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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최씨(江陵崔氏)의 근원(根源)
강릉(江陵)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우리 최문(崔門)
본관(本貫) 시조(始祖)의 고향(故鄕), 선조(先祖)의 세거지(世居地)이며 한국(韓國) 성씨(姓氏) 총수(總數)는 275성(姓)이 있으며 그 가운데 최씨 성(崔氏 姓)으로는 127본(本)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姓)을 사용한 것은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24대)과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20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13대)때부터 이다.
1. 우리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시조(始祖)는 휘(諱)자 필(必)자 달(達)자 이시고 시호(諡號)는 충무공(忠武公)이며 고려 개국시(高麗 開國時) 태조(太祖)이신 왕건(王建)을 도운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의 벼슬을 지냈으며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경흥(慶興)은 강릉(江陵)의 고호(古號)이다. 신라의 정란(靖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경주 정묘사(慶州 靖廟祠)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으며 당시의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명진화하(名振華夏)․혈식천추(血食千秋)라 기록되어 있으며 국란(國亂)의 평안(平安)과 백성(百姓)에게 학문(學問)을 가르치고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는데 힘써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어른으로서 해동부자(海東夫子)라는 칭호(稱號)를 받았다. 경주(慶州)에서 강릉(江陵)으로 입강(入江)한 시기는 914년 갑술(甲戌)로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역사(역사)는 약 1,100년이 된다. 시조(始祖) 충무공(忠武公)의 묘(墓)는 실전(失傳)되어서 제향(祭享)을 못 올리다가 1936년 병자(丙子) 강릉시(江陵市) 남문동(南門洞) 산황리(山篁里) 179번지에 황산사(篁山祠)를 세우고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에 다례(茶禮)를 봉행(奉行)하여오다가 1978년 강원도(江原道)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58호 지정(指定)받고 1982년 5월에 남문동(南門洞)으로부터 현재의 운정동 남일(雲亭洞 南逸)로 이전(移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명조(名祖)
⑴ 삼군(三君)
① 시조 경흥부원군 충무공 휘 필자 달자
始祖 慶興府院君 忠武公 諱 必 達
② 4세 정일품 삼중대광 명주부원군 휘 숭자 언자
世 正一品 三重大匡 溟州府院君 諱 崇 彦
③ 13세 명주군 휘 한자 주자
世 溟州君 諱 漢 柱
13세 명주군(溟州君)은 고려 충렬왕(高麗 忠烈王) 때 원(元)나라 군사와 함께 일본원정군(日本遠征軍)으로 지휘관(指揮官)이 되어 참전(參戰) 중 폭풍우로 병선(兵船) 밑에 달린 쇠닻이 바위틈에 걸리어 병선(兵船)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모든 장병(將兵)을 구출(救出)하기 위하여 갑판(甲板) 위에서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후 망치와 정을 가지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서 닻을 빼내어 모든 장병을 구해네 배를 무사히 떠가게 하여 놓고 명주군(溟州君)은 바다 위에 떠다니는 널빤지를 타고서 육지(陸地)로 나왔다. 공의 진충보국애국충절(盡忠報國愛國忠節)의 정신(精神)을 후손(後孫)들은 귀감(龜鑑)으로 삼기 위하여 울진읍지(蔚珍邑誌)에 올리고 울진군(蔚珍郡) 연호(蓮湖) 서반(西畔)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우고 공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精神)을 기리고 있다.
⑵ 삼현(三賢)
① 17세 호 조은공(釣隱公) ․ 휘(諱) 치(致)자 운(雲)자로 공형이(工刑吏) 삼조참판(三曹參判),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세자 우빈객(世子 右賓客)의 벼슬을 했으며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중신(重臣)으로 공(公)의 공(功)을 칭찬(稱讚)하여 말과 땅 노비(奴婢) 30인을 하사(下賜)하였으나 7번이나 사양(辭讓)하였고 왕명(王命)에 따라 무원록(無寃錄)을 주석(註釋)하여 형벌집행(刑罰執行)에 공정(公正)을 기할 수 있었고 서울대학교(大學校) 규장각(奎章閣)에 보관(保管)되어 있다.
공(公)은 세종(世宗) 22년(1440년) 12월 17일 51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셨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제문(祭文)을 보내어 조상(弔喪)하였고 후일 문종(文宗)이 된 동궁(東宮)께서도 제문(祭文)을 보내고 슬퍼하셨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강릉 함씨(江陵 咸氏)는 태조 원년(太祖 元年)(1392년)에 출생(出生)하여 성종(成宗) 11년(1480년) 89세에 별세(別世)하셨는데 기이(奇異)하게도 기일은 조은공(釣隱公)과 같은 날이다.
강릉향리(江陵鄕里)에서는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수좌(首座)로 모시고 수헌공(睡軒公) 원정공(猿亭公)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공(公)께서는 오죽헌(烏竹軒)을 개기(開基) 창건(創建)하여 차남(次男)인 수헌공(睡軒公)에 양여(讓與)하고 이사온(李思溫) 신명화(申命和) 권처균(權處均)으로 물려주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 18세 호 수헌공(睡軒公) 휘(諱) 응(應)자 현(賢)자로 조은공(釣隱公)의 둘째아들로 세종(世宗) 10년(1428년) 4월 3일에 출생(出生)하여 21세 때 생원진사(生員進士)에 모두 합격(合格) 단종(端宗) 2년(145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중앙요직(中央要職)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사양(辭讓)하고 노모봉양(老母奉養)을 위하여 향리(鄕里)로 내려와 강릉향교(江陵鄕校)의 훈도(訓導)를 자원(自願)했다.
벼슬은 공․병․형(工․兵․刑)의 삼조참판(三曹參判)과 충청강원관찰사(忠淸江原觀察使)를 지냈고 세 번씩이나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다.
78세에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동지성균관사오위도총부(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노령(老齡)을 이유(理由)로 사양(辭讓)하였다. 1507년 윤 정월 5일 강릉(江陵) 고향(故鄕)에서 80세를 일기(一期)로 충효(忠孝)의 일생(一生)을 마쳤다.
③ 20세 호 원정공(猿亭公) 휘(諱) 수(壽)자 성(峸)자 시(시) 문정공(文正公)은 세종(世宗) 18년(1487년) 강릉 북평촌(江陵 北坪村)에서 출생(出生). 1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을 여묘(廬墓)살이를 했으며 거유 한훤당(巨儒 寒喧堂) 김굉필(金宏弼) 문하(門下)에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충암 김정(沖庵 金淨)과 도의(道義)로 친교(親交)하여 대유(大儒)로 부르게 되었다.
후일(後日) 청송 성수침(廳松 成守琛)은 기묘인물론(己卯人物論)에서 공(公)을 으뜸으로 학문과 덕행(德行)을 일세(一世)의 귀감(龜鑑)으로 칭송하였다.
여러 번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불의(不義)와 타협치 않는 강직(剛直)한 절의(節義)로 어지럽던 관계(官界)에 뜻을 두지 않고 초연(超然)히 벼슬길을 거부(拒否)하였다. 공(公)은 손수 만든 족보(族譜)를 중대사(삼화사[中臺寺(三和寺])에 수장(收藏)하였는데 세칭(世稱) 원정족보궤(猿亭族譜櫃)라 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치 못하다가 200년 뒤 숙종(肅宗) 45년(1718년)에 이를 찾아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족보(族譜)를 만들게 되었다.
공(公)은 산수(山水)를 좋아하며 산하(山河)를 편력하였으며 문장(文章), 글씨, 그림, 음률(音律)에 뛰어나 모든 사람들이 사절(四絶)이라 일컬었고 공(公)의 유화(遺畵)로 암송규응도(岩松窺鷹圖) 운기 용흥도(雲起 龍興圖)의 두 폭이 전해 오고 있다.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連累)되어 중종(中宗) 16년 10월 21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刑場)에서 마쳤다. 중종조(中宗朝) 신원(伸寃)되어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兼) 판의(判義) 금부사(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를 상절(尙節)로 5년 후 인종 원년(仁宗 元年, 1545년)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정일품(正一品)에 증직(贈職)되어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했다.
선조(宣祖) 7년(1578년) 율곡선생(栗谷先生)이 선조(宣祖)에게 계청(啓請)하여 불천위(不遷位)의 명(命)을 내렸고 1645년 강릉 향현사(江陵 鄕賢祠)에 향현(鄕賢)으로 배향(配享)되었고 1737년 충북(忠北) 보은(報恩)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공(公)의 부조묘(不祧墓)는 황산사(篁山祠)의 경내(境內)에 봉안(奉安)되었고 1972년 강릉시(江陵市) 구정면(邱井面) 제비리(濟飛里) 충정사(忠正祠)에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⑶ 충절의 명조
① 삼대로 승계된 절조
14세 휘(諱) 복(卜)자 하(河)자는 현감(縣監)을 지내신 고조(高祖) 10세 휘(諱) 관(琯)자의 현손(玄孫)이며 추충(推忠)․찬화공신문하평리상호군(贊化功臣門下評理上護軍)이었던 13세 휘(諱) 치(致)자 안(安)자의 아들로 호는 충절공(忠節公) 사간공(司諫公)으로 1390년 울진군(蔚珍郡) 북면(北面) 고목리(古木里) 기곡동 무영현(武靈峴)에 입향(入鄕)한 울진 입향조(蔚珍入鄕祖)로서 고려(高麗)의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보문각직제학대사간(寶文閣直提學大司諫)에 이르렀으며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짐을 예감(豫感) 벼슬을 버리고 무영현(武靈峴)에 은거(隱居) 할 때 이태조(李太祖)께서 고려(高麗)의 유신(遺臣)인 공(公)에게 국사(國事)를 의론하고자 권기시(勸起詩)를 보냈으나 공(公)은 불복하고 고려(高麗)의 망국(亡國)을 슬퍼하며 산천을 소요할 때 이태조(李太祖)는 고려(高麗)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을 원주(原州) 간성(杆城) 삼척(三陟) 근덕면(近德面) 궁촌리(宮寸里) 고돌치(高突峙)에 유배(流配)를 보내어 가두었다. 공(公)은 울진사람 장천영(張天永) 임제(林悌) 태학생(太學生) 전생(田生)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恭讓王)의 둘째아들인 왕석(王奭)과 더불어 울진 삼척 등지에서 동지(同志) 수천명(數千名)을 규합하여 고려(高麗)의 복벽운동(復辟運動)을 일으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군(官軍)에 의하여 참형(慘刑)을 당하였다. 공의 유허비(遺墟碑)는 1998년 5월 10일 울진군(蔚珍郡) 북면(北面) 고목리(古木里) 기곡동 무영현(武靈峴)에 건립되었다.
16세 휘(諱) 시(始)자 창(昌)자는 15세 휘(諱) 명(明)자 도(道)자의 아들로 조선조(朝鮮朝)에 보공장군삼군도진무사(保功將軍三軍都鎭撫使)로 1456년 병자(丙子)에 사육신(死六臣)과 뜻을 같이하여 아들인 17세 절효공(節孝公) 휘(諱) 면(沔)과 함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하다가 부자(父子)가 병절(幷節)하였다는 것과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과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하다가 병사(幷死)하였다는 기록이 장릉사보(莊陵史補)에 실려 전해오고 있다.
우리 후세들은 이 삼대(三代)로 계승된 순절혼(殉節魂)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계룡산(鷄龍山)의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과 장릉(莊陵)의 조사단(朝士壇)에 배향(配享)되어있고 울진군(蔚珍郡) 죽포리(竹浦里)에 있는 경충단(景忠壇)에 추향(追享)되어 비를 건립하고 매년 음 3월 14일에 부자(父子)를 추모(追慕)하는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② 자격루(自擊漏, 물시계) 고안 제작에 공헌한 세(世)자 절(節)자 매창공(梅窓公)
19세(世)이신 휘(諱) 세절(世節)은 수헌공(睡軒公)의 셋째아들로 자(子)는 개지(介之)요 호는 매창(梅窓)이며 1498년 연산조(燕山朝) 4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及第)하시고 150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셨다. 그 후 무과(武科)에도 급제(及第)하셨고 호당(湖當)에도 뽑혔으며 이조(吏曹) 및 예조참의(禮曹參議)와 관서(關西) 호남(湖南) 영남(嶺南) 관동(關東)의 4도감사(道監司)를 지내셨고 대사헌(大司憲)과 형조(刑曹) 호조(戶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4조참판(曺參判)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 순변도절제사(巡邊都節制使)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을 지내시고 1533년 형조(刑曹) 호조(戶曹)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셨다. 특히 공조참판(工曹參判) 재직시 보루각(報漏閣)의 신자격루(新自擊漏, 국보 제229호) 고안제작에 큰 공을 세웠음이 자격루의 청동제수수통에 “제조 공조참판 최세절(製造 工曹參判 최世節)”이라고 양각 되어있다.
③ 25세 휘 배자 천자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한다. 경성파(鏡城派)의 분파조(分派祖)이신 휘(諱) 안(安)자 해(海)자의 10세손으로 명종 2년(1565년)에 출생하여 인조 18년(1640년) 2월 29일 7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시 함경북도(咸鏡北道)에 침입하여 우리의 왕자를 잡아갔던 일본(日本)의 가등청정군(加藤淸正軍)을 격파하고 실지(失地)를 탈환한 충절의 의병으로 당시의 승첩상황(勝捷狀況)을 새긴 석비가 일본(日本) 동경(東京) 정국신사(靖國神社) 경내에 있는데 이 비는 러일전쟁(露日戰爭)시 일본군(日本軍)이 전리품(戰利品)으로 약탈하여간 우리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이다. 이 비에는 의병활동(義兵活動)과 전승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공은 함경북도(咸鏡北道) 지방에서 28세의 약관(弱冠)으로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왜병(倭兵)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공은 의주에 있는 선조(宣祖)임금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왜란(倭亂)을 섬멸하였다는 전승보고(戰勝報告)를 하니 선조(宣祖)임금께서는 공을 치하(致賀)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인견(引見)하고 어의(御衣) 망건(網巾) 버선 필대등(匹對等)을 하사하며 공에게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의 벼슬을 내렸으며 다시 조산대부 사복시판관(朝散大夫 司僕寺判官)의 벼슬을 내렸으며 다시 조산대부 사복시첨정(朝散大夫 司僕寺僉正)을 증직하였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진주 강씨(晋州 姜氏)이고 묘(墓)는 경성부(鏡城府) 남주(南朱) 북면(北面) 시모동(始慕洞)에 있으며 경성(鏡城)의 창열사(彰烈祠)에는 당시의 의병장(義兵長) 정문부(鄭文孚)와 같이 배향(配享)되어있다. 일본(日本)이 약탈하여 일본 동경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경내에 가져다 놓은 휘(諱) 배(配)자 천(天)자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우리 문중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2005년에 돌아왔고 2006년 3월 1일에 북한(北韓)으로 인도되었다.
삼현 신도비(三賢 神道碑)의 건립연도와 경위
조은공 최치운(釣隱公 崔致雲)의 신도비(神道碑)는 강릉 향리(江陵 鄕里)의 유림(儒林) 및 지역학자(地域學者) 그리고 후손(後孫)들의 정성으로 월성 이유원(月城 李裕元)이 글을 짓고 창녕인(昌寧人) 조석여(曺錫與)의 근서(謹書)로 사후(死後) 448년만인 1888년에 건립(建立)되었다. 공(公)의 신도비(神道碑)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현존(現存) 문헌록(文獻錄)에 의하면 공(公)이 돌아가셨을 때 세종(世宗)과 동궁(東宮, 왕세자)이 생시(生時)의 공로(功勞)와 충의감(忠義感)을 생각하여 각기 제문(祭文)을 지어내려 보냈으며 도한 공(公)의 아들인 수헌공 최응현(睡軒公 崔應賢)은 성종 및 연산조 때 고위관료(이․호조참의(吏․戶曹參議),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공․병조참판(工․兵曹參判) 등)직을 두루 거친 분으로 선친묘(先親墓)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는데 자체능력으로나 상부관청의 승인을 받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수헌공 최응현(睡軒公 崔應賢)의 신도비(神道碑)는 향리(鄕里)의 유림(儒林), 학자(學者) 및 후손(後孫)들은 물론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이이(李珥)가 글을 짓고 이명은(李命殷)이 글을 쓰고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전서(篆書)로 사후 171년만인 1678년에 건립(建立)되었다. 삼현(三賢) 신도비(神道碑)중 수헌공(睡軒公)은 이율곡(李栗谷)의 적극적인 천거(薦擧)로 비교적 속히 건립(建立)된 것으로 본다.
원정공 최수성(猿亭公 崔壽城)의 묘(墓)가 경기도(京畿道) 진위(振威)[현 평택시(平澤市) 진위면(振威面)]에 있는 동안은 계속된 사화(史禍)로 신도비 건립을 추진하지 못 하다가 1952년 오산비행장(烏山飛行場) 확장으로 부득이 강릉(江陵) 조산(助山)으로 이묘(移墓) 후 즉시 건립을 품청(稟請)한지 5년, 공이 돌아가신지 436년만인 1957년에 서흥 김희달(瑞興 金熙達)이 글을 짓고 한양 조순원(漢陽 趙洵元)의 근서(謹書)로 현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1578년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계청(啓請)으로 원정공(猿亭公)의 부조묘(不祧廟)를 세워 제향(祭享)을 올려오다가 1920년 강릉경방[(江陵經坊, 현 江陵 洪濟洞)]소재 강릉최씨(江陵崔氏) 시조(始祖) 휘(諱) 필달(必達)을 봉안(奉安)하던 구(舊) 황산사(篁山祠)로 이묘(移廟) 하였다가 1982년 경방사당(經坊祠堂) 주변이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으로 경내가 협소하여 종인(宗人)들의 고념(顧念)과 정성(精誠)으로 현(現) 황산사(篁山祠)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계속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
현(現) 강릉지역(江陵地域) 유림(儒林)에서는 향리출신(鄕里出身)으로 주민들의 추앙(推仰)으로 받고 있는 사람의 행적(行跡)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龜鑑)을 삼고자 12현을 향현사(鄕賢祠)에 위패(位牌)를 모시고 매년 제례(祭禮)를 올리고 있는바 전술한 3현도 12현에 포함되어 봉향하고 있다.
현 시대는 신도비(神道碑)나 묘비(墓碑) 등을 누구나 구애 받지 않고 자의로 건립할 수 있으나 조선 초기(朝鮮 初期)에는 지방유림(地方儒林)이나 학자(學者)의 성원과 협조는 물론 지방 및 중앙관청의 승인이 없이는 건립이 어려웠던 것으로 사료된다.
영동지방(嶺東地方) 금석문(金石文) 자료집(資料集)에 의하면 영동지역에 건립되어 있는 신도비(神道碑) 12개는 1600년대에 2개, 1700년대에 2개, 1800년대에 2개, 1900년대에 6개 건립되었고, 묘비(墓碑) 13개중 조은공 최치운(釣隱公 崔致雲)은 1442년에, 나머지 12개의 묘비는 1700년대 이후에 건립(建立)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각건대 1600년대 이전인 조선 초기(朝鮮 初期)에는 신도비(神道碑) 건립제도 및 관습이 왕족 외는 세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각 신도비(神道碑) 건립(建立)에 관한 문헌록(文獻錄)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참고가 될만한 문헌(文獻) 찾기에 성의를 다하고 있다.
[참고사항]
[江陵을 本貫으로 하는 우리 崔門]
세거지(世居地) : 대대(代代)로 내여 오며 살고 있는 고장
1. 강릉 최씨의 시조
시호(諡號) : 왕 또는 종친(왕의 일가), 정2품 이상의 문무관으로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諡號)를 주었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절신(節臣) 등 정二품이 못되어도 국가에 특히 공이 많은 신하나 학문이 뛰어나 존경을 받는 학자들에게 그들이 죽은 후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국가에서 추증하는 이름을 말한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장(行狀)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예조(禮曹)에서 이를 심의한 뒤 봉상사(奉常寺)를 거쳐 홍무관(弘文館)에 보내어 시호(諡號)를 정하게 된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법으로는 『주공시법(周公諡法)』이니 『춘추시법(春秋諡法)』이니 하여 中國古代 이래의 시법(諡法)이 많이 적용되었던 듯하다. 우리나라는 신라에서 왕이 죽자 법흥왕이 부친의 시호를 지증왕이라(514년) 지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시호(諡號)에 사용된 글자는] 문(文)·충(忠)·정(貞)·공(恭)·양(襄)·정(靖)·효(孝)·장(莊)·안(安)· 경(景)·익(翼)·무(武)·경(敬) 등, 120 자인데, 한자 한자마다 정의(定義)가 있어서 생전의 행적(行蹟)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자(字)로 만들고 시호(諡號)아래 『공(公)』자를 붙이어 부른다. 문관에게는 文(문)자가 최고의 명예였으며, 그 외에도 정, 공, 양, 정이 있으며, 무관에게는 충, 무, 의 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것이 자랑스러운 시호였다. 시호를 정하는 법으로는 주공시법, 춘추시법에 따라 홍문관과 봉상시에서 글자마다 생전의 행적에 걸 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만들고 시호 아래에 公(공)자를 붙여 부른다.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표창을 받는 것으로 묘비에는 물론 족보에도 영원히 기록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ㅇㅇ공파"라는 다른 파를 만들 수도 있었다. 무관의 시호로 가장 영예스러운 충무공(忠武公)은 이순신장군의 대명사이다. 또한 연산군과 광해군은 시호를 받지 못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 : 후삼국통일과 고려개국을 도운 인물로 신흥사 공신당의 벽에 그려진 공신을 일컫는 말. <삼한벽상>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할 때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벽에 그려진 공신들을 따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삼한벽상공신도 삼한공신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비록 벽에 그려진 공신들이 삼한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삼한공신과 위계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신당에 오른 인물들이 모두 삼한공신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고려의 <개국공신>도 삼한공신과 겹쳐 이들 역시 삼한공신의 범위에 넣는데, 정확한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고, 대략 3,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삼중대광(三重大匡) : 고려(高麗) 때 문관(文官)의 정1품(正一品) 품계(品階). 원래(原來) 벽상삼한 또는 삼중대광이라 일컫다가, 공민왕(恭愍王) 11(1362)년에 둘을 합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이란 이름으로 하였는 데, 조선(朝鮮) 때의 '대광보국승록대부'와 같은 격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 : (≒ 문하시중)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 품계는 종1품이며, 982년(성종 1) 3성 6부의 관제가 확립되면서 문하성의 최고관직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1061년(문종 15)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개칭되었다. 1275년(충렬왕 1) 관제 개편에 따라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으로 분리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정승(政丞)이라고 불리다가, 1356년(공민왕 5) 관제가 전면적으로 구제(舊制)로 복귀함에 따라 문하시중으로 되었으나, 그 후에도 다시 1362년 도첨의부가 되면서 첨의좌정승·첨의우정승, 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수시중(守侍中) 등으로 바뀌었다.
고호(古號) : 사람이나 땅의 옛 이름
정란(靖亂) : 나라의 난리를 평정함
혈식천추(血食千秋) :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祭祀)가 오래도록 끊이지 아니함
실전(失傳) : [묘지나 고적 등이] 대대로 전해 온 사실을 알 수 없게 됨
2.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명조(名祖)
⑴ 삼군(三君)
③ 溟州君
진충보국(盡忠報國) :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
⑵ 삼현(三賢)
① 釣隱公
참판(參判) : 조선시대 육조(六曹)에 속해 있던 종2품의 관직. 지금의 각 부처의 차관에 해당.
집협전제학(集賢殿提學) : 조선 전기의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종2품 벼슬. 정2품인 [대제학(大提學)]아래 [제학]이란 벼슬
세자 우빈객(世子 右賓客) : 고려 ·조선시대 세자에게 글을 가르친 관직. 고려의 문종 때 처음으로 두었으며, 공양왕 때는 이전의 동지서연(同知書筵)을 좌 ·우 빈객으로 고쳐 동궁(東宮)에 종2품으로 각 1명씩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2품으로서 좌 ·우 빈객 각 1명을 두었는데, 같은 품계를 가진 타직(他職)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 조선시대 4대 세종(世宗)이 최치운(崔致雲) 등에게 명하여, 원(元)나라의 왕여가 만든 무원록(無寃錄)에 주해를 더하고 음훈(音訓)을 붙여 새로 편찬(編纂)한 법의학적 재판에 관한 전문서적으로 인명치사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살상검증에 관한 검시등에 활용하였다. 상하2권
배향(配享) :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 따위에 모시던 일
개기(開基) : 터를 닦기 시작함
② 睡軒公
훈도(訓導) :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중 중앙조정에서 파견된 향교의 선생님. 교수관(敎授官)이라는 호칭을 주었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로 구분된다. 교수는 6품 이상의 직급으로 주나 부처럼 큰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고, 훈도는 7품 이하의 직급으로 군이나 현처럼 작은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다.
관찰사(觀察使) : 조선시대 외관직(外官職) 문관의 종2품 벼슬.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된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 조선시대에 정사를 비판하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가려내어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리던 관청인 사헌부의 종2품의 장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의 종2품(從二品) 벼슬. 정원은 2명으로, 다른 관직과 겸임함.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 : 조선시대의 중앙군인 오위(五衛)를 지휘 감독한 최고 군령기관의 부책임자(5명)로 정2품의 관직.
③ 猿亭公
여묘(廬墓)살이 : 상제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며 무덤을 지키는 일.
신사무옥(辛巳誣獄) : 1521년(중종 16)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사건은 벌어져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 명이 관련되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 조선시대 최고통치기구인 의정부에 속해 있던 종1품 문관벼슬. 1426년(세종 8) 의정부(議政府)를 개편하면서 처음으로 좌찬성·우찬성 각 1명을 두었다. 이상(貳相) 또는 이재(二宰)라고도 하였다. 참찬과 함께 의정을 보필하면서 의정부사와 대소 국정 논의에 참여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조선시대(朝鮮時代) 사법기관(司法機關)인 의금부(義禁府)의 으뜸 벼슬. 종1품(從一品). 판금오(判金吾)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 조선세대 관계의 최고관. 정1품의 종친(宗親)․의빈(儀賓)과 문무신(文武臣)에게 주는 벼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 현록대부(顯祿大夫) ․ 흥록대부(興祿大夫)· 유록대부(綏祿大夫) ․ 성록대부(成祿大夫) 등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이 관위(官位)에 속하는 벼슬로는 영의정(領議政) ․ 좌의정(左議政) ․ 우의정(右議政) · 군(君) · 사부(師傅) · 영사(領事) · 위(尉)가 있다. 초기에는 문무신에만 쓰다가 뒤에 종친· 의빈에게도 통용하였다.
불천위(不遷位) : 불천지위(不遷之位). 큰 공훈으로 영원(永遠)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하락(下落)한 신위. 4대가 넘어가도 ‘옮기지 않는 조상의 제사’가 바로 ‘불천위’이다.
부조묘(不祧墓) : 불천위(不遷位)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 제사는 본래 4대 조상까지만 지내는 법[4대봉사(四代奉祀)]이다. 4대라고 하면 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 해당된다. 따라서 5대조의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고조부 윗대 조상의 위패는 사당에서 더 이상 모시지 않고 옮겨서 본인의 무덤 앞에 묻는다. 땅에 묻는 것을 매위(埋位)라고 한다. 그러나 특별한 조상의 위패는 4대가 넘어가도 옮기지 않고, 즉 매위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사를 지낸다. 4대가 넘어가도 ‘옮기지 않는 조상의 제사’가 바로 ‘불천위’이고, 이 불천위를 모신 사당이 ‘부조묘’이다.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주변사람들로부터 그 집안이 명문가로 대접을 받는 조건이기도 하였고 불천위가 있어야 종가(宗家)도 될 수 있었다. 어떤 특별한 조상이 불천위에 해당되는가? 퇴계나 율곡 같이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진 선비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에 자기를 희생한 인물들이 사후에 불천위로 모셔졌다. 대표적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닥쳤을 때 목숨을 바치고 재산을 바쳐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⑶ 충절의 명조
① 삼대로 승계된 절조
문하평리(門下評理) : 고려시대 문하부(門下府)의 종2품 관직. 목종 때 첨지정사(僉知政事)라 하였으나, 1061년(문종 15) 참지정사(參知政事), 1275년(충렬왕 1)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이름을 바꾸었다. 1308년 평리가 되고 정원은 3명으로 늘렸다. 1356년(공민왕 5) 참지정사, 1362년 첨의평리(僉議評理), 1369년 문하부참지사(門下府參知事)로 고쳤다. 1372년 다시 문하평리로 고쳤다.
상호군(上護軍) : 고려·조선 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 정삼품 무반직(武班職)으로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이 고려 후기에 개칭된 것이다. 상장군은 고려 전기 이군(二軍) 육위(六衛)에 각각 1명씩 모두 8명이 있으면서 무반의 최고층을 구성하였다. 고려 후기 상호군으로 개칭된 시기는 불명확하다.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 고려시대 예종 때(1116년) 설치한 경연(經筵)과 장서(藏書) 등을 관리하면서 왕을 모시고 경서를 강론하던 관청의 정4품 벼슬. 뒤에 경연청(經筵廳)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의 집현전(集賢殿)과 비슷한 기능을 함.
복벽운동(復辟運動) : 물러났던 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움직임
보공장군(保功將軍) : 조선시대 무산계(武散階)의 종3품 관계명. 1392년(태조 1) 7월 무산계 종3품의 상계는 보의장군(保義將軍), 하계는 보공장군으로 제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보의장군은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보공장군은 보공장군으로 기록었다.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 : 조선 초기인 1409년(태종 8)에 설치한 3군진무소(三軍鎭撫所)의 장관도 도진무라 불렀는데, 곧이어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면서 폐지하였다가 삼군진무소를 복구하면서 다시 설치하였다. 정원은 3명으로 하여 각각 1군씩 담당하였으며, 병조와 같은 군령체계에 두어 국왕의 명령이 있을 때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명령을 받게 하였다. 1466년에 도총관(都摠官)으로 개칭하였다.
장릉사보(莊陵史補) : 필사본. 9권 3책. 규장각 도서. 1796년(정조 20) 정조가 이서구(李書九)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② 梅窓公
사마양시(司馬兩試) : 과거시험에는 소과(小科)인 사마시(司馬試)와 대과(大科) 인 문과시(文科試)가 있는데 진사(進士)와 생원(生員)을 선발하는 시험을 사마시 또는 생진시(生進試)라고 하며 따라서 사마시양시(司馬兩試)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서 부르는 것을 가리킴. 제술과(製述科)의 합격자를 생원, 명경과(明經科)의 합격자를 진사라고 하였음. 초시와 복시를 거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00명씩 선발하는데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수여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만이 아니라 하급관리로 채용되는 자격도 얻게 됨.
별시문과(別試文科) : 조선 시대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丙年)마다 보이던 부정기적인 과거. 초시(初試) ·전시(殿試) 2단계 시험이 있고, 경향(京鄕)의 유생들을 서울에 모아 고시하였다. 초시에서는 종2품 이상 3명을 상시관(上試官), 정3품 이하 4명을 참시관(參試官), 양사(兩司) 각 1명을 감시관(監試官)으로 하여 300명 또는 60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에서는 의정(議政) 1명이 명관(命官), 종2품 이상 2명이 독권관(讀卷官), 정3품 이하 4명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시행하였다. 시취 인원은 일정하지 않아 가장 많을 때가 30명, 적을 때는 3명이었다.
호당(湖當) :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부터, 학문(學問)에 뛰어난 문관(文官)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특별휴가(特別休暇)를 주어 오로지 학업(學業)을 닦게 한 서재.
순변도절제사(巡邊都節制使) : 변방을 둘러보는 고려 말에 설치된 무관의 직책으로, 정3품의 한반도의 동북면과 서북면의 장관.
자격루(自擊漏) : 조선 세종 때, 물이 듣는 성질을 이용하여 일정한 시각이 되면 자동적으로 소리를 내게 만든 시계의 한 가지. 이 시계는 임진왜란(1592년)중 경복궁이 불탈 때 소실되었다. 세종 자격루를 본받아 중종 31년(1536년)에 만든 신자격루(新自擊漏)는 창경궁에서 조선 말기까지 쓰였으며 유물은 1938년에 현재 보관중인 덕수궁 광명문안으로 옮겨 왔으며 1985년 8월 3일 국보 229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유물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만원권 지폐의 도안으로 올라 있으며 우리의 과학 문화재이자 세계적으로도 몇 개 남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③ 25세 휘 배자 천자의 북관대첩비
가등청정(加藤淸正) : 일본의 무장(武將). 6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국통일 이후 규슈[九州]의 히고[肥後] 남부에서 25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울산싸움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갈등을 빚었다.
백의창의(白衣倡義) : 벼슬 없이 의병을 일으켜 싸움.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멀리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의 행재소는 의주에 있는 용만행재소(龍灣行在所)를 의미한다.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 병기제조를 관장한 관청의 종5품 관직
조산대부(朝散大夫) : 조선시대의 종4품(從四品)의 종친(宗親) 문관(文官)의 벼슬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 사복시(司僕寺)란 고려·조선 시대 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이며, 그 중 조선시대의첨정(僉正)은 종4품의 벼슬이며 판관은 종5품의 벼슬이다.
[三賢 神道碑의 建立年度와 經緯]
신도비(神道碑) : 임금이나 왕후, 종2품(品)이상의 벼슬을 지낸 분의 분묘墳墓 [무덤]가 있는 근처의 동남쪽 길목에 세우는 비석으로서 비명 (碑銘)은 통정대부(通政大夫, 堂上官 정3품)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이 찬술(撰述)[글을 지음.]하기 마련이다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놓은 죽은이의 생애에 관한 사항들을 새긴 비.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신도란 고관의 죽은 혼령을 신령으로 간주하여 그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
동궁(東宮) : 동궁은 황태자, 왕세자를 일컫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거처하는 궁(宮)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① 황태자(皇太子), 왕세자(王世子) ② 태자궁(太子宮), 세자궁(世子宮), 동저(東儲)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 조선 시대에 삼법사 또는 23부의 하나로, 서울의 행정 사법을 맡아보던 관아(官衙)에 딸린 종2품(從二品) 벼슬. 한성부의 으뜸가는 벼슬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이품 벼슬이었음.
12향현(鄕賢) : 조선시대 강릉에 살았던 인물 가운데 스승이 될만한 12명의 인물로 강릉향교 내 향현사에서 배향하고 있다. 최치운(崔致雲·1390~1440), 최응현(崔應賢·1428~1507), 박공달(朴公達·1470~1552), 박수량(朴遂良·1475~1546), 최수성(崔壽成·1487~1521), 최운우(崔雲遇·1532~1605), 최수(崔洙·1443~1474) 이성무(李成茂·1370~1436) 김담(金譚·1522~1605) 박억추(朴億秋·1523~1590) 김윤신(金潤身·1444~1521) 김열(金說·1506~?)등이다.
품청(稟請) : (웃어른이나 나라에) 백성이 여쭈어 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