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백제 660년 고구려 668년에 멸망시키고 신라 지금의 문경 당교에서 김유신장군의 신라군에 피살되었다 KBS 역사 스페셜 방영 세계 최강국 당이 신라조정에 가한 압력으로 상당시간 동안 신라 전체가 떨었고, 두려워했다. 나당전쟁 후 전이 다시 재발되지 않았다고 해서 전후에 바로 평화기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결과만을 보고 그것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그렇지만 거의 25년에 걸쳐서 신라조정과 당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약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당 고종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678년 9월에 당 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 했다. 하지만 토번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은 여전히 토번에 발목이 잡혀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인 679년에 나당전쟁의 정신적 귀의처였던 사천왕사가 신라의 왕경에 세워졌다. 이는 당의 재침에 대한 우려가 신라사회에 팽배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신라인들은 나당전쟁을 경험하면서 서역의 전황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676년 휴전 이후에도 서역의 전황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군의 재침에 대한 두려움은 전후戰後 신라의 급진적인 군비 증강과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로 나타났다. *소정방의 시체가 묻혔다는 당교. 과연 실재했던 다리였는지 확인에 나섰다. 동네 들어서고 주민에게 물어본다 혹시 이 근처 당교 있나요 마을주민 :이 동네 이름이 당교입니다 .당나라 땟놈이 와서 사방에 복병해서...다리 건너고 마을노인들의 안내로 당교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이게 당교냐? 당교. 뙤다리. 때놈 옛날에 다리가 있었는데 도로확장 공사하면서 자체가 하나도 없어졌어요 작년도 지금와서 완공.언덕T.D 다리아래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당교는 상주와 문경을 잇는 경계지점에 존재하고 있었다.다리PAN 지난해까지도 이 지역 주민들이 수시로 이용했던 다리는 도록확장공사로 인해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신동철 인터뷰 : 우리가 서있는 이 지역에서 삼국통일때 당군사 몰살시킨 곳. 당교 우리말로 뙤다리 삼국유사뿐 아니고, 이 지역 사람들 모두가 듣고, 그렇게 알고 있으며 뙤다리 존재가 증명합니다 트레킹. 문경시청(그렇다면 당교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당교사적비(17) 문경시청에는 당교사적비가 세워져 있다.다리가 묻히게 되자, 시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비문에는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장군이 당의 소정방을 물리친 역사적다리라 씌여져 있다.시청안 사진 찾고(10) 시청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당교의 원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당교Z.I(23) 이 지역 사람들이 뙤다리라고 부르는 당교.김유신장군이 당나라 군사와 소정방을 살해하여 묻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지명과 함께 1300여년동안 이어져 온것이다.고려사 넘기고(16) 소정방피살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손가락 짚으면(13) 고려사에는 지금의 충남 예산군에 속하는 대흥현 대잠도에 소정방 사당이 있고 해마다 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어 제사 지낸다고 기록돼 있다. 트레킹 충남 예산군 사당터 추정지(43) 봉수산 기슭.. 기록상에 나타난 소정방 사당터로 추정되는 곳이다.기왓장의 종류가 다양기왓장이 상당히 많다. 어골무늬를 가진 기왓장이 나오고 있어, 어골문양 고려시대 대표적 문양...바로 이 건물자리가 고려부터 있었다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기왓장(21)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사당터.그러나 개간을 하면서 쌓아둔 덤불속에는 주춧돌들과 함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기와문양이 발견된다.고려시대에 세워진 소정방의 사당이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도학교수 인터뷰 1531년에 이약수 선생이 쓴 시문집보면 봉영산 동쪽에 소정방장군의 사당이 되어 있다고 되어있다.바로 봉영산은 뒤에 있는 봉수산을 말하고, 봉수산 동쪽에 해당되고 있다.조선말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보면 대흥현 서쪽 3리지점에 소정방 사당이 있다고 되어있다.바로 현아가 앞쪽에 있는데 그로부터 대략 3리지점에 소정방 사당이 있었다는 것과 부합동국이상국집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 제소정방장군문.당시 경주민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정방의 제사를 지내며 쓴 제문이다.글씨 환해지자마자 장군은 불행히도 우리나라에 머무른채 수레가 서쪽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므로 유사가이곳에 남게 됐습니다.미서원 미서원은 전재에서 사용하는 수레를 뜻한다. 소정방이 서쪽, 곧,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유사 그래서 유사, 즉 사당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고 쓰여있다. 사당이 지어지게 된 배경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객혼 그리고 객혼, 즉 떠도는 영혼이란 소정방이 신라에서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이규보선생은 고려무신정권기의 인물로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보다 70-80년 앞선 시기에 이 제문을 지었다. 이 제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당시에는 소정방장군이 신라서 전물했다는 사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모두 인지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당추정지 부감 소정방은 신라에 의해 피살되었다.그러나 세월이 지나 점차 앙금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에게 전쟁신의 의미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그래서 객혼으로 떠도는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저 멀리 서쪽 중국땅이 바라보이는 이곳에다 사당을 세운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