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대 덕종실록
1.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 德‘
(1016-1034 재위기간 : 1031년 5월-1034년 9월. 3년 4개월)
현종 후기의 안정은 덕종(德宗)대에도 이어진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 지 3년여 만에 생을 마감한다.
덕종은 현종이 장남으로 제3비 원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1016년(현종 7년) 5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흠(欽),
자는 원량(元良)이다. 1020년 5세의 나이로 연경군에 책봉되었다가 2년 뒤에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1031년 5월 현종
이 죽자 중광전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9대 왕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먼저 선대 왕들에게 즉위를 고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또한 각
지방에서 진상한 말을 대신들엑게 나눠줌으로써 화합정치를 표방하였다.
즉위 2개월 뒤에는 유소를 중군 병마원수로 삼고 장극맹을 병부상서로, 홍빈을 형부상서로, 이유섬을 공부상서로, 김
종현을 우간의대부로,황보 영을 어사잡단으로, 문사명을 전중어사로, 손위를 전중승으로, 박의부를 감찰어사로 임명하
는 등 백관들을 전폭 교체하였다.
조정의 백관이 안정되자 덕종은 거란에 유교와 김행공을 파견하여 압록강에 설치한 다리를 철거하고 억류한 고려 신
하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하지만 거란은 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는 거란에 대해 사절단 파견을 중지
하여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거란은 고려의 사절단이 중지되자 1032년 정월에 사진을 보내려 했으나 고려의 거부로 입국하지 못했다. 고려는 압
록강 다리를 철폐하고 억류중인 신하들을 돌려 보내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며 삭주 영인지(영흥)와 파천(강원 통
천)에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한편 1032년 3월에는 거란의 정국 혼란으로 고선오,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여명에 달하는 중앙관료 출신들이
고려로 망명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거란의 내부사정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 해 4월에 다시 거란 관료 출신 해가, 내
울고 등 27명이 귀순해 오자 이들도 받아들였으며, 6월에는 거란에 머무르던 우응, 악기 등의 발해인 50여명이 망명해
옴에 따라 이들도 역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거란 관료들의 망명을 적극 받아들였다.
이처럼 덕종은 현종과 마찬가지로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권 다툼으로 밀려난 거란인들을 받아들
여 그들의 정국을 진단하고 내부 사정을 분석하려고 했다.
고려의 입장이 이처럼 강경일변도로 나오자 1033년 10월 거란은 정주를 침략하여 군사적인 압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고려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해 군사적 도발행위를 감행하지 못했다.
현종대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외침속에서 국력을 한층 신장시킨 고려는 덕종대에는 군사적으로 강성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종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과거 출신 신진관료들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안정의 기반이었다.
정치.외교 이외에 덕종은 교육분야에서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한다. 즉위년인 1031년 윤10월 처음으로 국자감에 시험
제도를 도입하여 국자감을 명실공히 고려 제일의 교육기관으로 부상시켰던 것이다.
국자감에 입학시험을 설정했다는 것은 성종대 이래 추진되던 지방교육기관 육성계획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이전에는 단순히 힘 있는 집안 자제들이 형식적으로 거쳐가던 국자감에 시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인재를 실력
에 따라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즉위초에 이렇듯 고려의 안정을 위해 몇가지 주목할 만한 시도를 하긴 했지만 덕종 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034년
9월 급작스럽게 약해진 몸을 유지하지 못하고 병석에 누운 그는 아우 평양군 형에게 선위하고 19세의 어린 나이로 생
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덕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덕종은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였고, 정치를 함에 있어 아버지의 하던 일을 고치지 않았으며, 원
로들인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 등을 신임하여 조정에는 서로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이 덕분에 백성들은 편안한
삶을 누렸으니 비록 봉황이 날아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시호에 덕(德)자를 붙인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로다‘
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숙릉이다.
2.덕종의 가족들
덕종은 경성황후 김씨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3비 경목현비에게서 1녀, 충주 유(劉)씨에게서 1녀
등 2명의 공주를 얻었다.
제1비 경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딸이며 원순숙비 김씨 소생이므로 덕종과는 이복남매간이다. 그녀는 1034년 2월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덕종 사망 후 52년을 더 살다가 1086년 7월에 죽었다. 능은 질릉이며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
다.
제2비 경목현비 왕씨는 중서령 왕가도의 딸이다. 1031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므로 경성왕후보다 먼저 왕비에 올랐으
나 왕족이 아닌 까닭으로 제2비로 기록된 듯하다. 소생으로 상회공주가 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제3비 효사왕후 김씨도 경성왕후와 마찬가지로 현종의 딸로서 원혜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그녀도 덕종과 이복
남매지간이 되고, 제11비 왕 문종과는 동복남매간이다. 그녀에 대한 더 이상의 지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제4비 이씨와 제5비 유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씨는 부여군 공방시랑 이품언의 딸이라는 것
과 유씨는 중주사람 검교소감 유총거의 딸이라는 내용만 전한다. 이들의 칭호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떤 대우를 받았
는지 알 수 없으나 왕비로 책봉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충주 유씨는 공주 1명을 낳았다.
3. ’덕종 실록‘ 편찬 관련사항
고려 최초의 실록인 ’칠대실록‘은 현종대에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덕종 3년인 1034년에 완료된다.
’덕종실록‘에 관한 내용은 <고려사>에서 이제현이 덕종에 대해 평한 글 중에 직접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만
들어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서 편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다만 ’현종실록‘을
최충이 노년에 편찬하였던 것에 비추어 ’덕종실록‘역시 이때 함께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현종.덕종 연간의 세계 역사
현종.덕종 연간의 중국은 여전히 송과 거란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송과 거란은 서로의 힘의 세력을 알고
균형을 유지하여 ’전연의 맹약‘(1004)을 맺고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송나라에서는 화약과 나침반이 발명되었다(1000년).
서아시아에서는 셀주크가 이끄는 투르크족이 시르다리아 강 하류에 정착한 후, 손자대에 와서 아무다리아 강을 건
너 이란서부와 메소포타미아로 진출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건설한다(1037)
한편 유럽에서는 노르만족의 침략자 롤로가 노르망디 공국(996)을 세우고 그의 5대손 윌리엄 1세가 출생(1028년)하
여 이후 그가 영국을 침략 정복하여 노르만왕조을 세운다(1066년)
프랑스는 루이 5세로서 카롤링거 왕조가 끊어지고 위그 카페에 의한 카페왕조가 시작된다. 위그 카페 로베르2세에
이어 3대 앙리 1세가 왕위에 오른다(1026년).
독일에서는 카롤링거 왕조가 일찍 단절되고,작센공 오토 1세가 독일왕(1024)에 이어 이탈리아 왕까지 겸함으로서 교
황 요한 12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는다(1027년). 오토2세 오토3세에 이어 하인리히 2세를 끝응로 작센
왕조가 끝나고,콘라트2세가 황제에 오른다. 콘라트2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백작의 증조부는 콘라트인데,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콘라트도 작센왕가의 후손이다.그러나 모계 후손인 셈이다.콘라트2세는 잘리어 왕조
의 시조이다.
첫댓글
20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생을
마감한 덕종
고려의 아홉번째 왕 으로
국사 편찬 사업 까지 완성 했다고
하니 왕위에 오른 짧은 기간 에도
대단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사 공부를 다시 해보니 애국심이
생기는것 같아요
추일슬풍님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병에 걸리면, 치료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방백신도 없었고,치료약도 없었으니까요.
일단 병마를 물리친 다음에, 음식으로 양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잠시 범방에 들렸다가
외출 합니다
정독은 저녁에나 할 것 같아요
비가 와도 너무 와서
비상입니다.
어쩌나요.
걱정이네요
이제 그만 와야지요
더 이상 비 피해가 없기를 바래봅니다
보쳉언니
조심 또 조심 안전 운행 하세요
일이란 선후가 있고,경중이 있으니,
급함과 중함부터 착수해야 될 일입니다.
끝까지 읽고 보면 앞의 내용을 까먹어요
그래도 뭔가 건지려고 또 읽어 내려가요
공부하는 느낌으로...
만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과정을 봐가면서,일이 성사되는 시간이 필요하고,
음식과 술따위도 익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반복하고 기다리다보면 알게 모르게 기억으로 남게 되더군요.
고진감래와 진인사대천명이란 사자성어와 육자성어가
생각납니다.
요즘 머릿속이 텅~~~
돌아서면 잊어 먹어요~ㅎㅎ
먼저 손에다 연필을 잡으세여.
그리고 종이위에다 써보면서 읽어 내려가니,
기억이 향상되드만요.
만인에 해당될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미미한 저의 게시글에 유임무자로서
또는 학구적 마음으로 항상 관심하여 주신 데 대하여
심심히 감사합니다.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화약과 나침판이 세계 최초인가요
인류는 전쟁을 위하여 태여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종이
아닌가 싶네요
고려사 실록을 보면서
그 당시의 세계 정세까지
기록해 주시는 추일슬풍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입니다
고려왕조실록 편자의 원본을
복사하여 게재하고 있어 저작권위반이
될 수 있으나 묵인하는 걸로 인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