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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녹번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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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과묵상 스크랩 2011년 5월 2일 월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5 11.05.01 16: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 5 2일 월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는 295년 무렵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고, 알렉산데르 주교의 비서직을 맡아 주교를 수행해 니케아 공의회(325)에 참석하였다. 뒷날 주교가 되어 아리우스 이단과 싸우다가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몇 차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1-8)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of water and Spirit
he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 공동체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과 신자들이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더욱더 담대하게 주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1독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곧 누구든지 새로 나려면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대부분의 과일나무들이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데, 특별히 포도나무는 다음 해를 위해 반드시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옛 가지들이 길게 자라기만 하고 열매는 잘 열리지 않기에, 불필요한 마른 옛 가지를 잘라 내야 거기에서 새순이 돋고 포도가 싱싱하게 잘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주지 않으면 무성한 잎사귀 때문에 열매에 갈 영양분과 일사량이 줄어들어 포도송이가 잘 영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한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예수님께서는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포도송이가 새롭게 열매를 맺듯 새순을 돋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도 마르고 썩은 옛 가지를 잘라 내야 합니다. 본성에 뿌리를 둔 온갖 집착과 욕망의 가지들을 잘라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순이 돋고 새 열매가 맺습니다. 집착과 악습은 몸에 붙은 가지 같아서 잘라 낼 때 아픕니다
.
시적인 표현이겠지만, 포도나무도 가지를 잘라 내면 눈물을 흘린다고 했지요. 옛 가지를 잘라 낸 자리에서,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새순이 돋을 때쯤,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우리도 새로 나려면 이런 눈물겨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나야 한다고 하시니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이겨 내야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새순을 돋게 하시고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니까요!

☆☆☆

 

복음의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말씀조차 이상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어린이 같은 질문입니다. ‘새로운 영적 출발로 보면 간단한 일인데,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식만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론에 밝은 것과 신심이 깊은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도 지식에 매달리고 교리를 따집니다. ‘마음공부가 언제나 먼저입니다. 영혼이 풍성해야 신심은 자라납니다. 주님께서도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끄심을 첫자리에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떤 처지에 있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는 것을 덮고, 주님의 이끄심에 맡기는 생활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새 출발에 이론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첫발을 딛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가 소중합니다. 어정쩡한 마음에는 영적 성장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해 온 신앙생활인데도, 유치한 믿음은 여전히 많습니다. 니코데모처럼 따지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을 찾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이끄심을 믿고 그분께 맡기라는 가르침입니다.

☆☆☆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입니다. 최고 의회는 이스라엘의 입법과 사법을 통괄하는 최고 기관으로 산헤드린이라 합니다. 그런 위치에 있었지만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조차 엉뚱하게 받아들입니다.
지식과 이론이 그대로 영적 성숙이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영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이로 살고 있는지요? 신앙은 행동이지 이론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끄심을 만나고 체험해야 성숙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영적 이끄심을 체험하면 타인을 편안하게 합니다. 위로부터 이끄심을 받기에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우아한 외침을 내세우더라도 사람을 괴롭힌다면 위로부터 오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니코데모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먼저 고생과 실패를 겪게 하십니다. 때로는 강한 좌절을 느끼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이끄심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라고 하셨습니다. 은총 역시 주님을 따르는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그 사람은 이론으로 무장된 사람이 아닙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

 

 “어느 날, 임원 회의에서 부산 공장의 폐수 시설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본 폐수 처리 분야 최고의 기술을 가진 곳을 찾았는데, 놀랍게도 그곳은 과거 우리의 합작 회사이자 집적 회로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종합 전자 회사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곳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부산 공장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는 이러한 질문부터 던졌다. ‘폐수 처리 시설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폐수 처리를 하려고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이렇게 대답하자 회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처리할 폐수가 없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폐수 처리 시설도 필요 없죠.’ ‘그렇습니다. 오늘 저의 결론은 바로 그겁니다. 폐수 처리 시설을 만드는 데 고심하지 말고 차라리 폐수를 줄이십시오’”(손욱, 『변화의 중심에 서라』).
이 이야기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관점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러한 관점의 변화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기업체의 사장은 폐수 시설을 증설할 계획을 포기하고 폐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문제의 초점을 전환함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 문제들도 사실은 이와 같은 방식의 해결이 필요합니다. 이를 오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철이 든다는 것

- 전진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시며,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작년 어느 날 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저희 수도회 선배 신부님의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병자성사를 주러 간 것입니다. 83세의 어머니는 장이 마비된 상태라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병자성사 예식을 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철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 지나 겨울이 오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듯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한테서 나와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듣는 것이며, 그렇게 허락된 삶을 충실히 다 살고 기꺼이 하느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허락된 삶을 살다가 어느 때든 죽음을 맞이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성호를 긋고 힘겹게 입술을 움직이며 기도문을 외우셨고, 또 메마른 입술 사이로 어렵게 성체도 영하시면서 마지막 순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이마에 손을 얹은 다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드렸습니다. 며칠 뒤 어머니께서는 선종하셨고, 하느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다.


예전에 저는 새로운 기계 다루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최신 기기에 관심이 많았고 또 구입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기기가 겁납니다. 새롭게 사용방법을 배우는 것도 힘들고, 그러한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리고 예전처럼 잘 쓸 자신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다 보니 직접 조립까지 하면서 좋아했던 컴퓨터에도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이상이 생겨도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힘들게 사용할 뿐이었지요.

그런데 어제 새벽, 컴퓨터가 이상한 증세를 보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고, 점점 느려집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백신 프로그램을 돌렸습니다. 역시 바이러스 때문이었습니다. 한 두 개도 아니도 자기마치 30개 이상의 바이러스가 컴퓨터 안에 있었네요. 오래전부터 감염되었는지 치료를 해도 효과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결국 최후의 선택인 포맷을 하고 다시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지금 컴퓨터의 상태는 너무나 좋습니다. 3년 넘게 사용했던 컴퓨터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새 컴퓨터를 쓰는 것처럼 쌩쌩 돌아갑니다. 귀찮다고 불편함을 안고 살았던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의 측면을 연관시켜 떠올려 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지 모릅니다. 특히 요즘에는 지방 선거에 임하시는 분들이 바빠서 성당에 잘 나오지 못했지만, 선거 끝나면 열심히 성당에 나오겠다며 잘 봐달라고 인사하시는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방치해서 점점 더 불편함이 커졌던 것처럼,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힘들고 어려운 삶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특히 강조하여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권위에 기초를 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권위에 의존할수록 신앙은 더욱 약해진다(에머슨).  

 

영에서 태어난 삶     

-오민환-

 

오늘부터 사흘간 예수님과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이며 유다인들의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니코데모는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것이고,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모두를 소유한

기득권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한 대낮에 주님을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
인적이 드문 밤에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실 당시 지도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서지

못했습니다(요한 12,42). 니코데모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적

(
표징)을 보고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신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 신앙이 얼마나 뿌리가 약한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신앙의 근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진실로

진실로건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니코데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육에서

태어난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은 세상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인간입니다. ‘은 요한에게서는 신앙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기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에서

태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신앙인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참된 자유인으로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남

-전삼용신부-

 

어떤 신부님의 강의 테이프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의 이야기인데 저는 그런 일도 있나 싶었습니다.

그 자매의 남편은 술, 도박, 여자, 구타 등 온갖 안 좋은 것은 다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얼마나 때리는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어떤 때는 목숨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참아오고 있었는데 한 번은 임신한 아내를 구타하여 아이가 유산되었습니다. 배를 얼마나 때렸는지 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온 몸이 검게 멍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타한 이유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믿지 못할 인간이기에 남까지 의심하는 의처증까지 생긴 것입니다.

그 자매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해외 모 성모님 성지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 성지에서 기도하다가 문득, 남편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해 왔는데 자신도 남편을 많이 무시하며 살았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남편을 용서하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용서는 정말 은총입니다. 은총이 없으면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때도 숨을 내쉬시며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라고 하시듯이 성령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 자매는 성지순례에서 성령님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용서 못하는 육적 인간에서 용서 할 수 있는 영적 인간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용서할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편이 공항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회개한 것은 자신인데 남편까지 회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고 술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부는 매일 함께 기도하는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은 미움으로, 한 사람은 죄로 종살이 하던 몸이었지만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자신들이 만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시며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니코데모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인한 새로 태어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위의 자매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고 미움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얻게 되는 참 자유입니다.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청년들에게 신학교나 수녀원에 들어가라고 하면 많은 경우에 그들은거긴 규율이 있잖아요. 전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하고 말합니다. 이들은 아직 성령으로 태어나는 참다운 자유를 알지 못합니다. 참된 자유는 육이 아니라 영의 자유입니다.

제가 직접 증언을 들은 마약 중독자도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치유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거부하였었습니다. 그 사람은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규율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 안에 갇힌 것이고 마약의 노예생활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참다운 자유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서 육체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새로 태어난 이의 자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합니다. 그렇게 영이 육을 이기게 될 때 더 자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새는 한 가닥 얇은 줄에 발이 묶여 있어도 날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 발을 묶고 있는 육적인 집착들을 성령의 칼로 끊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끊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성령의 은혜로 또 하나 끊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결심합시다.

<<짧은 묵상>>

성경에는성령의 인도로란 구절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히 구약에선 엘리야가 성령의 인도로 떠났다가 돌아왔다를 반복합니다. 결국 그는 성령의 불마차에 들어올려져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도행전에서 필립보도 성령의 인도로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전 생애를 성령의 인도로 사신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받도록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겨냅니다.

이는 성령님만이 인간의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해 주실 분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라 5,16)라고 하시며 성령님만이 육체를 이기게 하여 참으로 자신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라는 말은 결국 성령의 힘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만이 육체의 종살이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참다운 에너지이고 힘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사는 것이 어쩌면 자신을 속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면 그 바람은 우리를 천상 나라로 이끌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깁시다. 그러면 마치 연처럼 하늘을 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을 자유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도는 말고 오직

-김찬선신부-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기도 내용입니다
.
저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도들이 부럽습니다
.
왜냐면 저는 이렇게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저도 이적을 일으켜 불치의 환자를 낫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
이것은 정말로 순수한 사랑의 바람입니다
.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그런 기도를 하지 못함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게

돈을 소쿠리로 긁어 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못함과 같은 이윱니다
.

청한다 해도 저를 아시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청하여 청한 것이 주어졌을 때
제가 교만해지지 않을까,
제가 그것을 잘못 사용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는 표징과 이적을 청한다 하더라도

제가 어떤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기보다는
표징과 이적이 제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부활로 제가 다시 태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시듯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냐면 제가 육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저의 육에서는 육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아주 단순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못생긴 나에게서 잘 생긴 돌연변이가 생기기를 바라면
그것은 도둑놈 심보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육의 존재인 한에는
제 입에서 육의 말이 나오고
,
저의 생각은 늘 썩어빠진 생각만 할 것이고

무엇을 한다고 해도 늘 저의 성취만을 추구할 것입니다.

어제 새벽 기도할 때 “주님, 말씀하시고, 듣게 하소서.”라는 말이

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저께 자전거 Hiking을 하는 큰 행사를 치루고

아침에 일어나니 뭔가 허탈감 같은 것이 들었는데,
그동안 듣기보다는 노상 지껄이기만 했고
,
하느님의 뜻보다는 제 생각에만 골몰했던 저에 대한 반동으로

이런 기도가 나온 것이라는 것이 즉시 느낌으로 왔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고 전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가득 찼던

사도들이 오늘 아침 몹시 부럽고
그래서 저는 오늘 다른 기도는 말고
오직 ‘오소서 성령님!’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양승국신부-

 

<미풍이 불어오는 잔잔한 호숫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간절히 추구하는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요.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잔잔한 호숫가에 서있는 듯한 마음의 평화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현존 안에 누리는 마음의 평화

"마음의 평화", 사실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지만 솔직히 꿈같은 일이지요.  

많은 분들이 이런 하소연들을 하십니다

"성당에 나가면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해서 나온 지가 벌써 10년짼데, 마음의 평화는커녕 점점 분심과 잡념만 쌓여갑니다. 여기 저기 기도회다 피정이다 다녀보지만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 자유로움은 고사하고 적개심과 분노만 커져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아직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 없는 마음의 평화는 어불성설입니다. 용서 없는 자유로움은 불가능합니다

용서가 없다면 고통만이 우리 삶을 지배합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 진실한 기도도 없습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 건전한 인간관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용서가 없는 곳에 평화도 구원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로 나다"는 말씀은 물론 세례를 통한 새로남을 의미하지만,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한다면 낡은 기존의 우리 시각을 교정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녔었던 고착화된 마음가짐을 고쳐먹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웃을 종전의 이웃이 아니라 새로운 이웃으로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결국 "새로 난다"는 말은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저는 꽤 많은 분들의 삶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이 몸 붙여 지내는 사람들 중에 관계가 최악인 "딱 한 사람"으로 인해 본인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딱 한사람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그렇다는 것,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딱 한 사람으로 인한 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이 그 딱한 사람으로 인해 분노의 순간들이고 복수의 칼을 가는 지옥의 시간이기에 삶이 너무나 팍팍할 뿐입니다.  

자신의 삶 안에 자신은 10%도 없고 "그 밥 맛 떨어지는 사람"이 주인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새로 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기꺼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기꺼이 용서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기꺼이 옛날 습관과 아픈 추억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생기 있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 새로 태어나는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은 오직 진정한 용서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움켜쥐었던 손을 펴면

- 양옥자 수녀-

 

아주대학병원에서 원목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야곱처럼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 하고 싶은 일,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이나 섭리에는 귀를 막고 살아오다가 병고라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의 뜻을 꼭 움켜쥐었던 손을 서서히 펴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여정을 보았다.
한 치 앞만 보면 하느님 섭리의 길이 야속하고 손해만 보고 고통만 주는 것 같지만 움켜쥔 손을 펴면서 받아들이게 되는 하느님의 길 안에서, 그들은 전에 누리지 못했던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럴 때 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맑게 빛나고 아름다운지…. 나는 그런 여정을 걷고 있는 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혼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보일 듯 맑게 빛나는 아름다운 네 영혼을 찍어두고 싶다.” 그들이 하느님을 만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빛나는 그들의 얼굴이 하느님을 만난 흔적을, 향기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하느님의 뜻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이라고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늘 최선의 길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삶의 참된 의미와 존재 가치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행복을 맛보게 된다. 세상의 잣대와 나의 좁은 시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두려는 작은 노력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운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 깊은 배려임이 분명하다

 

새벽을 열며

 

 좋은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제목은 ‘1초의 의미’라는 글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일생의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고마워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사람의 따뜻함을 알 때가 있다.

“힘내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용기가 되살아날 때가 있다.

“축하해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행복이 넘치는 때가 있다.

“용서하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안녕.”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이 일생 동안의 이별을 가져올 때가 있다.

말하는데 1초도 안 걸리는 아주 짧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지 모릅니다. 즉,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소중한 말도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은 한번 뱉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특수부대에서 훈련병들이 비행기를 타고 낙하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교가 신호를 보내면 군인들이 차근차근 비행기 밖으로 뛰어 내려가 낙하산을 펼치는 것이 훈련의 과정이었지요. 그런데 한 훈련병이 자기 차례가 되어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렸는데 낙하산이 안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훈련병 : (떨어지며) 교관님! 낙하산이 안 펴집니다. 아~아~아~아~아~아~

그때 교관이 떨어지는 군인을 보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교관 : 다시 올라와아아아~~~!

떨어지고 있는 훈련병이 다시 올라올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내뱉은 말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너무나 쉽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을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초의 말 한마디라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만을 기억하는 이기적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1초의 말 한마디라도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갖출 때, 우리들은 상대방에게 더 큰 배려를 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공지 한 가지를 합니다.

제가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인천남동지구 사제연수를 갑니다. 따라서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새벽묵상글을 올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이틀 동안 묵상글이 없더라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길....

 

말 조심을 합시다.

 빠다킹신부 

 거듭 태어나기      

-김유철 신부-

 

예수님과 바리사이의 최고 의회 의원 중 한 사람인 니코데모가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3,3)고 말합니다.
즉 많은 기적들이 하느님의 힘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거나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움직임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보고 있는 구경꾼이 아닌 함께 뛸 동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니코데모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3,5)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존재는
육으로 생각하고, 육으로 행동하고, 육으로 살다가 땅에 묻힙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다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게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남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해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진실로’ 바라는 내용입니다.

 "영(靈)에서 태어난 사람"

-이수철신부-

꽃처럼 피어나는 영적 깨달음에 새롭게 열리는 세상입니다.


영적 깨달음에 이은

내적 변화와 치유,

평화와 기쁨이요,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얼마 전 드린 말씀이지만

저에겐 잊혀 지지 않는 신선한 영적 깨달음이었습니다.


요즘 부활시기에 걸맞은 봄꽃들 만발한 아름다운 자연환경이지만,

맹인들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새롭게 열리는 아름다운 세상에 놀라듯,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렸을 때도

이와 똑같은 아름다운 영적 현실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왜관 수도원의 형제들은

수도회의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이하여

가장 중요하다 생각되는 문제를 셋으로 압축했는데

정체성 확립,

영적 쇄신,

베네딕도회 영성 교육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정체성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세속화와 더불어 어느 수도회나 겪는 현실일 것입니다.

 

사실 영성이 바탕 되지 않은 모든 활동들,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짓기처럼 공허할 뿐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에도 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이 날로 얕고 가벼워지는 것도

내적, 영적 삶의 빈곤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영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났다 하여

저절로 좋아지는

영안의 시력도,

영적 성장이나 영적 성숙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여

끊임없이 성경독서와 성무일도, 미사에 충실할 때

영의 시력도 좋아져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풍요로운 영적 현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영적 삶에

성무일도와 미사, Lectio Divina(성경독서)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영적 현실을 체험하지 못하면,

영적 맛을 보지 못하면,

자연히 우리의 관심은 보이는 외적 현실로 쏠리게 되어

삶은 복잡해지고 혼란해져

정주(定住)생활도 점차 힘들어 질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 동료들이

함께 기도를 마쳤을 때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합니다.

 

기도를 통한 성령 충만으로

이들의 마음은 담대해졌고

영의 눈도 활짝 열렸음을 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에로 가는지 모릅니다.

 

영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성

령 따라 사는 자유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시어

풍요로운 영적 삶을 살도록 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 피신하는 이들!”(시편2,12ㄷ).

 <고달프던 일상(日常)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양승국신부-


   요즘 들어 자주 저를 괴롭히는 생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 초월’ ‘자기 극복’이란 문제입니다. 어찌 그리도 어려운지요. 수십 년간 발버둥 쳐 왔지만, 삶은 어찌 그리도 매정한지 모릅니다.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때로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삽 십년 전의 제 모습이나 지금 제 모습이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때 고민하던 일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제 삶을 휘젓습니다.


   아직도 대범하지 못하고 관대하지 못해 마음고생이 극심합니다. 아직도 별것 아닌 일에 엄청 마음 상하고, 그냥 넘길 만도 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제가 스스로를 봐도 참으로 ‘쫀쫀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관계 안에서 티격태격합니다. 옹졸하게도 마음의 문을 닫아겁니다. 금방 후회할 일인데도, 한 순간만 참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 한 순간에 엄청난 점수를 깎아 먹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명료하게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아직도 제대로 된 ‘깨우침’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세상으로 나오면서 ‘으앙’ 하고 크게 외쳤지만,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주님 안에 새로 나지 않으면 엄밀히 말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목숨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깨달음이란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가장 값진 명품으로 갈아입은 사람입니다.


   깨우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깨우침이겠습니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깨우침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점점 사라져가는 유한한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깨우침이겠습니다.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시며 주님 안에 사는 것만이 참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는 깨우침이겠습니다.


   깨우친 사람은 아래로부터(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왔지만, 또 다른 깨우침의 과정을 통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깨우친 사람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나큰 하느님의 상급이 주어질 텐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지금까지 끼고 있었던 색안경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고정관념이나 자기중심주의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보아도 볼 수 없었던 천국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 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육적인 한 인간이 읽은 복음서와 깨달음의 과정을 거친 한 영혼이 읽은 복음서 역시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는 복음서는 오랜 세월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의혹과 불신을 뛰어넘게 해줄 것입니다. 영적인 한 인간이 봉독하는 복음은 다름 아닌 생명의 복음이요 희망의 복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제대로 깨우침에 도달한 영혼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이해하기 힘든 이천년 전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함께 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라...

-오상선신부-

 

"새로 나야 된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께서는 좀 알아듣기 힘든 말씀을 하신다.

새로 나야 한다는 말씀은 알겠는데...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는데...

바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니...

알쏭달쏭하다.

 

아마도

바람이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 어떤 집착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을 두고하는 말일까?

그러한 점에서

사도행전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육적으로 만든다.

영적인(성령적인) 사람은 이러한 육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말일게다.

 

위의 말씀을 통해 볼 때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자리하시게 되고

그때

신앙 공동체의 리더들인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게 되고

예수 부활을 증언하게 된다.

어디 그 뿐인가?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게 된다.

 

부활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 공동체의 문제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 가정 공동체, 본당 공동체, 수도 공동체는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성령의 작용하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성령 체험을 하게되고,

기적 체험을 하게 되고

부활의 증인이 되고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얻어 누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초대공동체가 누렸던 크리스천 체험이었다.

본질적으로 수도공동체들은

바로 이러한 초대공동체의 크리스천 이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을 섬기고 서로 순종하며 삶으로써

이러한 성령체험, 부활체험, 기적체험, 축복체험을 나누자는 것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어떠한가?

이러한 체험들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 하나 하나가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 엄청난 축복 체험을 누리게 된다.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성령체험의 여정을 걷도록 주님께로부터 초대받는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꼬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것 같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 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주님 친히 이렇게 살아라고 요청하신다.

나는 어떤 집착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얽어매고 있는가?

무슨 욕심을 나는 부리고 있는가?

무슨 세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인생을 살아갈 수록

모두가 부질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바람은 불고 싶은대로 분다!>

<집착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래로 살아가자>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흘러가자!>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자!>

<부활체험, 성령체험, 기적체험, 축복체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오소서, 성령님

내 맘에 오소서.

나를 온갖 집착에서 씻어주소서.

훨훨 당신 영과 함께 온갖 자유를 만끽하게 하소서.

 

영으로 난 사람은

온전한 자유인이다.

 

오늘 하루

신나게 외치자

<나는 자유인이다!> 라고...

 

참된 변화 

-김훈일 신부-

 

아주 큰 공장에 좋은 기계들이 새로 설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 기계들을 통해서 좋은 제품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첫 가동을
시작했지만 기계가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와서 이 기계를 점검하고 고쳤지만 여전히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데를 여기저기 손봤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직원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해 보겠다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이 들어간 지 불과 몇 초 후에
기계가 신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기계를 고쳤느냐고
신기해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전원의 스위치를
올렸지요.” 니코데모는 학식과 덕망과 지위를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떻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지는지
예수님께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 공장의 경우처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니 존재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늘 주님 곁에 머물러서 심판받지 않고 새 생명을 간직하는
신앙을 살아야겠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황순찬-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돌아보면 10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다. 전보다 미성숙함을 포장하는 기술이 진일보한 것은 있지만 근원적으로 새는 쪽박이 어디 가겠는가. 평소 나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내가 실수한 부분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아내가 뭐라고 꼬투리를 잡으면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합리화하거나 궤변을 늘어놓으며 얼버무릴 때가 많다. 그런데 종종 아내가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의 핵심적인 면을 지적할 때가 있어 내심 소스라치게 놀라 허둥지둥할 때가 많다.
한 번은 저녁시간에 큰아이와 둘이서 비디오로 ‘스타워스’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둘째는 혼자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큰아이는 이제 여덟 살이라 예전처럼 그렇게 아빠한테 올라타고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둘째는 아직 다섯 살이라 나만 보면 올라타고 짓이겨서 함께 있으면 살갗이 아프다. 같이 장난감놀이를 해도 계속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다가 악을 쓰고 울면서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어디 갈 때도 절대로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한테 매달려서 어떻게 해서든지 안긴 채 다닌다. 그래서 가급적 둘째와는 붙어서 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내 모습을 놓치지 않고 아내가 둘째를 소외시키는 것 같다고 핀잔을 준다.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라면서도 오히려 열을 내어 “어떻게 아빠가 두 아이를 똑같이 사랑하지, 누군 좋아하고 누군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 애들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어!”라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아내 역시 “아니면 말지, 왜 큰소리야!”라고 빽 소리를 지른다. 나는 아무래도 뒤가 켕겨 주섬주섬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그걸 아내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집에 다시 들어가서도 나는 그런 적 없노라고 끝까지 우겼다. 마음이 편치 않지만, 내가 옹졸하다는 것을 알지만 내 알량한 자존심은 마지노선을 허물지 말라고 종용한다. 결국 나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합리화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한다. 산성화된 체질을 알카리성으로 바꾸는 것도 내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데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한다. 지금 같아서는 물과 성령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해도 뭐가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성경을 대하면서도 나는 끝까지 뻔뻔스럽게 중얼거린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사람도 생긴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나?” 
 

새로 나기 위하여

-강영구신부-

예수님, 새로 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니고데모는 새로 난다는 것을 어머니 배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남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라 하셨음으로, 다시 태어남은 육적인 태어남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을 뜻합니다.  

저는 이 땅에 태어나고자 의도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와 같은 아들을 낳겠다고 작정하거나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부모님을 통하여 한 생명을 점지해 주셨기에 저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저의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저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은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생명도 선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생명은 전적으로 저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대로 새로 나는 사람만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 새 생명으로 거듭나서 열매를 맺게 되듯이(요한12,24-25), 스스로 죽는 사람만 거듭 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주장, 생각과 뜻을 고집하면 거듭 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죽어야 합니다. 새로 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죽고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세례를 통해서 당신과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로마6,3-4). 그러나 이 생명은 아직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끊임없는 거듭남을 통해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오늘도 죽게 하소서. (一明

 요한복음 - ’생명의 책’

 -박상대신부-

 

  어제 부활 제2주일로서 우리는 주님부활의 팔일 대축제를 일단 마감했다. 무릇 부활축제의 기쁨은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8일 동안 4복음서가 전하는 주님부활과 발현에 관한 성서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부활사건 자체가 초기교회의 제자들에게 차원 높은 신앙의 도전으로 부각되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제자들의 부활신앙은 고무되었다. 주님부활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이 공생활에 비하여 짧고, 일관성이 부족하고, 내용상 서로간의 모순을 보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요한 20,30) 목적을 가진 기록들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책이 또한 성서이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장(場)을 열고 있다.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 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고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강행(强行)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靈)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直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入籍)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세례(洗禮)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자신의 육과 피, 즉 자신의 힘과 열정만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다르다. 이들은 모든 일은 하느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물과 영으로 재생(再生)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적인 생명에 참여하고 또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생명이 인간 고유의 생명을 속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생명은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 이 자유는 방종을 종용(慫慂)하는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율법과 격식과 겉치레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양심대로’ 행하는 행동이다.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심어주신 신성한 품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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