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미카 6,1-4.6-8
마태오 12,38-42
여러분 삶의 의욕의 정도를 측정해 드립니다
무엇을 잃으면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무엇을 찾으면 삶의 의욕을 찾을까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에 사는 지니는 요술램프를 소유한 주인에게 모든 소원을 들어줍니다.
“지니가 당신에게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제가 왜 이 질문으로 시작하느냐면 이 대답에 따라 삶을 대하는 자세가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계 제일 부자인 빌 게이츠에게 같은 질문했을 때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이 묵상글의 끝에 그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유튜브에 매일 복음 묵상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 교리서 해설, 영성 서적 해설, 성서 해설까지 올리니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많이 알아야 하는 건가요? 시골 할머니의 단순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많이 알아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저는 당황하여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셨다면 배우는 게 좋아서 그러셨겠죠.”
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공부해도 잘 못 하는 이유는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허술한 대답에 답이 다 있습니다.
삶의 이유는 더 배워서 뱀에서 소로, 모기에서 예수로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배움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삶의 의욕은 결국 비례합니다.
아기가 진정한 성장을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부모에게 이것저것 귀찮게 물으며 배움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성장을 멈추는 때는 언제일까요?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배움을 멈추는 때입니다.
부모의 이름을 알았으니 더는 부모에게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심지어 표정도 제대로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따라 하면서 참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부모와 같이 자신도 부모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모가 가르쳐준 것 이상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려는 이에게 주이지는 시간도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배운다면 말입니다.
워런 버핏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 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니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며 물을 때 빌 게이츠는 이것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청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자세가 곧 인생에 대한 자세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절대 없다고 평하십니다.
왜냐하면,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실 표징이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표징은 무언가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표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배워서 회개한 것입니다.
이어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아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아기와 같습니다.
인생에 대한 자세가 배우려 하는 자세와 같습니다.
얼마나 더 배워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느냐가 얼마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느냐와
비례합니다.
지니가 다시 한번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아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발전하는 것이고 발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마태오 12,38-42
이보다 더 큰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예수님께 던지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오만불손하고 배은망덕한 말인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오 복음 12장 38절)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이후, 날이면 날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이 다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매일 당신 백성에게 건네셨던 신선하고 명쾌한 말씀이 표징이었습니다.
오랜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 이미 목숨이 끊어져 버린 사람들도 당신 말씀 한 마디로 일으켜세우셨는데, 이보다 더 큰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또 어떻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앞에 예수님께서는 ‘표징의 종결자’로 ‘사람의 아들’ 카드를 제시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현존 자체가 가장 극적이며,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표징임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 세상 육화 강생 그 자체, 당신의 현존 자체가 가장 큰 표징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습니다.
사실 황공하고 송구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다는 것,
이것처럼 큰 표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셔도 좋을 텐데, 때로 아비규환이고, 때로 냄새나고, 때로 진흙탕 같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면 더 송구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랍니다.
정말 하찮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각자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부당만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 더 큰 표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역시 그 옛날 율법학자들와 바리사이들처럼 또 다른 표징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도 해가 뜨고, 또 다른 하루를 선물로 받고, 또다시 생명으로 초대받은 것은 명백한 표징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과분하게도 성찬례에 초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며, 그분과 한마음 한 몸이 되는 것, 엄청난 표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12,38-42: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38절) 하며 유혹을 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39절) 라는 말은 하느님을 유일한 신랑으로 알고, 사랑받는 배필로 사는 삶을 버리고, 즉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버리고 악과 거짓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간음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게는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리를 꼬투리 잡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이다.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어리석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쓰러지고, 표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알려는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불신앙 속에 갇힐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4).
예수께서는 요나가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이, 당신이 고난을 받고 사흘째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시한다고 하셨다. 유다인들은 니네베 사람들에 비교되면서 책망을 듣는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기는커녕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기에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1절) 하신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42절). 여왕은 여인의 몸으로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 긴 여행을 하였다. 지혜를 원하는 것만큼 힘이 생겼다. 그녀는 서둘러 솔로몬에게 가서, 그의 말을 직접 들으려 했다. 그의 명성만 듣고도 그를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지혜를 하찮게 여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니 주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떠나고 만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을 보아도 요나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고, 두 사람은 종이기 때문이다. 이 종들의 말에 다른 민족들도 귀를 기울이는데, 주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의 말과 행위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삶을 노력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