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장군에 관한 설화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는 특히 설화로 많이 전해진다. 문자로 기록된 것은 고려사, 세종실록,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기문총화 등에 전해진다. 구전된 것은 전국각지에서 전해지고 있다. 탄생 설화와 관련해서는 어느 사신이 길을 가다가 낙성대 근처에 이르렀을 때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에서 아들을 출산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강감찬이다. 후에 송나라의 사신이 와서 강감찬을 만났을 때 천문에 문곡성(文曲星-북두칠성 중 하나)이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다고 하며 계단 아래로 내려가 강감찬 장군에게 절을 올렸다고 한다. 강감찬이 소년원님으로 부임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보는 관속들을 관아에 세워놓고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아전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겨우 일 년이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느냐고 호통을 쳐서 아전의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퇴치한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어느 고을에 부임하여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관속에게 부적을 써주고 못에 던지게 했다. 그러자 그곳의 개구리가 다시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호랑이를 쫓은 설화가 있는데,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에 사는 수백 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쳤다. 그는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고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고 한다. 낙성대 사당의 강감찬 장군의 영정은 호랑이 가죽을 밟고 서 있다. 그 밖에 모기를 없앴다는 이야기, 개미퇴치 이야기,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손으로 꺾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 ||||
당시의 동북아는 거란과 송나라가 대치하고 있었다. 고려는 거란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무시하며 송나라와 손을 잡았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배후의 고려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이때 거란의 임금 성종은 소손녕을 대장으로 삼아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입했다. 거란이 안융진에서의 패배로 주춤하고 있을 때 서희가 단독으로 적진으로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거란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얻었다. 후에 서희가 죽고 강조가 난을 일으켜 전왕을 살해하고 현종을 세웠다. 이를 트집 삼아 거란은 강조를 벌한다는 명분 아래 다시 침입을 하였다. 강조는 이 전투에서 패해서 포로로 잡혀 죽었다. 이때 강감찬은 현종을 개경에서 피신시키고 전략을 짜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후방이 공격당하자 싸울 의사를 잃고 하공진을 인질 삼아 퇴각하던 중 홍화진의 양규와 귀주의 김숙홍에게 기습을 당하고 거란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강감찬은 야전사령관이 되어 북방의 성을 쌓고 20만 군사를 길렀다.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과 현종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고려가 응하지 않자 다시 거란 제일의 장수인 소배압을 필두로 10만 정병으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는 71세였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았다. 강감찬은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거란군에게 곳곳에서 타격을 주었다. 도저히 승산이 없음을 느낀 소배압이 거짓 화친을 제의하고 군사를 돌려 도망가던 중 귀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대패하여 거란으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 ||||
윤태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