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32. 지혜는 환술에 속지 않는다
32. 생멸하는 것
선지식이 전하는 말길을 따라 수행을 지어가다보면 이런저런 아리송한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참구하게 되는 여러 선어(禪語)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자주 접하는 표현에는 ‘둘이 아니다.’,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모양도 아니고 모양이 아님도 아니다.’ 등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모양 짓지 않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까? 딱 부러지게 규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도 그것을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못 본 것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도 않다. 보고 안 것은 틀리지 않지만,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유이다. 만약 그것에 대해 지칭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것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지칭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보고 알기 위해서는 어떤 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틈이 없다.
당연히 상대가 존재하지 못한다. 상대가 없으니 보았다고도 알았다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상대가 없는 것이다. 상대가 없다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또한 아니다.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어려운 말 같지만, 아는 입장에서는 너무 쉬운 것이다. 이때 알지 못하는 입장과 아는 입장은 완전히 정반대의 앎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틈이 남아있다면 두 가지가 나타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있다. 이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항상 ‘나’를 동반하게 된다. 틈이 없다면 아는 것이 없다. 이때는 ‘나’를 동반하지 않는다.
‘나’가 있는 앎은 온전한 앎이 아니다. 그 앎은 ‘나’의 조건에 따라 변한다. ‘나’가 없는 앎은 조건이 없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안다는 마음도, 모른다는 마음도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안다고 한다. 이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알려고 하는 그 마음이 내가 아님을 알고 나니 알아야 할 것도 없고 모른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한때는 눈먼 존재였지만 지금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는 눈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다. 어찌 보면 안과 밖을 보지 못하는 눈이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눈을 뜨면 안과 밖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분별해서 보아야 하는 것이 나타나지 못한다. 만약 안과 밖이 있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나’라는 것에 대해 의심할 줄 알아야지, ‘나’라는 것으로 의문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해결하려 하면 생멸하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해결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생멸이 생겨날 수가 없다.
“여래장(아뢰야식)은 착함과 착하지 못함의 인연으로서 육도 중생의 생사 인연을 창조할 수 있네. 비유하자면 뛰어난 마술사처럼 각종 사람과 사물을 변화시키지만, 그 변화시킨 각종 사물에는 나도 없고 내가 만든 사물도 없는 것과 같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하는 ‘나’에 대해 해결할 것이 있는 줄 알고 살아온 세월이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그 ‘나’는 실재일 수 없는 ‘나’이다. 그저 이름으로만 불리는 ‘나’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그 ‘나’는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그러니 그 ‘나’는 생멸할 수가 없다. 우리의 본래는 눈으로 볼 수 없고, 느낌으로 느낄 수 없고, 의식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실재하지 않는 ‘나’는 실재하는 본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온전히 알 때, 만물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지혜는 어떤 움직임도 아니고 움직임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음을 알고 있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반응도 없고 반응하지 않음도 없다. 그저 지혜만 있을 뿐이다. 이 반응하지 않는 지혜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혜를 나타내어 대상과의 관계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과 느낌과 의식의 세상인 허상에서 잘잘못을 해결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다. 그 해결은 인과의 과정이다. 그 인과는 옳고 그름이 없다. 나고 사라짐도 없다. 반복되는 어리석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