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장생활 기간은 짧다. 대략 5년정도. 처음 1년은 주일성수 문제로 이곳 저곳 끊임없는 입사와 퇴사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주변분들로 부터 눈총과 근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작은 고모님의 주선으로 2교대하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 야간 근무 때 새벽이 되면 "주님 이 시간은 제가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려야하는 시간이 아닌가요?" 그렇게 드려진 기도의 덕분인지 3개월 후 그야말로 기적처럼 굴지의 H그룹 중공업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그러나 77년도는 한국의 중공업이 힘차게 시동을 걸고 전세계를 향하여 값싼 기계설비들을 수출하던 시기인지라 회사는 주일성수를 할 수가 없었다. 격주 휴무를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나는 줄기차게 주일성수를 고집했다.
부산에 사시는 부친은 장남이 H그룹의 회사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주변사람들에게 자랑을 많이 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부친과 부자유친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던 나로서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였다.
결국 주일성수 문제로 불거진 상사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4년여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신학교 편입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더 현명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작장인으로서의 내 삶은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업무의 집중도가 떨어졌다. 정말이지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집중도가 높은편이다. 그래서 늘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4년여의 직장생활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직장을 정리하고 목회자의 길로 둘어선 이후의 내삶은 어떠했을까? 목회자로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설교연구가로서의 삶은 후회가 없다. 특유의 집중도가 가장 발휘된 부분이 설교연구 였다.
청년 때의 동지나해 폭풍속에서 구조받은 은혜와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선교사의 길을 나선 이후의 삶은 어떨까? 수족이 묶여있는 공산권에서의 선교는 쉽지않다. 나는 어느 교회나 단체에도 묶이지 않은 독립군이다보니 선교보고의 의무가 없었다. 그야말로 소신껏 활동이 가능했다.
한국에서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필수사항이 있다. 그것은 선교보고의 테크닉이다. 실제가 중요하지 않다. 보고가 중요하다. 당연히 거품이 발생한다. 그들의 보고를 듣다보면 입이 쩍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재능이 부럽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중국 정부는 5개의 종파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고 활동을 허락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정책은 하용이라는 미명하에 고사작전이 바탕에 깔려있다. 성직자 양성기관은 인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그리고 모두 국립이다. 예를들자면 30여개의 신학교는 대학과정은 맞지만 초등학교 졸업자도 지원이 가능하다.
정부가 운영하는 신학교는 아무래도 어용 사역자 영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가정교회 출신들은 정부직영 산학교 입학도 쉽지않겠지만 대자수의 경우 입학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산학교를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운영이 결코 쉽지 않다. 그야말로 지하학교 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사이버신학교. 사이버라기 보다는 멀티미디어를 통한 개인학습을 위한 교재의 개발과 보급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한국교회정보센터와 연결이 된 덕분에 많은 자료가 확보돼 있었다.
후에 인터넷이 활발해지면서 선교사들의 안전한 인터넷 활용을 위한 네트워크 관리에 사역의 대부분을 투자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직접 사역보다는 사역자들을 지원하는 사역이었다.
이제 선교사로서의 마지막 가도가 생겼다. 현지의 사역자들에게 예수동행운동을 전달하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동행이야말로 기독교신앙의 가장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