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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 기획은 월간잡지 'BESTELEVEN'이 2010년 1월호부터 5월호까지 월드컵 특집으로 준비한 'CLASSIC TEAM' 에서 따왔음을 미리 알립니다. 글의 내용은 직접 쓴 글입니다. 좋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치우폐인] 'CLASSIC TEAM - 2002 KOREA REPUBLIC' (1)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
뜨거웠던 2002년 6월의 함성
월간축구잡지 'BESTELEVEN'(베스트일레븐)을 보시는 독자라면 이번 특집의 의미를 알겠다. 월드컵 역사에 최강의 전력으로 기억되는 팀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바로 'SPECIAL PROJECT - CLASSIC TEAM'이다. 2010년 1월부터 5월호까지 총 5팀이 소개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위엄을 실감하게 해주고자 나열해보겠다. 1954 월드컵 - 푸스카스가 버티는 '마법의 팀' 헝가리, 1970 월드컵 - '역대 최강의 삼바군단' 브라질, 1974 월드컵- '황제 베켄바우어'의 서독, 1986 월드컵 - '신의 아이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1998 월드컵 - '아트축구' 프랑스 가 그 예다. 하나같이 월드컵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긴 팀들이다. (단, 1954 월드컵에서 헝가리는 '베른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며 준우승.)
그리고 비록 베스트일레븐에 소개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반드시 소개하고 싶은 팀이 있다. 필자는 한국인이다. 세계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축구가 한국축구다. 필자를 이렇게 만들어준 계기는 2002 월드컵. 그 시절이 없었다면 평생 축구를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들. 한달동안 우리가 세계의 주인공이었던 2002 월드컵 - '4강 신화' 대한민국 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축구팬의 자부심은 차범근, 홍명보, 박지성 등과 같은 선수 개개인에게 있는게 아니라 바로 2002 월드컵 4강에 있다. 베스트일레븐의 취지에 맞게 객관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지만, 한국인이 한국을 평가하는데 어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닥치고 찬양이다. 그리고 후세의 축구팬들에게 큰 소리 치고 싶다. "우린 2002 월드컵을 눈앞에서 보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축구, 'Miracle 2002'
2002년 5월,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 -거스 히딩크-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1954 월드컵을 통해 월드컵에 첫 발을 내밀었던 한국은 2002 월드컵 전까지 총 5차례에 출전했지만 단 1승 조차 거두지 못했다. 국민들의 염원은 16강을 고사하고 단 1승, 적어도 일본보다 잘 해야 한다 였으니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지금과 비교하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전혀 월드컵의 규모와 위엄에 대해 실감하지 못했다. 아시아를 호령했던 축구지만 세계로 나가면 지는 것이 축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성적'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었다. 그러나 그 누가 예상했겠나? 한달 후, 정말 세계가 놀랐다. 한국이 4강에 오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기적'. 그들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한국의 월드컵 개최 비하인드 스토리
갑자기 일본 얘기를 하면 당황스럽겠지만 먼저 설명할 게 있어서이다. 월드컵 출전에 번번히 좌절되었던 일본은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월드컵 개최'를 들고 나선다. 일본의 독보적인 진행 중에 뒤이은 한국의 참가. 88 올림픽에서 성공적인 개최에 이어 일본의 출전에 큰 자극을 받고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이 피파에 유치 신청서를 낸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월드컵 개최 붐이 일어나면서 FIFA로 애정어린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대한축구협회의 결단력과 실행력(한국 근현대사에서 흔히 봐왔던 독재와 로비 비슷한 것.)이 일본으로 기울었던 FIFA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착실하게 준비해왔던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던 FIFA는 공동개최를 제기했다. 일본에겐 월드컵 무출전이 라는 큰 약점이 있었고, 한국은 인프라와 같은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2002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확정. 조금 아이러니했다. 다른 국가도 아니고 한국과 일본.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은 두 나라가 월드컵 최초로 공동 개최를 하게 된 것이다. 월드컵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의 시작이었다. 사실 득을 본 건 한국이다. 일본에 비해 뒤늦게 유치전에 돌입했고 단독 개최는 일본보다 당시 한국에게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한국과 일본에게 생긴 과제. '단 한번도 깨어진 적 없는 개최국의 16강 진출'. 정작 현실은 단 1승도 못 거두었다. (현재 남아공을 두고 개최국 16강 진출 여부에 많은 우려를 하지만, 역대 개막국 중 최악의 국가로 평가받는 건 단연 한국이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월드컵 전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양팀은 1998 월드컵을 끝으로 본격적인 시작에 나섰다. 그런데 한국에 큰 변수가 생겼다. 바로 'IMF' 였다. 나라 경제가 위기인 상황에서 월드컵 개최 준비를 두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 대한축구협회의 실행력이 빛을 보았다. 월드컵 개최에 인력을 투입하는 것. 이는 실업률을 해결하면서 경기장을 짓고 개최 준비를 하는 상승 효과를 불러왔고('한국판 뉴딜 정책' 되겠다.) 다행히 한국은 IMF를 초고속 졸업하며 위기를 넘겼다. 이제 남은 건 대표팀이였다.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는 또 한번 초강수를 두었는데 바로 '외국인 감독 영입'이었다. 98 월드컵의 성적 순대로 감독들을 찾아가 제의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건 당시 한국에게 5 대 0 패배를 안겨주었던 네덜란드(4위)의 히딩크 감독이다. 이렇게 해서 2001년 1월 히딩크호가 출범했다.
순탄하지 못했던 히딩크호의 출발, 충격의 '오대영' 그리고 한국축구의 암흑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앞서 외국인 감독 영입을 초강수라고 표현했던 이유, 월드컵 출전사에 외국인 감독이 한국을 이끄는 경우는 처음이였기 때문이다. 히딩크가 한국 최초의 외국인 감독(크라머)은 아니였지만 이에 따라오는 부담 요소가 컸다. 우선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지금이야 외국인 감독이 온다 해도 히딩크라는 성공 사례가 있지만, 히딩크의 경우엔 없었다. 히딩크 감독은 모든 게 처음부터 시작인 상황이었다. 그 예로 히딩크 부임 후 대표팀을 거쳐간 선수들은 약 50명 정도 된다. 그의 첫 시험무대는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 1승 1패의 무난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경기력에선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히딩크가 이를 모를리 없다.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파악했는데 바로 '체력'이었다. 조금 의아한 말이었다. 세계를 상대로 기술은 못 미치더라도 적어도 체력에서 큰 문제를 보인다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에 이용수(히딩크 부임 후 계속해서 히딩크 옆에서 한국축구를 설명해줬다. 현재 히딩크의 열혈한 신도)를 비롯한 축구인들의 의문을 산 적 있다. 하지만 히딩크는 달랐다. 더 높은 수준의 체력을 요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공격 축구와 압박 축구를 하는 것이 히딩크가 선호하는 축구였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유럽식 파워 프로그램'. 히딩크호는 장기간의 합숙 훈련에 돌입했다. 선진화된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월드컵에 맞추어 높은 수준의 체력을 만들고 조직력을 맞추어 갔다. 이 과정에서 히딩크는 많은 선수들과 전술을 시험하고 주전 선수를 과감하게 제외하여 막내와 경쟁시키는 등 기존의 국내 감독과 차별되는 외국인 감독 하에 운영되었던 체계는 그동안 한국축구가 보여왔던 모습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다. 정말 질리도록 많았다. 제 아무리 히딩크라고 한들, 실패 없는 성공은 없었다. 특히 성적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부임 이후 이집트 4개국 초청대회를 우승한 것을 제외하고 자랑할 만한 승리 기록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의 첫경기,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와 대결(2001/5/30). 월드컵을 딱 1년 앞둔 시기라 국민들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5 대 0 대패를 당한 것이다. 아무리 당시 세계 최강 디펜딩 챔피언이지만 프랑스는 주전이 빠진 2군에다 5실점은 분명 충격적이었고 팬들은 실망했다. 비록 그후 2승을 거두었지만 득실점차로 밀려 3위로 탈락, 4강 진출에 실패했다. 반면 공동개최국 일본은 승승장구하며 준우승의 쾌거를 거두었다. 더 놀라운 건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고 2승 1무로 1위로 진출, 결승에선 프랑스와 만나 단 1점으로 패했다. 5점이나 내줬던 공동개최국 한국과 비교되는 게 당연했다. 이 대회 직후 일본의 피파랭킹은 11계단이나 급상승하며 한국(당시 37위)을 추월하며 33위에 랭크. 그리고 한국 축구에 비수를 꽂는 일본의 사령탑 트루시에의 발언. "더 이상 한국과 비교 말라." 한일 전에서 적어도 축구만큼은 믿어왔다. 그런데 90년대부터 일본에게 패하기 시작하더니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것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말이다. 대패당한 것도 서러운데 여기에 일본이 불을 지펴 축구팬 아니 국민들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게다가 한일 관계를 알리 없는 외국인 감독의 존재가 더욱 미웠다. 돌이켜보면 월드컵 개막 1년 전 이때가 바로 '한국축구의 암흑기'가 아니였겠나 싶다. (반면 세계가 기억하는 일본축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는 막장의 안드로메다로 가는 기세)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2달 후 또 한번의 충격. 민족의 날, 광복절(2001/8/15)에서 선물받았다. 비록 원정이지만 체코에게 또 한번 5 대 0 패배를 당한 것이다. 상대가 프랑스와 같이 세계 최강의 팀이 아니였기에 문제는 더욱 컸다. 이후 월드컵 개막 한달 전까지 히딩크를 보고 조롱한 단어. 바로 '오대영 감독' 되시겠다. 98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이끌며 한국에게 오대영 패배를 선사했던 그가 한국을 이끌고 두번의 오대영 패배를 선사했다. 정말이지 연관성 있게 잘 지은 별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현재 허정무 감독을 조롱하는 축구팬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 '허접무', '허무축구', '인맥축구', '검증되지 않은 감독' 이라고 놀리는 꼴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지금은 성적이 괜찮고 월드컵이 코 앞으로 다가와서 덜하지 한달 전만 해도 허정무 까기는 절정이였다;; 발끈했으면 미안하다. 자극적인 말인건 인정하지만, 만약 당신이 히딩크 시절에 축구를 봤다면 더 욕했을 사람이다.)
그 어느 때보다 대표팀 그리고 히딩크에 대한 불신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히딩크 감독의 '경질론'도 불가피했다. 월드컵을 한달 앞두고 국민들은 큰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고 성적도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국내의 축구인들이 외국인 감독은 안 된다며 히딩크를 비난하며 나섰고, 실제로 히딩크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50%가 넘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이 상황은 이후 대표팀 감독들이 까일 때 쉴드쳐줄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히딩크의 성공만 기억하는 축구팬들은 이 부분에 대해 당시의 여론들에 욕해선 안 된다. 물론 잘한 건 아니지만, 장담하는데 내 생각엔 현재 허정무를 까왔던(전제조건) 당신들도 그때 축구를 보았다면 너도나도 히딩크 까기에 안달이 났을 것이다. 그게 그동안 봐았던 대표팀 사령탑에 대한 시선이자 과정이니 말이다. 만약 히딩크 호 시절 인터넷 문화가 현재처럼 활성화되있었다면 현재의 허정무보다 더 까일 수 있는 사람이 히딩크일 것이다. 인터넷 드립은 여기서 그만두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그만큼 히딩크도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게 유독 한국은 대표팀 감독에 대해 존중과 기다림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국내 리그에 대한 관심은 쥐뿔도 없으면서 관심은 대표팀과 유럽축구에 쏠리고도 대표팀에 좋은 성적을 기대하니 어떻게 보면 정말이지 역설적인 현실이다. 그러지 말자고 부탁하고 싶지만 이번 월드컵 후 얼마 안 지나서 금방 꺼질 국내 축구 열기와 유럽축구에 열광할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유럽축구에 열광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되도 안하는 논리로 국내축구와 비교하고 무시하는 일명 유럽축구빠의 모습들은 정말이지 한심하다. 잠시 흥분했다. 주제에 벗어났으니 여기서 멈추겠다. 다시 위의 문단에 이어 들어가겠다. (물론 이런 내 모습이 보기 안 좋은 건 안다. 하지만 성격이 그렇다. 할 말은 하고 넘어가야 희열을 느낀다. 다시 한번 이해바란다.)
그러나 히딩크는 기존의 감독들과 달랐다.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선수들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고 나섰다. 당연한 일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적으로 그가 서있는 자리(대표팀 감독)를 생각하면 정말 용기있는 발언이다. 히딩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실패라고 말하진 않았다. 이는 성공을 위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히딩크의 태도에 한국축구가 드디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히딩크의 말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한마디로 한국에게 엄청난 가능성이 보였다."
"한국 선수들은 실패를 두려워했고, 변화를 싫어 했다. 이를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다."
"선수들의 눈빛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봤다. 그들은 기회를 기다리지 않았다. 기회를 잡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본격적인 한국의 2002 월드컵 이야기, 2부에서 계속...
참고문헌 - '꿈은 이루어진다' (조선일보사)
http://blog.daum.net/chiwoopyein
월드컵을 앞두고 학점포기 하는 치우폐인의 축구 이야기
그러니 월드컵 특집 관계자 여러분... 저 좀 시켜주세요...
학점? 그게 뭐임? 먹는 건가요? OTL
아무리 좋아서 이 짓 한다지만 시험 앞두고 이게 뭐하자는 건지 ㅠ
P.S ) 2010 월드컵을 앞두고 특집으로 쓰게 됐는데
단기성 글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 2002 당시 상황에 집중하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김현회 기자'님'을 존경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쓰다보니 그 분의 필체를 따라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 보시다시피 경어체는 찾기 힘들 겁니다. 김현회 까는거 아님
본인의 장래희망이 기자인만큼 이 순간만큼은 기자로 빙의해서 글 쓰고 있습니다.
조금 자극적인 말을 쓰게 됐지만 좋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기 편하게 복사 풀었습니다. 스크랩은 감사하지만 출저 표시 없는 무단 복사는 하지 말아주세요.
- 치우폐인 -
▶ [특집] 'CLASSIC TEAM - 2002 KOREA REPUBLIC' (1)
▶ 2010년 5월 24일 한일전, 10년의 기다림 매치 볼 수 있을까?
▶ 누가 이운재를 욕하는가? (부제 : 이운재를 믿어야 하는 이유) BGM 有
▶ 이동국을 다루려는 허정무를 보면서 히딩크의 모습을 보았다(히딩크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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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험을 앞두고 당신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ㅎㅎ
저도 낼 시험 두개 잇는데 공부하는척하면서 스페인전 기다리고 잇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