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바람의 집과 황혼의 우상”
그가 도달한 황혼의 여정
그의 황혼 시편들에서 “삶은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것”으로, 이때 바라봄은 시선의 조응을 통해 풍경을 형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편승 되는 데 있다. 이른바 “흐르는 강물 속 틈을 만드는 것”이며 그 틈에 시적 자아도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햇살이 되어 ‘바람의 집’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바람의 집이야말로 모든 세계를 넘나드는 자연의 법칙이며 시인이 선택한 자유의 방식이 된다. 이것의 기원은 ‘시인’이라는 “말에 꽂혀 지난 1960년대”를 거슬러 “웬 어린 소년 하나”가 아직도 살아있는 여정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년이 그리던 시인은 ‘중늙은이’를 품은 ‘황혼의 우상’이 되어 「수만리」 “오래 묵은 꿈들을 떠올리며” 한 권의 시집으로 찾아왔다. (권성훈, 해설 중에서)
[저자 소개]
1953년 세종시(구,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1983년 『삶의문학』 제5호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로 평론,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외 6편으로 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봄바람, 은여우』, 『생활』, 『걸어 다니는 별』 등이, 평론집으로 『시와 깨달음의 형식』, 『시의 깊이, 정신의 깊이』 등이, 시선집으로 『초식동물의 피』(2018), 『초록잎새들』(2021) 등이, 저서로 『화두 또는 호기심』, 『풍경과 존재의 변증법』 등이 있다.
(사)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부이사장, 충남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삶의문학』, 『문학과비평』, 『시와상상』, 『시와사람』, 『불교문예』, 『시와인식』, 『시와시』, 『시와표현』, 『세종시마루』 등의 발간에 앞장서 왔다.
김달진 문학상(평론, 2021) 수상, 풀꽃문학상(시, 2021)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대전문학관 관장 등을 맡고 있다.
[작가의 말]
빽빽한 숲으로 가득한 나라를 꿈꾸고는 했다. 나무들로 우거진 초록 숲의 나라를 꿈꾸고는 했다.
어느덧 꿈이 이루어져 빽빽하게 숲이 우거진 나라를 갖게 되었다. 마침내 나무들이 가득한 초록 숲의 나라를 갖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빽빽하게 숲이 우거진 나라가, 나무들로 가득한 초록 숲의 나라가 함부로 파괴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녹색 자연이 함부로 절개되고 있다.
시내도, 강도 마르고 있다. 마을도 뒤뚱거리고 있다. 벌겋게 허리 잘린 채 널브러져 있는 이 나라의 초록 숲이라니!
숲은 늘 시내와 강과 함께 마을을 품고 있다. 파괴되는 것은, 절개되는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마을도, 마을 사람들도, 사람들의 말도, 마음도 파괴되고 절개되고 있다,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한때는 이 나라 고샅고샅을 다 밟아보고 싶었다. 이 나라 고샅고샅을 다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걷다가 보면 이 나라 곳곳이 다 시멘트 빌딩들이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는 저 숲을, 골짜기를, 시내를, 강을, 마을을 어쩌나! 저 뒤뚱거리는 마을이라니!
2022년 가을
청리당에서 이은봉
[목차]
1부
우금치 단풍잎 / 수종사 찻집에 앉아 / 우실바다 / 인왕산의 봄 / 금쇄동에서 / 세미원 연꽃 / 우봉리牛峯里 / 뒤뚱거리는 마을 / 너릿재 / 낙엽 지는 공산성 / 대전역에서는 / 무월리撫月里 / 서오능 서어나무들 / 통영 / 정도리 바다 / 구도리 바다 / 미조리 민박집 / 형제묘 / 내지리 / 모래구미 / 산제사
2부
장항 습지에서 / 우전리牛田里 바다 / 개운산 공원 / 푸른길 공원 / 수락산에 가면 / 수타사의 가을 / 강정의 밤 / 무성서원 / 모항의 저녁 / 도리포 / 노루 세 마리 / 연꽃섬 / 울릉도에 와서 / 수만리 / 작은모래미 / 항모리 / 식물탐사 / 금일도 / 부곡 아침 / 금갑 아침
3부
다독다독 / 성강리 / ‘푸른길’ 길가 / 태풍 무이파에 갇혀 / 문헌서원 아침 / 백두산 천지 / 예송리 바다 / 율포 아침 / 수종사에서 / 백수의 노을 / 염전길 / 겨울, 임자도 / 하늘의 소리 / 겨울, 간월암 / 광화문 / 수월헌水月軒에서 / 당목항 / 연기휴게소에서 대평휴게소까지 / 바다를 향해 걷는 산 / 중복날 아침
4부
봄철 인왕산 / 장봉도 길 / 광주천 산책길 / 아미골 비석마을에서 / 부산갈매기살 / 플래카드들 / 압록강 안개 속에서 / 작금바다를 지나며 / 용천사 / 비 내리는 수요일 / 강정 아침 / 나로도 바닷가 / 개천사 비자나무숲으로 가자 / 녹산 등대 가는 길 / 민주지산 옆구리 / 광주송정역에서 / 거문도 등대 / 보길도에 와서는 / 여수 선소 근처에서 / 삼천포의 봄 햇살 / 연대섬 한 바퀴
해설 | 바람의 집과 황혼의 우상 | 권성훈
[책 속에서]
금강 북쪽, 장남 평야의 끝
산언덕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지 막은골
모듬내 둑방을 막아야 한다며
옛사람들이 입 모아 붙인 이름이지
막은골의 두 다리 그때는 튼튼했지
똑바로 서서 혼자서도 잘 걸었지
지금은 이 마을 뒤뚱거리며 겨우 걷지
공사 중 한쪽 다리 부러져버렸지
다리 부러져 뒤뚱대는 것은 별것 아니지
조만간 이 마을 없어진다지
크고 엄청난 대도시 세워진다지
대도시가 세워지면 무엇이 좋나
좋을 것 없지 왕왕 자동차나 몰려다니겠지
그렇지 대도시에는 고향이 없지
대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그렇지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지.
― 「뒤뚱거리는 마을」
은행나무도 두 그루다
강물도 두 줄기다
마음도 두 개로 흔들린다
까마귀도 두 마리
까악까악 하늘을 날고 있다
수종사 찻집에 앉아
중늙은이 두 사람,
둘이면서 하나를 생각한다
두 눈 살짝 감은 채
하나이면서 둘인 세상을.
― 「수종사 찻집에 앉아」
연꽃, 시궁창에 피는 꽃,
한 개를 통해
천 개를 말하는 꽃,
월인천강의 꽃
한때는 새하얀 연꽃으로
피고 싶은 적 있었지
개천에서 자란
푸른 용이고 싶은 적 있었지
지금은 푸른 용은커녕
검은 미꾸라지도 못 되어
어렵고 힘들게
진흙덩이 밀고 다니지
그래도 오늘은
세미원 연꽃 보러 가는 날
늙은 마누라
아직은 따듯한 손잡고 가는 날
한 개의 연꽃이면서도
천 개의 연꽃이 된들
무엇이 좋으랴 아무것도
얻은 것 없거늘, 잃은 것 없거늘.
― 「세미원 연꽃」
[추천의 말]
“살아 움직이는 풀뿌리의 삶을 노래한 고샅길 서정시”
1953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이은봉은 전후의 피폐한 산야를 보고 성장하면서 초록숲의 나라를 꿈꾸며 살았다. 동시에 시인이 된 그의 발길은 고향 마을에서 시작하여 전국 방방곡곡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이번 시집은 인왕산을 거점으로 광화문을 거쳐 제주의 강정 마을 그리고 울릉도는 물론이고 압록강, 백두산을 답파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칠십 평생 걸었던 고샅길 하나하나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발로 딛고 노래한 미시적이지만 장엄한 서사적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편에는 파괴되는 국토를 바라보면서 과거의 추억은 물론 그리움마저도 절단되고 부정되는 오늘의 현실을 목격한 시인의 분노와 아픔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담겨 있다. 어쩌면 그것은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 한국현대사 대한 증언이라 할 수 있으며 파괴되어가는 현장 고발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참하게 뭉개지는 조국의 산하대지이다.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초록숲을 이룬 국토가 다시 파괴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를 침잠시킨 그의 시들은 잔잔하고 나지막한 어조로 서두르지 않고, 백석이 자신의 굴곡진 생에 대해 고백했던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가 걸었던 수많은 고샅길에서 보았던 풀뿌리 하나하나가 거친 시대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시적 힘을 획득한 것은 바로 그러한 어법과 시선이 그의 마음속 깊이 지닌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최동호,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