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 봉헌의 규례
겔 43:13-27
13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14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이 아래층 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네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15 그 번제단 위층의 높이는 네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16 그 번제하는 바닥의 길이는 열두 척이요 너비도 열두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17 그 아래층의 길이는 열네 척이요 너비는 열네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너비는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
1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1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
20 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21 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22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
23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25 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26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
27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43:13-27 / [번제단의 모양과 크기] 번제단의 크기는 다음과 같았다. 제단의 맨 밑에는 사방으로 빙 돌아가며 물고랑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깊이와 폭이 큰 자로 1자씩이고, 그 가장자리에는 높이가 한 뼘 되는 테가 빙 돌아가며 담처럼 둘러 있었다. 14) 이 기초 위에 제단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맨 아래층의 높이는 2자였다. 그 다음 층은 제단의 벽이 1자씩 좁아져 있었고 높이는 4자였다. 다음 층은 다시 제단의 벽이 1자씩 좁아지고 15) 높이는 4자였는데 이 부분이 희생제물을 살라 바치는 화덕으로 쓰일 곳으로 네 모서리에는 뿔이 각각 하나씩 달려 있었다. 16) 화덕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2자씩으로 네모 반듯하였다. 17) 이 화덕을 받치는 큰 층은 가로 세로가 14자로서 이것 역시 네모가 반듯하였다. 이층에도 빙 돌아가며 폭이 1자인 물고랑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테의 폭은 반 자였다. 이 제단의 동쪽에 설치된 계단을 통하여 화덕이 있는 곳으로 오르게 되어 있었다. 18) [번제단 봉헌 규정] 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제단을 봉헌하는 규정을 알려 주어라. `너희는 번제물을 내게 바치고 번제 짐승의 피를 뿌릴 제단을 세운 다음에 19) 레위 지파 가운데에서 내게 가까이 나아와 섬길 수 있는 사독의 후손들을 제사장으로 뽑아라. 그리고 그들을 시켜 황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서 제단을 건설하는 동안 사람들로 해서 더럽혀진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20) 그 황소의 피를 제단의 네 뿔과 받침대의 네 귀퉁이와 사방의 테에 발라 사람들의 허물로 부정을 탄 제단을 정하게 하여라. 21) 그런 다음 그 황소를 성전 구역 밖에 있는 지정된 곳에서 불살라 없애거라. 22) 그 다음날에는 다시 흠 없는 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라. 그 전날 황소의 제물을 바치던 것과 똑같은 의식을 거행하여 사람의 허물로 부정을 탄 제단을 깨끗이 하여라. 23) 그런 다음 또 황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골라서 바치되 24) 제사장들은 희생제물로 가려 놓은 그 짐승들 위에 소금을 뿌려서 내 제단에 불살라 바쳐라. 25) 그 다음날에도 계속하여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물들을 바쳐라. 26) 너희는 7일 동안 이렇게 제물을 바쳐서 사람의 허물로 부정을 탄 제단을 정하게 하여서 봉헌하여라. 27) 이같이 하여 그 기간을 채운 뒤 8일부터는 제사장들이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규정대로 제단에 바쳐라. 너희가 이처럼 규정대로 시행하면 내가 너희의 모든 제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새 성전의 제단을 통해 하나님과 죄인의 언약관계가 영원히 유지됩니다.
새 성전의 제단(13-17)하나님의 영광의 귀환을 본 후 에스겔은 제단에 주목합니다. 제단은 희생제물의 피와 잔존물을 받도록 밑받침으로 둘러있습니다. 측면에서 볼 때 제단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줄어드는 세 개의 네모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밑받침 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척, 너비는 한 척이며, 아래층 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네 척, 너비는 한 척입니다. 수직방향으로 보면, 제단 위층의 높이가 네 척이며 제단 바닥에서 뿔 넷이 솟아 있습니다. 번제단 바닥 길이와 너비는 모두 열두 척이며 네모 형태입니다. 그 아래층의 길이와 너비는 열네 척이며 역시 네모 형태입니다. 이 크기는 솔로몬 성전의 제단 크기와 비슷할 것이며, 광야 시절 성막 제단(출 27:1-8)에 비하면 네 배 정도 클 것입니다. 모세 시대의 제단에는 층계가 허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출 20:26) 이 제단은 율법보다 새 언약에 어울리는 형태입니다. 에스겔이 성전의 기물들 중 제단부터 보여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성전을 볼 사람들은 의인들이 아니라 모두 죄인들이며,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뿐입니다.
제단 봉헌 의식(18-26)하나님은 에스겔더러 칠 일 동안(25, 26) 제단 봉헌 의식을 주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의식의 목적은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20, 22, 26). 비록 환상으로 보는 새 제단이지만 이전에 제단에서 행했던 가증한 죄악들에 대한 기억을 씻어내기 위해서 에스겔은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과 함께 희생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였기에 제사장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였지만 비록 환상 속에서나마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또한 모세가 단을 정결하게 하고 봉헌했던 것처럼(출 29장) 에스겔은 제 2의 모세의 역할을 합니다.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27) 하나님은 칠 일 간의 봉헌 의식이 끝난 다음 날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바치는 수직적 의미의 제사이며 감사제는 하나님 앞에서 온 백성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수평적 의미의 제사입니다. 감사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는 말씀은 자기 백성과의 교제를 언제나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은 제단의 희생을 보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여기에 언급된 '소금'은 새 언약의 불변성을 강조합니다.
적용: 에스겔의 새 성전의 중심에 제단이 있습니다. 죄인이 피의 제단을 통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직 어린 양 예수의 피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나요?(요일 1:7)
" ...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자리의 주인은 사람이 차지하는 경우가 있듯 합니다. 예배의 여러 모양이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제단의 양식과 제사의 규례를 하나님이 친히 자세하게 일러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설 교 >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에스겔 43:12 / 피영민 목사
서론
전의 법은 이전의 법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전의 법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서 40장부터 48장까지는 아마 성경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말씀일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의 인도를 따라 새로운 성전을 환상 가운데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에스겔이 처음 보았을 때 성전은 비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43장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와 성전 전체에 가득해졌습니다. 이어서 제단과 제사장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들을 받게 됩니다. 근본주의 혹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 성전을 지상 천년왕국 때에 다시 지어질 문자적인 성전으로 해석합니다. 문자적인 성전에서 문자적인 희생제사가 회복될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새 성전은 문자적인 성전이 아니라 성령께서 임재하고 계신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 것으로 해석해야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제단과 제사장에 대한 상세한 규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상징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해놓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시고 교제하시며 훈련을 통해 성장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 되는 것은 매우 큰 특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무질서한 집이 아닙니다. 확실한 질서와 규례를 가진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자유와 행복이 있지만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종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하나님의 집은 마음대로 행하는 곳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하는 법이 있는 집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절대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7)
I. 하나님의 집의 법은 무엇인가?
에스겔 43장 12절 중반에 그 법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니라” 지극히 높은 산은 시온산을 의미합니다. 시온산은 하나님 교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집 즉 교회의 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왜 교회의 법이 거룩이어야 하느냐?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느 부분이 거룩해야 할까요? 솔로몬의 성전과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오로지 지성소 안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이 본 새 성전에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전체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석구석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NIV에서는 산꼭대기 지점의 모든 주위(all surroundings)가 거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목사, 성도, 예배 모두가 거룩해야 합니다. 목사가 나비넥타이를 매고 빨간 양복을 입고 나와서 설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교회 식당에서 메뉴를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먹는 것과 마시는 것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교회의 모든 부분이 다 거룩해야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골짜기나 깊은 산 속에 지어진 오두막 집이 아닙니다. 교회는 지극히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집입니다. 숨겨진 기관이 아니라 만천하에 다 노출된 기관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6) 교회는 산꼭대기에 있는 빛입니다. 교회가 재산이 많기로 유명하거나 권력자가 많아서 유명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유명해져야 합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 성도들은 거룩으로 유명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나 교회는 다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교수를 했었는데 강의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기 사생활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사생활이 없습니다. 제가 뭘 먹는지 어딜 가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 교회에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노숙자도 제 이름과 제가 어딜 다녀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이 노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거룩에 대해서 반감이 있습니다.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성경책을 끼고 조용히 걸어 다니며 말도 없이 웃지도 않고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종교적인 바리새인 같은 사람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거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분리해 놓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separation).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구별해 놓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해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나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하고 있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룩을 너무 윤리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놓으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따로 구별해놓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 되어 사용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dedication). 물그릇 하나도 막걸리 집에서 쓰이는 것은 그냥 그릇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그릇은 거룩한 그릇인 것입니다. 도구가 무슨 윤리성이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일에 쓰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윤리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따로 구별해놓으셨다는 의미가 성경에서는 훨씬 강한 것입니다.
셋째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likeness).
넷째로 거룩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communion).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해놓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해 놓으신 이유는 교제하기 원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한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법은 어떻게 시행되는가?
법은 아무리 옳은 법이라고 해도 실효성이 있어야 합니다. 법은 타당성과 실효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은 건강의 적이므로 술 마시는 사람은 징역 10년에 처한다는 법을 국회가 만들어서 통과시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술이 없어지겠습니까?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땅굴을 파서라도 바다 밑에 술집을 만들어 마시고 올 것입니다. 이처럼 실효성이 없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거룩이라고 하는 법을 어떻게 실행해 나가실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이 법에 순종하는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로 축복하십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축복하시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징계하심으로 이 법의 실효성이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겔 43:9) 거룩하지 못한 것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임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거룩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보하는 조건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교회 안에 사랑과 기쁨이 있게 되고 승리가 있게 되며 결국 부흥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국의 맛을 미리 볼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이 법에 불순종하고 거룩하지 못한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불신자들이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분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진노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7) 교회나 가정에서 문제와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모두 거룩하지 못한 요소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요소가 있으면 반드시 다툼과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부싸움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부패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온갖 거룩하지 못한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었습니다. 윤리적, 성적인 부패와 교회 내적인 분리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불순종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를 심판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 11:30) 물론 사람은 나이가 들어 때가 되면 다 죽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병든 사람이 많고 약한 사람 많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거룩하지 못한 원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축복하시고 거룩하지 못한 성도나 교회는 징벌하심으로 거룩이라는 법을 시행해나가십니다.
Ⅲ. 에스겔 43~44장에 나타난 다섯 가지 거룩의 원리
에스겔 43장과 44장에는 매우 복잡한 말씀이 있는데 그 내용은 바로 거룩의 원리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거룩의 지도라고 표현하였는데 에스겔 43-44장은 거룩의 원리에 관하여 5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에스겔 43장 13~27절은 "제단의 원리"(Principle of Altar)입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의 중심에는 제단이 있었습니다. 제단은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짐승을 태우는 곳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그 중심에 피 흘려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피 흘려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심을 일분일초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나 성도가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잊어버리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마귀의 궤계에 놀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쓰신다고 하실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실 때에 못한다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단의 원리입니다.
둘째, 에스겔 44장 1~4절은 "닫힌 문의 원리"(Principle of Closed Door)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오셨으니까 동문을 닫으라고 명하십니다. 동문을 닫으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못 들어오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란 하나님의 영광이 지속적으로 임재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거룩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 즉 성령이 지속적으로 임재하여 충만케 되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월요일부터 특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모두 참석하시기로 결심하셔서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성령이 지속적으로 임재하여 충만케 되시길 바랍니다. 닫힌 문의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셔서 충만하게 항상 임재하여 나가지 않아야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에스겔 44장 5~9절은 "배제의 원리"(Principle of Exclusion)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불신자는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그 속에 거룩하지 못한 것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불신앙이나 의심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제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가 이루는 것이고 오직 믿는 자만이 침례를 받는 것이 바로 침례교의 원리인 것입니다.
넷째, 에스겔 44장 10~14절은 "우상거부의 원리"(Principle of Priests)입니다.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우상숭배의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성도들은 어떤 경우라도 우상의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앞일을 알고 싶다고 점쟁이한테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무당이 와서 굿을 하는 방법으로 특별집회를 하면 되겠습니까? 어떤 부흥사는 최면술을 써서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예배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 숭배의 방법은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다섯째, 에스겔 44장 15~31절은 "제사장의 원리"(Principle of Priests)입니다. 다윗, 솔로몬 시대에 사독과 아비아달이라는 제사장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 두명 중 아비아달은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킬 때 다윗을 배반하고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다가 결국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 직분을 파면당합니다. 그래서 에스겔 44장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독은 다윗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결국, 거룩이란 그리스도에게 끝까지 충성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원리인 것입니다.
결 론
에스겔 43~44장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제가 간단하게 원리를 말씀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는 거룩이라는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거룩하지 못했던 언행 심사를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말, 행동, 생각, 거룩하지 못했던 것 모든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의 원리가 기록된 법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성도들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룩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항상 임재하시고 동행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제사가 드려지기까지는
겔 43:18-27 / 양희천 목사
본서 40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에스겔은 성전의 구조를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으러서는 성전 제사 규정을 언급합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장막의 양식과 규례를 먼저 제시한 다음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 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고찰해 봄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예배)를 드리는 삶을 영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흠없는 제물이 갖춰져야 합니다.
먼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제물의 조건을 '흠없는 수송아지' 또는 흠없는 수양 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정결한 동물 중에서 취하여 드리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전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실로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담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2. 피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이 준비되면, 그것을 죽여 피를 뿌려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피를 뿌린다는 것은 생명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인류는 범죄했으므로 그 생명이 취해져야 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대신 제물의 피를 흘렷던 것입니다. 피흘림이 동반되지 않으면 죄 사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사 물과 피를 한점없이 쏟아야 했습니다. 그 피는 죄악된 인류가 하나님의 정죄 앞에서 쏟아야 할 몫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 제사드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3.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집전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단지 제물을 바치고 제사장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뿐입니다. 제물을 잡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온전히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대표해서 성소와 지성소에 나가서 제물을 진설함으로써 죄사함을 간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모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 사독 가문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제사장들의 모습을 통해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단번에 속죄 제사를 드리신 분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없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대속물로 드린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죄악을 실제적으로 도말시키셨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믿는 모든 자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출 19:6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온전한 제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갖춰져야 함을 보았습니다. 흠없고 정결한 제물 피흘림, 대제사장, 이 세가지 요건이 그리스도에 의해 단번에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제사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토대 위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종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예배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상주심을 간구해야 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롬14:18)'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6,17)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시는 예배
에스겔 43:13-27
들어가는 말
주일 아침 김집사님댁에서 김집사님과 High School 다니는 아들 사이에 교회에 가는 것을 놓고 실강이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빠, 그냥 교회에 가기 싫다니까요? 재미없어요. 지루하단 말이예요!” 사춘기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글쎄요. 그냥 흥미를 잃었어요. 별로 얻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예배를 드려도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지루하고 실제 생활에 별로 적용이 안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나 아니면 교회 다니기를 중단한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 것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심지어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십니까?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예배를 드리긴 드리는 데 뭔가 공허하고 허기지고 채워지지 않는 그런 영적 공허감을 느껴보신 적 없나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한 가지 빠진 것 같은 느낌, 없으십니까? 교회에 오고 예배에 참석하긴 하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대로 따라하다가 아무런 감동도 채워짐도 없이 예배의 자리를 떠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해 보신 적은 없나요? 제가 말씀드린 이런 경우 중 어느 한 가지가 여러분이 느꼈던 감정이라면 이 시간 저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감정이나 느낌은 여러분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한번쯤은, 또는 때때로 경험하는 영적 상태입니다. They are experienced by most, if not all of us, from time to time. 어떤 분은 또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예배를 왜 드리나? 염려되지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길르앗의 유향처럼 좋은 치유약이 있습니다. “Balm of Gilead” (Jer 8:22)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대로 예배를 드리면 그런 영적공허감들이 은혜와 감격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런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고 싶은 사람이 깨닫고 이해해야하는 영원한 진리를 계시해 준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3-24)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예수님의 이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의 예배하는 삶 가운데 그토록 자주 경험하는 영적 공허함은 사라지게 됩니다. 예배를 시시하게 만드는 사탄의 연막술을 제거할 영적 해독제를 찾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영적 해독제를 찾아가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예배란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한번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정의를 이해하면 그 신비한 영적비밀에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예배란 마치 상대의 발과 외투자락에 입맞춤을 하듯 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세로 낮추고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의 언어인 헬라어의 의미는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꿇어 엎드리는 굴복과 복종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둘 다 상대를 향한 경의와 존경, 순종과 항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정의 가운데에서 강조점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Do you see the emphasis in all those definitions?)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도 바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강조의 대상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를 받는으시는 분입니다. (It is not on the worshipper but the One who is worshipped.)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 영혼의 고유하고 신령한 행위인 것입니다. 예배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거나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란 우리의 음악적 또는 예술적 감각과 기호를 충족시키거나 사회적 복지와 현실적 필요를 공급받는 세속적 사건이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분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올려드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그런 방법으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고유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는 우리가 아닌 그분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때 시작됩니다. 나는 사라지고 조건없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의 제단앞에 올려질 때 진정한 예배가 출발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강조점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The emphasis in the true worship is on giving, not receiving.) 찬양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 또는 설교가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말하는 사람, 예배가 감동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편의주의와 소비주의 문화가 예배속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채우는 시간을 예배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감없는 찬양이나 은혜없는 설교를 변명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예배에 임하면서 하나님 그분보다 나 자신 또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마치 마차를 앞세우고 말을 뒤에 두고 마차를 끌게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때 그 예배를 즐겁게 받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의 영혼은 다시 은혜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준비되어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는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허겁지겁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이던, 건강이던, 재물이던, 재능이건 모든 것의 최고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지 쓰고 남는 것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모든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것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드릴 번제단의 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이나 예배 규칙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제단의 규모와 치수에 관해 말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건축물의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첫절인 14절을 보면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로 시작해서 17절의 “그 층계는 동쪽으로 향할지니라”로 마칩니다. 위로 갈수록 크기가 약간씩 작아지는 안정된 세단의 층으로 되어 있는 단순한 석조 구조물입니다. 약간의 특징이 있다면 맨 위 세번째 층의 네 귀퉁이에 뿔처럼 튀어나온 돌장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첫번째 단락인 13절에서 17절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을 지시하시는 분이 바로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생각이나 아니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이 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만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대로 준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돌하나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떠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인본적인 예배가 되게 하는 함정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경배를 받듯이 더 멋지고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장식한 제단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상들의 제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장식이 화려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단순합니다. 그래서 순종하기가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단순하게 순종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예배는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십니다. 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충만감은 예배자의 영혼을 감동과 감격으로 흘러 넘치게 합니다. 영적으로 새로움과 재충전을 경험하게 합니다. 세상을 이길 넉넉한 용기와 힘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 모두 바르게 잘 준비된 예배를 드리시는 신령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본문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두번째 단락인18절에서 27절은 제단을 위해 행할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겔 43:18) 제사장들이 어린 수송아지와 숫염소를 잡아 피를 발라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하나님은 즐겁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제단에 번제로 드릴 희생 제물을 올려드리기 전에 흠없는 제물을 잡아 그 피로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속죄 제사의 규례입니다. 레위기 16장 18절과 19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론은)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할 것이요” (레 16:18-19) 정결의식을 그렇게 칠일동안을 합니다. 성경에서 칠은 완전수입니다. 이렇게 완전하게 정결하고 성결하게 한 후에 하나님께 온전한 희생제물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일을 아론의 휴예인 사독의 자손중 제사장이 합니다. 이들은 바로 영적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자신들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런 피를 통한 정결행위는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율법을 저버린 대가로 심판 중에 있는 이런 유다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제단의 회복은 유다백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고 용서를 의미합니다. 축복의 회복을 의미하고 미래의 보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와 여러분들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실 때 성결하고 거룩하게 잘 준비하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화려하지 않고 비록 단순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는 나만의 영적 제단을 건축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형식만 갖춘 건축물이 아닌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고 성결하게 된 내면의 제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흠없는 동물의 피가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뿌려진 피를 보고 저주가운데 초라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바람앞에 촛불같은 가련한 인간들의 생명과 삶을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들을 믿음으로 행하며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는 삶의 역전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게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에 나가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히 10:19-20; 롬 3:25-26)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는 참된 예배는 이렇게 영혼과 마음의 정결과 성결이 선행될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 예배를 하나님은 즐겁게 받으십니다.
죄를 짓고 심판과 징계 가운데 있는 자에게 가장 간절하고 중요한 것은 조건없는 용서입니다. 그 용서의 표시가 바로 피로 정결하게 된 제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감히 어찌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예배한다고 하나님이 더 하나님 되시고 내가 그분을 인전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고 그 하나님이 덜 하나님이 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다. 용서하실 의도도 없이 희생 제사제도를 만드셨겠습니까? 용서하실 의도도 없이 제단을 쌓게 하고 동물을 잡아 피로 정결하게 하도록 요구하시겠습니까? 예배를 즐겁게 받아 주실 마음이 없이 어찌 예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용서하실 준비가 완벽하게 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기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준비하게 하시고 피로 정결의식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게 하나님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는 이 일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행하셨습니다. 바로 온전하고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시고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죄의 깊이와 무게를 깨달으며 상한 심령으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의 예배를 즐겁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고 부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문에서 바로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회복시켜 그것을 얻고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과 강조점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고 예배들 드리는 예배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과 기업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에 뿌려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 9:12-15) 첫째로는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 용서 받았음을 알게 하도록 예배에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계속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게 목적입니다. 세번째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시는 게 목적입니다. 내세에 영생을 주시고 현재의 삶 가운데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즐겁게 받으시는 하나님은 예배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언약가운데로 다시 부르시고 언약의 축복들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7절을 함께 보십시다.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 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43:27)
여러분 받아주심의 은혜를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받아 드려지는 은혜를 그리워합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어합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은 아픔이고 불행입니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상처가 좀처럼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거절 당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랑을 하기가 힘듭니다. 창세기에 기록되는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의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려지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때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최고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준비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에배를 즐겁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결하게 구별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쁘게 그 예배를 받아 주십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십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하나님은 즐겁게 받으십니다. 둘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준비되어서 드려져야 합니다. 단순하고 작은 일들이지만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복장, 시간, 예물, 태도, 마음 가짐등 모든 것을 잘 준비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셋째로 예배는 거룩과 성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소와 염소의 피로 제단을 정결하게 한 후 제물을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통해 예배를 즐겁게 받으신 하나님은 예배자를 축복하십니다.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언약가운데로 다시 부르십니다. 축복의 영토,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 축복의 분량과 영역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