넘어졌을 때를 안일하게 생각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 편으로는 머리도 너무 작아서 맞는 안전모가 없어서였을 것이라는 재밌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2013 방송대 일본학과동문 추계야유회 철원안보투어 제2땅굴 견학기념" 단체사진을 진입전에 촬영하는 모습입니다.
개척시대 미국의 서부로의 골드투어모습들을 잠시 상상하여 보았습니다.
북한의 남침땅굴임을 알면서 차마, 웃을 일은 아니지만, 해학적인 모습들에 그저 미소를 띄워봅니다.
위령탑에 새겨진 "적 남침 지하 갱도 작전"중 장렬히 전사한 여덟 영현들의 이름입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이 나라의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지켜보소서!"
"제2땅굴의 현황"을 시각적으로 보다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브리핑챠트라고나 할 수 있을까요?
한 눈에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1975년 4월 8일 땅굴발견시, 작전중에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육군청성부대원 고 김호영 중사 등 8명이 산화하였습니다. 그 분들의 넋을 추모하고 순국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세운 추모위령비의 비문입니다.
"전쟁이 영웅을 낳는다"는 말에 대한 새삼스런 댓글을 달아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논리이기에 상황과 생각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영웅"이냐, "희생"이냐가 논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하는데 다소 난해한 감은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전쟁이 영웅을 낳는 것이 중요하기보다는, 그에 따른 희생이 모두에게 영원한 상처로 남을 뿐이기에 이 땅에서 전쟁은 영원히 사라져야만 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특히, 저는 종교분쟁의 역사적 이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세계사적 남북이데올로기의 갈등이 해소되고 화해와 평화로의 이행이 진전되고 있는 현재의 국제사회적 조류에 걸맞는 표현으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1923~1996)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부연해 봅니다.
"종교는 물이나 공기와 같을 때는 좋지만, 종교적 정의라고 하는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변화할 때에 인간은 쉽게 악마가 된다(宗教は、水か空気のようである場合はいいが、宗教的な正義というもっとも悪質なものに変化するとき、人間は簡単に悪魔になる. <슈쿄와 미주카 쿠키노요데아루 바아이와 이이가, 슈쿄테케나 세이기토이우 못토모 아쿠시츠나 모노니 헨카수루토키, 닌겐와 칸탄니 아쿠마니 나루.> )"
오히려, 부연설명을 하지않는 것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는 측면에서 원문의 내용만을 번역하여 나타내어 봅니다. 참고로, 이 글은 시바료타로 선생의 역사기행 시리즈 "길을 가다(街道をゆく / 카이도오 유쿠)" 중에 나오는 내용임을 언급해 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평화를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뿐입니다.
제2땅굴의 발견경위 및 굴착증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 게시판입니다.
땅굴발견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제2땅굴의 발견동기와 그 과정, 그리고 땅굴의 제원 등을 설명한 안내판입니다.
두루미로를 따라 이곳에 오는 도중에 해설사님이 설명한 내용중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이 제2땅굴의 발견동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땅굴은 북한이 약 3년여 동안이나 파내려 온 것이었다고 하는데, 주로 다이나마이트 폭파작업은 북한군이 지상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군에서는 지하에서의 폭파음같은 것을 전혀 구별하여 들을 수가 없었는데, 1973년 11월 20일에 청성부대 소속 장병 2명이 경계근무중에 지하에서의 폭파음 소리를 듣게 되어 제2땅굴발견의 계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 폭파음 최초 청취자가 강원도 탄광도시인 태백시 출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줄곧 탄광촌 갱속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평소에 많이 듣고 또 그 소리가 귀에 익어서 이번과 같은 북한의 남침용 땅굴 발견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는 실화입니다.
우리는 이제 제2땅굴의 내부견학을 시작합니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발견하기 위하여 아군측에서 굴착장비로 파내려간 약 108m의 역갱도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제3땅굴을 견학하면서 느낀 점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우선 이 곳은 진출입경사로에 에스컬레이터시설(제3땅굴은 모노레일운행)이 안되어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노약자나 신체가 불편한 사람은 견학이 어려울 것 같아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건강한 사람으로서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올라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굴의 높이가 2m라고는 하지만, 바닥에 안전시설같은 것을 하고나니 허리를 구부리고 다녀야 할 형편입니다. 그렇게 큰 키도 아닌데 시종 구부린 자세로 다니려니 허리가 아프기도 합니다. 종종 잘도 부딪히는 머리, 정말이지 안전모가 없었으면 벌써 엠블란스의 들것에 실려 나갔을 것입니다.
화강암반속의 굴이라서인지 무너질 염려는 없는 듯 합니다. 지하유출수의 자연배수를 위해서 땅굴의 바닥을 1,000m마다 3도의 경사를 두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막힘없이 자연배수되는 것을 보니 측량기술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측에서 딸굴을 찾아내기 위해서 작업한 시추봉이 관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시추공도 표식에 의해 확인할 수 있고, 북한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작업을 위해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파놓은 많은 구멍자국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3땅굴에 비하여 제2땅굴이 확실히 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참을 걸어도 굴속 광장이 나오질 않습니다. 한 참이 지나서야 제2광장이 나옵니다. 우리측에서 파놓은 우물이 있고, 소원성취를 위한 의식을 행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물의 밑바닥에는 많은 동전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는 "평화통일"이라는 염원의 소리가 공중으로 많이 떠다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제1광장이 나옵니다. 사진촬영은 금하고 있으니, 북한측 굴입구쪽의 시설물들과 표식을 살펴봅니다. CCTV가 북한측을 바라보고 설치되어있고 화생방경보장치나 지뢰매설물 등의 표식이 보입니다.
영상장치에서는 제2땅굴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반복적으로 방영되고 있습니다.
원래 제1광장과 제2광장은 땅굴작업을 위한 작업자들이 식사 등을 하는 휴게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측의 땅굴굴착작업자들의 연령대는 대체로 고등학생 정도의 17~19세 나이의 청소년층이었다고 하는 해설사님의 설명입니다.
이제 제3땅굴 내부의 견학을 모두 마치고 다시 입구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들어오는 다른 팀이 있어서 좁은 통로를 비켜가려니 나가는 것이 조금 더딥니다.
혹시 박쥐라도 보이려나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았지만, 한 마리도 보이질 않습니다. 아마도 철원 제2땅굴에서는 박쥐는 키우지 않는 모양입니다. <^)^>
다시 108m의 역갱도 계단을 따라 올라와 출입구를 나서니 태양은 여전히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제2땅굴의 출입구입니다
땅굴내부의 견학을 마치고 밖에 나와 다시 한 번 개별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바라보고 좌측부터 정강균(2기) 일본학과 회장님, 필자인 3기 박정윤님, 김명숙 문화관광해설사님, 1기 정우진님입니다.
제2땅굴 내부의 견학을 마치고는 곧바로 땅굴입구와 마주보고 서있는 휴게소 건물로 이동하였습니다.
1층은 휴게매점이 있고, 2층에는 제2땅굴과 관련한 노획물들의 전시를 위한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전시관은 방문객들로 하여금 더욱 신뢰감을 갖게 함과 동시에 많은 것의 이해를 돕습니다.
1971년 7월에 사전 갱도 예상출구를 확인 탐지할 목적으로 철원 북방 3km 지점에 침투하였다가 아군에게 사살된 간첩으로부터 노획한 간첩장비들이 전시된 코너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생활용품들의 전시코너입니다
땅굴안 공사장 내부 습득물의 전시코너입니다.
갱도 내부에 설치한 전기도구와 착압기 파이프로 제품이 원시적이며, 아래는 아군에게 총격을 가할 목적으로 2차 콘크리트 차단벽에 부착한 총안구입니다.
갱도내부 습득물 코너입니다.
75년 3월 24일 ~ 동년 7월 19일 사이에 갱도 내부에서 노획한 적의 피복류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과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갱도차를 사용했던 흔적물의 전시코너입니다.
북한군은 갱도작업에 갱도차를 사용하였으며, 아군이 강력하게 차단해 들어가자 레일과 침목, 그리고 갱도차를 철수해 갔으나 이러한 흔적을 남기고 갔던 것입니다.
땅굴 공사도구 전시코너입니다.
갱도 내부에서 노획한 원시적인 공사도구로써 갱도작업에 투입된 북한군과 북한주민이 얼마나 혹사당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시추장비 전시코너입니다.
적의 남침 갱도를 발견하기 위하여 갱도통과가 예상되는 구역을 지하로 구멍을 뚫을 때에 사용한 것입니다.
시추작업 1m당 약 3만원이 소요되는 등, 막대한 예산이 들었으며, 이것은 후방 국민들의 방위성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북한의 간첩이 휴대했던 장비를 전시한 코너입니다.
제2땅굴 휴게소건물내의 매점입니다.
요즘에는 북한과의 무역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않아 비싸다는데, 재고로 남아 있어서 팔고 있다는 북한술(인풍술)을 한 병 기념으로 삽니다.
개성공단이 재가동에 들어가 다행입니다만, 모쪼록 평화적인 남북관계가 꾸준하게 진전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군복무중에는 얼마나 좋아했던 "군인건빵"이 추억의 식품으로 전시되어 있어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취사병들의 도움으로 건빵을 식용유에 튀겨서 설탕에 묻혀 맛있게 먹기도 했던 옛 추억이 뇌리에 생생합니다.
이제 우리는 제2땅굴의 견학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내입니다. 역시, 도로변 좌우로는 드넓은 철원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벼는 이미 수확하여 벼포기만 보일 뿐입니다. 이곳 철원평야는 호남평야나 김해평야 등과는 달리 한 달 이상이나 빨리 추수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철원평야는 전체적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인데, 현재의 평야지는 대부분 1978년에 인공저수지가 만들어지고 한탄강에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되면서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설사님은 지금 철원평야가 어떻게 이곳에 형성되게 되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화산섬 제주도지역에 있어야 할 현무암질 암석들이 왜 이곳에 이렇게 많이 분포하고 있을까를 설명합니다.
시대는 이미 머나먼 수 억년 전의 일입니다.
지질학 용어상 홍적세(洪積世; 지질시대구분의 하나로 신생대 제4기 전반의 시대. 인류가 발생하여 진화한 시대로 지구가 널리 빙하로 덮여 몹시 추웠다. 메머드 등의 코끼리와 현재의 식물과 같은 것이 생육하였으나 지리적 차이가 심했다) 중기(혹은 후기)무렵에 발생한 대규모 화산활동에 의한 것인데, 전곡리유적과 철원 일대의 구석기 유적이 형성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만드는 전조가 된 것이랍니다.
북한땅의 평강 오리(鴨)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옛 한탄강을 메우면서 철원과 연천지역을 거대한 현무암 지대로 변모시켰다는 것입니다. 용암이 옛 한탄강의 물줄기를 따라서 서남방향으로 흘렀는데, 엄청난 양의 용암이 단층선의 취약한 부분을 뚫고 열하분출(裂罅噴出; 지구의 껍질부에 생긴 갈라진 틈새로 용암이 분출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와 상대되는 분출형태를 중심분출이라 하는데 중간의 불구멍<火口 혹은 火道>으로 용암이 분출하는 형태로 제주도나 울릉도, 백두산 등이 이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한탄강 계곡은 샘솟는 용암의 양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계곡 상부로 넓게 퍼져 나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가령구조곡(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지질대를 일컬음)의 협곡지역은 비교적 편평한 용암대지(분출하여 흘러내리는 용암의 양을 강이 다 수용하지 못하고 강을 넘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강과 그 주변 일대가 넓고 편평하게 형성된 땅)로 재탄생하였으며 낮은 야산들은 용암에 뭍히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용암에 완전히 뭍히지 않고 산의 정산부만이 삼각뿔처럼 용암대지 위에 뾰족하게 올라와 있는데, 이를 스텝토우라고 한다는군요. 아래의 사진에 보이는 낮으막한 야산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엄청난 마그마가 분출되었기 때문에 좁은 협곡을 타고 흐르는 한탄강이 모든 용암을 다 수용할 수 없어 일부의 용암은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천을 역류하여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였답니다. 이 과정에서 지류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곳은 용암으로 인해 거대한 댐이 만들어졌으며, 지류천을 따라 흘러내려오던 물들이 한탄강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되자 마치 오늘날 댐 상류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듯이 영평천 일대와 차탄천 일대(연천읍 차탄리 일대)는 거대한 호수로 바뀌었답니다.
한탄강 상류에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용암이 용암댐을 넘어서 이 호수로 유입되면서 이 용암매체는 호수 속으로 돌돌 말리면서 빠르게 식게 되었는데, 신답리 아우라지, 동이리 도감포 등지에서 관찰되는 배개용암은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 글은 "강상식 학예사님"의 "전곡리유적의 지질사적 배경과 유적형성의 전조"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글을 잠시 부분인용한 것입니다.
아래 사진의 야산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윗 글중에 지질학용어인 "스텝토우"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어 한층 도움이 되는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의 평야지는 조선시대에는 재송편이라 하여 소나무가 많이 자라면서 숲을 이루던 곳이라고 합니다. 드넓은 재송편의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해발 219m의 얕은 산이지만, 입지적 잇점이 많아서 6.25전쟁 때에는 피아간의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하였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이 흙이 흘러내렸다 하여 일명 아이스크림 고지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또, 예전에는 이 산밑에 삽송리(揷松里 혹은 森松里)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 이름을 "삽송봉(揷松峰)"이라 하였는데, 말이 구전되어 오면서 변형되어 "삽슬봉"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답니다. 또 하나의 별명이 있는데, 산의 모양이 투구와 흡사하다 하여 "투구봉"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이 삽슬봉은 고려시대에는 산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어 이북땅인 북쪽의 평강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고도 합니다.
버스가 다음 목적지인 평화전망대까지 가는동안 해설사님의 설명은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 차량은 드디어 철원평화전망대에 도착합니다.
먼저, 주변을 한 번 살펴봅니다.
인공호수와 인접하여 넓은 주차장이 잘 마련되어 있고, "철원평화전망대 모노레일카"라는 큰 글씨의 간판이 붙어있는 현대식 철골구조의 건물이 산기슭을 타고 장방향으로 길게 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 마당의 잔디정원 위에는 구형 탱크 한 대가 전시용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또, 건물의 한 쪽 방향으로는 모노레일 철로가 산능선을 타고 기역자 형태로 이어진 것이 보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건물 중앙부의 현관격인 통로에 들어서니 한 쪽에는 넓다란 매점시설이, 또 한 쪽으로는 모노레일 매표소와 승강장시설이 잘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매점은 내려올 때 들르기로 하고 모두들 서둘러 모노레일에 탑승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은 아니라서 2량으로 되어있는 모노레일에 전원 탑승을 마치니 차체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360도 어느 쪽이라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높푸른 가을하늘이 정말 청명하여 나들이하기에 최적한 날씨입니다. 겨우 10여미터 올라왔는데도 인공호수 건너편으로 펼쳐진 철원평야가 한 눈에 쏙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나왔던 아이스크림 고지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입니다. 제법 거리가 있어서 산속의 자세한 것까지 보는 것은 망원경이 없이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경사도는 약 30%쯤이나 될까요? 90도 오른 편으로 꺽어지면서 평화전망대건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옆유리창으로 전망이 넓게 트인 방향을 바라보니 저 멀리 백마고지를 시작으로 그 앞쪽으로는 끝없는 초원지대마냥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가 펼쳐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입에서는 탄성을 자아냅니다.
불과 몇 분만에 모노레일은 평화전망대 광장입구에 도착하는데, 레일의 산쪽 방향을 보니 중간 쯤에 불교도들을 위한 군종사찰이 보입니다. 군종사찰 위로는 자비로운 모습의 부처님상이 높게 서있습니다.
모노레일에서 내려 평화전망대 광장입구로 들어서니 10여미터 더 높은 대지에는 천주교와 교회, 그리고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예수상과 마리아상 등 종교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들 평화전망대에 오릅니다.
1971년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전차입니다.
90미리포와 50구경 기관총, 30구경 기관총을 각 1정을 장비하고 있고, 엔진은 825마력의 AVT-1970 엔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노레일 승강장의 모습입니다
전망대에서 남쪽방향을 보고 촬영한 것입니다. 평화전망대 바로 아래로는 주변의 농업용수용 "동정호"가 보이고, 그 저편으로는 위해서 설명한 아이스크림 고지가 보입니다.
"동정호"는 일명 "강산저수지"라고도 불립니다. 수계는 평강군 남면 학전리에 있는 보양호와 가곡 등지에서 유입되는 수자원을 저수하여 1977년에 토축한 인공저수지로 제방연장은 3km로써 단일제당 규모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고 합니다.
저수지면적 74.9ha, 저수량은 42,367톤이며, 유역면적은 1,827ha, 몽리면적은 802.3ha로 강산리, 하갈리, 양지리일부 지역에 관수하는데, 철원 안보관광코스와 접해있어 좋은 관광명소가 되고 있답니다.
모노레일의 철로시설입니다
휴전선을 동쪽에서 서쪽을 보고 촬영한 것입니다.
육군제대자가 아니라서 모든 것이 생소합니다만, 몇 년 전에 제3땅굴과 도라산역 관광을 해본터라 많은 것이 눈에 익습니다.
남방한계선과 그 위쪽으로 보이는 비무장지대, 그리고 북방한계선과 북녘땅이 마치 세계의 큰강 하구유역에 펼쳐진 초원지대마냥 광활하고 삼림이 우거집니다.
저 멀리 보이는 몇 개의 산들은 6.25당시에 꽤 유명한 접전이 벌어졌던 유명한 산이라고 합니다.
모노레일에서 내리니 철원평화전망대 건물이 한 눈에 쏙 들어옵니다.
줌조작을 안해도 카메라렌즈에 온전하게 포착됩니다.
전망대 오른 편으로 높은 대지위에 우뚝 솟아있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무슨 의미로 세워졌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후로 햇볕정책을 이유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이 크리스마스 등탑점등을 하지않고 있다고 합니다.
전방부대의 남북상호간 심리전 활동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잘 알고는 있습니다만, 쉽게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면도 많이 엿볼 수 있습니다.
대하드라마의 사극 등을 보거나 중국사서 등을 읽으면서 가끔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적막한 밤하늘 아래 매복중인 적군들을 자극하기 위하여 고향생각이 절로 나는 싯구나 노래 등을 불러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작전장면 등이 있습니다.
그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전법의 근원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궁예왕의 옛 태봉국 도성지가 휴전선경계와 맛물려있다고 해서 그쪽을 향해서 카메라 렌즈를 맞추어 보았습니다만, 보다 큰 카메라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철원지역을 직접와서 살펴보니 과연, 궁예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할만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지금 보이는 곳은 비무장지대와 남북방한계선을 포함하는 구역입니다. 숲이 우거지고 자연생태가 그대로 보존되고는 있습니다만, 저 지역은 제주도와 같은 현무암질 토양이라서 수전농은 어렵고 밭농사로 옥수수 등을 주로 재배하며 토지로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합니다.
우리쪽은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방 약 2km선을 남방한계선으로 잘 유지하고 있지만, 북한측은 그 북방한계선이 거의 휴전선에 근접하게 내려와 있다는 해설사님의 설명입니다.
휴전선은 물론 경원선 철로와도 맛물려 있는 태봉국 도성의 개관(槪觀)입니다.
* 관련자료
-. 문헌 :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지도 : 일제시대의 철원지도(1917년, 1:50,000), 군사지도(1:25,000, 1:50,000) 항공사진(1951년 미군제작)
* 위치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방 풍천원 벌판(중강리, 월정리, 홍원리, 가월리 일원)
* 구조 : 방형(方形), 이중성(二重城; 내성과 외성), 9.5도 동북향
* 축성재료 : 토축(土築)에 부분적인 석축(石築; 현무암)
* 성벽의 형태 및 규모
-. 형태 : 사다리꼴
-. 규모(1942년 당시)
^^ 둘레 : 내성(7.7km<1.5km * 2.35km>, 외성(12.7km<2.75km * 3.6km>)
^^ 높이 : 12척(3.6m 내외)
^^ 폭 : 하단(6간<10.9m>)
@@ 잔존상태 : 높이 1.2m ~ 4m, 하단 4m ~ 7m
-. 유적 : 왕궁(터)(포정전<布政殿>), 사찰(미륵전), 석등(국보 제118호), 석탑(3층), 귀부, 어수정
-. 정도(定都)기간 : AD 905 ~ 918
-. 주변의 궁예관련 유적 : 보개산성(포천), 명선산성(포천군), 운악산성(포천군), 동주산성(철원군), 궁예궁궐터(파주시)
태봉국 도성지로 보이는 곳을 최대한 줌으로 당겨서 촬영한 것입니다
남방한계선을 따라 희미한 산능선까지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요?
백마고지가 있는 방향입니다.
대동방국(大東方國)의 꿈
일찍이 철원평야의 지정학적*정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했던 궁예왕은 905년에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911년에는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바꾼다.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대동방국(大東方國) 건설을 국가이상으로 삼았던 궁예왕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태봉국 도성은 <왕궁성>의 둘레 길이가 1.8km, <내성>은 7.7km에 달하며 <외성>은 무려 12.5km나 되는 3성구조 도성형식을 취하고 있다.
태봉국 도성은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갇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 도성에 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와 「조선고적도보」에 석등과 석탑, 귀부 등에 관한 사진과 설명이 있어 유적에 관한 흔적을 짐작케 할 뿐이다.
따라서 태봉국 도성 재현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고대사 연구학자들과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동시대를 대변하는 고구려 <안학궁>과 발해 <상경용천부>, 신라 <왕경>, 그리고 당나라와 일본의 3성구조와 방리제(坊里制=條坊制; 고대도시의 구획방법의 하나로 그 기원은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특히 도시마다 서로 다른 구획기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고대도시로 경주와 평양이 그것의 주요 연구대상으로 현재진행형이라는 학계의 말이다) 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태봉국 도성은 현재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정확히 반쪽은 북한, 반쪽은 남한으로 양분된 형국이지만, 이 금단의 땅은 오히려 21세기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시발지가 되고 있다.
천년 전 고려 건국의 토대가 된 태봉국의 이상과 정신은 남북 통합의 구심점으로 다시 일어나 통일시대 역사의 중심에 설 것을 기대한다.
태봉국 도성도(泰封國 都城圖)입니다.
모형도를 크고 아주 보기 쉽게 잘해 놓았습니다.
궁예의 태봉국이 고려를 왕건이 세우는데 근거지가 되었다는 측면에서 정말 의미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나,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연 통일신라시대에 이어 두 번째로 한반도의 통일국가를 연것이 고려이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국호가 조선으로 바뀌긴 합니다만, 조선시대 역시 한반도 통일국가의 연속이었습니다.
비록, 조선말 이후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북신탁통치시대가 원인이 되어 6.25전쟁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이 전개되었고, 또 현재와 같은 갈라진 남과 북으로 남아있는 형국이긴 합니다만, 한반도의 통일국가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도록 그 맥(脈)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는 면에서 그 시사점이 매우 크다고 할 것입니다.
모쪼록, 휴전선의 한을 풀어주는 또 한 번의 중요한 역할자로서 자리매김 해주기를 마음 깊이 기원할 뿐입니다.
그럼, 궁예와 태봉국 도성지(泰封國 都城址) 이야기를 잠시 살펴봅니다.
신라의 왕실 태생으로 전해지는 궁예( ? ~ 918)는 일찍이 궁중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세달사(世達寺; 궁예왕이 10세 즈음에 출가했다는 사찰로, 고려시대에는 보덕사의 극락보전 등을 창건한 원경국사<元敬國師, ? ~1183> 충희<沖曦>가 머물던 흥교사<興敎寺>이다. 사찰은 없으나 2012년 6월 11일 밭 개간작업중에 출토된 유물이 있다는 것을 영월군이 확인함에 따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에서 성장한 후 북원(北原; 현재의 원주)의 양길(梁吉;신라 진성여왕 때의 반란자) 밑에 들어가 세력을 키웠다(892년).
특히 명주(溟州; 현재의 강릉) 등 영동지역 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사원의 수원승도(隨院僧徒; 군현의 거주민처럼 항산<恒産;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산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수가 대단하여 한 사찰에 1,000여명 이상에 달하기도 하였다. 형성배경은 정확치 않으나 신라말 선종사원의 사하촌<寺下村>이나, 고려초 대사원 정책과의 관련성에 따른 것으로 본다)들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미륵사상을 내세우면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진성여왕(877~897) 통치하의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영서지방을 거쳐 철원으로 진출한 궁예는 계속 서진하여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요 왕씨(王氏) 세력의 아성인 송악(현재의 개성)을 장악한 후 그곳에 후고구려를 건설하였다(901년).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지녔던 궁예는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904년), 도읍지도 한반도의 중심지인 넓은 철원평야의 풍천원으로 다시 옮겼다(905년).
그는 새 도읍지에 대규모의 도성을 쌓고 국호도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911년),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수립하여 나아갔다. 그는 불교적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정치(神政的 專制政治)를 추구하였으나, 이러한 신정정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계 호족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초래하여 궁예는 결국 그들과의 대결에서 패자가 되고 말았다(918년).
비록, 궁예는 몰락했지만,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그의 정치이념과 대제국 건설의 이상은 왕건(王建)을 통하여 고려로 계승되었다.
궁예가 풍천원의 새 도읍지 주위에 쌓은 태봉국 도성지는 현재 월정역 북방 비무장지대안에 놓여있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二重城)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남북으로 긴 사각형 형태이고, 북쪽이 동쪽으로 9.5도 기울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외성이 12.5km, 내성이 7.7km로써 대부분 토성이지만, 일부는 현무암을 섞은 토석 혼축성(土石 混築城)이다.
해방 당시에 외성의 하단폭은 10.9m, 높이 3.6m였고, 내성의 하단폭은 3.6m, 높이 2.1m 정도였으나, 최근의 확인결과 현재의 남아있는 성의 폭과 높이는 해방 당시의 절반정도이고 많은 부분이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 해방 당시에는 내성의 북쪽에 궁궐터인 포정전지(布政殿址)와 석등(해방당시 국보 118호), 그리고 외성 남벽에 남대문지(南大門址)와 석탑 및 돌거북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도성안 동쪽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경원선 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으나 철도는 모두 제거되고 철도제방만 남아있다.
지금은 이 도성 한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가로지르며 도성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어 앞으로 이 도성의 조사와 연구는 남과 북이 뜻을 합하여 함께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민족 공통의 과제로 남아있다.
궁예왕과 태봉국성도와 관련한 모형도 및 그 역사에 관한 비교적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군사분계선이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안의 성터를 육안으로 직접 바라보니 천 년 전 그 때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집니다.
여기에 서 있는 나 자신이 그 당시의 궁예왕이라는 생각으로 드넓은 평원을 둘러보니 과연 한반도를 가슴으로 품을만한 그러한 기개같은 것을 갖고도 남음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궁예왕 본인이 그 꿈을 실현하지는 못하고 맙니다만, 그로 하여금 닦아진 통일왕조의 기틀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입니다.
스스로가 미륵불이라 자청하면서 관심법에 도취가 되어 자신의 숙명사업을 이루지 못하면서 패주의 길을 걷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대하드라마 사극을 통해서 보던 그 때를 떠올려봅니다. 물론 줄거리 전체가 기억날 정도로 또렷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2층의 전망대로 올라갑니다. 전망대의 공간은 매우 넓습니다. 방송국 스튜디오 방청석마냥 많은 사람이 앉아서 전방의 비무장지대와 북한땅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창이 천정과 바닥사이의 창틀에 끼워져 좌우로 길게 시설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180도의 시야는 확보되는 것 같습니다. 앉을 수 있는 계단형태의 의자시설도 전방조망과 지형설명 등을 위한 TV 시청에 알맞도록 잘 되어 있습니다. 단체방문객 약 200명 이상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시설같습니다.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도록 지형을 축소하여 모형으로 제작해 놓은 아래 사진의 시설도 매우 편리하고 좋습니다.
일행은 먼저 전면 천정에 매달려있는 TV를 통하여 이곳 통일전망대의 안내와 개괄적인 여러 설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시청합니다. 그 다음에 해설사님으로부터 모형의 지형도를 보면서 보조 설명을 듣습니다. 제반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전에 제3땅굴이 있는 곳의 도라산 전망대를 방문했을 때는, 그곳에 근무중인 안내장병의 절도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으로 지시봉을 들고서 전방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을 들었었는데, 이곳은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비무장지대와 북한 땅을 바라봅니다. 그 안내장병을 대신하는 분이 이번에는 문화광광해설사님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습니다만, 각자 나름의 의미부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전망대를 돌아보는동안 다른 팀이 없어서 비교적 조용하고 복잡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만, 이제 내려가려 하니 다른 단체팀이 들이닥칩니다.
모두들 유리창 밖의 실외 테라스에서 육안으로 북한땅을 바라보면서 기념촬영도 하곤 합니다.
비무장지대와 태봉국도성지 그리고 북한땅의 주요 지형 등을 나타내는 모형의 지형도를 보면서 각각의 주요 지명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먼저, 궁예도성을 중심으로 알아봅니다. 궁예도성의 안으로는 거의 1/2지점이라 할 정도로 중심부를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습니다. 궁예도성 외성의 동쪽(사진의 오른쪽) 성벽에 치우쳐서 지금은 제거된 경원선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는 철로표시를 해놓고 있습니다.
궁예도성의 북서방향 모서리부로는 북방한계선이, 남동방향 모서리부로는 남방한계선이 각각 지나면서 그 연장선 곳곳에는 남과 북의 초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남동방향 모서리부에는 우리가 다음 일정으로 경유할 월정역과 두루미 전시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있는 위치는 궁예도성 남동방향 모서리부에서 다소 이격된 곳입니다. 강산저수지의 북쪽 끝 모서리 부분이 그 사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궁예도성 북쪽으로는 북방한계선에 거의 인접한 곳곳에 "선전마을"이 있다는 표지판이 서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육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연립주택이나 단독주택들처럼 군락을 이루며 여기저기 많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선전마을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잠시 키워드 검색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많은 사진과 글들이 검색됩니다.
북한의 이러한 선전마을은 해마다 상당한 규모로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살고있는 주민은 거의 보이지 않고, 건물만 우뚝우뚝 서있기만 하였지 도로기반을 조성하는 흔적은 거의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겨우 리어카정도 지날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석연치않은 면면들입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이 선전마을이 소재하는 곳의 주변 야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라는 점입니다.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잘려나가는 것도 있겠지만, 탈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민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에서 일부러 벌거숭이 산을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궁예도성을 기준으로 서쪽 방향으로는 6.25전쟁 당시에 격전지로 명성을 올렸던 몇 개의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피의능선 등이 바로 그러한 산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전망대에서 똑바로 마주보이는 곳에는 평강고원과 이어지는 낙타고지와 오리산이 보입니다. 한 편 전망대 오른 편 45도 방향으로는 서방산이 보입니다.
이들의 산들에 대한 이야기는 개별사진과 함께 알아봅니다.
"피의 능선" 이야기는 "바다낚수(樂水)"라는 카페에 공개한 이야기를 잠시 인용하면서 6.25전쟁 당시의 처절했던 실상을 돌이켜보는 시간으로 삼아봅니다.
피의능선이 소재하는 곳은 강원도 양구군입니다.
이 곳에서의 전투기간은 1951년 8월 18일부터 동년 9월 7일까지이고, 참전 병력은 아군으로는 국군 제5사단 36연대, 7사단 8연대, 8사단 27연대, 미국 2사단 9연대, 72중전차대대 B중대, 1해병사단, USAF 5공군이, 적군으로는 북한군 6, 12, 27사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이끈 당시의 주요 지휘관은 유엔군의 황엽(1921~ , 당시 연대장, 대한축구협회장 엮임)과 클락 루프너이고, 북한군은 최충국, 조관이었다고 합니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우리나라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피눈물을 머금고 1.4후퇴를 하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시작해 1951년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하지만, 그 이후로 양측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마침내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열게 됩니다.
그러나 짧은 휴전회담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은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던 주요 고지에 철통같은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보급로를 확보합니다.
결국, 이 한 달간의 회담기간 때문에 양측은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전장을 "피의 능선"으로 만들게 됩니다.
이 "피의 능선"이란 이름은 당시에 전장터의 능선위로 처절히 흐르는 피의 강을 본 외신기자들이 붙인 것이랍니다.
장마가 끝난 8월 중순,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미군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격을 재개합니다. 이 지역은 국군 5사단 36연대와 미군 2사단 9연대가 공략을 맡고 있었습니다. 먼저, 국군이 공격을 개시합니다.
8월 18일 황엽 대령이 이끄는 36연대가 미군 야포 200문의 지원하에 983, 940, 773고지를 향해 돌격하였습니다.
능선 아래의 공짜기는 피바다가 되었고, 산 아래의 미군 포병단 주변은 탄피바다가 되었습니다.
미군이 퍼부은 포탄은 무려 2.5톤 트럭으로 5천대 분량이었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완강하였고, 심지어 회담기간중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 때문에 5부 능선을 돌파한 부대들조차 더 이상의 전진은 힘들었습니다.
18일과 19일 양일간 773, 940 고지를 향해 돌격했던 5중대와 6중대는 궤멸지경에 이르를 정도였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와중에 적의 약점을 꿰뚫은 5중대장 최병길 중위와 11중대장 정창호 중위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773고지는 8월 20일, 983과 940고지는 8월 22일에 점령했다는 점입니다.
황엽 연대장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자신이 36연대로는 고지를 사수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곧바로 미군 2사단에 고지를 사수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미군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너희가 해낸 영광의 점령지를 왜 남한테 맡겨?"하면서 황엽 연대장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8월 27일까지 세 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맹공으로 그 세 고지를 몽땅 잃고 맙니다.
이 때부터 양측의 고지뺏기싸움은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아침에 점령했다가 저녁에 후퇴하는 일이 반복되자 미군 2사단 사령부는 작전을 수정하게 됩니다.
기존 병력에 72중전차대대 B중대, 미군 1해병사단, 국군 7사단 8연대, 8사단 27연대, USAF 5공군까지 투입하는 물량공세를 펼쳐 북한군을 3면에서 포위하고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진작 이러한 작전을 폈더라면 국군 36연대 거의 모든 병사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늦게나마 미군이 상황을 인식하고 대처한 덕분에 드디어는 773고지가 미군 2사단 9연대에 함락되자 북한군 3개 사단은 나머지 940, 983고지를 포기하고 북방의 894, 941, 851고지로 퇴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처절한 전투는 아직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북한군이 퇴각한 그 고지대 역시 악명높은 "단장의 능선"이었던 것입니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게 된 동기는 전쟁으로 인하여 헐벗은 산의 모습이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서두에 조조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명마(名馬)이야기를 잠시 하였습니다만, 아래 백마고지전투에서 고지를 지켜내기 위해서 전 유엔군 장병들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싸워준 그 정신이야말로 먼 훗날까지도 영원히 장한용사상의 넋이 되새겨진 명마(名馬)고지로서 전해질 것임에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럼, 백마고지(白馬高地)에 관한 이야기도 역시 "바다낚수(樂水)"님 글에 신세를 집니다. 당시의 생생한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기분속에 잠시 빠져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백마고지(395m)는 강원도 철원에 위치하며, 전투기간은 1952년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입니다.
참전병력으로는, 유엔군이 국군 9사단 28,29,30연대, 51,52,53포병대대, 53전차중대, 미군 213자주포대대, 955중포병대대, 73전차대대였으며, 중공군은 38군단 112,113,114사단이었습니다.
주요 지휘관으로는 유엔군의 김종오(1921~1966, 충북 청원출생, 당시 대령계급의 9사단장, 전 육군참모총장, 대장), 중공군의 장융후이였습니다.
6.25전쟁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 1952년 후반기는 휴전회담이 한창인 때였습니다.
그 때문에 양측은 전면공세는 하지않고 군사력을 재정비하면서 증강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때문에 모든 전선에 걸쳐서 교착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의 기본작전은 모두 11곳의 중요 고지를 적으로부터 탈취한 후에 진지를 구축하여 회담이 끝날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고지중에서 유명한 곳이 바로 백마고지(395고지), 화살머리고지(백마고지 서북방 3km지점, 281고지) 등입니다.
유엔군이 빼앗은 중요 고지들은 이후에 끝없는 쟁탈전에 휘말리게 되는데, 서로 보다 유리한 위치의 고지를 확보하고 방어망을 쳐두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국군 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기 1년전인 1951년 10월 17일부터 11km에 달하는 철원평야전선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방어하는 지형이 대부분 평야였기 때문에 전선의 좌측에 위치한 구릉인 백마고지가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당시의 9사단장 김종오는 30연대에 백마고지 일대의 방어를 맡겼고, 백마고지 위에는 달랑 30연대 1대대가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10월 3일 전향한 중공군 장교 1명으로부터 "10월 4일에서 6일 사이에 백마고지를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이에 김종오는 재빨리 백마고지에 1개 대대병력을 더 투입시키고 28연대를 예비부대로 준비하여 즉각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그리고 적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합니다.
과연 중공군 전향장교의 정보대로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114사단 340연대의 2개 대대가 하나는 능선을 따라 공격하고, 또 하나는 백마고지를 직접 치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3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중공군은 결국 후퇴합니다. 중공군은 이날 밤에 백마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양동작전으로 화살머리고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이 고지에 배치되어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낸 부대는 다름아닌 앞서 나온 프랑스 대대였습니다.
10월 7일 재차 백마고지 공격에 나선 중공군은 이번에는 포위전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견디지 못한 국군 30연대는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으나, 단 두 시간만에 국군 28연대가 기습을 감행하여 고지를 재탈환합니다.
10월 8일에도 역시 아침에는 빼앗기고, 저녁에는 빼앗는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3일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28, 30연대는 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병력에 손실을 입고 말았습니다.
10월 9일에는 자정이 되어서 중공군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3시간 정도의 집요한 공격끝에 결국 중공군은 능선 일부와 백마고지를 수중에 넣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국군은 백마고지 정상에 1만 7천발의 포탄을 날렸습니다. 폭격기도 쉴새없이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마침내 밤이 되자 29연대가 역습을 펼쳐서 고지를 재점령합니다.
백마고지를 내주고싶지 않는 마음은 중공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조석으로 고지의 주인이 뒤바뀌는 싸움이 계속 되었지만, 결국에는 10월 15일 29연대가 백마고지 북쪽에 있던 적 진지를 탈환하였고, 중공군 제39군단 예하 3개 사단은 궤멸상태에 이르러 마침내 철수하고 맙니다.
9일간에 무려 12차례의 공방전을 펼친 처절한 싸움 끝에 얻은 승리였습니다.
한 편, 화살머리고지를 방어하던 프랑스 대대는 많은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지를 지켜 적의 양동작전을 막아냈습니다.
전망대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지척지간으로 낙타고지(432.3m)가 보입니다. 육안으로 확실히 볼 수 있는 산이라서 이름처럼 낙타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산 꼭대기에 초소같은 건물이 하나 있지만, 인기척은 안보입니다. 선전마을 외딴집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그리고 그 오른쪽 옆뒤로 오리산(鴨山; 453m)이 보이고, 그보다 더 뒤로는 조금 나즈막하게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지대(실제 촬영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가 보이는데, 평강(330m)고원이랍니다. 더 뒤로 안개속 흐릿하게 조금 높게 보이는 것이 장암산(1,052m)이라고 하는데, 이 장암산이 한탄강의 발원지라고 합니다.
모두가 가보고싶은 땅이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비록, 밟아보지는 못하는 땅이긴 하지만, 이 오리산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언급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습니다.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압산(鴨山)이라고도 한다는 이 오리산은 해발 453m로 해발 220m인 철원보다 230여 미터가 높습니다.
그런데, 철원지역이 드넓은 평야지대로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 동기는 바로 이 오리산 지대에 화산이 폭발하면서입니다. 그 분출된 용암의 양이 엄청나게 많으면서 지대가 낮은 이곳 철원을 비롯한 포천, 파주, 연천지대까지 무려 약 97km에 이르는 지역까지 흘러들었다고 합니다.
그 흘러든 용암이 식으면서 광활한 대지를 이루는데, 이른바 현무암대지라 일컫습니다.
넓이로 치면 약 650 [㎢](약 2억평)나 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최소한 10번 이상은 마그마분출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니, 그럴 수 밖에요.
특히, 이 오리산에서 발생한 화산폭발은 열하(裂罅)분출형태를 띄는데, 이 열하분출은 한라산, 울릉도, 백두산 등의 화산분출형태인 중심분출과는 다른 거북이 등껍질 갈라지듯 지구의 바깥표면(지각=地殼)이 갈라지면서 그 갈라지진 틈새로 마그마가 분출되어 나오는 형태였던 것입니다.
지질학적 설명으로는 이러한 형태로 분출되는 마그마는 주로 점성이 약한 현무암질로 흘러나온 용암이 엄청난 평원을 이루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오리산이 주변 지형보다 불과 140m밖에 높지않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원지인 오리산이 소재하는 평강의 현무암층의 두께가 가장 두껍다고 합니다만, 그 뒤로 지구상의 빙하기를 거치면서 간빙기 시대에는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현무암지각층이 얇아집니다. 액체상태의 마그마가 고체상태의 현무암으로 식어지자 수축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뒤로 간빙기(間氷期, Interglacial; 빙하기에 빙기를 구분하는 지질학적인 따뜻한 평균기온. 전통적으로 간빙기는 육지 또는 얕은 대륙붕에 살았던 고생물에 의해 밝혀짐)시대에 빙하가 녹으면서 지대가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고체상태의 용암이 수축작용으로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 갈라진 사이의 골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길이 되어 지금의 한탄강과 임진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에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열립니다.
약 30만전의 일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사용했던 고인류가 이곳에서 출현하게 됩니다만, 그러한 측면에서 북한의 그 지역에서는 오리산을 "한반도의 배꼽(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전망대에서 촬영한 낙타고지(432.3m)의 모습입니다.
중앙에 아늑한 모습으로 나지막하게 보이는 산이 오리(鴨;453m)산이랍니다. 한반도의 배꼽이라 부를만도 하지요. 푹 들어간 곳이 꼭 배꼽모양 닮았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해 보입니다.
그 뒤로 높게 보이는 산이 한탄강의 발원지라는 장암산(1,052m)입니다.
사진의 낙타고지 좌측 뒷편으로 멀리 지평선으로 보이는 곳이 해발 330m높이의 평강고원이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마고원 다음으로 높은 고원지대라고 합니다.
물론, 가까이 보이는 아마존 하구언삼각주처럼 보이는 곳이 우리들의 원통한 분노를 안고 있는 비무장지대입니다.
원산까지는 약 100km의 거리라는 표식입니다.
현재, 철로는 사라졌지만, 경원선철도의 흔적이 낙타고지와 오리산 사이로 남아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통일이 되면 이 노선은 분명히 복원되겠지요.
원주지방환경청과 강원대학교 어류연구센터에서 공동으로 실시한 민통선내의 산명호 모니터링 결과 국내의 인공호중 유일하게 외래어종이 전혀 없는 자연 그대로의 어류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호수입니다.
소재한 곳의 주소가 철원읍 "산명리"라서 "산명호"라 불리는 것 같습니다.
총 8과 24종의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한국 고유어종으로 멸종위기종 Ⅱ급(2급) 묵납자루를 비롯하여 줄납자루, 긴몰개, 돌마자, 참갈겨니 등 총 8종이 출현했다고 합니다.(생물도감이라도 봐야 알 수 있는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아마도 지방의 사투리어로 알고 있는 어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육식어종인 쏘가리, 가물치, 메기가 산명호의 핵심종으로 생태계의 조절자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도 어류생태계의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본다는 연구자들의 견해입니다.(이 어종은 잘 알고 있는 어종으로 알고있는 이름과 일치합니다^^)
이 산명호는 인공호로 일제시대인 1923년에 착공하여 1930년에 준공한 것으로, 총 저수용량은 3,720톤이며, 유역면적은 4,670ha에 이릅니다.
제2땅굴로 가면서 나무가지 사이로 볼 수 있었던 토교저수지입니다.
철원평화전망대 1층 전시실 입구 안내실입니다.
전시 안내실 장식테마는 비무장지대의 생태계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곳이다보니 자연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될 수 밖에 없겠지요. 아마도 곰, 사자, 호랑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전시관 내부를 한 번 들여다 봅니다. 항상 사진찍느라 조금씩 뒤쳐지다보니 가이드의 입장에서 해설사님이 눈치를 하는 것 같아서, 가능한 빨랑빨랑 동선을 따라 이동합니다.
전시실 입구의 풍정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목판장식물이 오른 편 벽에 걸려있습니다.
"강한 안보의식이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다소 어두운 조명과 함께 "분단의 시작"이라는 테마코너가 시작됨을 볼 수 있습니다.
평화전망대 1층의 전시실을 자세하게 둘러볼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돌아나오는 마지막 출구변의 벽에 나란히 전시해놓은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생태자연생물에 관한 사진만 빠른 동작으로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나 동물들도 많습니다.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생물들의 이름들을 모아봅니다.
천연기념물 제199호 황새, 제328호 하늘다람쥐, 제216호 사향노루, 제330호 수달, 제329호 반달가슴곰, 제259호 어름치, 제205호 저어새, 제242호 까막딱다구리 등입니다.
멧돼지는 예나 지금이나 그저 천연덕스러운 짐승인 모양입니다.
언젠가 일본 츠시마(対馬)를 렌트카를 빌려서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렌트카를 타고 어느 지역을 지나가는데, 살진 통통한 멧돼지 한 마리가 불과 100여미터 앞 도로위를 지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멧돼지 개체수가 많다는 증거이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멧돼지에 관한 조금은 해학적인 듯한 이야기로 일본 츠시마역사에 주요하게 다루어진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기행일기를 쓰면서 츠시마역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입니다.
현재의 정치형태로 설명한다면 츠시마 자치체에서 멧돼지 퇴치를 위한 자치법령을 정하여 전 섬주민이 적극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넌센스한 것은 그 당시 일본 본토 바쿠후(幕府) 조정에서는 산짐승(때로는 물고기와 조류도 포함)을 함부로 포획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에도바쿠후<江戸幕府> 제5대 쇼군<将軍> 토쿠가와츠나요시<徳川綱吉;1646~1709>의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生類憐れみの令>법의 제정<1687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멧돼지로 인하여 츠시마 섬내의 농작물피해가 너무도 극심하다보니 그 당시의 영특한 츠시마의 한 유학자(수야마토츠안<陶山訥庵; 1657~1732>, 주로 농정에서 활약한 유학자) 가 나름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와같은 방책을 세우고 이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농정 유학자는 현재까지도 츠시마사람들의 영웅(성인<聖人>)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각설하고, 다른 생물들을 정리해봅니다.
위의 멧돼지와 연어, 열목어, 삵(작은 귀 고양이), 산오이풀, 곰취, 개불알꽃, 금강초롱, 얼레지, 왜솜다리 등입니다.
잠시, 비무장지대(DMZ; Demiliterized Zone)의 종합적인 생태환경에 대해서 말해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비무장지대는 일반인의 활동이 금지된 곳입니다.
따라서, 근 60년동안 인적이 거의 없었던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덕택에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아시아 최대의 자연보호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무장지대 일대는 자연생태의 정점인 포유류와 조류의 분포면에서 한국 내 제일의 종 다양성을 지니고 있고, 반달가슴곰, 여우, 사향노루, 산양, 수달 등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의 개체수가 서식하는 장소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비무장지대 주변은 하천과 습지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다양한 어종의 풍부한 개체수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에 시베리아호랑이와 아무르표범이 생존한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있는듯 합니다만, 정확한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새 정부에서는 남북이 협력하여 비무장지대내에 평화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모든 것이 쉽지만은 않겠습니다. 모쪼록,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만, 남북간의 비극적인 결과로 얻어지게 된 비무장지대 보물생태환경을 어떻게 하면 보다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일지를 전담연구기관을 두어 지속적으로 연구토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임을 언급해봅니다.
예를들면,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사전설계시에 동서간의 생태이동로가 끊김이 없도록 일부구간은 터널을 이용한 도로를 건설한다던가, 습지 등이 있다면 그 자체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면서 구름다리나 전망시설 등의 시설물로 전망이 가능케 하는 등의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철원평화전망대관람을 마치고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오던 중에 촬영한 전망대와 모노레일 철로주변의 풍정입니다.
불교도 장병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움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해 봅니다.
모노레일 승강장의 모습입니다.
우리 일행이 내린 후에 곧바로 기다리던 손님들이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서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철원평화전망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 차량은 이제 월정리역과 두루미관을 관람하기 위해서 이동중입니다.
철새도래지로도 유명해진 철원평야는 오늘도 (쇠)기러기 떼들이 수도 없이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날고, 논밭에 내려앉아 열렬한 먹이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위의 점점이 보이는 새들이 먹이활동중인 (쇠)기러기 떼입니다. 정말로 장관입니다.
우리는 이제 철원두루미관에 도착합니다.
원래 이 건물은 "월정리 전망대"였다고 합니다.
철원군이 비무장지대의 가치를 높이고 생태관광자원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현재의 "철원두루미관"으로 리모델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09년에 개관하였고, 지상 3층 규모로 독수리와 두루미, 소쩍새 등 현재 철원에 서식하거나 찾아오는 46종류의 조류나 동물을 정교한 박제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나름의 생동감마저 느낄 수 있는 생태계 교육 체험관으로 아주 좋은 기획작품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철원두루미관과 접하는 건물 뒷쪽은 남방한계선을 나타내는 철책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철원평야 겨울철새 도래지"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놓은 게시판이 철원두루미전시관 진입계단 오른 편에 세워져 있습니다.
철새테마 전시공간입니다.
사진은 입구에서 안쪽을 향하여 촬영한 것입니다.
평화전망대에서 이곳으로 차량이동중 이 전시관을 설명하면서 해설사님이 깜짝퀴즈를 한 문제 냈는데, 그 문제의 답을 이제야 확실히 풀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퀴즈의 내용은 "해마다 늦가을 쯤이면 철원을 잊지않고 찾아오는 철새인 두루미의 머리와 꼬리의 색깔은 무엇일까요?" 였습니다.
사진속의 박제두루미를 보니 금방 알 수 있지요.
정답은 "검정색"으로 밝혀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붉은색이 원래 어두운 조명에서는 검게 보이기 쉽습니다.
또, 다음의 글에 주목해야 합니다.
♣흰색 바탕에 목은 검은색 머리위는 붉은색, 날개 안쪽은 검은색이며, 꼬리는 흰색이지만, 날개를 접었을 때에 셋째 날개깃이 마치 꼬리처럼 검은색으로 보입니다♣
정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머리는 붉은색(赤色), 꼬리는 흰색(白色)"인 것입니다.
비록, 살아있는 생물은 아니지만 자연은 역시 함께하면 할수록 우리 인간의 감성을 순수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연은 역시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감상의 소감을 대신합니다.
하늘의 제왕 독수리입니다.
독수리의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마냥 무섭게 보입니다.
독수리는 천연기념물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독수리에 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철원지방 각 권역별 주요 철새서식지를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토교저수지 권역과 한탄강 권역, 샘통 및 아이스크림고지 권역 등 세 곳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사진은 철새테마관의 안쪽에서 입구쪽을 향해 촬영한 것입니다
철새의 이동을 설명한 전시코너입니다.
모두가 철새박사가 되어가는 듯 싶습니다.
학(鶴)이라 불리는 『두루미』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왔으며, 장수와 행복, 부귀, 고고함을 상징하며, 어원처럼 관(官)을 쓴 아름다운 새입니다. ------- ~~~ ---------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두루미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재두루미는 키가 110~120cm 정도로 두루미보다 약간 작으며 몸이 재색을 띠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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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는 암수 모두 머리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단정학(丹頂鶴)』이라고 부르며, 두루미라는 이름은 "두루루 두루루"라고 운다고 해서 유래된 순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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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기러기를 설명하는 코너입니다.
쇠기러기는 몸길이 75cm내외의 기러기 종류로 큰기러기보다 작은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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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전시관입니다.
3층 전시관은 마치 자연의 생명체들이 서식하는 산속의 길을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놓았습니다.
코스가 좀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철원두루미관의 관람을 마치고 이제 우리는 월정리역사를 보러 갑니다.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한 간이역이었습니다. 경원선은 1914년 8월에 부설된 서울 - 원산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철도였습니다. 이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기차철도의 철원역과 평강군 남면 가곡역 사이에 위치한 간이역이었고,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경원선 최북단의 종착지점입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패하면서 기관차부분만 가지고 갔기 때문에, 지금 이 월정리역사 철로위에는 뒷부분 객차의 잔해만이 녹슨 채로 남아있습니다.
사진은 월정역과 그 주변의 풍정입니다.
역사 오른 편으로는 "남북통일기원 종루"가 있고, 역사 왼 편으로는 "월정리(月井里)"란 이름에 얽힌 전설의 주인공인 "효녀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뒷 편으로 철로와 함께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판이 세워져 있으며, 아울러 북한군이 두고간 경원선 마지막 열차의 녹슨 객차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월정리(月井里)"의 전설이 담긴 효녀상입니다.
월정리역의 소사(小史)입니다.
월정리(月井里) 역사(驛舍)의 복원된 모습입니다.
누군가 씩씩한 군인의 모습처럼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 재밌습니다.
이 역은 처음에는 비무장지대 안쪽에 있었는데, 6.25전쟁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이 월정리역은 서울까지는 104km, 북녘의 평강까지는 19km, 또 원산까지는 123km가 되는 서울역과 원산역간의 거의 중간지점에 위치합니다.1988년에 철원군에서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말에 우리는 한결같이 통일의 염원을 담습니다.
맞습니다.
열차는 달려야 맛입니다.
그런데, 달리기는 커녕, 서있지도 못하고 마냥 쭈그려앉아 시름시름 잠만 자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화장터로 가야 할 신세입니다.
나는 불교의 윤회설(輪廻說)을 믿고싶습니다.
모쪼록, 훌륭한 준마로 다시 태어나서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명마(名馬)가 되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미 쪼그라져버린 월정리역의 저 철마(鐵馬)는 걸코 우리의 명마(名馬)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이든 북한이든 그것은 분명히 침략자를 위한 명마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적의 명마가 남긴 잔해를 통하여 그에 합응(合應)한 교훈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월정리역사 옆에 세워진 종루(鐘樓)로, 종루안에는,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이 걸려있습니다.
다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힘차게 불러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 ~~~
두 일본인 청춘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왠지 한반도의 통일이 성큼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사진은 역시 자연스러운 포즈가 아름답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셔터를 깜빡였더니 사진이 제법 작품입니다.
두 분 주연배우님께만 특별무료인화권을 부여합니다.<^!^>
오늘의 안보투어일정이 거의 종반전에 이르고 있습니다.
월정리역과 철원두루미관에서의 아쉬운 시간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이제 철원의 구시가지였던, 지금은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지역)내의 광활한 철원평야지로 탈바꿈한 곳의 모습을 보면서 오후일정의 최초출발지였던 철의삼각전적관으로 향합니다.
다시, 해설사님의 안내가 시작됩니다.
이야기는 먼저, 우리가 현재 달리고 있는 3번 국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 3번국도의 총연장 직선길이는 555.2km입니다. 전국 25개 남북노선중 하나로,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에서 시작하여 북한의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까지 이어지는 일반국도라고 합니다.
지도를 보니 도로명을 "평화로"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길은 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군인들의 이동로였다는 해설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예만 든다면, 임진왜란 때에 왜군들의 군사이동로였고, 6.25전쟁 때에도 마찬가지로 북한군이나 유엔군의 군사이동로였습니다. 현재는 우리 군의 군사이동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태여 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궁예왕시대(후고구려 시대, 서기 900년대)에도 역시 군사이동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가장 중요하고 역사가 깃든 "척추로(脊椎路)"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스토리가 있는 역사적인 도로위를 달리면서 좌우로 펼쳐지는 철원평야와 저 멀리로 둘러싸인 크고 작은 산들, 그리고 가끔씩 도로변 가까이에 허름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그저 자취정도만을 남기고 있는 옛 철원 구시가지의 상징적 건물터를 봅니다.
아직은 민통선 안쪽이라 관할 군부대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출발 5분여가 지나면서 해설사님의 설명은 점점 바빠지고 평화로(3번국도)변 좌우로 몇 개의 건물벽이 앙상한 뼈대마냥 보입니다.
일제시대 제2금융조합의 금고실의 남은 벽체의 모습, ,구철원 역사, 농산물검사소터, 일제시대 철원읍내 얼음의 보급창고였다고 하는 얼음창고건물, 그리고 해방이후 철원이 북한통치(신탁통치시대)하에 있을 때 지어진 노동당사 등의 건물이 그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철원역(鐵原驛)" 이야기를 잠시 들어봅니다.
경원선과 금강선선이 폐선되면서 철원역 또한 폐역이 되었는데, 역사 위치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였다고 합니다.
원래의 역이 소재했던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춘천에 버금갈 정도로 번성했던 구철원 시가지라서 기본적인 수요가 컸고, 게다가 철원역에서 금강산선이 분기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철도시설 외에도 금강산선의 조차장, 사무실, 전기시설, 여관 등이 밀집하여 서울역과 비교대상이 될 정도로 경원선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역으로 사실상 강원 북부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의 서울역사 역무원인원이 8백여명이었는데, 철원역사의 역무원인원도 마찬가지로 그 정도였었다고 하니 과연 철원역이야기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원지역이 군사적으로 요충지라는 점에서일까요, 6.25전쟁의 참화로 이 일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거의 시가지가 사라지듯이 폐허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역사(驛舍)는 태평양 전쟁 때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없어졌다는 견해도 있지만, 1945~1950년 사이의 신탁통치시기에는 북한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가 부재하여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후에 한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안보관광의 목적으로 폐허지를 정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하게 되었답니다.
2007년도 후반에 신탄리역에서 끊겨있던 경원선 이남구간을 철원부근까지 연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었었는데,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철원이 철도교통의 사각지대로 남게 되었답니다.
철원역의 원래 위치였던 외촌리 지역이 현재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민통선 이북인 관계로 구철원까지 복원하기로 하였다가, 또 다시 계획이 수정되어 민통선 이남인 대마리에 "백마고지역"을 두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모쪼록,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또 나아가서는 통일이 되어서 옛날의 철원역이 다시 복원되어 금강산유람의 추억이 우리 모두에게 안겨질 수 있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버스가 좀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또 유리창이 사진찍기에 적당치 못하여 주요 포인트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아래 사진은 일제시대 주변 상가에 얼음을 공급하기 위해 상업목적으로 지어진 "얼음창고터"의 보존중인 건물벽입니다.
3번국도 평화로를 사이에 두고 양 쪽으로는 철원평야지의 연속입니다. 월정리역을 출발한지 10분여쯤 지날무렵 차창 앞유리로는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군부대의 초소가 나옵니다. 초소앞에 다다르자 당직병 한 명이 차량에 승차하여 늠름한 모습으로 경례를 하면서 미리 신고된 인원과의 이상유무를 확인하고 다시 내립니다.
원래는 노동당사도 민통선 안쪽에 있었는데, 1990년대에 민통선을 일부 북쪽으로 약 4km정도 이동했다고 합니다.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해설사님은 민통선내를 출입하는 농민들의 출입방법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버스는 이제 3번국도와 교차되는 87번 지방도를 따라 신철원방향으로 달립니다. 어느새인지도 모르게 벌써 노동당사를 지나칩니다. 가까스로 카메라에 담았더니 제법 쓸만 합니다.
직접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건물의 내막과 역사적인 의의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좋를 것 같아 해설사님의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철원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官田里)에 소재하는 옛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건물입니다. 2002년 5월 31일에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철원군이 관리합니다.
이곳이 1946년 초에 북한 땅이었을 때에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 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랍니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있으나, 2층과 3층은 붕괴되고 골조만 남아있는 형태입니다.
1층의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했거나 취조실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6.25 전쟁으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로는 포탄과 총탄자국이 촘촘히 보인답니다.
이 건물을 지을 때에는 성금으로 1개 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또한, 내부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서 공산당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부터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했습니다.
당사 뒷 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 때의 참상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노동당사를 지나 87번 지방도를 타고 신철원을 향해 달리면서 해설사님은 차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도피안사(到彼岸寺)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보이는 산의 이름은 화개산(花開山)이라 하는데,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있는 산입니다.
이 도피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라 전해집니다만, 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신도 1,000여 명을 동원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절의 이름도 도선국사가 좋은 절터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에서 피안(극락세계)과 같은 아늑한 절터를 발견하고 모든 중생이 안식을 누리라고 붙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1898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당시의 주지인 법운(法雲)이 재건하였고, 1914년에 다시 개수하였다는 백과사전의 내용입니다.
8.15 광복후에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6.25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1959년 당시 육군 제15사단에서 재건하여 군승을 두어 관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찰에는 도선국사가 건립 및 주조하였다는 3층 석탑(보물 223)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63)이 있습니다.
이제 버스가 목적지에 가까워집니다.
도로사정이 좋아서 버스는 거침없는 질주를 합니다. 한탄강 물줄기가 흐르는 곳일까, 잠시 차창밖을 바라보니 조금은 요상한 다리가 보입니다. 아차! 승일교다 싶어 카메라를 빼드는데, 이미 버스는 각도를 벗어납니다.
할 수 없이 그냥 지나칩니다.
2002년 5월 31일에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이 승일교는 총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로,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일컫는답니다. 1948년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그 후에 휴전이 성립되어 우리 남한 땅이 되면서 1958년 12월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완성시킵니다. 결과적으로, 기초공사와 교각공사는 북한이, 상판 및 기타 마무리 공사는 우리가 한 이른바 남북합작의 다리인 셈입니다.
3개의 교각위에 아치형을 이루고 있는 다리로, 처음에 북한 쪽에서 공사할 때에는 구소련의 유럽공법이 도입되었으나, 나중에 우리측에서 공사할 때에는 그와는 다른 공법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최초의 북한의 설계자는 진남포제련소의 굴뚝을 설계한 김명여라고 합니다.
콘크리트 다리로서 시공자와 완공자가 다른 까닭에 양쪽의 아치모양도 약간 다른데, 북쪽에서 공사한 것은 둥글고, 우리측에서 한 것은 둥근네모 형태를 띱니다.
다리의 명칭에 대해서는, 김일성 주석 시절에 공사를 시작해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완성했다고 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김일성 주석의 "일(日)"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이 하나 있고, 6.25 전쟁 때에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는 후자의 이야기가 정설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나간 다리는 새로 놓인 한탄대교입니다.
버스는 우리가 처음 출발한 철의삼각전적관 주차장으로 돌아와 안전하게 주차합니다.
해설사님과의 작별인사와 함께 우리는 잠시 20분 정도의 개인시간을 갖습니다.
해설사님의 노고와 정성에 대한 감사의 뜻을 박수로 대신합니다.
생각같아서는 고석정을 돌아보고도 싶지만, 이 짧은 시간으로는 도저히 여의찮아 철의삼각전적관 정면 좌우측으로 잔디정원을 넓게 조성하여 방문객들의 자주국방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주제가 담긴 야외전시공간을 돌아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비록, 일행은 그렇게 많지않은 안원이지만, 주위를 살펴봐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야외전시공간을 서둘러 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사진촬영을 하고서는 이제 약속시간이 되었나 싶어 주차장소로 돌아오는데, 버스안에는 인원이 거의 없습니다.
어찌된 일일까, 한참을 기다리니 한참 후에야 차창 저 멀리서 꾸역꾸역 한 두 명씩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대부분, 양손에는 중량감 있는 무엇인가를 들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궁금해서 살펴보니 무우와 배추 등 신선한 채소류였습니다. 신토불이 정신이 발동한 것일까요? 신선하고 푸짐한 강원도 고냉지 채소를 그 짧은 시간에 구입해서 들고 오는 것을 보니 대단합니다. 어쨌든간에 맛은 있어 보입니다. 오늘같은 날에 그런 재미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행사의 진행자는 투덜투덜 합니다. 서울로의 귀경길에 극심한 정체가 줄곧 빚어지는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서 일정을 서둘렀는데, 대부분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서울도착시간이 상당히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합니까? 진정한 주인은 백성이니, 백성의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밖에요.
인원점검은 끝나고, 이제 서울로 돌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잠시 모두가 해야할 일이 조금 남았습니다. 약속시간을 어기고 지각하는 동안에 듣고 본 것에 대하여 정리할 시간을 가져봅니다.
임꺽정의 고장에 왔다가 그가 누구였었는지도 모르고 간다면, 의적(義賊)의 "의(義)"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흉볼것같아, 그의 이름자라도 살펴보고 갑니다.
임꺽정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실존 인물로 황해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천민인 백정집안 출신이며 탐관오리들의 횡포 등에 불만을 품고 그들로부터 곡식 등을 탈취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른바 의적(義賊)이라 불리던 인물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인물에 접근해 봅니다.
임꺽정은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습니다.
이후 명종 대의 정치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義賊) 행각을 벌입니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에는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1559년(명종 14년)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적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합니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한양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현재의 종로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한양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서 경기*강원*평안*함경*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칩니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성이 높아집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합니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男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형답하게 됩니다.
성호 이익(李瀷)이 자신의 자서전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꼽을 정도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둑입니다. 그를 의적으로 평가하면서 소설책과 영화 등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임꺽정의 동상입니다.
임꺽정 가든에서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 다섯 그릇 정도면 저 만큼의 힘이 나올 수 있을까요?
장수감임에는 틀림없었나 봅니다.
고석정(孤石亭)을 글로나마 돌아보기 위해서 한국지명 유래집을 잠시 빌립니다.
고석정(孤石亭)은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동송읍 장흥리에 위치한 정자를 말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 철원도호부에 "고석정 옛터는 도호부 동쪽에 있다"는 기록에서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철원도호부 누정조에 "고석정(孤石亭)은 도호부의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이 우뚝 서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대동지지』 철원도호부 성지조에 "고석성(孤石城)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6백92척이다. 옆에는 고석정이 있는데<중략> 바위가 거의 3백척이나 우뚝 솟아있다. 둘레는 10여 장(丈)으로 위에는 한 개의 구멍이 있는데, 기어서 들어가면 마치 집과 같아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고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석(孤石)은 바윗돌이 강 가운데에 홀로 우뚝 솟아 있어 유래한 지명으로 짐작됩니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도호부의 동남쪽 강가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현재, 철원팔경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으며, 도지방 기념물 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탄강가에 약 10m 높이의 바위 위에 1997년에 재건축된 2층 누각 형식의 정자가 있고, 강 중앙에는 고석바위(약 23m)가 솟아 있습니다.
특히, 고석바위에는 조선 시대 명종 때에 임꺽정(林巨正)이 은신하였다는 자연석실이 있고, 건너편에 있는 석성에서 의적활동을 했다고 전합니다.
오후에 철원안보투어의 시작무렵에는 실내의 통일관 전시실을 주로 돌아보았습니다만, 서울로 돌아갈 지금 즈음에는 전적관 앞마당의 외부 전시물들을 돌아봅니다.
탱크와 장갑차, 야포, 전투기, 전폭기, 관측기 등이 예전의 것인 실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측항공기를 돌아보면서는 저의 옛 추억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고교시절 2학년 때에 교내 가을축제 기간이었습니다.
"축제"하면 대학교에서나 보통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만, 당시에 제가 다닌 학교는 조금은 돌연변이 학교라서 이러한 축제행사를 했습니다. 이 기간에는 보통 가을체육대회와 악대부의 음악회, 연극부의 연극행사, 태권도부의 시범행사 등이 행하여졌습니다. 또 그와 더불어 교내 실내체육관을 시화전 행사장으로 꾸며 기간 내내 학생회가 주최가 되어 행하는 "시화전 모습"을 외부에 개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에 저는 취미부에서 활동했는데, "시화전 행사"를 준비하면서 비행기를 한 대 만들었습니다.
혹시, "종이비행기?"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네 바퀴로 활주로 정도는 굴러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전장은 약 1.2m, 날개폭은 약 90cm, 높이는 약 40cm, 기종은 화물여객기였습니다.
무엇으로 만들었냐구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볼펜껍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볼펜모양이 다양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주로 6각이나 원통형의 모나미볼펜과 문화볼펜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부분에 착안점을 둔 것입니다.
전교생의 인원이 약 1200여 명이었으니까? 1~2개씩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학생회 간부였던 문예부장 선배님의 협조를 얻어 주재료의 준비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약 2,000개 정도를 모았습니다만, 나중에 소요량을 확인해보니 약 1,700개 정도였습니다.
몸통 내부는 스틸로폼을 본드로 여러장 겹쳐붙여서 칼로 깍아내는 식으로 비행기 몸체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유리창용으로 셀로판지 약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바퀴도 볼펜이 6각이니 몇 개를 합치면 원형모양이 됩니다. 그 둘레를 약간의 고무패드로 감아 본드로 붙이면 바퀴가 근사하게 완성됩니다.
또, 날개는 6각 볼펜 껍질을 2중으로 연속 이어붙여서 본드가 완전히 굳어진 다음에 실톱으로 잘라서 날개모양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여객기의 앞부분입니다.
돌고래의 턱처럼 곡면처리가 불가피합니다만, 여기는 볼펜껍질의 검정색 뚜껑을 마치 화살촉처럼 여러 개를 이어붙이면 곡면처리가 자연스럽게 됩니다. 볼펜 뚜껑이 원추형이니 당연히 비행기 조종사가 앉아있는 바로 앞머리 부분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꼭지점을 형성하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몸통 내부의 스티로폼을 빼면 거의 볼펜껍질만으로 화물여객기 한 대를 만든샘입니다.
사용한 본드는 플라스틱 통속에 들어있는 오공본드입니다. 8월에서 9월 중순에 걸쳐서 약 1달 반 정도를 조그만 격실에서 본드냄새에 취해 살았습니다.
다 만들어진 후에는 악세사리를 추가했습니다.
당시에 세계기능올림픽 전자기기분야 금메달리스트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특별실습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지금의 크리스마스트리장식용 발광램프장치인 이른바 전문용어로는 "링카운터회로(Ring counter circuit)"라고 하는 "전자회로깜빡이장치"입니다.
고밀도 집적회로소자(LSI; Large Scale Intergrate)와 직류전원장치의 조합으로 만들어서 발광소자인 LED(Light Emitted Diode; 현재는 이 분야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저소비전력 고휘도조명장치나 텔레비젼 화면<LED TV> 등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합니다)를 여러 색깔을 채용하여 비행기 날개 앞쪽에 하나하나 삽입하는 식으로 완성을 시켰습니다.
약간 어두운 실내에서 그 발광장치가 작동을 하면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야간비행 모습처럼 정말 아름답게 보입니다.
시화전 행사기간동안 많은 외부인들이 다녀갔기 때문에 기념사진으로 학교 이외의 외부인에게도 많이 남아있을 줄로 생각됩니다만, 지금처럼 디지탈 카메라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작 본인은 구체적인 사진을 찍어서 담아두지 못했습니다.
작품과 함께 여러 명이 어울려서 찍은 사진이라 사진게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화전은 교내 실내체육관에서 하였는데, 행사장 주출입구 정면에 전시된 작품이었습니다.
시화전이 끝나고 나서는 이 작품이 학교 본관의 중앙현관에 있는 유리전시관에 장기간 전시되기도 한 훌륭한 작품입니다.(~^~)
본인이 생각해도 학생이라는 입장과 처해진 주변 환경, 사회적 이슈(리사이클 운동), 최소한의 비용, 창의력 등을 고려했을 때에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였음을 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럼, 이 비행기의 추후 행방은 어찌 되었을까요?
저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에그머니나! 더 이상 멀리 날지 못하고 교내 모 화단으로 추락하고 말았다는 비보입니다.
그 다음 해 2월쯤인가봅니다. 당시 1년 선배인 3학년 선배들의 졸업시즌이었습니다. 아마도 졸업파티쯤 열었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샴페인 정도 마셨을까요? 졸업기념으로 집으로 가져가려다가 덩치가 커서 좀 망설였는지, 교내기숙사 옥상에서 "이 비행기가 어디까지 날아가나보자" 하면서 그냥 날려버렸답니다. 종이비행기도 아니고, 엔진달린 비행기도 아닌 그저 관상용인 이 비행기는 당연히 추락할 수 밖에요... . 그래서 이 비행기는 그날로 기숙사앞 화단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전언입니다.
만약 라이트형제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잠시,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창의력 개발을 위해서 괜찮은 동기부여가 될 것같아 내용을 삽입해 봅니다.
그럼, 야외 전시물을 돌아봅니다.
철의삼각전적관 건물 정면의 모습입니다.
전적관을 바라보고 좌측편의 전시물입니다.
전적관을 바라보고 우측편의 전시물입니다.
하늘의 양털구름이 가을하늘의 정취를 더해줍니다.
수륙양용 완전궤도식 장갑차입니다.
잠깐? 여기서 퀴즈를 하나 냅니다. 장갑차와 탱크(전차) 중 어느 것이 먼저 나왔을까요? 또, 어느 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었을까요?
빙고!!! 정답은 각자의 몫입니다(^!^).
주포 90미리를 장착한 최대 48km로 달릴 수 있는 전차입니다.
최대사거리 23,720m, 시간당 연속 40발을 발사할 수 있는 155미리 M59 평사포입니다.
주로 요새지 폭파용이랍니다.
승무원 2명이 탑승할 수 있고, 최대속도 185km/h, 상승한도 5,639m, 항속거리 852km의 제원을 갖는 O-1G 관측기입니다.
최대속도 1,100km/h, 상승한도 15,000m, 항속거리 2,000km의 제원을 갖는 F-86F전투기입니다.
최대속도 630km/h, 상승한도 7,320m, 항속거리 1,600km의 제원을 갖는 T-28A훈련기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처럼 우리 사람들은 물건을 보면은 욕심을 부립니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오감신경 원리의 무조건반사를 스스로가 충분히 제어하지 못한다고 뭐라 욕할 수도 없는일, 물건을 보면은 보는 것에 그치지 못하고 또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젠 출발해야 합니다.
타보기도, 쏴보기도, 직접 조종도 해보고싶은 충동을 자제하면서 우리는 버스에 오릅니다.
귀경길 도로는 예상대로 많이 막힙니다.
요즘은 안전사고 등의 이유로 법이 개정되어 관광버스내 음향시설 등이 제약을 받는 실정이라 예전처럼 활발하게 오락할 수 없음이 자못 아쉽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누군가 재주꾼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재주꾼은 누구일까요. 9기 석규호 동문이 바로 그 인물입니다.
저는 석규호 동문께 "게임박사님"이라 칭호를 달아줍니다.
좋게 풀이하면 오락이요, 나쁘게 몰아붙이면 사행성 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민속놀이입니다.
석규호 동문께서 아마도 지난 번 야유회에서 재미좀 톡톡히 본 듯 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같은 메뉴를 들고 등장하였습니다.
이른바 "빙고게임"이라고 하는 숫자퍼즐게임입니다.
한 게임, 한 게임, 할 때 마다 흥미는 점점 더해집니다. 걸려있는 상품이 있으니 당연지사이지요.
참! 게임도 재밌게도 만들었습니다. 상품속에 또 다른 재미가 질펀하게 담겨있습니다.
마치,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마냥 웃음에 웃음을 자아내는 게임에 모두가 도취되어 이제는 지갑마저 게임에 걸게 됩니다. 과장된 말로 겨우 천원짜리 지폐씩이나 되는 거금이 들어있는 지갑을 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교통체증은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니어서 우리 일행은 무사히 혜화동 방송대 정문에 예정대로 도착합니다.
하루의 일정동안 모두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던 듯 헤어짐에 못내 아쉬움섞인 표정으로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합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서, 서로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오후에
松學亭 박 정 윤 쓰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간 장면들이 많은데, 세심히 둘러보고 기록을 남겨주셔서 그날의 감회가 다시 뭉클합니다.
일일이 설명을 붙이자면 많은 시간이 걸릴텐데, 완성된 글을 하루 속히 보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부지런도 하십니다.
아직 완성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칭찬이시니 그저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빨리 완성된 것을 보고 싶습니다.
1기 정진우 선배는 벌써 글을 써서 학보사와 이경수 교수님 카페(방송대 일본학과 정보의 장)에
올렸다고 하던데, 글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사진 정리를 하면서 쓰는 것이 훨씬 더 어렵지요.
좋은 견학을 했군요.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함께 하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완성되면 다시 한 번 보세요.
함께 다녀오신걸로 명단에 부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경수 교수님의 카페(방송대 일본학과 정보의 장) 3기방으로 스크랩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