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 음식과 문화 그리고 역사
나이 때문인지 자꾸만 지난날 이야기를 거듭합니다.
부디 꼰대스럽다 탓하지 마세요.
늙어가는 것은 참으로 이런저런 회한(悔恨)이 많아집니다.
2012년 늦여름에 유럽 대륙의 동서횡단 종점인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인민박에서였습니다.
거기서 당시에 나이가 서른 한살인 처자, 상남이를 만났거든요. 사는 곳이 남쪽에 창원이라 했습니다. 자그마하고 아담한 체격에 호기심과 꿈이 잔뜩 서린 인상이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르쀠에서 출발해 49일 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이어서 '포루투갈길'도 냅다 걸어서 내려왔다 했습니다.
참고로 르쀠~생쟝~산티아고라면 거리가 1,600Km 입니다. 그런 체격으로 그런 일을 해낸 것입니다.
한술 더 떠서 '프랑스길' 800Km는 불과 18일에 주파했다더군요.
세상에, 매일 마라톤 풀코스 이상의 길을 걸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녀의 보행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짐짓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더 걸작이더군요.
"왜 그렇게 걸었어?"
"그저~! 앞만 보고 걸었어요!!"
그날 그에 앞서 민박에 들어서자마자 주인 아줌마의 일성이~~~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어하는 한국 아가씨가 있습니다."
"누군데요? 어디 있습니까?"
"그저께 우리집에 도착했는데 아침에 관광을 나갔구요 저녁이면 들어옵니다."
그가 지금 소개한 상남이 입니다.
나중에 그녀와 대면 중에 리스본에서 50Km 떨어져 있는 까보다 호카(Gabo da Roca, 호카곶)를 모르고 있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호카곶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땅끝이라구요.
유럽의 크리스쳔들은 긴 세월 스페인 갈리시아의 피스테라(Fisterra)가 세상의 끝이라 믿고 있었지만, 1884년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표준시회의를 통해 GMT시간이 제정되면서 그리 되었죠.
그러므로 한국의 해남 땅끝마을에서 뜬 아침 해는 서쪽으로 27,000 여Km를 돌고돌아 저녁에 거기서 진다 했습니다. 그 호카곶은 리스본에서 내륙으로는 신트라(Sintra)를 지나 30Km, 해안길로는 카스카이스(Cascais) 항구를 지나 50Km 만큼 거리라 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 민박에서 뜻 밖에 다시 만나게 된 상남이는 오늘은 일정을 하루 늦춰서 카스카이스까지 27Km를 걸어서 갔다가 차로 돌아왔노라 하더군요.
그녀는 셰프 자격증도 있어서 중남미의 어느 한국 대사관에서 주방장을 지낸 경력도 있고 앞으로 맛난 식당이나 베이커리라도 열어보는 게 계획이라 했습니다.
벌써 근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니 그녀의 인생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터입니다.
부디 그 동안 꿈을 펼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축원드립니다.
유럽은 셍겐조약이라는 비자 협약에 따라 모든 외국인은 무조건 90일 이상은 체류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오직 예외의 경우는 외교관을 제외하면 취업비자, 학생비자, 아니면 언론인 비자 밖에 없습니다. 셍겐조약이 적용되는 나라는 유럽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유럽연합(EU) 국가들이고 그외는 EU에 가입하지 않은 동유럽의 나라들은 우리 한국과 별도의 비자 협정으로 각각 30일 또는 60일 동안 체류가 가능합니다.
일반 여행객과는 달리 걸어다니는 나그네들은 뜻밖에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외진 곳에서는 안전을 위해 오픈된 차도로 걸어야 하는 경우에, 혹시 자신도 모르는 새 뒤에서 오는 자동차 통행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동양인이 그럴 경우에 서양인들은 금방 경찰에게 신고를 해버립니다. 그들은 누가 탈법을 했다하면 자기네끼리도 고발 정신이 투철하거든요.
그래서 문득 무아지경 흥에 취해 걷는 중에 난데없이 경찰차가 나타나곤 합니다.
이점은 순례자로 붐비는 스페인의 안전한 까미노와는 판이한 현상입니다.
이 속편 기사를 세심하게 읽으시는 독자분께서는 벌써 이상한 점을 간파했으리라 여깁니다.
전편의 동서횡단 출발과 속편의 도착 사이에 시차가 무려 2년이나 된다는 점 말입니다.
그 연유가 바로 셍겐 조약이라는 비자협정 때문입니다. 사실은 2년으로 나누어서 걸었습니다.
동서횡단은 13개국을 통과하고 총 거리가 5,600Km에 소요시간은 8개월에서 4일을 뺀 236일이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교통수단으로 점핑을 한 구간은 한 번도 없었고 오로지 매일 걸어서 소요된 시간이 그랬습니다.
출발 직전에 셍겐조약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는 실로 우연이었습니다.
장도에 나설 두어 주일 앞서서 원조 나그네 몇이 우연히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중에 선배 나그네(닉네임 리노님)께서 '상당한 시일인데 혹시 체류기간 문제는 확인을 해봤냐'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외교부에 관할 부서를 찾고 통과할 나라마다 주한 대사관을 모두 돌아봐도 딱히 해답이 안 나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실로 우연히 문화공보부 장관을 역임한 고교 선배님이 실마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 분께서 절친 중에 인터넷 신문을 경영하시는 모 사장님에게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단 주기적으로 여행기를 보내는 조건이었죠.
시일이 촉박하니 일단 출국을 하고서 '기자비자'는 사후에 국내에서 차차 해결해주기로 하고 떠났습니다.
출발 전에 이런 정보를 깨우치게 해주신 리노님께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앞서 비자 문제에 관련하여 도움을 주신 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지 두 주일 만에 여행기의 송고와 따라서 특파원의 자격도 송구하게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일단 본격적으로 걸어보니, 나의 여행기가 매일매일 일기도 아닌 터에 일찍이 취학 전부터 품었던 오랜 꿈을 위해 나선 길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글을 규칙적으로 써야한다는 압박감이 너무나 큰 부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대목에서 최근에 범람하는 유럽의 도시 등 여행기를 한 번 돌아보고 쉽사리 출판하는 분들을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셍겐조약에 따른 체류기간의 카운팅은 헝가리에 입국해서 부터였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차례로 지나서 프랑스의 르쀠(Le Puy)에 이르니 딱 90일 시한이 되므로 거기서 일단 멈췄다가 다음 해에 그 르쀠부터 다시 이어서 걸었습니다.
이것이 동서횡단에 2년이나 소요된 사연입니다.
동서횡단을 완성한 얼마 후에 해병대를 갓 제대했다는 젊은이가 찾아와서 자신도 그러고 싶으니 길 안내를 부탁하더군요. 하도 멋져 보여서 경험대로 안내를 했죠.
처음에는 그가 인터넷에서 날 만난 소감으로 멘토를 만난 듯했더군요.
그는 이스탄불 출발 이후 베오그라드에 도착해서 소식을 딱 한 번 전해 왔습니다.
그후 그도 동서횡단을 마무리 했다고 역시 인터넷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수년 후에 실로 우연히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를 대하니, 자기는 한꺼번에 대륙횡단을 완성했지만 나는 도중에 쉬었다 걸었노라는 자랑을 펼치는 듯한 글을 올려 놓았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누가 국내에서 쪼끔만 걸어도 스페인의 '프랑스길'이나 '북쪽길' 등 초장거리를 걸어도 그가 문득문득 띄우는 SNS 또는 영상이나 여행기를 스치듯 대해도 그들이 어떻게 걷는지 한눈에 선~합니다.
다만 스페인의 까미노를 걸어본 나그네라면 특히 서양인들이 멀고먼 길을 각자의 형편에 따라 어떻게 걸어내는지 다들 알지 않습니까?
국내에서 국토종단은 거리부터 유럽과 차이가 있습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출발해서 서해안의 주변을 따라 휴전선까지 직진해 올라오면 650Km요, 국토를 대각선으로 충북 등 내륙을 관통하여 동해안에 고성의 금강산 입구까지는 750 여Km입니다.
하므로 우리는 빨리빨리 국민성과 함께 길에서도 은연중에 그게 단거리든 장거리든 일단 출발했다면 단번에 목적지까지 완주를 해내야 한다는 인식이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하자 느긋~합니다. 속전속결과 느긋한 타협과 포용성의 차이입니다.
이점이 생활철학에서 평원성 대륙을 살아온 서양인들과 다닥다닥 산이 많은 우리와 다른 정서입니다.
이야기를 다시 리스본의 민박으로 되돌려서 그 집에서 나를 미리 알고 있었던 이유는 단지 예약 때문입니다.
그때 만해도 스마트폰도 몰랐고 거기다 디지털이라면 원체 깜깜하니, 나의 여정에서 숙소의 선택과 예약은 오로지 뉴욕에 있는 둘째의 몫이라 프로필의 일부가 미리 알려졌던 모양입니다.
굳이 이렇게 속편을 첨가하는 이유도 전편에서 '음식'도 '문화'도 주제가 흐릿해서 보충을 더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유럽을 동서로 관통하면서 한국 문화에 관해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된 사례가 몇몇 있습니다.
서양인들에게 관심이 많은 코리언들의 문화 아이템은 LG, 삼성, 현대 등의 굴뚝산업 제품들 외에도 K-드라마, K-팝, B-보이들, 태권도, 축구의 박지성 선수 등이었습니다.
축구라면 그동안 세상이 변했으니 지금은 어떤 선수가 유럽인들의 우상일까요?
이들 우리의 문화 요소들은 오늘날 서양인들에게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니 코리아,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랬습니다.
가요계에서 싸이의〈강남 스타일〉은 2012년 7월 중순에 선을 보인 K-팝의 대표곡이라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 노래가 불과 한 달 후에 같은 해 8월 중순에, 아까 리스본의 민박에서 만난 상림이 말로는 포르투갈에서 코임브라(Coimbra) 남쪽의 어느 시골을 지나오는데 동네 꼬마들이 시냇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며 물장구 치고 놀면서 그〈강남 스타일〉로 춤추면서 노래하고 놀더라는 것입니다.
다만 K-팝의 음악적인 예술성에 관하여는 평소에 지론은 있지만 여기서 일단 접어야겠네요..
서양인들에게 한국의 비-보이들이 대단한 인기라는 사실이 좀 엉뚱하지요? 하지만 궁벽한 시골을 지나면서도 수없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태권도 이야기를 첨가해 봐야겠군요.
비엔나를 지날 때 한인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우연히 한국인 사업가와 합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집은 비엔나에 회사는 슬로바키아에 두고 있는 꽤 큰 규모의 비지니스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태권도가 유럽의 어둠의 거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그분에게서 전해 들었죠.
동부나 중부 유럽 일대에서 일반적으로 크고 작은 비지니스를 하려면 마피아와 소통을 하지않으면 심히 어렵다 했습니다. 88서울올림픽 때 우리 태권도 대표팀의 코우치를 맡았던 분이니 그저 허황된 낭설은 아니였다 판단합니다. 초창기에 유럽에서 우리의 태권도 사범들이 키워놓은 현지의 서양인 제자들이 이제는 3대 ~4대까지 곳곳에 퍼져 있므로 - 비록 좀도둑이면 몰라도 뒷골목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놈이라면 - 한국인은 절대로 노터치라 했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를 위해 제격인 충고가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또는 '모르는 게 약이다.'
날마다 혼자서 외딴 길을 걸어내야 하는 방랑자는 이르는 곳마다 신변의 안전에서 극히 예민하니 이러한 팩트는 실로 크나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럽의 음식 문화는 동양과는 달리 해가 뜨는 동쪽에서 해가 지는 서쪽 끝까지 온 대륙이 모두 동일합니다.
그게 포크와 나이프로 한결같고 상차림 역시 샐러드에 빵에 수프에 메인디쉬의 순서 등이 아시아의 식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까.
오로지 잠을 못자기에 커피를 절대로 기피하는 나로서는 타지로 돌아다니면서 불편함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커피는 서양인들에게 밥이나 진배 없지 않습니까?
특히 아침 식사 자리에서 불편하고 너도나도 호의로 권해오시지만 그때마다 거절을 해야하는 게 미안하고 또한 불편합니다
출국 때마다 배낭에 튜브형 고추장을 몇개씩 넣고 떠나지만 귀국해서 열어보면 뚜껑을 하나도 열지 않았습니다.
떠돌다가 한국 음식을 만나면 반가워서 좋고 없으면 없는 그대로 그만입니다. 한식이든 양식이든 가리지 않고 맛나게 잘 먹고 다니니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항가리의 전통 수프인 굴라시(Goulash)를 소개해야겠군요.
한국의 육개장과 유사한 이미지에 유럽에서 최상급 레스토랑에서도 굴라시 메뉴는 꼭 빠지지 않습니다. 그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여기서 헝가리의 조상은 Huns들이고 그 훈족이 한국사에도 등장하는 흉노족의 일파라는 점은 우리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출발 첫날 바키르퀘이(Bakırköy )에서 숙박하는 날이었죠.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 지근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저녁을 일단 해결해야 하니 주인이 소개한 동네 먹자골목으로 나갔습니다.
마침 퇴근 시간 무렵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어떤 가게에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으로 일을 하고 있기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일으킨 식당을 아들이 물려받은 경우더군요.
얼마 후 주문한 음식을 테이블에 놓으면서 날 흘깃 보더니 묻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나라에서 왔죠?"
"Seoul, Korea!"
"그럼, 박지성 선수 알아요?"
"물론 알다마다!"
"내가 그의 광팬이거든요."
"브라보!!"
"당신한테는 오늘 우리집 밥 값이 프리입니다."
"아니, 왜?!!"
"한국인이니까요"(내가 좋아하는 선수의 나라니까요)
그게 첫날이고 시작이었습니다.
동서횡단 내내 박지성 선수로 인하여 공짜 밥 또는 공짜 맥주를 얻이 먹은 게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역사책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지식은 제국주의를 휘두른 서양인들이 한편으로는 탐욕스럽다고 가르칩니다.
환갑을 기념으로다 국토종단 중에 지나치는 고을마다 느낀 우리 한국인들의 인정(人情)과 심성을 비교한다면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순수 그 자체입니다.
리히텐쉬타인에서 스위스로 입국한 셋째 날 래퍼스빌 요나(Rapperswill-Jona)라는 동네의 숙소에서는 체크인을 하던 중에, 40대 중반의 주인이 내 패스토트를 보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사진 액자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백인 어린이들이 태권도 도복을 입은 단체 사진이더군요.
주인이 흥분해서 하는 말이 어릴 때 태권도를 배웠는데, 그게 지금도 그리 자랑스럽고 아울러 한국을 사랑한다고 난리였죠. 그리고 자기집에 한국인은 난생 첫손님이므로 그날 숙박비(95유로)는 프리라 했습니다. 단 저녁은 자기네 레스토랑에서 사서 먹으라면서요.
세상에, 우리 돈으로 14~5만원 짜리의 공짜 잠을 잔 날이었습니다.
기나긴 여정 중에 나름대로 리히텐쉬타인이라는 초미니 국가와 스위스의 정식 수도인 베른(Bern)을 구태어 들린 이유가 있습니다.
전자는 우표로 유명한 나라여서 후자의 베른은 아인슈타인의 생가에 들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른에서 음식에 관하여 의외의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나의 모든 방랑에서 최고의 식당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친구들은 간혹 나를 구르몽(Gourmont, 식도락가)이라 평하기도 하지만 떠돌이 나그네들의 주머니를 감안해서 유럽에서 추천하고픈 식당이 넷 있습니다.
둘은 한인 식당이고 나머지 둘은 서양식입니다.
그 중에 베른의〈욱타운〉이 최고입니다.
베른 본역에 정문을 나서면 ㄴ자 도로 끝으로 빌딩의 1층 내부에 먹자코너에 딸린 조그만 식당입니다. 한국인 부부가 서양인 종업원 몇을 거느리고 열심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제네바의 메인 우체국 인근에〈서울의 집〉입니다.
둘 다 한국 식당이면서도 점심시간에 스위스의 현지인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집라서요.
서양 식당은 둘 다 스페인의.'프랑스길'에 있습니다.
먼저 문어(뿔뽀) 요리로 유명한 멜리데(Melide)에서 산티아고 방향으로 14Km 쯤 더 가면 아르주아(Arzúa)가 나옵니다.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가촌(街村) 형태의 마을이죠.
그 아르주아의 마을 중간 쯤에 있는 레스토랑은 10유로의 순례자 메뉴(델 디아)에 포함되어 나오는 갈리시아숲이 아주 일품입니다. 역시 강추입니다.
그리고 산티아고의 먹자골목입니다.
년전에 「Bar, 레스토랑」방에 올려봤더니 반응이 일단 별루라 그만 내려버렸죠.
맥주 프랜차이즈〈Do Bispo〉를 다시 소개합니다.
그집은 씨푸드 꼬치 안주가 주류를 이루고 식사도 물론 곁들일 수 있습니다. 맥주 또는 비노 블랑코(백포도주) 한 잔을 원하신다면 꼭 들러보세요.
그 집에서 압권은 갈리시아 해변에서 나오는 조개 중에 우리의 피꼬막과 유사한 놈으로다, 싱싱한 조개회를 안주로 비노 불랑코까지 겯들이면 나그네의 머나먼 노독(路毒)은 씻은듯이 해소될 터입니다.
다만 떠도는 나그네의 장비는 모자나 의상의 코디, 물론 신발과 배낭 등 액세서리의 선택은 정답이 없다 봐야겠지요.
각자의 형편과 취향은 천차만별이니까요.
그 중에 특히 먹거리란 더더욱 자기만의 스타일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