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묘단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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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정씨 묘원 입구 모습. 우측 능선에는 겸재 묘단이, 좌측 능선에는 겸재의 5대조인 정응규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 20세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화의 종화(宗畵)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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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재(瑞海齋) 전경. 2009년 건립(광주정씨 수사공 종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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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재 우측 계단을 오르면 전방에 겸재 정선 묘단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정선의 그림에는 다채로운 숨은 그림들이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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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 묘가 실전(失傳)되어 종중에서 이 곳에 설단(設壇)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묘단/단묘/단소 등의 용어를 사용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입암도(立巖圖)>, <혼혼해색도(混混海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산창유죽도(山窓幽竹圖)>, <의송관란도(倚松觀瀾圖:扇面)>, <노산폭포도(盧山瀑布圖)>,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청풍계도(淸風溪圖)〉 그리고 개인 소장의 <금강산 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노산초당도(盧山草堂圖)>, <통천 문암도(通川門巖圖)>, <봉래산 불정대도(蓬萊山 佛頂臺圖)>, <석굴암도(石窟庵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금강전도(金剛全圖)> 외에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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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 방향으로 내려다 본 모습 |
▲ 겸재 묘단으로 다가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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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묘단 전경 |
18세기 조선 화단을 이끌었던 강세황은 겸재 정선이 실제 경치를 잘 그린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세황은 진경을 그릴 때는 각 장면에서 알맞은 화법을 찾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정선의 산수화를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정(鄭)은 그가 평소에 익숙한 필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태를 일률적으로 '열마준법(裂麻皴法)'으로 함부로 그려서 그가 진경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 위키백과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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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묘단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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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 업적비. 겸재의 업적과 겸재의 6대손에서 절손되어 묘소를 보전치 못하여 이 곳에 설단(2009년)을 하였다는 내용... |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5) 경기헤럴드 청원미학연구 소장 이근우 교수 2010년 12월 24일
겸재 나이 65세가 되어 그야말로 화가로서의 기량이 무르익었을 즈음 영조는 겸재를 그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운 서울 교외의 양천(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부근)현령으로 불러들인다. 영조의 겸재 사랑이 얼마나 극진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겸재의 그림재주를 알아본 영조의 예술적 안목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그 아름다웠던 풍광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당시만 해도 지방관이면 누구나 부임하고 싶어했던 산수가 수려한 고을이었다. 양천현령으로의 발령은 영조가 그 화가적 기량이 절정에 달한 노화가 겸재로 하여금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명작을 세상에 내놓으라는 배려였던 것이다. 어찌 겸재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겠는가! 겸재는 평생의 친구 이병연과 다시 한번 시화환상간의 약조를 하고 임지로 떠나 열심히 그 아름다운 절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속대로 이병연의 시와 어우러진 화첩을 세상에 내 놓았으니 곧 ‘경교명승첩’ 즉 ‘서울교외의 명승을 그린 화첩’이란 뜻이 되겠다. 그런데 관리로서 화가로서 승승장구하여 남부러운 삶을 살던 겸재도 피할 수 없는 비극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죽음으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들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동생의 죽음이 잇따랐다. 두 번째 겸재의 ‘해악전신첩’ 21점은 동생의 죽음이후 슬픈 감회를 달랠 길 없어 떠난 금강산 여행으로 탄생하였다. 실로 36년 만에 다시 그린 금강산과 그 주변의 절경들로 70대 중반의 원숙한 겸재의 필치가 담긴 걸작들이 탄생하였다. 불행도 한꺼번에 닥친다고 청천벽력과도 같은 슬픔이 있었으니 평생의 지기였던 사천 이병연의 죽음이었다. 겸재 나이 76세요, 이병연의 나이 81세였다.
사천과 어린시절 뛰놀던 인왕산 치마바위는 의구하건만 이제는 사랑하는 벗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을 달래며 비 개인 인왕산을 그렸으니 곧 국보 제 216호 인왕제색도(비개인 인왕산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겸재는 마치 빗자루로 쓰윽 쓸 듯이 붓을 놀려 비온 뒤의 젖은 인왕산 바위를 너무도 사실감 있게 그려내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가면서까지 국보가 된 작품을 선사한 셈이니 좋은 인연은 죽어서도 저승과 이승을 초월하여 이어지는 모양이다. 친구의 사후에도 겸재의 관운은 더욱 그 빛을 발하여 마침내 조선 519년 역사상 화가로서는 전후후무한 가선대부인 종2품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천수를 다 누리고 84세의 나이로 친구 이병연의 곁으로 가게 된다. - 이하 생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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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 묘단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어떤 분이 도봉구청에 겸재 묘를 찾자고 제안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가져 왔습니다.
제안개요 : 겸재 정선(1676~1759년)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의 황금기인 '진경시대(1675~1800년)'를 살면서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여 그림으로 그 시대문화를 선도해간 위대한 화가입니다. 더구나, 우리 산수를 36세 젊은 나이에 그린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에서 벌써 주역의 근본인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원리를 이끌어 화면 구성의 근본을 삼았으며, 솔숲이 우거진 흙산은 음(陰)으로 파악하여 중국 남방화법의 기본인 묵법으로 처리하고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돌산은 양(陽)으로 파악하여 돌산과 흙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수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도봉구에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는 산과 바위도 진경산수화법에 비춰 볼 때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있는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제안배경 및 목적 : 겸재 정선의 묘소는 현재 서울 도봉구 쌍문동인 양주 해등촌면(海等村面) 계성리(溪聲里)에 안장됐는데 묘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겸재 묘소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찾는 다면 최대의 문화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봉구 관내에는 많은 문화 유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겸재 정선선생 만큼 파급효과가 큰 문화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겸재 선생의 묘가 발견된다면 강서구에서 해마다 열리는 겸재선생 관련 각종 행사를 주최할 수 있으며, 겸재 묘소를 성역화하여 주변에 각종 시설물을 설립하여 일반인들의 참여도 연계하여 도봉구 문화콘텐츠나 문화재 등을 관람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도 하리라 보입니다. 이에 도봉구에서는 겸재 정선의 묘소를 발굴하는데 인력과 예산을 배정하여 적극적인 발굴작업의 필요성을 제안합니다.
제안효과 : - 창동복합공연장과 연계한 다양성을 표방할 수 있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지역 알림 - 관내 문화재와 연계한 관광상품을 적극개발하는데 일조 - 관내에 낙후된 지역의 활성화로 문화/경제적 지원등으로 다양한 계층에게 혜택 부여 - 도시개발계획 시에 획일적 개발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함을 표방할 수 있는 지역 개발 가능 |
겸재 정선 묘단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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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 쌍분이 정응규 묘, 우측 빨간선 끝 부분 봉분이 겸재 정선 묘단이 위치.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오포읍 추자리 산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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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하단의 화살표 지점에 겸재 정선 묘단이 위치. 우측 상단의 광주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