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아닌 남의나라 군대에서 싸운 폴란드인과 조선인에 일본인!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자기나라 군대에서 싸운다면 의미도 있고 떳떳할테지만 제 2차
세계대전때 연합군으로 참전해 싸운 폴란드인들은 전후 조국이 공산화 되고.....
동서 냉전으로 고국에 귀향도 못했으니 싸운 보람 조차 없게 되어버렸으며 조선인
과 일본인 역시 남의나라 군대에서 싸운 사람들의 사연이 있으니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나라 잃은 폴란드인 병사들
중세에 폴란드는 대국이었으니 그다니스크를 점령하고 이반 뇌제의 러시아 군대와
싸워 승리했으며, 1683년에는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폴란드 기병 윙드 후사르는 오스만 터키군에
돌격해 대승리를 거두어 유럽을 구출했으니 기독교 세계를 지킨 수호천사 였습니다.
윙드 후사르는 1503년 ~ 1775년에 폴란드의 기병으로 5 m 짜리 랜스(장창)와 윙드 후사르
의 상징인 날개 장식을 달고 있는데 본고장 발칸 반도가 오스만 터키에 점령되자 패망한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국, 왈라키아, 헝가리 왕국의 후사르들은 국가를 잃고 용병으로
떠돌았는데 일부가 폴란드 왕국에 고용되었으니 이때 3개 부대의 폴란드식 후사르가 생깁니다.
윙드 후사르가 세운 전적을 살펴 보면 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2,600명이 기마 돌격을 하여
칼 9세가 지휘하는 스웨덴군 기병 2,500명과 보병 8,300명 중에서 무려 7,800명을 전사
시켰으며.... 6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돌격해서는 러시아군 2만을 전사시켰습니다.
또 윙드 후사르 300명이 오스만 터키(오스만 투르크)군 1만 5천명에 돌격해 오스만 터키군 천여명
을 전사시켰고, 그후 다른 전투에서는 윙드 후사르의 돌격으로 오스만터키군 3만 5천명이 붕괴
됐으며 코사크 - 타타르군 14만을 향해 돌격했는데 폴란드군의 손실은 불과 700명이었다고 합니다?
168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의 제2차 빈 포위전에서 터키(투르크)군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20만으로 추정되는 대병력으로 포위하자, 윙드 후사르 1만 8천명이 후대
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병 돌격' 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돌격으로.......
오스만 터키군을 붕괴시켜 저들이 살기위해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폴란드 지배를 받던 카자크 Cossack (러시아 남부 자유농민)가 반란을 일으키자 1651년 베레스테츠코
에서 63,000명 폴란드군은 140,000명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 전투
에서 폴란드군의 피해도 엄청 심한데다가..... 국력이 소모되어 대홍수(Potop) 시기에 쇠퇴하게 됩니다.
카자크는 코사크라고도 하는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으로, 드니프로강 하류와 돈강과 우랄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14세기에 드니프로강의 자포리자 카자크와 돈강의 돈 카자크가 생겼으니 자포리자 카자크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봉신이었는데 1962년 율부린너 주연 대장 부리바 Taras Bulba 라는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동쪽의 카자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이후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아
폴란드는 국토의 절반이 점령당하자, 북쪽의 스웨덴도 브란덴부르크군과 함께 침공해
와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들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폴란드군은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독일) 및 러시아군에 맞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낸후, 러시아와의 전쟁은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는데, 전쟁의 결과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으로 편입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폴란드는 1793년에 다시 러시아의 침공을 받으니 최전성기에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던 폴란드의 영토는 21만 제곱킬로미터로 축소되었으며 왕국은 370만명의
인구를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그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까지
침략해 와서 1795년에 3국이 분할해 갈라먹으니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나라가 없어진 폴란드인은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에 협력하니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 프랑스의 괴뢰국으로
잠시 독립했으나,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에 분할되어 지도에서 사라지니 이후 10여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철저하게 진압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폴란드인 150만명은 징집돼 점령자인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과 협상국
(러시아)에 소속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동맹국이 항복하면서
1918년 11월 폴란드는 123년만에 폴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을 받자
동유럽 신생국들과 연합해 소련군을 몰아내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해 민스크와 키에프를 점령 합니다.
그러나 소련 붉은 군대의 반격으로 점령지를 뺏기고 1920년 8월에는 바르샤바까지 진격해온
소련군을 비스와강에서 격파해 기적적으로 승리해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넘기고는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체결해 벨로루시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까지 손에 넣었는데,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비밀협정으로 또 다시 폴란드를 갈라먹으니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2차대전에서 1944년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로 진군하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니
몬테카시노 전투인데, 1월 부터 5월 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무려 네 차례나 대공세를 편 후에
간신히 몬테카시노 점령에 성공하니 연합군에는 미군, 영국군, 자유 프랑스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구르카 부대 까지 참전했지만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부대는 나라를 잃은 군대였던 폴란드군 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자유 폴란드군은 노르망디를 비롯 좋게 말하면 전투의 결정적인 국면에, 다르게
말하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국면에 투입되곤 했으니.... 노르망디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자루 속에 가두었고 독일군은 유일하게 남은 탈출구로 거세게 달려 나갑니다.
압력과 저항이 엄청난 자루의 끝을 묶는 임무에 투입된 부대는 폴란드군 이었으니
그렇게 악착같이 싸웠음에도 폴란드군은 나라를 잃은 상태였기에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없었으니, 이후 자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생존한 폴란드군과 폴란드 국민은 종전 후에 더 큰 비극을 겪게 됩니다!
해외의 자유 폴란드군 외에도 폴란드내 비밀 지하조직인 국내군 40만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켜 임시 정부를 세우고 나치 독일에 대항해 싸웠는데, 2차대전때 전체 인구의 20% 인
600만명이 사망했으니 소련과 중국에 이어 사망자가 3번째로 많은 나라(4번째는 독일)로 전쟁이
끝나기 전에 연합국에게 토사구팽당해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동쪽 땅을 뺏겨야 했습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데 폴란드 망명정부는 귀띔도 받지못해 항의하니 처칠은 불만이면 언제
든지 연합군을 나가도 좋다고 무시했으니, 그래도 소련이 폴란드의 동부 절반을
점령한 대신에 독일의 오데르강 동부를 대신 폴란드 영토로 주었는데 산업화가 잘
되어 있는게 그나마 위안거리였지만 이후 공산화 되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2. 아라랑 아라리요, 독일군의 포로 조선인
전인평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독일 조선인 포로가 부른 아리랑과 독립운동 가요” 라는 기사
에는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리랑 뛰어라 노다 가세.” 지직거리며 거친 소리를
내는 에디슨 축음기 녹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나 애잔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쥐어뜯는다. “
“또한 목메어 부르는 독립운동 가요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를 듣노라면,
멀고 먼 이역 땅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던 조상들의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 진다.
때는 1916년 가을 그리고 1917년 봄,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조선인 다섯명이 노래를 불렀다.“
“ 이들 조선인들은 전쟁 포로로서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의 장래에
대해 한 치 앞을 모르는 암울한 포로 생활 중에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왜 어떻게 조선인들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멀고 먼 독일에서 노래를 불렀을까?”
“1860년대 조선왕조는 대기근과 홍수 그리고 민란 등으로 대단히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당시 민초들의 생활은 말할수 없이 어려웠고 고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함경도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흘러간 곳이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이다. 이곳에서 조선인 대부분은 무국적자로 형언할수 없는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자 러시아 황제는 동원령을 발동했다. 무국적자로
지내던 조선인 일부는 군에 입대하면 러시아 국적을 준다는 말에 군대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전 조선인 중에 일부는 1914년 8월경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혔고,
이들은 독일 쾨니히스브뤼크, 뮌스터, 그리고 하메르슈타인의 포로수용소에 수용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한“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왕국에 책임을 요구했고, 이에 러시아를 등에 업은 세르비아가 응하지 않으면서
천만명이 죽고 800만명이 실종됐으며 2천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동맹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불가리아와 오스만 터키이고 협상국은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인데 이후 일본, 이탈리아, 루마니아, 미국등이
참가합니다. 독일은 슐리펜계획에 따라 먼저 서쪽으로 진격해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격파한 후에..... 다시 동쪽으로 돌아와 러시아와 상대할 계획 이었습니다.
독일은 동부 전선에는 12개 사단을 가진 제8군만 배치했는데 러시아는 예상과 달리 빨리
38개 사단을 동프로이센 전선에 동원 하자, 이에 독일군 8군 총사령관 힌넨부르크와
참모장 루넨도르프는 북쪽 러시아 제1군에 대해서는 1개 사단으로 방어만 하고 11개
사단을 동원해 남쪽 러시아 제2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는데 이때 포로가 된 것 같습니다?
“빌헬름 2세 황제가 통치하던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말에 왕립 프로이센
표음 위원회가 설립되어 세계 여러나라의 다양한 지역에서 잡혀온 포로를 활용하여
음악과 언어를 녹음하고 또한 노래의 가사, 녹음한 사람의 인적 상황을 꼼꼼하게 정리하였다.”
“경황없는 전쟁통에 포로들의 음악과 언어를 녹음 하겠다는 발상도 놀랍거니와
녹음후 노래 가사와 가창자 인적사항도 적었다. 신상기록지에 이름,
생년월일, 부모 출신지, 사용가능 언어, 직업, 종교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새삼스레 독일인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에디슨이 축음기
를 발명한 것이 1876년이니 아직 녹음시설이 보편화되지 않은
형편이었을 것인데, 이런 작업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주민 2, 3세로서 김 그레고리, 안 스테판, 강 가브리엘, 유 니콜라이, 유 니키
포르이다. 이들이 부른 노래는 모두 45곡으로 1시간 10분 분량이다. 녹음에는 수심가, 애원성,
국문 뒤풀이 등의 민요가 들어 있고..... 특별히 귀중한 것은 독립 운동 가요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강 가브리엘(강홍식)이 1917년 3월 녹음한 독립운동가요 ‘대한 사람의’ 는 “대한 사람의 우리들은
요 총과 칼이야 무서말게요” 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1917년 하메르슈타인에서 유 니콜라이가
녹음한 독립운동가요 ‘만났도다’ 는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이 노래를 부른 포로 5명의 나이는 녹음 당시 23세에서 41세 였다. 이들은
귀한 집안의 아들이기도 하고 혹은 가장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고향을 그리며 타향에서 눈을 감았을까? ”
“이 45곡의 노래는 국립국악원 김해숙 원장과 송지원 연구실장 등의 3년여 작업 끝에
‘그리움의 노래’라는 CD 2장으로 재탄생했다. 자세한 서지 연구와 악보도 소개
되었다. 낯선 땅의 전쟁 포로로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참담하고 처절한
상태에서 노래하는 조선 청년,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이 자료에 담긴 노래들은 우리 민족이 겪어온 질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소중하다. 앞으로 이 귀중한 자료가 유능한 전문가
의 손을 거쳐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이 조선인 포로의
노래를 드라마 오페라 또는 뮤지컬로 재현할 역량 있는 작가가 기다려 진다.”
3. 강제수용소에 갇힌 일본인 12만 중에 2만명 미군에 지원
1941년 12월 7일 북태평양을 열흘에 걸쳐 횡단한 일본 항공모함 전투기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에 들어가자 미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니... 그 수가 무려 12만명인데 미국은 1,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전쟁했음에도 독일계 미국인을 수용소에 가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인종차별인지? 노인과 여자에 어린아이 까지 모두 포함된 일본계 미국인 12만명은 3년간
구금 중에, 일본인들의 집과 재산은 이웃에 살던 미국인들에게 약탈당했지만 재무장관의 보고
에...... 루즈벨트 대통령 은“ 나는 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라고 한마디로 야멸차게 일축합니다.
"1945년초 미국 전역에 10개 수용소에 감금된 일본계 미국인들은 3분지 2가 미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인데.... 미국은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자 1943년 1월 28일,
육군 장관 Stimson 는 미국 군대에서 재미 일본인 2세 자원병을 받는다고 발표했을
때, 2만명이 자원했고 제442 보병대와 제100 보병대의 용맹은 유럽에서 전설적 이었다."
"일본계 부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제442 연대 3천명은 유럽 전선 이탈리아에 출정해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3,000개의 퍼플 하트 훈장과 500개의 청동
무공 훈장, 810개의 청동 성장, 47개의 수훈 십자 훈장, 그 외에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 전 해에 하와이에 거주하는 일본인 천여명으로 100대대가 창설되어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
지니 로마 점령을 위한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일본인 대대는 60% 가 전사하는데, 잔여 병력
400명은 2차 전투에서 85% 가 전사하자 겨우 60명만이 살아남아 442연대로 편입
되는데, 다시 말하면 하와이 거주 일본인 천명 중에 94% 인 940명이 전사했다는 얘기 입니다?
1944년 4월 21일 이탈리아 산토렌소 전투에서 442연대 3소대장 다니엘 이노우에
소위는 독일군 기관총 2대를 부수고 3번째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던지려다가 총상으로 오른팔이 뭉개지자.... 왼손으로 오른손에 들린
수류탄을 낚아채 던져서 진지를 파괴하니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전무후무한 “일본인 부대의 공훈”을 치하하기 위해 1946년 7월 15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
은일본인 부대를 방문해 격려했으며, 저 오른팔이 잘려나간 이노우에 소위는 1958년
하와이주 의원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8선을 했는데.... 하와이는
호놀룰루 국제공항 이름을 "다니엘 이노우에 국제공항" 으로 명칭 까지 바꾸었습니다.
"이들 일본계 미국인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음을 불사하고 용맹스럽게 싸운 이유는, 국가
에 충성을 보이면 강제수용된 가족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
이었다. 1944년 말, 미국 대법원은 "정부가 배신 행위에 대한 증거 없이 계속
해서 태평양 연안의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수용하고 추방할 수 없다" 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돌아왔을 때는 집에 보관해둔 많은 물건들이 도난당한 상태였고,
집과 농장, 가게 등은 California 백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아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일본인 2세 군인들은 이발소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부
당했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에 육군성의 홍보 활동으로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으로 발생한 태평양전쟁에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미군편에 서서
싸운줄 아는 분도 계실테지만, 광복군은 물론 한국인들은 부대 단위로 일본군과 전투에
참여한건 전무하며... 오히려 자발적이건 강제이던간에 일본군이 된 한국인은 무려 10만명
이나 되니 이들은 미군 및 미국의 동맹인 중국군등과 싸웠으니 한국은 일본과 한패였습니다.
조선인들이 폴란드인들 처럼 일본에 대해 쌀과 면화등 전쟁물자 공출을 하지 않고 징용과
징병을 거부하며 총궐기했다면.... 태평양전선으로 갈 일본군 50만이 반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투입되니, 조선인들은 저 투쟁에서 600만이 죽은 폴란드 보다는
적겠지만 그래도 십수만명이 죽고 수십만명의 부상자에 수백만명이 집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저런 전국적인 투쟁으로 일본군을 3년간 한반도에 붙잡아 둠으로써 태평양
전선의 "미군 1만명의 생명" 을 구했을 것이니 그럼 38선으로 분단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김구선생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자 사람들은 기뻐서 우는줄 알았
지만 선생은 우리가 일본군과 싸운 실적이 전혀 없으니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우신 것입니다.
4. 전후 일본계 해리스 사령관과 한국계 김영옥과 대니얼 유
하와이 미국 태평양사령부 해리 해리스 총사령관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고베에 살던 어머니는
미군의 공습으로 집과 가족, 친지와 친구를 잃고는,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에 일자리를
얻었는데, 1950년대에 미 해군 상사를 만나 결혼했으니 남편은 6.25 한국전쟁에도 참전
했으며 해리스는 1956년 요코스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테네시주 시골로 이주합니다.
해리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두개의 뿌리를 가진데 대한 자긍심을 지니라고 했지만 일절
일본말을 가르치진 않았다는데,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반일감정을 걱정했기 때문이니 해리스는 일본의 공습을 받았던 하와이에서
총사령관으로 근무하고는 몇년후 서울에 와서 주한 미국대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1944년 산토렌소 전투에서 442연대 3소대장 다니엘 이노우에 소위의 활약은 위에서
얘기했거니와 하와이 100대대에 한국계 김영옥 소위가 있었으니 일본인부대 유일한
한국인으로, 유럽전선에서 맹활약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고 전역
했다가 6.25가 일어나자 대위로 지원입대해 영웅적인 전과를 올려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대령으로 에편했는데, 로스앤젤리스시는 공립중학교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로 바꾸었습니다.
주미대사관이 아베 총리의 미상하양원 합동연설을 저지하려고 국회의원 간담회를 열자 참석자는
단 한명뿐이었으니 일본계 3세 혼다 의원인데, 그는 캘리포니아주 의회에 일본을 비난한
위안부 결의안 제출때 김영옥씨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김영옥은 2차 대전때 함께 싸운 100
대대 출신 일본계 전우들을 설득해서 대거 참가시키니 마침내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습니다.
몇년전 12월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하와이 진주만의 애리조나함
에서 역사적 화해를 할때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일본계 해리스 총사령관도
옆에 있었다는데... 70여년 전에 일본 해군기의 무차별 폭격을 받은 그
자리에 일본계 총사령관이 앉아있는 상황은 역사의 아이러니 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한국계 최초로 미국 해병대 장성이 된 대니얼 유 소장이 저 일본계 해리스
대장이 지휘하는 태평양사령부 산하 특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
되었으니... 그럼 일본계와 한국계가 나란히 근무하는 셈인데, 해병대 장성이
통합 특전사령부 산하 특전사령관에 오른건 대니얼 유 소장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을 米國 이라고 부르는데 America 에서 “메” 발음을 취했으며
일본인들이 쌀(米) 을 고메 (こめ) 라고 하니 “米” 는 메이
또는 마이라고 발음 되는지라..... “아메리카 = 米國” 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조선은 일본인들을 통해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였으니 19세기에 기차와 자동차, 전기와
수도, 영어와 국어에 축구와 야구, 민주주의와 자유, 개인에 국민등 수천여자의 서구
문명 단어들 처럼 일본인들이 번역해준 대로 America 를 米國(미국) 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1945년 해방 후에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대신 미군이 진주하고는... 쌀
이며 밀과 옥수수에 옷까지 주니 동경의 대상이 되어 “아름다울 美” 자를
써서 美國(미국) 이라고 고쳤는데..... 일본은 아직도 米國(미국) 이라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