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글은 지네딘 지단을 위한 두 번째 글이다. 혹시 첫 번째 글을 급한 일 때문에 읽지 못하고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잠시 짬을 내어 아래 링크도 보기 바란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축구 역사를 장식한 이름 – 지네딘 지단, 첫 번째 이야기
그러나! 틀림없이 많은 분들이 위의 링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이 문장을 보고 있을 터이므로 지난 회를 잠깐 요약하고자 한다. 지단은 축구사에 길이 남을 스타일리스트였다. 패스나 드리블, 슛이라는 특정한 한 분야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합한, 그리고 그 위에 흐름, 밸런스, 팀워크 등 얼핏 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스포츠의 본질적인 요소를 한 손에 움켜쥐었던 선수였다. 그가 움직이면 모두가 움직였고 그가 멈추면 모두가 멈추었다. 또한 그는 우리가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감정을 그라운드 안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스타였다.
2006년 12월 알제리를 방문한 지단. 알제리 베르베르족 출신인 그는 자기가 자란 카스텔란뿐 아니라 부모님의 고향인 알제리를 잊지 않았다. <출처: 연합뉴스>
지네딘 지단은 1972년 6월 23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혈통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알제리의 베르베르(Berber)족 출신이다. 지단의 부모는 1968년에 알제리의 카빌리야 지역 아게몬 마을에서 파리로 이주했다가 마르세유로 옮겼다. 알제리의 대표적인 베르베르족으로는 카빌(Kabyles), 샤위와(Shawia), 므자브(Mzab), 투아레그(Touare)족이 있다. 그중에서도 카빌족은 알제리의 가장 세력이 큰 베르베르족으로 험준한 산악 지역 카빌리야에 모여 산다.
지단의 부모는 1960년대 알제리 독립 전쟁이라는 피의 수난을 겪은 뒤 카빌리야를 떠나 파리를 거쳐 마르세유에 정착했다. 지중해 역사의 영광과 오욕, 그 승전과 패전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항구 도시 마르세유는, 프랑스 영토 안에 위치한 거의 모든 인종의 터미널과 같은 곳이다. 기원전 600년, 그리스인들이 처음 창건한 이후 중세의 혼탁한 발전 과정과 찬란한 지중해 무역을 거쳐 19세기 민족주의의 대혈전까지 치르면서 마르세유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고향을 탈출한 어떠한 인종의 사람들이라도 한 뼘쯤의 공간이나마 어렵사리 끼어들어갈 수 있는 항구가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에 따른 대규모 디아스포라에 의해 동유럽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스며들었다. 지단의 부모도 그런 대열에 합류했다.
순수 혈통의 프랑스 사람들 말고는 모두가 이방인이었지만 알제리에서 건너온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알제리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베르베르족 카빌 사람들은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마르세유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먹고 살아야 했다. 지단의 아버지도 건물 경비 같은 일을 하며 가족을 책임졌다.
그들은 마르세유 북부 카스텔란 지역에서 살았다.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로 알려진 곳이었다. 훗날 지단은 그러나 “그곳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양한 인종의 가난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았다.”고 회고한 적 있다.
알제리를 찾아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지단. 1962년, 132년 동안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했지만, 알제리 내부에서는 과거 청산을 두고 여전히 복잡한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오랜 기간 알제리를 식민 통치한 프랑스는 특히 2차 대전과 알제리 독립전쟁 와중에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2차 대전 때는 알제리 내 유대인 강제 이주에 동의했으며, 독립전쟁 와중에는 피의 억압이 반복되었다. 1956년 파리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5년 넘게 알제리에 체류했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프랑스라는 제국의 힘이 알제리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가혹하게 재편하였는가를 탐사하여 1958년 [알제리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쓰기도 했다. 물론 그 자신이 베르베르족이기도 하다.
알제리의 독립전쟁 와중에 부르디외는 생생한 사진까지 남겼는데, 이 사진들의 한국 순회 전시회 때 내한했던 부르디외의 제자 타사디트 야신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는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초청 토론회에서 “7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치르고 1962년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물리친 알제리 내부에서, 그리고 식민 모국인 프랑스에서도 과거청산 문제는 오랜 숙제”라고 말한 적 있다.
야신 교수의 성장기 또한 지단과 흡사하다. 알제리 지역 내에서 독립운동이 가장 뜨겁게 벌어졌던 곳이 카빌 지방이다. 그곳에는 베르베르족 다수가 거주한다. 야신 교수의 부모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그 바람에 부모를 포함하여 스무 명이 넘는 집안 사람들이 프랑스군에 총살당했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독립은 했으나 친프랑스 성향의 알제리 주류 사회는 베르베르족의 전통과 문화를 억압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지중해를 건널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러한 수난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축구 선수들 중에 아스널의 사미르 나스리, 바르셀로나의 이브라힘 아펠라이, 레알 마드리드의 카림 벤제마가 베르베르족 카빌 혈통이다.
지단의 아버지가 이 대혼란 속에서 ‘어느 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프랑스와 알제리라는 거대한 대립 아래에 복잡한 대립 구도가 층층이 얽혀 있었던 탓이다. 특히 2차 대전과 그 이후의 잔혹사에서 베르베르족은 알제리에서나 프랑스에서나 가장 천대받는 입장이었다.
1961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알제리인 200여 명이 학살당하여 그 시신이 센 강에 내던져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이 이 학살을 지휘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낭만적으로 ‘예술의 나라’ 운운하는 프랑스의 ‘쌩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파퐁은 보르도 지역에서 어린이 223명을 포함, 유대인 1,690명을 수용소로 보낸 전력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패전이 굳어지자 레지스탕스로 신분 세탁을 하여 예산장관까지 올랐다. 그 와중에 파리 경찰청장을 했었는데, 알제리 독립운동이 뜨겁던 그 무렵 그는 파리 거주 알제리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너는 어느 쪽 편이냐?’ 하는 무서운 질문들이 벌이는 역사적 상흔 속에서 지단의 부모 또한 바다를 건넜고, 그의 아들은 마르세유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 카스텔란에서 공을 차며 성장했다.
다시, 지단의 회고를 들어보자. “집 근처에 상가가 있었다. 끊임없이 트럭들이 오가는 활기찬 곳이었다. 어른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짐을 옮겼다. 그에 대한 대가로 캐러멜이나 돈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축구 외에는 그런 일만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평범한 실력으로 공을 차고 즐기는 정도였다면, 오늘날 지단은 카스텔란 지역에서 트럭 운전을 하면서 쉬는 날엔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축구장을 찾아 광적으로 응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월드 스타로 성공한 뒤에도 지단은 자주 자신이 성장한 카스텔란 지역을 찾는다. 어렸을 때의 친구들이 십중팔구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야채 가게를 하거나, 트럭을 몰거나, 실업 수당을 받으며 살아가는 친구들과 더불어 옛 시절을 추억하는 지단의 모습은 자주 외신에 소개된다. 지단은, 마라도나처럼, 자기를 키워준 가난한 동네를 결코 잊지 않는다.
일찌감치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지단은 14살 때 AS 칸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아 그곳의 유스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17살 때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그 이후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전설과 신화의 연대기다. 1992-93 시즌에 지롱댕 드 보르도로 이적하여 4년 동안 머물면서 UEFA 인터토토컵 및 95-96 시즌 UEFA컵 준우승을 선물했으며 이때 함께 뛴 빅상트 리자라쥐, 크리스토프 뒤가리 등과 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끌게 된다.
1996년에는 이탈리아 유벤투스로 이적하여 리그 연속 우승 및 3연속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2001년에는 당시로서는 이적료 세계 최고액인 1500억 리라로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하여 그 유명한 01-02 시즌 UEFA 챔스 결승전 발리슛 등의 화룡점정을 기록하며 은하군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독일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할 것을 선언한 지단은 2006년 5월 7일, 비야레알과의 홈 경기에서 'ZIDANE 2001-2006'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물론 그로부터 한달 여가 흐른 뒤 지단은 어느 이탈리아 선수의 가슴팍을 머리로 치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으니, 이에 대해서는 지난 연재에 기록하였다.
이 위대한 선수에 대하여 역시 그와 같은 반열의 스타들이 인상 깊은 평을 남겼으니 몇 마디 인용해 본다. 먼저, 요한 크루이프의 말이다.“지단이 최고의 선수인 이유는 그가 볼을 갖고 여러 가지 마법을 부릴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을 언제나 올바른 타이밍에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미셸 플라티니는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단은 경기를 지배하는, 그리고 축구의 가장 근본적인 것에서 왕이다. 그의 볼 컨트롤, 패스워크 등 볼을 컨트롤하거나 받을 때 그와 대적할 선수는 없다.”
1998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성공시키고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는 지단. 그는 프랑스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혈통 여부를 떠나서 본다면, 지단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사람이다. 국적 취득에 관한 국제사법상의 두 가지 큰 원칙은 속인주의(屬人主義: 국민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적용하는 원칙)와 속지주의(屬地主義: 자국의 영역을 기준으로 법을 적용하는 원칙)다. 속인주의의 대표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에서 태어났어도 부모가 외국인이면 원칙적으로 독일인이 될 수가 없다. 그 반대가 프랑스다. 부모의 인종 여부와 상관없이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원칙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갖는다. 여러 인종이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얽히고설키면서 근현대사를 써온 프랑스로서는 속지주의가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프랑스 샹송 문화를 대표하는 이브 몽탕은 이탈리아계다. 나나 무스쿠리는 그리스계다.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도 알제리계에서 태어났으나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따금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보였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헝가리 이민자 부모 밑에서 컸으며, 전 부인 세실리아 사르코지 역시 유대계와 스페인계 혈통을 가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 점에서 지단은 확실한 프랑스 사람이다. 그가 주역이었던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 대표팀은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3-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당시 개선문에는 지단의 거대한 초상 사진이 걸리기도 했다. 지단은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유로2000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프리킥을, 포르투갈과의 4강전에서 골든골을 넣었으며 이 압도적인 전성기의 실력으로 '최우수 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비록 ‘박치기 사건’으로 전대미문의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빅상트 리자라쥐, 마르셀 드사이, 클로드 마켈렐레, 릴리앙 튀랑 등이 은퇴한 가운데 레몽 도메네크 감독의 끈질긴 요청을 받아들여 은퇴 의사를 번복한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지단은 자기가 입은 프랑스 유니폼을 더럽히지 않았다. 지단은 마켈렐레, 튀랑과 함께 복귀하여 프랑스를 결승까지 이끌었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4강전에서는 페널티킥까지 성공시켰다.
2002 대선에 나선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Jean-Marie Le Pen) 후보. 그는 불법 이민자 추방 이민법 개정을 주장한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로,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낳았다.
이러한 과정은 프랑스인 지단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국위선양’과는 조금은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2002년의 한 외신 기사를 참조해 보자. 프랑스 일간 <르 몽드>가 발간하는 정평 있는 시사 월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1월호에는 프랑스사회과학고등연구소 역사학 교수 제라르 노와리엘의 기고문이 실렸다. '프랑스의 이민통합 모델은 유효한가'라는 이 글에서 노와리엘은 19세기말 제3공화정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정부가 시행한 '국민통합' 정책이 실패했음을 지적했다. 프랑스 전체 인구 중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온 과정을 해석하면서, 노와리엘 교수는 특히 2차 대전 이후 프랑스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2세대가 속지주의에 따라 프랑스 '국민'이 되긴 했어도 극심한 차별로 가난한 노동자로서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지단이 프랑스 축구 대표팀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됨으로써 마치 프랑스가 ‘인종 화합, 국민 통합’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자칫 이를 악용하는 자들의 선전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성공한 이민자 출신들을 영웅화함으로써 프랑스의 정책 실패를 덮어버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당시 프랑스는 대통령 선거전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코 앞에 둔 시점인 그해 4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파 르펜이 사회당 후보 조스팽을 누르고 결선까지 진출했다. 르펜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는 프랑스 인구의 약 3분의 1이 되는 이민의 역사를 부정해온 사람이다. 국가 대표팀을 두고 ‘인종의 쓰레기장’이라고 비난했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순수’ 프랑스인으로 다 바꿔버릴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때 지단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장 마리 르펜의 딸 마린 르 펜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두고 시위하는 학생들. <출처: 연합뉴스>
우리는 종종 스포츠 스타들이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이를 위해 이벤트를 펼치는 풍경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일이다.“어렵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나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물론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법. 그렇다면 한마디 덧붙일 줄 알아야 한다. “열심히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결코 당신 잘못이 아니다. 우리 서로 손을 마주 잡자”라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스포츠 스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성공 신화의 아이콘’은 많지만 말이다.
지단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극우 인종주의자가 신자유주의 과잉 경쟁 신드롬에 물든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저 인종 쓰레기들을 몰아내자’라고 광풍을 일으킬 때, 지단은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프랑스의 가치를 오염시키는 르펜과 그 당에 투표하는 일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르펜에게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단의 뒤를 이어 마르셀 드사이도 '르펜은 파시스트'라며 공격했고 로베르 피레스는 '르펜이 집권하면 월드컵에 불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르펜이 속한 국민전선은 이 모든 선수들을 비난했고 르펜 역시 "지단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축구나 계속하라"고 빈정거렸다. 그럼에도 지단은 멈추지 않았다. 인터뷰와 성명을 통해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환기시켰다. 그 역할 덕분인지 자크 시라크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물론 시라크 역시 철저한 ‘프랑스주의자’에 가깝다. 예의 2002 대선에서 재선된 시라크는 그해 5월 11일, 파리 생 드니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컵 축구 대회 결승전에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연주 되는 도중 거칠게 화를 낸 적 있다. 바스티아팀과 로리엥팀과의 결승전 식전 행사 중에 바스티아팀 팬들이 호각을 불며 야유를 했기 때문이다. 이 팀의 연고지는 지중해의 프랑스령 코르시카섬이다. 나폴레옹의 출생지로 유명한 이 섬은 1768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지배권이 넘어간 이후 지금까지 끈질긴 독립 운동이 벌어지는 곳이다. 마치 알제리처럼 말이다. 그러한 열기가 그라운드 안까지 스며들자 시라크 대통령은 화를 냈던 것이다.
그 후에도 프랑스의 이러한 양상은 반복되고 있다. 역사의 걸음걸이는 결코 반듯하지 않다. 지난 2005년 11월, 프랑스는 인종차별과 이에 맞선 대규모 소요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그 자신이 이민자 출신이면서도 당시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는 '인간 쓰레기'라는 표현을 썼고, 훗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릴리앙 튀랑이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고 저항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는 1879년에 국가로 채택되었다. 이미 그 이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파리에 모여둔 각지의 의용군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 기원으로, 그 노래를 처음 부른 의용군들은 마르세유 출신들이었다. 프랑스 국가가 ‘마르세유 군단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바로 그 지역에서 태어난 지단은 어떤 점에서는 가장 프랑스적인 가치를 그라운드 안팎에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2012년 12월 20일, 지단은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자선 경기에 참여했다. 포르투 알레그레는 브라질의 슈퍼스타 호나우지뉴의 고향이며 브라질 대표팀의 전 감독 둥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의 그레미오 아레나에서 열린 자선 경기에서 지단은 우루과이의 로코 아브레우의 패스를 받아 페널티 지역 왼쪽으로 완벽한 왼발 발리슛을 성공시켰다. ‘외계인’ 심판으로 유명한 피에를루이지 콜리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이에로, 데쿠, 융베리, 리켈메 같은 전설들이 지단이라는 신화의 조력자가 되었다.
지네딘 지단. 그가 언젠가 감독이 되어 그라운드를 다시 밟는다면 사람들은 프랑스의 똘레랑스에 대해 다시 논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지단은 이러한 이벤트 자선 경기 말고 정식으로 선수가 되어 그라운드에 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이 있다. 감독이 되는 길이다. 지난 해 10월, 프랑스 일간 <피가로>는 지단이 레알 마드리드 단장직을 자진 사임했다고 전했다.
80년대 아르헨티나 축구의 간판 스타이자 소설가이며 깊이 있는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호르헤 발다노 전 단장이 플로렌티노 페레스 레알 마드리드 회장의 요구에 의해 사퇴하고 지단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15개월 만에 물러난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리 아름답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호르헤 발다노는 지단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 적 있다.
“지단은 축구 역사의 혼합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가 구사하는 축구 스타일은 남미와 유럽 축구가 결합되어 있다. 마치 스포츠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빨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현대 축구는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경기장에서 그가 내리는 결정은 축적된 지식의 산물이며 이것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지단이 조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글자 그대로 모든 전형을 뒤엎은 불세출의 이방인이다. 그에게 필적할 만한 선수들은 있겠지만 그를 능가할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지단의 사임을 두고 페레스 회장이 무리뉴 감독 같은 기라성들이 벌이는 구단 내의 정치 싸움에 밀려났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단이 단장 같은 행정가 보다는 감독이라는 그라운드의 운명을 다시 밟기로 결정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지단이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때가 되면 프랑스는 다시 한번 ‘지단 신드롬’을 즐겁게 겪을 것이다. 그 신드롬이 프랑스의 진정한 똘레랑스가 실천되는 것을 상징하게 될지, 아니면 부도난 약속 어음을 그럴 듯하게 치장하는 것인지는 아직 답할 수 없다. 지단이 그것을 증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 것도 아니다.
다만 만약 그가 감독이 되면 그는 그만의 스타일대로 자신의 팀을 이끌 것이며,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은 그라운드 밖에서 진정한 화해에 대해 한번 더 진지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다. 저명한 정치학자로 진정한 평화의 길을 모색했던 리 호이나키의 책 제목처럼, 역사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든 정의의 길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