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차용규는 일제강점기 학성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식 포드 승용차 2대를 사 들여 영업용 택시의 효시를 열었다. 그가 차고로 사용했던 울산경찰서 앞 건물터는 최근 들어 현대식 5층 건물로 바뀌어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게 되었다. | ||
자동차는 인간에게 주는 편리함 때문에 ‘근대 문명의 꽃’이라고 불린다.
울산에 처음 차가 들어와 운행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이다. 이 무렵 신문을 보면 울산자동차부 소속의 8인승 포장형 승합차가 울산에서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이후 7인승, 10인승, 12인승, 16인승 등 다양한 차종이 여러 노선에 투입되었는데 이때는 회사를 운영했던 사람도 그리고 이들 차를 탔던 사람들도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무렵 벌써 과속이 사고의 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동차의 속도를 규제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 규정 속도는 32km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것도 너무 빠르다면서 24km로 하향조정했다. 1930년대가 되면 이를 높여 시속 48km까지 허락했다가 30km로 다시 규제했다. 물론 이것은 지방에 비해서는 도로 사정이 훨씬 좋았던 서울의 예다.
요즘 자동차 운행 속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사고가 잦았던 것은 이때부터 이미 운전사들이 교통질서 의식이 없었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도로에는 교통 표지판은 물론이고 신호등이 없었다.
이 때문에 울산의 경우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운행되었던 1920년대가 되면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1921년 12월에는 울산자동차 소속 승합차가 온천장을 출발해 울산으로 오다가 웅상에서 정신원(59)이라는 여자를 치어 중상을 입혔는데 이 사고가 운전사의 과실 때문으로 보고 경찰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 1926년 2월 2일 동아일보에는 ‘최근 들어 운전사의 부주의로 울산에서 자동차 사고가 잦은데 2일에도 울산~양산을 다니는 자동차가 언양에서 전복되어 승객 7명이 중경상을 입어 부산 철도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으며 며칠 전에도 울산에서 방어진으로 가던 차가 가로수를 받으면서 승객 한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이들 사고의 대부분이 운전 부주의에서 발생한 것’이라면서 운전사의 운전 미숙을 나무라고 있다.
당시 울산자동차 조합은 울산을 중심으로 8개 노선에 10인승 11대와 16인승 5대를 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이 되면 그동안 자동차 수가 늘어나 울산에 모두 43대의 차가 운행되었다.
이 무렵 외국인으로 울산에 와 미국차를 선보인 사람이 있었다. 호주 출신의 라이트 선교사가 부산에 살면서 선교를 위해 울산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 이미 그는 차를 타고 다녔다. 당시 그가 탔던 차는 미국산 포드 A로 1927년에 제작되었는데 가격이 400~500달러로 뉴욕에서만 25만 명이 이 차를 이용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라이트 목사는 울산에 오면 언양과 두동까지 이 차를 몰고 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그의 차가 마을에 머물 때면 마을 사람들이 차를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예원배라는 우리 이름을 가졌던 라이트 목사가 탄 차는 경남도청에 처음으로 등록한 자가용 1호가 되었다.
이무렵 울산사람으로 울산 최초의 영업용 택시를 운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당시 울산의 거부 차용규였다. 차씨는 1932년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한 후 ‘학성자동차’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리고 자동차 기술자인 차영배(車英培)와 손영극(孫永極)을 고용했다.
자동차는 미국식 포드 승용차 2대로 차고는 당시 울산경찰서 앞 고기업씨가 운영했던 양조장 옆에 있었다. 이 차는 일본에서 들여왔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은 차를 생산하지 못해 일본인들이 미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시 한국으로 수입한 것이었다.
당시는 운전사 구하기가 힘들어 운전사에 대한 예우가 요즘 조종사보다 좋았다. 운전사들의 한 달 월급이 100원 정도였는데 이는 군수 월급과 비슷했다.
학성자동차는 철저한 콜제였는데도 부산에 가는 울산 유지들이 많이 탔다. 부산까지 차비는 5원으로 당시 면서기 월급이 18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비싼 편이었다. 범서 천석군 김홍수는 휴양차 동래 온천장에 있었던 김천관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때마다 이 차를 이용했고 부산 중학교와 동경 농대를 졸업한 후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던 박지중도 고향인 울산을 오갈 때면 언제든지 이 차를 탔다.
또 김재문도 아들 둘이 일본 하기(萩)시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어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가 일본으로 갈 때면 부산까지 항상 이 차를 타고 갔다. 김재문은 당시 울산의 최고 부자였던 김좌성의 아들이다. 또 당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차용규의 아들 제훈도 방학이 되어 집으로 올 때면 부산에서 반드시 이 차를 타고 울산까지 왔다.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해 울산이 시로 승격되기 전인 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울산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특히 읍내에서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당시 읍장이었던 고기업 외 몇 명되지 않았다.
고기업의 경우 국내에는 자동차 생산 공장이 없어 부산으로 가 일제 강점기때 자동차를 만들었던 회사에 특별히 부탁해 차를 구입했다. 차는 미군 지프를 개조한 것이었는데 드럼통을 펴 차를 만들다 보니 요즘 차처럼 멋이 없었다.
해방 전후에는 군용 쓰리쿼터를 개조한 버스가 현 동아약국 자리에 주차장을 두고 부산과 경주, 장생포를 다녔다. 그런데 이 차는 목탄차가 되어 태화루 고개와 오복고개를 오를 때는 가쁜 숨을 쉬어야 했다.
울산에서 제대로 된 지프를 처음으로 탄 사람은 이재수다. 이재수는 울산 성안 출신으로 울산농고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5·16이 일어났을 때 군정기간 동안 잠시 울산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데 이때 전용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일을 보았다.
두동면 출신의 김영근은 해방 후 운전사로 출세한 사람이다. 1927년생인 그는 만주에서 자동차를 배워와 해방 후 군청에 들어가 스리쿼터를 몰았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정식 면허증을 가진 운전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요즘처럼 자동차학원이 없어 운전사가 되는 길은 조수로 오랫동안 궂은일을 하면서 자동차 기술을 배우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운전사가 이처럼 드물다 보니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군청에는 차라고는 지프와 스리쿼터 각 한 대 씩 뿐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군청에서 스리쿼터를 몰았던 김영근은 울산경찰서로 자리를 옮겨 순경직으로 경찰서장 차를 몰았다. 이후 자신이 모신 서장이 함안경찰서장으로 갈 때는 그를 따라 함안으로 가 다시 서장의 차를 몰았다. 그런데 그가 모셨던 서장이 경찰서장에서 도경국장으로 진급하더니 나중에는 치안국장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당초 순경으로 운전사 생활을 시작했던 김영근도 상관이 진급할 때마다 계급이 올라가 상관이 치안국장이 되었을 때는 그도 경위로 치안국장의 차를 운전했다.
이후 상관의 도움으로 운전사 생활을 그만두고 일반직으로 편입해 치안국 수사지도과에서 근무했던 그는 치안국장의 차를 몰았다는 경력 때문에 경찰 세계에서 위세가 대단했다. 경찰을 떠난 후 광산진흥공사에서 일했던 그는 이곳에서 나온 후에는 의정부에서 개인 광산 개발을 했으나 실패해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의 위세는 줄어들지 않아 60년대 중반만 해도 서울의 부자들도 타기가 힘들었던 피아터 차를 몰고 울산으로 와 유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울산에 있으면서도 한때는 부산 중앙동에서 우촌이라는 고기집을 차려 놓고 소금구이 장사로 돈을 많이 벌었던 진주 출신의 마담과 친해 이 마담과 함께 울산의 성신병원을 구입해 공동으로 운영했지만 이마저 잘되지 않아 그만두어야 했다.
이후에도 광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언양에 사무실을 두고 인근 야산을 뒤지면서 광맥을 찾았으나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한 때는 우정동 시외버스 터미널 식당과 동강병원 매점을 운영하는 등 어렵게 살아야 했다.
노후를 언양에서 보내었던 그는 결국 그가 꿈꾸었던 광산과 병원사업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4~5년 전 타계했다.
차용규가 일제강점기 시작했던 학성자동차 차고는 북정동 울산경찰서 앞 고기업이 운영했던 양조장과 일본인이 주인이었던 ‘야마지 약국’ 사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현대식 5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학성자동차는 해방 후에는 한동안 성남동 동아약국 옆으로 옮겨 운영되었다.
이번에 기사를 취재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김영근이 모셨던 사람으로 치안국장까지 했던 인물이 누구였나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영근이 말년을 보내었던 언양으로 여러번 가 김영근의 친인척들을 만났지만 그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현재 울산에는 자가용 45만7000여 대와 영업용 1만9000여 대를 합해 모두 47만6000여대의 차가 다니고 있다. 또 울산에 본사를 둔 현대자동차는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발돋움했다.
울산이 불과 60~70년 뒤 이처럼 세계적인 자동차 메카가 될 것이라고는 일제강점기 자동차 사업을 처음 시작했던 차용규도, 또 이 차를 타고 울산과 부산을 자주 다녔던 당시 울산의 유지들도 감히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해방 후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지프를 처음 탔던 고기업도 그리고 만주에서 배운 운전 솜씨로 한세대를 풍미했던 김영근 역시 감히 꿈꾸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사람살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시간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