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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느슨한 진리가 엄밀한 진리를 핍박한다.”, “지도와 지형” (왕상18:19, 40 왕하10:18-31)
■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중요성
①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나 해석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잘 해석하고, 해석한 것은 성경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즉 통일성차원에서 점검을 해야 한다.
② 교회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잘 해석하여, 진리의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고, 그 일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위대한 역사는 진리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각 세대마다 일어나는 다른 이단들의 성경에 대한 오해와 곡해, 과장, 축소, 부정으로부터, 교회가 성경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표명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 신자들을 보호하고, 교육함으로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교회는 이런 가르침을 공유함으로 교사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한쪽에서 세우느라 애쓴 것을 한쪽에서 헐지 않도록 했다.
③ 이런 이유로 성경을 유일한 기준(The)으로 삼지 않고,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의 기준(a)으로 삼는 현대의 세대에서, 교회와 성경과 신앙고백들은 뗄 수 없는 관계로 서있게 되었다. 바빙크는 성경으로부터의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함께 소유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특권으로 설명하고 있다. 교회가 이 특권을 잘 누림으로 진리는 더욱 잘 지켜지고, 보존되어 갈 것이며, 그 길에서 이탈했을 때, 교회는 소명을 잃은 것이다.
④ 현대 교회에서 신자들이 20년 이상 신앙생활을 통해 양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단들에 대처할 수 없고, 신앙의 터가 연약한 것은 바빙크의 말처럼, 교회의 귀한 특권과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고 가르침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에 있다.
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story)나 부분적 의미들(삶의 적용: 도덕적, 윤리적 교훈)은 풍성해 졌지만, 신앙고백 속에 나타나는, 성경전체에서 말하는 주제는 약화되었다. 즉, 신앙의 대상, 방법, 자세, 소망에 대한 체계가 약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주제 없는 내용의 가르침은, 기둥 없는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신자의 연역함을 초래했다.
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역사적 배경
가. 교리문답서 전의 역사적 배경
① 본 교리문답서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② 1546년 프레데릭 2세는 멜랑히톤의 영향아래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쯔빙글리파의 신학을 조화시키려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루터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가 교리적인 기초로 제시되었으며, 또한 예배의식에는 쯔빙글리의 방식이 채용되었다. ③ 문제의 발단은 “공재설”에 대한 입장 표명에 따라서 각 분파가 심하게 충돌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④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였다. 그는 각 교파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칼빈주의 신학정신에 많은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학적인 혼란을 제거하고 또한 후손들의 건전한 종교교육에 건전한 기초가 될 수 있는 신앙교육서를 제정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⑤ 독일의 선제후인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의 명령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인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궁정 설교자인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게 본 교리문답을 작성하도록 제시했던 것이다.
나. 교리문답서 제정과 채택의 결과
① 프레데릭은 1562년 12월에 이 교리문답서를 수정하여 승인을 받기 위해서 주요 목사들과 교수들의 총회에 이 작업을 위임했다. 그 결과 1563년 초에 “팔라티네이트 선거후의 지역에 있는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칠 교리문답, 또는 기독교 교훈집”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문답서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뽑아 낸 우리 기독교의 요약된 교훈서, 또는 교리문답서이므로 이후 교회와 학교에서는 다음 세대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란다.”라고 서문에 간략하게 자신의 입장을 제시해 주므로 이 교리문답서가 당시 개혁교회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② 그리고, 이것은 1600년에 있었던 국가 종교회의에서는 이 교리문답을 교회의 통일된 교리 규범의 하나로서 채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책임자는 이에 서명하고 모든 목사는 교회에서 이 교리문답을 설명해 주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1618∼1619년 도르트 회의 때에도 중요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③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의 가치는 화란 개혁파 교회에서는 이것을 청소년 신앙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주일 저녁 설교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1568년에서 1571년까지는 화란의 개혁교회와 라인강 하류 지방과 헝가리, 체코, 폴란드에 있는 개혁교회가 이것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1609년 미국 땅에 나타난 최초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다. ④ 특별히 본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독특성이 충분히 이해되면 더욱 본 조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즉, 프레드릭(Frederick)은 본 신앙고백서를 인준함으로 인해서 1566년 5월14일 고소를 당하였으며, 이단으로 제소되는 위기에 당면하게 되어 개혁주의 신앙으로부터 돌아설 것과 추방령이 내려졌다. ⑤ 그러나, 프레드릭(Frederick)은 물러나지 않고 진지하게 황제 MaximillaⅡ세와 루터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신앙고백의 목적과 원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양심을 거스른 것보다는 차라리 왕관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담대하게 외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이 교리문답이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도저히 반증할 수 없는 성경적 근거들을 들어 반박했으며, 이 일에서 이 보다 더 성경적인 것을 보여주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르겠다고 외쳤던 것이다. 결국 이런 프레드릭의 강경한 바른 신앙에 대한 정신의 확립으로 인해서 후에 그는 루터파와 황제에게서까지도 ‘경건한 프레드릭’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위기를 벗어나는 중요한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우리는 여기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내용 ① 그것은 프레드릭에게 가장 어려움을 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루터파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파 신앙의 독특한 역사적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루터파에게 있어서 조차도 이 교리문답의 신앙적 정신은 자신의 신앙과 일치시킬 수 없는 이단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이런 신조의 역사를 통해서 왜 역사적 개혁교회가 루터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지를 알게 된다. 즉, 루터주의도 결국에는 개혁신앙과 교리적인 핵심 부분에서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에게 이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교리문답을 개혁교회에서는 당시 전체적으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개혁파 신앙이 일반 비(非)개혁신앙과 얼마나 다른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② 결국 이 교리문답서는 프레드릭의 장남인 “루이 6세”(루터주의자)에 의해서 큰 수난을 당하게 된다. 즉, 이 교리문답을 작성한 자들을 추방하고, 또한 교리문답의 배포금지와 불태움을 입는 수난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교리문답이 출판된 이후에는 이른바 이 교리문답의 성격이 쯔빙글리적, 또는 칼빈주의적 이단이라는 이유 때문에 엄격한 루터파에게 극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로마 가톨릭 파에게도 미사제도를 우상숭배라고 정죄한 제80문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③ 이런 역사적인 수난의 과정 속에서 본 교리문답의 개혁 신앙적인 정신의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우르시누스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자신이 제정한 교리문답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변호서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해석을 출판하여 개혁신앙의 독특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들은 루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들과 오해들에 대한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들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④ 이처럼 본 교리문답은 루터주의와 가톨릭과 구별되는 철저한 개혁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는 당시의 개혁교회 신앙인들에게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이 연결된 실천적인 삶에서의 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레드릭(Fredrick) Ⅲ세가 이 교리문답이 의도하는 바가 세 가지임을 밝히고 있는 글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교리적 가르침의 틀을 제공하고, 설교의 지침을 마련하며, 단일한 고백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계속해서 “만일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의 초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게 되면, 그것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 그리고 세속적 문제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개혁을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서 이에 따라서 가르치고, 행동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라고 그 목적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 신앙고백서의 작성 목적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 내에서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와 개혁파 속에서 철저한 ‘성경적인 교리문답’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 개혁주의적 특성으로서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왕상18:19)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18:40) (왕하10:18-31) ⑥ 성경지리학에서 예후의 종교개혁장소로 보이는 유적지에서 아세라상이 발견된다. 즉 종교혼합주의로서 夫婦의 신으로 삼위일체하나님을 아도나이(夫) 아세라(婦)개혁 한 것이다. 갈1: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과식에 따른 불쾌감, 소식에 따른 쾌감 누림의 문제이지만 생사의 문제는 아니다.”
(롬5:1-4 노아의 떼, 롯의 떼,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 창6:22, 18, 19:14 20 / 므낫세왕의 생애 왕하21:10-18 대하33:10-13, 탕자의 삶)
2.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교리적 특징
2.1. 세 구조의 본문
특별히 그 구조에 있어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를 세 구조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칼빈의 제네바 2차 교리문답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다시 세 구조로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 있다. 첫째는 비참, 둘째는 구원, 셋째는 감사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세 구조는 칼빈의 제네바 2차 교리교육서 구조에 있어서 십계명을 사도신경의 뒤에 둠으로 인해서 복음과 율법의 깊은 신학적 이해를 살펴보았듯이 본 교리문답서에서도 이런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본 교리문답서는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마지막 부분인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설명하는 ‘감사’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에 대한 감사의 접근 방식은 이 교리문답을 해설한 우르시누스 자신에 의해서 더욱 깊은 신학적 이해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성도의 삶의 규범으로 율법을 따라서 사는 것의 최종적인 목적이 인간 자신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영광은 사랑, 존경, 순종, 그리고 감사를 포함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존경, 그리고 순종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며, 우리가 받은 혜택으로 인해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 행위는 자신에게 돌려지는 칭찬과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해야 함이 필연적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성경이라는 지형, 신앙고백서라는 지도) 어려서부터 교훈해야 되는 이유는 교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보존합니다.”
(출20:12, 신22:6-7)
3. 교회에서 교리문답을 소개하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주석 서문 중에서…)
3.1.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
“또 이 말을 당신들 자녀에게 가르치며, 당신들이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신 11:19).
3.2.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때문인데, 이는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도 바르게 알고 예배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시 8:2, 표준새번역).
3.3. 우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바른 지식이 없이는 아무리 수년간의 지식이나 명철이 있어도 구원 얻지 못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영원한 위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요 17:3; 히 11:6) 그럴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신이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를 믿지 않습니다.(롬 10:14, 17) 그러므로 구원받을 사람들은 복음의 주요하고 근본적인 가르침인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부여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 일을 위하여 준비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배움이 많지 않거나, 어린 사람들에게도 적합한 간단하고 단순한 형태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3.4. 교회와 공동체의 보존을 위해서입니다.
지나온 모든 역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배, 경건한 삶과 실천, 정직, 공의, 진리들이야말로 교회와 국가의 복락과 보존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까지 경건이나 참된 덕의 열매를 산출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 일들에 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참된 덕성의 훈련과 새롭게 되는 일을 시작하지 않고 오래 지체되면, 우리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본성과 악한 원리들이 강화되고 견고해 져서, 나중에 그것들을 억제하고 제한하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어 그것들을 거부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성경으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하여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고, 경건의 실천을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가 본성으로 타고났거나 어려서부터 받아들인 잘못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고, 우리가 자라고 익숙해진 악한 것들을 저절로 버리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국가가 타락과 멸망으로부터 보존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의 이런 타락한 것들에 대한 적절한 억제가 필요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 다스려져야 합니다.
3.5.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과 주장에 대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할 기준과 규칙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오도되지 않고, 잘못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공동번역)”,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 하였나 분별하라” (마 7:15; 살전 5:21; 요일 4: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율법과 사도신경은 사람들의 주장을 판단할 법과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잘 알아야 하는 지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3.6. 설교를 잘 듣고 유익을 얻기 위해;
이 교리문답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 들은 설교가 자신들이 배운 교리문답의 어느 부분의 어느 주제와 관련된 것인지도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리문답으로 미리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는 해도 자신들에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7. 범인(凡人)들에게 유익;
특별히, 교리문답의 중요성은 배움이 많지 못하거나, 약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교리문답을 배울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간단하고, 명백하고, 독특한 형태의 가르침이 적합한데, 교리문답이 바로 여기에 적합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길고, 더 까다로운 형태로 주어지는 가르침에 약한 사람들에게 적합합니다.
3.8.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교리문답을 잘 아는 것은 특별히 가르치는 위치에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뿐 아니라, 교회의 교리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보다 더욱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항상 배우는 것에 부지런한 것이 합당하며, 디모데처럼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내 교훈을 교우들에게 깨우쳐주시오. 그러면 그대는 지금까지 따르는 믿음의 원리와 참된 교훈으로 점점 자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딤전 4:6).
3.9. 이 외에도 다른 중요한 이유들을 여기에 더할 수 있는데
특별히 이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목적이 갖는 탁월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문답이 지향하고,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교리문답의 가치와 중심성이 있습니다. 이 최고의 선을 알고, 참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화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3:44에서 말씀하신 교회라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이며, 이는 수많은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이를 위하여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교리들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이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려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서부터 이런 가르침으로부터 배우고 양육 받지 못한 다면, 우리는 이런 가르침들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온갖 거짓 가르침과 풍조에 이리 저리 떠밀려 다니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그리스도를 떠나 그리스도를 해치는 일 가운데 있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교리문답을 배우는 이유는 우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교리문답이 밝히고 있는 최고의 선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이생에서 이미 시작되어 맛보고 있는 우리의 위로는 우리가 오는 세상에서 완전하고 온전히 이 최고의 선을 누릴 것에 대한 확신과 기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최고의 선은 이것을 지금 우리고 있는 사람들을 참으로 복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것을 지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 언급된 ‘유일한 위로’, 혹은 ‘최고의 선’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1문답의 내용을 가리킵니다.-역주). By Zacharias Ursinus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
눅24:50,51; 행1:9-11 행7:49; 골2:9; 요3:13,11:15; 마28:6
4. “칼빈주의 신학 ‘밖에서’(Extra Calvinisticum)”의 특징
칼빈주의 신학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는 개혁신앙에 있어서 개혁파 신학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totus)과 인성(totum)에 대한 개혁신학의 독특한 이해이다. 이 주제는 루터주의와 분리되게 되는 성만찬 논쟁의 핵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먼저 본 교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본문이 제시되고 있다.
제47문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인간적인 본성으로는 지금 이 땅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제48문: 만일 신성이 있는 곳에 인성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불가해하고 어디에나 현존하기 때문에, 그 취한 인성 외부에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어서도 인격적으로 인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루터주의가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의미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 자체를 곡해하는 위험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배격한 개혁신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루터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예수의 신성의 속성들을 공유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인간성이 편재, 전능, 전지와 같은 속성들을 가지셨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루터파의 기독론의 이해는 성만찬론에 있어서 예수께서 신체적으로 떡에 현존한다는 자신들의 공재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신적 속성은 예수의 인간성으로 전달되는 빵과 포도주의 각 요소 “안에, 그와 함께, 그 아래”에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현존”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고대 신조인 칼케톤 신조에서 확립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제시를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지만 그의 신성은 계속해서 참되고 진정한 신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혼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안에서 연합한다고 제시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인성은 신성으로 변화하거나 신성과 혼합되지 않고 인성은 언제나 인성으로 남아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은 언제나 신성으로 남아 있음을 함께 제시했다. 즉, 창조자와 피조물의 그 근본적인 구별은 성육신에 의해서도 변경되지 않는 것이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인격적으로 연합된 것임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결국 신성은 인성의 밖에서도, 그리고 그 안에서도 존재하는 것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성만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려져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제적인 연합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신비적인 연합”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4.1. 참 인성
우리의 중보자는 참 인간이셔야 합니다.(요일4:2) 우리와 같이 연약한 모든 부분을 감당하시는 분(히5:7~8)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동일하지만 죄까지 있는 중보자라면 하나님의 율법에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의 모든 부분을 체휼하셔야 하지만 죄는 없으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다.(히4:15) 그래야 의로운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를 완전히 대속 하실 수 있습니다. 즉,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참 인간이신 의로운 분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분이어야 합니다.(16문답)
4.2. 참 신성
비록 그분은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참 인간이어야 하지만 만세 전에 계셨던 분(요1:1, 빌2:6)으로서 참 신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신성은 성육신 후에도 기본적인(Fundamental)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롬11:36) 그래야만 참 인간이신 의로운 분이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질 때 자신의 신성의 능력으로 잘 감당하도록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성은 인성의 연약함을 붙들어서 구속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합니다.(히2:14~18, 롬8:3~4) 그러므로 참 인간이면서 동시에 참 신이셔야 합니다.(17문답)
4.3. 양성(신성과 인성)의 교류
가. 전제
지금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양성론(인격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는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제2위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는 오직 "한 인격만"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갈4:4~5, 롬1:3~4) 그리고 그 인격 안에서 양성론(신성과 인성 / 요1:14,히2:11-14)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아서 신성을 부인하거나(아리우스 ,AD325, 니케아), 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거나(아폴리나리우스, AD381, 콘스탄티노플회의), 신성과 인성은 인정하지만 한 분의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두 인격체로 보기도 합니다(네스토리우스, AD431,에베소). 이러한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제2위로서 인격체와 양성(신성, 인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나. 양성의 교류
성육신 후에 인성과 신성의 특성이 제2위의 인격의 특성이 됩니다. 이때 그의 인격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성육신 후에 그리스도는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Person)이십니다. 여기서 세 가지 정도 살펴야 합니다.
첫째, 성육신 전에는 전지, 전능, 편재만 있으셨으나 성육신 후에는 비애의 인간, 제한된 지식과 능력이 참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후 그리스도는 전지, 전능, 편재(요1:1)와 동시에 비애, 제한된 지식(히5:7)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죄인된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신성이 주체가 되거나 또는 인성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사역의 주체는 삼위일체의 2위이신 그리스도가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양성이 분할할 수 없는 제2위의 인격적 사역입니다.(롬5:8)
셋째,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며, 기도의 대상입니다. 바로 그분은 하나님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원을 주십니다.(18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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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의할 점 두 가지
여기서 주의할 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자께서 성육신하실 때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육신한 것이 아니라 제 2위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롬8:3)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때 육체 안에도 신성이 있으며 육체 밖에도 신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둘째, 구약의 그리스도와 신약의 그리스도가 같은 분이지만 조금의 신비(?)가 있는데, 구약의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는 인성(절대로 인간의 인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인격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취하였기 때문입니다)을 취하심으로 인간의 육체를 가지신 분입니다.(롬8:3b) 이러한 신비에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영원히)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17,18문에 대한 보충 설명)
종교적인 면에서 이단, 정치적인 면에서 반역 (살후 2:4)
5. 제3판의 “제80문”의 특징
1563년 판에는 로마 교회의 미사 제도를 “우상 숭배”라고 선언한 제80문이 초판과 재판과 다르게 제시되고 있음이 큰 특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즉 초판에서는 빠져 있고, 재판에서는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3판에서는 그 전체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1563년 12월 4일에 트랜트 회의 끝난 후에 로마 교회의 “저주문”에 대한 프레드릭의 강력한 저항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내용으로 인해서 프레드릭은 더 많은 어려움에 처하기 했었던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제80문 : 성만찬은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성만찬은 ①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통해서 우리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선언입니다. ② 또한 그것은 성령께서, 하늘 아버지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케 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미사는 ① 그리스도의 몸이 사제들에 의하여 날마다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하여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는 사죄를 얻지 못 한다고 가르칩니다. ②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제80문에 입장을 대부분 비(非)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개혁주의 분파 안에서조차 이 항목에 당시 프레드릭의 입장을 매우 과격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평가는 오늘날 엄밀한 개혁신앙을 회복해 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갖게 한다. 왜냐하면, 과연 이들의 평가처럼 제80문의 성격이 과연 그런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개혁신앙을 고집해 왔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입장이 바른 성경적인 신앙을 지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고, 또한 정당한 것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오늘날 신앙고백서를 평가하는 정신이 얼마나 느슨해져 있고, 또한 타협적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성경적인 바른 신앙에 대한 엄격한 표현은 성경의 참된 진리를 더욱 바르게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후손들에게도 정확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음을 우리는 후대의 신앙고백서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웨스트민스터에서도 로마 가톨릭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평가하고, 이 분파와는 절대로 교리적으로 일치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참된 정신을 명확히 하고, 또한 바르게 정립하고자 하는 정신을 ‘과격하다’거나 또는 ‘극단적이다’라고 한다면, 성경적인 진리를 파괴시켜 가면서도 포용과 연합으로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행위는 도대체 어떤 행위인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제80문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 중에서 알미니안 주의자들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들은 16세기 초에 이 교리문답이 성경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수정 작업을 제기하고 나왔다. 그러나, 이 수정 작업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성경의 참된 정신에 의해서 교리문답의 수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있어서 부딪치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려고 했었던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제거하고 오히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가장 잘 조화된다. 그리고 단순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청소년들이 이해하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장년들의 교육에도 매우 유용하다. 그러므로 벨기에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이 교리문답을 가르쳐서 교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며, 어떠한 모양의 반대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이델베르그의 입장이 전통적인 개혁신앙의 바른 정신에 서 있음을 더욱 확고히 정립을 해 놓았다.
결국, 이처럼 성경의 참된 정신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인간의 연합과 일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면서 인본주의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정신은 하이델베르그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에서도 위의 조항을 삭제하고 변경시키는 1903년의 신앙고백서 작업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개혁파 신앙의 정립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행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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