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서원
구강서원은 조선시대 울산지방의 최초 사립 교육기관으로 효종 10년 (1659) 2월 9일 울산향교 춘기(春期) 석전대제釋奠大祭) 후 배두첨(裵斗瞻), 이기(李夔), 이정의(李廷義), 김중남(金重南), 이익(李益), 배두원(裵斗元), 안세경(安世卿), 이동영(李東英), 김중태(金重泰), 이제한(李悌漢), 전홍철(全弘哲) 등 11명의 발의가 있은 후 3차에 걸쳐 사림(士林) 55人이 참여하여 조(祖) 490석, 전(錢) 3,650냥(38.9%)을 공동출자하였다. 이때 오문(吾門)에서는 조 188석(38,36%) 전 1420냥(38,90%) 등 전체의 38.63%를 출자하였다.
현종 7년(1666) 8월 향교 대향(大享) 때 서원 건립공사를 시작하자는 합의에 따라 건립지를 오산(鰲山 현재 三山)으로 정하고 공사에 들어갔으나 다음 해 정월 10일 서원 터에 화재가 있었고 또한 2월 10일 밤에 일어난 대형화재로 목재가 모두 소진하여 서원건립은 중단되었다.
현종 8년(1667) 4월 재차 서원 건립이 논의되어 서원 터를 학성(鶴 城) 서쪽으로 정하고 9월 23일 개기(開基)하고, 포사(庖舍) 5칸, 서쪽 주방 8칸, 동쪽 주방 4칸을 지어 10월 2일 입주 상량하였으나, 이듬해 현종 9년(1668) 7월 19일 한밤중에 또 불이 나서 포사 5칸이 모두 불타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는 울산에 서원 건립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의미 한다.
숙종 2년(1676) 지금의 울산시 중구 반구1동 290번지(서원마을) 현대글로리아아파트 자리로 옮겨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서원 자리는 반달 모양으로 생겼으며 삼태봉을 안산으로 삼고 이수(二水)가 합류하며 팔경(八景)이 두루 갖추어졌다.
숙종 4년(1678)에 묘우(廟), 신문(神門), 강당(講堂), 동·서재(東西齋) 등을 완공하였다. 발의한지 무려 19년만의 건원(建院)이었다. 이듬해 숙종 5년(1679) 1월 8일 울산유학의 연원인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어 도회都) 공의(公議)에 따라 원규(院規)를 정하고 초대원장(初代院長)에는 경주 출신 별검(別檢) 이채(李埰)공을 선출하고, 유사(有司)는 생원(生員) 박세도(朴世衜)公을 뽑았다.
숙종 8년(1682) 봄부터 서원의 현판을 내려달라는 청액운동(請額運動)을 시작하였으나, 첩설(疊設)이라는 이유와 관가의 당쟁으로 사액 받지 못하다가 세 번의 실패 끝에 네 번째인 숙종 20년(1694) 3월 9일에 학잠(鶴岑), 오산(鰲山), 구강(鷗江) 셋 중 구강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으니 준공된 지 16년 후이며, 울산에서는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사액 청원운동에 거금 5만4,000냥을 소비하였다고 한다.
영조 11년(1735)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선생이 울산도호부사로 부임하여 묘우(廟宇)는 숭도사(崇道祠), 강당은 지선당(止堂善), 동재는 상지재(尙志齋), 서재는 경신재(敬身齋), 신문은 유의문(由義門)이라 명명(命名)하였고, 사인(士人) 최석신(崔錫信)이 액자를 썼다.
영조 11년(1735) 8월 부사(府使) 자신의 녹봉과 공금을 출염(出捻)하여 동·서재 각 4칸 신축공사에 착공하여 익년(1736) 여름 정문과 담장을 준공하니 비로소 서원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원장(院長) 1인, 유사(有司) 1인, 전곡(典穀) 1인을 두었다.
그리고 200여 년 동안 강학(講學)과 향사(享祀)를 봉행해 오다가 영조(英祖) 이래로 서원이 난립하여 색파와 붕당이 횡행하여 고종 5년(1868)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전국에 사액(賜額)받지 않은 서원은 대부분 훼철되고, 고종 8년(1871) 4월 대원군(大院君) 서원 철폐령에 따라 전국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는데 이때 구강서원도 훼철되어 양현(兩賢)의 위패는 서원마을 뒷산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후 옛터는 주거지로 변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향내 뜻있는 유림들이 1988년 서원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현 복원부지(반구동 산 171~1번지) 2,640m2(800여坪)을 매입하여 울산광역시에 기부채납 하였다
서원 복원사업은 울산광역시에서 사업비 21억 원을 중구청에 영달하여 2001년 3월에 착공하여, 2003년 2월에 준공하였는데 철폐된지 132년만이다. 복원 규모는 묘우 7평, 내삼문 3평, 강당 25평, 문루 13평, 고직사(庫直舍) 11평, 전사청(典祀廳 3.5평 등 6동(棟)이다. 동·서재(東 西齋)는 복원하지 않았고, 본래에는 없던 선화루(宣化樓)라는 누각을 세웠다.
고유문( 상량문(上梁文)은 풍산(豊山) 유용우(柳龍佑)가 찬(撰)하고, 2003년(癸未) 3월 15일 개원과 함께 봉안고유(奉安告由)를 갖게 되었다. 복향(復享) 봉안문(奉安文)은 정동열(鄭東烈)이 찬(撰)하였다. 향제는 매년 2회 봄·가을에 지내는데, 춘기(春期) 2월 중정일(中丁日), 추기(秋期)는 8월 중정일(中丁日)에 지낸다.
서원창건 당시 사림 55인 중 오문(吾門)에서는 기(夔), 시(蓍), 익(益), 동영(東英), 정의(廷義) 등 21인이 참가하여 창건을 주도하였고, 나중에 오문(吾門)의 10세 수(琇)공이 서원유사(書院有司)로 있으면서 도호부사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선생의 뜻을 받들어 동·서재(東西齋)를 건립하였는데 전력하였다.
서원건립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인사 대부분이 오문(門)의 내 손들로 울산사림(士林)에서 오문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2018년 4월5일 오전 서재(西齋) 기공식이 있은 후 동년 8월 29일 준공하고 서재의 명칭은 경신재(敬身齋)라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