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제7권 / 잡저(雜著)
동경유록(東京遊錄)
동경『東京: 경주(慶州)』은 신라의 옛 도읍이다. 남아있는 풍속이 반드시 다 보존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름난 구역과 운치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나고 특별히 아름다운 곳이 동해의 모퉁이인데, 동해가 이런 명성을 얻은 것은 이견대(利見臺)와 소봉래(小蓬萊)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임명을 받고 동쪽으로 온 즉시 한 번 가서 찾아보고 싶었으나, 실행하지 못한 지가 지금에 8개월이 지났다. 올해 음력 4월 17일 병술에 선사(仙槎) 장운거(張雲擧), 하남(河南) 정중립(鄭中立)과 유람을 약속하였는데, 장운거는 병으로 사양하였다.
나와 정군이 전재(殿齋)에 일직을 보류하고, 횡헌(黌軒: 향교)에서 장운거를 이별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달려 계림(鷄林)을 지났다.
숲속은 달리 특이한 것은 없고 오직 노송만이 울창하게 하늘에 솟아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숲속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위에 닭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계림(鷄林)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첨성대(瞻星臺)를 지났는데, 첨성대는 당시에 기상을 관찰하던 곳이다. 다듬은 돌을 쌓아서 높이가 수십 길이고, 형체는 둥글고 덮개는 네모나며 가운데는 넓고 목 부분은 좁다. 허리 쪽 구멍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서 위로 올라간다. 아, 우리나라 좁은 땅에 삼국(三國)이 대치하여 각각 그 기상을 살피고 각자 닥쳐올 일에 대해 대응하였으니, 운수가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월성(月城)을 둘러 동쪽으로 가니 또한 신라왕의 옛터이다. 그 형세는 동서쪽이 단절되어 있으며, 남쪽은 문수(蚊水), 북쪽은 계림이 있어 한 줄기 맥으로 연결되는 언덕이 없었다. 동쪽은 평평한 들판을 위주로 하고, 뒤쪽은 성처럼 높고 앞쪽은 갈고리처럼 굽어 있으니, 참으로 납갑법(納甲法)에서 말한 ‘간월형(艮月形)’이었다.
당시 번화하고 문물이 성대하던 곳이 모두 변하여 산골 아이와 들판 목동의 터가 되어 버렸으니,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이치를 또한 볼 수 있다. 인하여 근체시 한 편을 지었다. - 본집에 보인다. -
동쪽으로 길을 돌려 10여 리를 가서 송목정(松木亭)에서 한 식경을 쉬었다. 저물녘에 불국사에 들어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마치 인적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돌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큰 바위 가에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홈통을 통해 폭포가 몇 리를 가로질러 흘러서 돌 유구에 쏟아져 내렸다.
폭포를 넘어 구름다리[雲橋]를 올라가니, 다리는 돌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문으로 들어서자 금칠한 누각과 석탑과 오래된 불상과 새로 그린 그림이 천태만상으로 기괴했는데, 모두 신라의 유적이다. 내가 중립에게 “신라왕이 쓸데없이 허무한 곳에 백성의 힘을 다 끌어 썼으니, 애석하도다.” 하였다.
양산(梁山)에 사는 김함(金緘)이 걸어서 스승을 쫓아와서 들어와 절을 하니, 스승은 바로 견응기(堅應箕) 어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견 어른과 함께 유람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또 그가 스승을 쫓아온 뜻을 가상히 여겼기에 인하여 함께 여러 순배 술을 마시고 자리를 마쳤다.
좌경루(左景樓)에 묵었는데, 벽 위에 걸린 현판은 대부분 근래에 이름난 유학자와 시인이 지은 것이었고, 그 아래에는 각각 등급과 품평이 있었다. 이는 필시 짓궂은 아이나 모자라는 사람이 장난친 것이겠지만, 그 가운데 한 수만은 그것을 면하였는데, 곧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지은 것이었다.
아, 선생의 덕업이 멀리 후세에까지 미쳐, 짓궂은 아이와 뽐내는 무리들도 오히려 놀리고 업신여길 수 없었는데, 하물며 당시에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랴. 또 한 편을 지었다. - 시가 본집에 보인다. -
18일 정해(丁亥)
비가 오려 하자 사람들이 “날씨가 만약 비가 내린다면 바닷가를 가더라도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니, 잠시 뒷날을 기다렸다가 날이 개었을 때 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고 여기며 다른 날에는 또 어떤 제약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동쪽 고개[추령(楸嶺)]로 걸어갔다.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깔리고 소나기가 오락가락하여 원근을 분간할 수 없었고, 다만 발아래 한 줄기 길이 보일 뿐이어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중립이 말하기를 “하늘의 해는 비록 볼 수 없지만, 은빛 파도와 흰 물결은 어둑한 저녁 무렵에 우리 두 사람이 부모님과 이별하고 나라를 떠나는 심회를 한 번 가질 수 있을 것이니,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소의 소원을 이루는 것만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나도 좋다고 하고 마침내 말을 타고 가며 피리 부는 사람에게 재주를 보이게 하니, 간드러지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져 마치 학이 높은 하늘에서 우는 것 같았다. 한낮에 비를 맞으며 요광원(要光院)에 당도하여 말에게 여물을 주며 어깨를 펴고 쉬었다. 골은 깊고 숲은 우거졌으며 기암괴석이 좌우에 줄지어 있었다. 큰 비는 여전히 내려 앞 시내가 넘치려 하였다.
몇 잔의 술을 마시고 그대로 취해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하였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 점점 바다 어귀에 이르니, 평야가 널찍하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는 한 쌍의 탑이 있었으니, 곧 신라 시대 감은사(感恩寺) 터이다.
바닷가에 투숙하여 비로소 큰 바다를 바라보니, 안개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바람에 이는 파도가 마치 산과 같아서 하늘과 물이 맞닿아 형상을 분간할 수 없었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졌는데, 깎아지를 듯이 서 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을 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아마도 신라왕이 《주역》 〈건괘 구오(乾卦九五)〉에 이른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라고 한 데서 뜻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헌(東軒)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뾰족뾰족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大王巖)이다. 속언에 “용이 이 바위 위에 나타나 신라왕과 서로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다. 서로 함께 몇 잔을 마신 뒤 자리를 파하고 날이 저물어 잠자리에 들었다. 율시 한 편을 읊었다. - 시가 본집에 보인다. -
다음날 무자(戊子)
가랑비가 아직도 뿌리고 구름은 어제와 같이 어두웠다. 또 소봉래로 가는 길이 막혀 우리 두 사람은 이른 아침밥을 먹고 도롱이를 걸치고 감포(甘浦)로 향해 출발하였다. 길 왼쪽에 봉화대가 우뚝 솟아 있는데 한 사람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봉화를 피울 조짐이 없으니, 태평시대의 기상을 볼 수 있었다.
말 위에서 비로소 동북쪽 한 쪽에 푸른 하늘이 보이기에 정군을 불러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정군이 “정성이 독실했으니 하늘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잠시 뒤 구름이 흩어지고 햇빛이 새어 나오니, 해당화는 선명하고 큰 물결은 잠잠해졌으며 흰 돌은 맑은 빛을 띠고 푸른 소나무는 무성하여 비 갠 뒤의 천태만상은 이루 다 접할 겨를이 없었다.
또 정군에게 이르기를 “어제 어두울 때에는 어찌 오늘 이처럼 맑고 밝은 경치가 있을 줄 알았겠는가. 바로 사람의 마음이 마치 비록 지극히 어둡고 가려졌더라도 한번 선(善)의 단서가 드러나 마침내 밝아지게 되면 그 본체가 드러나는 것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부가 중단되면 그 어두움이 또 이르니, 퇴계 선생의 시에 ‘찬 서재에 홀로 앉아 변화를 관찰하노라니, 겨우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지니 어두우면 밝기 어렵네.[獨坐寒齋看變化, 纔明還晦晦難明.]’라고 하였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 시가 본집에 보인다. -
오후 1시경에 우진(右鎭)에 이르니 진장(鎭將) 정군웅(鄭君應) 시중(時仲)이 우리들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헌(軒)에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술을 몇 잔 마셨다. 정군에게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만사가 분수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무(武)를 갖추는 일이겠는가. 함께 배를 타고 훗날 쓰이게 될 자질을 시험해보고 싶네.”라고 하고, 마침내 함께 배에 올랐다.
바다 어귀에서 몇 리쯤 들어가서 고기 잡는 사람을 불러 전복을 잡아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자 나란히 함께 들어가 물결을 차고 수영을 하면서 번갈아 들어갔다 나오며 백여 개를 잡았다. 회로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다.
정군과 함께 해변을 따라가니 길가의 방파제와 돌 봉우리, 가파른 바위가 있기에 말에서 내려 시를 읊었다. 소봉래를 향해 달려가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이 섬은 바다 가운데에 우뚝하게 서 있는데, 아랫부분은 바위고 윗부분은 흙으로 푸른 소나무와 늙은 전나무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서 있었다.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엷게 걷혀 거울 면을 닦아 놓은 듯하였다. 거꾸로 비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금빛 물결이 드넓게 일렁거려 마음과 눈이 확 터져 황홀하기가 홍몽(鴻濛)을 넘어 우주를 벗어난 듯하였다.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이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있다면 이곳이 제일가는 봉우리일 것인데, 어찌하여 세속에서 소(小)라고 일컬은 것일까.
우리 세 사람이 취한 몸을 부축하고 일어나 노송(老松)에게 아뢰고 이름을 썼다. 또 회재 선생(晦齋先生: 이언적(李彦迪))의 “땅이 다해 동쪽으로 바다와 맞닿으니, 천지간 어느 곳에 삼신산이 있으려나. 비좁은 먼지 세상 살고 싶은 생각 없어, 가을바람에 노나라의 뗏목 타고 떠나고파라.[地角東窮碧海頭, 乾坤何處有三丘. 塵寰卑隘吾無意, 欲駕秋風泛魯桴.]”라는 시를 읊고, 이어 삼가 차운하였다.
- 시가 본집에 보인다. -
서로 이별하고 장기현(長鬐縣)으로 향하였다. 태수 이한(李僴) 공 인립(仁立)이 잔치를 열어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자 인립이 “여색을 취할 때 반드시 못생긴 여자를 취하면 남들에게 빌미가 되지 않고 마음도 편안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손을 잡고 칭찬하기를 “이것은 대장부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고, 함께 매우 즐겁게 보냈다. 달이 이미 중천에 떠올랐고, 중립과 주인은 먼저 취하여 중당(中堂)에 누웠다.
20일 기축(己丑)
이별할 즈음에 태수가 뇌록(礌綠)을 노자로 주기에 쓸 일이 없다고 사양하였고, 사슴고기 포를 주기에 어머니께 드리려고 사례하고 받았다. 연일(延日)을 향하다가 길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날이 저물어 현(縣)에 이르렀다. 그곳 수령이 활쏘기를 하다가 또한 정성스럽게 대우하였다.
이어 태수에게 “이곳은 문충공 정 선생[정몽주(鄭夢周)]의 고향입니다. 어찌 유풍과 여운이 남아 있는 곳이 없습니까?”라고 하니, 태수가 사람들을 경내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늠름하여 마치 머리카락이 서고 마음이 서늘한 것 같았다. 이어 근체시 한 편을 읊었다. - 시가 본집에 보인다. -
21일 경인(庚寅)
성으로 돌아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5, 6일이 되지 않았다. 동해의 빼어난 승경과 신선이 사는 곳의 기이한 경치를 다 찾아보고 돌아와 평소에 쌓아둔 소망을 모두 펼칠 수 있었다. 아, 나 같은 자는 배우지 못해 볼만한 것이 없는데, 당세에 명성을 도적질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임무를 받아 오늘 여기에 왔고, 또 지방을 유람할 수 있었으니, 어찌 내 인생의 하나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만 관람하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여 평생토록 지킬 바를 돌아보지 못했으니, 말단을 일삼고 근본을 버린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주 선생[주자(朱子)]의 시에 “인하여 알겠네. 평생의 회포, 세속의 생각과 함께 없어지지 않음을.[因知平生懷 未與塵慮泯]”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지나온 행적을 기록하고 또 나의 단점을 기록하여 스스로 힘쓰노라.
만력 경진년(1580, 선조 13) 4월 그믐에 영양(永陽) 이덕홍(李德弘)이 기록하다.
[주해]
[주01] 이견대(利見臺) : 경주(慶州) 해안에 세워진 대(臺)인데, 속설에 의하면, 왜국(倭國)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자,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걱정하여, 자신이 죽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 도적을 방비하겠다고 맹세한 나머지, 임종 때에 유언하기를 “나를 동해
가에 장사하라.” 하였으므로, 신문왕(神文王)이 그 유언대로 장사를 지내고, 뒤에 그를 추모하여 그곳에 대를 쌓고 바라보았더니,
과연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나 보이므로, 이를 인하여 그 대를 이견대라 명명했다고 한다.
[주02] 소봉래(小蓬萊) :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리에 속해 있는 섬으로, 소봉대(小蓬臺)가 있다.
[주03] 내가 …… 즉시 : 이덕홍이 1578년(선조11) 7월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참봉에 제수된 때를 말한다.
[주04] 선사(仙槎) 장운거(張雲擧) : 장영(張翎, 1543~?)으로, 운거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울진(蔚珍), 호는 월송(月松)이다.
통훈대부 장한보(張漢輔)의 아들로, 157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사는 울진을 가리킨다.
[주05] 정중립(鄭中立) : 정대민(鄭大民, 1551~1598)으로, 중립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1575년(선조8) 25세의 나이
로 향천(鄕薦)에 의하여 동부(東部) 참봉에 기용되었다. 이후 영숭전(永崇殿)ㆍ문소전(文昭殿)ㆍ집경전(集慶殿)의 참봉 등을 거
쳤고 운봉ㆍ곡성ㆍ장수 등의 현감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주06] 금으로 …… 하였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 〈김알지 탈해왕대(金閼智 脫解王代)〉에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
뭇가지에 걸려있는데 궤 속에서 빛이 나왔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雲中有黃金櫃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
鳴於樹下.]”라고 하였다.
[주07] 월성(月城) : 신라의 궁성인 반월성(半月城)을 가리킨다. 현재 경주시 인왕동에 성벽 일부와 석빙고(石氷庫)만이 남아있다. 성의
모양이 반달 같다고 하여 반월성으로 불렸다고 한다.
[주08] 납갑법(納甲法) : 천간(天干)을 팔괘(八卦)에 나누어 배분하는 방법으로, 〈건괘(乾卦)〉에는 갑(甲), 임(壬)을, 〈곤괘(坤卦)〉에는
을(乙), 계(癸)를, 〈진괘(震卦)〉에는 경(庚)을, 〈손괘(巽卦)〉에는 신(辛)을, 〈감괘(坎卦)〉에는 무(戊)를, 〈이괘(離卦)〉에는 기
(己)를, 〈간괘(艮卦)〉에는 병(丙)을, 〈태괘(兌卦)〉에는 정(丁)을 해당시킨다.
간지와 괘효(卦爻), 오행(五行), 오방(五方)을 서로 연결 지을 때 이를 활용한다. 《경씨역전(京氏易傳)》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
다.
[주09] 간월형(艮月形) : 간(艮)이 나타내는 달[月] 모양으로, 곧 하현달 모양이다. 납갑법에, 간(艮)은 23일의 하현달을 나타내어 남방
(南方)에 거하니 납병(納丙)이다.[주-D010] 본집(本集)에 보인다 : 《간재집》 권2에 수록된 〈월성(月城)〉 시를 말한다.
[주11] 구름다리[雲橋] : 국보 제23호인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를 말한다.[주-D012] 시가 본집에 보인다 : 《간재집》 권2에
수록된 〈불국사(佛國寺)〉 시를 말한다.
[주13] 요광원(要光院)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조에 “부의 동쪽 37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주14] 한 쌍의 탑 :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을 말한다.
[주15] 대왕암(大王巖) : 경주 감포에 있는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다.
[주16] 시가 본집에 보인다 : 《간재집》 권2에 수록된 〈이견대(利見臺)〉 시를 말한다.
[주17] 찬 서재에 …… 어렵네 : 《퇴계집》 권2에 수록된 〈이인중에게 답하다[答李仁仲]〉라는 시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獨坐寒齋’가 《퇴
계집》에는 ‘默坐虛堂’으로 되어 있다.
[주18] 시가 본집에 보인다 : 《간재집》 권2에 수록된 〈감포에서 날이 쾌청하여 삼가 선사의 명 자 운에 차운하다[甘浦喜日晴謹次先師明
字韻]〉 시를 말한다.
[주19] 땅이 …… 떠나고파라 : 《회재집(晦齋集)》 권1에 수록된 〈소봉대(小峯臺)〉라는 시이다.[주-D020] 시가 본집에 보인다 : 《간재
집》 권2에 수록된 〈회재 선생의 ‘소봉래’ 시에 차운하다[次晦齋先生小蓬萊韻]〉라는 시를 가리킨다.
[주21] 뇌록(礌錄) : 목조건물에 벌레가 생기거나 부식,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녹색 안료이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뇌성산에 뇌록지가 있다.
[주22] 태수가 …… 같았다 : 연보에 포은 선생의 사당을 참배한 기록이 보인다. 《간재집》 권8 〈간재선생연보〉 경진년 4월 선생 40세 조
에 “소봉래를 유람하고 오천을 지나다가 포은 선생의 사당을 참배했다.[遊小蓬萊, 過烏川, 謁圃隱先生廟.]”라고 하였다.
[주23] 시가 본집에 보인다 : 《간재집》 권2에 수록된 〈오천에서 정 문충공을 생각하며[烏川憶鄭文忠公]〉라는 시를 말한다.
[주24] 인하여 …… 않음을 :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 〈노봉을 유람하며 운자를 나누어 진 자를 얻다.[游蘆峰分韻得盡字]〉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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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東京遊錄
東京。乃新羅舊都也。遺風餘俗。未必皆存。而名區韻地。非一非二。其最勝而擅麗者。東海之陬。而東海之得此名。以其有利見臺小蓬萊也。余受任東來。卽欲一往探討而未就者于今八閱月矣。是年淸和哉生魄後一日丙戌。與仙槎張雲擧河南鄭中立約遊 。雲擧以病辭。僕與鄭君。留聞直于殿齋。別雲擧於黌軒。竝轡而行。歷鷄林。林中別無所異。惟有蒼髥老樹。薈蔚參天。三國史曰。金櫃掛于林梢。有雞鳴于其上。故名焉。過瞻星臺。臺卽當時觀象之所也。以熟石矗之。高可數十丈。形圓而戴方。腹大而項細。由腰穴以入。自中而上也。噫。我東方彈丸之地。三國鼎峙。各察其象。各應其應。則數亦未必不在於其間也。繞月城而東。亦羅王舊墟也。其爲形勢。東絶西斷。南蚊水。北鷄林。無一詠所接之原。東以平郊爲主。後高如城。前曲如鉤。眞納甲法所謂艮月形也。當時繁華文物之盛。盡化爲山童野牧之場。其盈虛消息之理。亦可見矣。因得近體一篇。見本集 東轉十餘里。憇松木亭一餉間。暮入佛國寺。雲烟蒙翳。若無人跡。然纔過一石橋。有巖上蓮池。池北刳木。飛泉橫流數里。瀑下於石槽。踰飛泉上雲橋。橋刻石以成。若雲虹然。旣入門。金閣石㙮。古佛新畫。千態萬狀。奇奇恠恠。皆新羅遺躅也。僕謂中立曰。羅王盡民力於無用虛無之地。可惜。梁山人金生緘。徒步從師。入拜。師卽堅丈應箕也。余旣恨其不得與堅同遊。又嘉其從師之志。因與飮數巡而罷。宿左景樓。壁上懸板。多近代名儒韻士之所述。而其下各有科等品題。此必狂童晩出之所戱。而其間一詩獨免焉。乃金先生宗直之作也。嗚呼。先生之德業。遠及於後世。雖狂童夸毗之徒。尙不能戱侮之。而况於當時親炙之者乎。又得一篇。詩見本集 十八日丁亥。天欲雨。人曰。天若雨則雖往海邊。不得見日出。莫若姑待後日。以乘霽景也。吾二人以爲好事多魔。不知他日更有何等掣肘邪。强步東嶺。雲霧晦冥。銀竹交橫。遠近不分。只見脚下一線路。進退狼狽。中立曰。天日雖不可見。銀濤雪浪。冥冥薄暮。吾兩人離親去國之懷。聊可一攄。不若更進一步。以遂素願也。吾曰。諾。遂騎馬而行。令篴人試才。縷縷之聲。寥亮若鶴唳雲霄也。亭午。帶雨抵要光院。抹馬息肩。谷邃林深。奇巖恠石。羅列左右。大雨猶作。前溪欲漲。飮酒數椀。因醉一夢。而起吟一絶。忘未記焉。沿溪而下。漸至海口。平蕪寬衍。鷄犬相聞。路傍有雙㙮。乃羅代感恩寺基也。因投海上。始朢大洋。烟雲蔽空。風濤如山。天水相接。不可辨狀。東山一支。直走海門。一角斗斷。巖石削立。高可十餘丈。其上有畫閣。巋然屹立。所謂利見臺也。臺之得此名。豈羅王取易乾封九五所謂飛龍在天。利見大人之義歟。坐東軒騁目。波濤接天。浩浩洋洋。又於南浦。有巖贔屭而立。屹然於橫波激浪之中。卽所謂大王巖也。諺曰。有龍見於此巖上。與羅王相見焉。故因名云。相與飮數巡而罷。向晦就寢。詠四韻一篇。詩見本集 翌日戊子。細雨猶灑。雲暗如昨。又將沮小蓬萊之行吾二人蓐食。荷蓑而出向甘浦。路左烟臺突兀。有一人坐其上。絶烟火之候。可見其太平氣象也。馬上始見東北一片靑天。呼鄭君而指之。鄭君曰。誠旣篤矣。天何不知哉。俄而雲陰解駁。日光穿漏。海棠鮮明。鯤波妥帖。白石粼粼。蒼松蔭翳。霽景千萬。應接不暇。又謂鄭君曰。昨日昏晦之時。安知有今日如許淸明之景乎。正如人心雖昏蔽之極。一有善端之發而遂明之。則其本體之呈露。豈不如是乎。然工夫間斷。則其昏之者又至矣。老先生詩所謂獨坐寒齋看變化。纔明還晦晦難明者。甚可懼也。因吟一絶。詩見本集 未初到右鎭。鎭將鄭君應時仲。朢見吾等之來。席軒而待。相叙寒暄。與之飮數行。因語鄭君曰。男子生斯世。世間萬事。無非分內。而況於武備乎。請一行船。以試他日受用之資。遂與登舟。入海口數里許。招海尺求鮑魚。其人赤身投水。與齊俱入。蹴波游泳。更迭出入。得百餘箇。或膾或炙。其味可悅。携鄭君遵海濱而往。路傍海塢。石峯巉巖。下馬吟咏。馳向小蓬萊。日已昃矣。是島兀立海中。趺巖首土。蒼松老檜。不知其幾。厥夕。雲烟淡抹。鏡面如拭。倒影翳翳。金濤浩瀁。心眼暢豁。怳然若超鴻濛出宇宙。蓬萊方丈。無則已。有則此其第一峯也。何世俗之以小稱之也。吾三人扶醉而起。白老松而書名。又詠晦齋先生詩曰。地角東窮碧海頭。乾坤何處有三丘。塵寰卑隘吾無意。欲駕秋風泛魯桴。因敬次。詩見本集 分袂相別。向長鬐縣。太守李公僴仁立。開筵欵欵。酒半。仁立曰。取色必醜。則人不祟而心亦安。余執手稱賞曰。此丈夫之言也。相與極歡。月已三竿。中立與主人。先醉卧中堂矣。二十日己丑。臨別。太守贐以礌綠。辭以無用。餽以鹿脯。謝以將毋。向延日。抹馬於路。日暮抵縣。其守方射侯。亦欵遇之。因謂太守曰。此文忠公鄭先生之故里也。豈無流風餘韻之所存乎。令人入境。凜凜若髮竪心爽也。因詠近體一篇。詩見本集 二十一日庚寅。還城。首尾不滿五六日。東海之勝狀。仙丘之異致。無不欵探而歸。以攄平生之素蘊。噫。如鄙人者。不學無狀。盜名當世。濫受非分之任。今此之來。又作方外之遊。豈非愚生一大幸乎。第徒役於觀覽之一事。而不顧平生之所守。則不幾於事末而遺本乎。朱先生詩曰。因知平生懷。未與塵慮泯。其不謂是乎。因記所歷。且志吾所短以自勖焉。萬曆庚辰四月晦。永陽李德弘錄。<끝>
간재집 제7권 / 잡저(雜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