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지혜로운 것 넷(잠30:24-28)
잠언 30: 24-28절은 작지만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을 말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은 흔히 없이 여김을 당합니다. '저 작은 것은 무슨 힘이 있겠는가?' 혹은 '저 작은 것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서도 이것은 역시 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작은 것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히려 크다고 하고 다 자랐다고 하는 것에게 경고하면서 작은 것에게 가서 배우라고 말합니다. 이 작은 것들은 지혜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이 작은 것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힘이 없고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의식이 작은 것들에게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 속에도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담아 둔 지혜로운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사용해서도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이런 말씀을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24절의 말씀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땅에 작은 것들 넷이 있는데, 그들은 지혜로운 것들 가운데서도 지혜로운 것들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것들 가운데서도 지혜로운 것들이니 '가장 지혜로운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 개역이나 개정역은 의미를 살린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굴은 인간 생활 가까이서 작은 생명체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서 하나님이 담아 놓은 지혜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지혜를 배워서 하나님 앞에서 잘 활용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넷을 말하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다섯, 여섯 등으로 더 찾아서 열거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생각 됩니다.
아굴이 말하는 작지만 가장 지혜로운 것들 중의 첫 번째는 개미입니다. 개미는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한다'고 말합니다. '준비한다'는 이 말은 '확실하게 한다, 굳게 세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개미가 여름에 그들이 먹을 음식을 충분하게 모아 둠으로써 겨울이 되어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준비함을 의미합니다. 개미가 확실하게 겨울을 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미도 여름에 일하여서 준비해 두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면 일할 수가 없고 준비해 둔 음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옛 이스라엘이나 오늘날의 우리도 이렇게 떡을 위하여 준비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육신의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도 물론 배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게으른 자에게 개미의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여름에 열심히 일해서 육신적인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미가 철저히 대비하는 모습은 이스라엘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떡과 관련지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르침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은 맨 처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통하여 온 세상이 한 나라가 되고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창12:1-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신앙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온전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그 때에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밥상도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 때에는 육신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을 떡으로 삼아서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마다 듣는 설교와 성찬은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미가 '확실히 준비하는' 양식은 오늘 우리에게는 장차 올 안식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영원을 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사도들과 신약의 기자들은 주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영생의 새 포도주와 영생의 떡을 성령으로 먹고 마실 것입니다. 잠언의 개미는 이런 가르침을 오늘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으로 말하는 둘째 생물은 사반이라고 합니다(26). 사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을 음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오소리(badger), 토끼 또는 유대산지의 바위너구리(cony), 바위너구리(hyrax)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번역을 보면 어떤 동물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소리, 토끼, 바위너구리는 다른 종류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다'고 한 것을 볼 때에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사는 바위너구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위사이에 집을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사반은 강하지 않는 종류다. 하지만 그것들은 바위에 집을 짓는다'입니다. 여기서 바위가 단수 명사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바위에' 또는 문자적으로는 '바위 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위 '위'도 아니고 '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 안'이라는 말이 이해하기 힘이 드니, 한역에서는 '바위 사이에'라고 역한 것 같습니다(물론 영어번역을 참고했겠지만). 하지만 이것을 영어번역본들에서도 바위들(crag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울퉁불퉁한 바위가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바위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단수'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사반은 아마도 크고 높고 험한 바위에 있는 적은 굴이나 또는 틈새, 또는 움푹 들어간 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아무 것도 그것들을 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반은 난공불락의 피난처에서 살았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위였습니다. 광야에서는 목마른 백성에게 물을 내는 바위였습니다(민20장,고전10:4). 때문에 모세는 마지막에 이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이라고 반복해서 부릅니다(신32: 4,13,18,30,31). 물을 내시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모세는 반석으로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사사기에도 이 반석이 나옵니다. 사사기에서 반석으로 자기를 나타내셨던 하나님은 자신을 제단(altar)으로 나타내셨습니다(삿6:20). 그리고 이 반석은 또한 삼손과 이스라엘의 피난처로 상징되기도 했었습니다(삿15:11).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믿고 따르는 자에게 바위를 여호와 자신과 동일시하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삼상14:4). 따라서 이스라엘의 시편들에서는 여호와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바위라고 노래한 것(시31:3,71:3)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아굴은 사반의 피난처인 바위를 통해서 애굽에서 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바위이심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위 속에 거하는 사반은 이스라엘 자신들임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사반이 바위 속에 집을 짓는 것이 안정이듯이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 거주하는 것이 안정이요 세상의 모든 악과 공격을 피하는 피난처라는 것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아굴은 바위 안에 집을 짓고 사는 사반을 통해서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아서 그를 의지하라고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짧은 잠언 구절이지만 이것은 옛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평화와 안전이라는 사실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것 중에 지혜로운 것의 세 번째는 메뚜기입니다. '메뚜기에게는 왕이 없다. 하지만 그 모두는 떼를 지어서 나아간다'(27)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지혜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우선 이것은 왕이 없지만 일사분란하게 나아가는 메뚜기를 연상시킵니다. 수십만 또는 수백만 마리의 메뚜기가 일사분란하게 행진하는 것을 우리는 연상해 봅시다. 큰 떼를 이루면서도 작은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줄을 짓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야말로 왕이 되어서 앞에서 지휘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일사분란하게 질서를 가지고 무리를 이루면서 어떤 방향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메뚜기 떼의 이러한 행진을 선지자 요엘은 군대의 행군에 비유합니다. 요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힌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기어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라"(욜2:2-11)라고 했습니다. 메뚜기는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메뚜기를 호령하며 지휘하십니다. 이것은 물론 북방 군대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실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물론 요엘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령을 주실 것까지 말씀하지만, 앞에서 말한 메뚜기 떼를 여호와께서 호령하시면서 지휘하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북방 군대(욜2:20)를 들어서 시온을 치실 것을 말씀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었음을 연상시킵니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출애굽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구름기둥과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을 지휘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메를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군대로서 지파마다 자기 위치에 배치되어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광야를 행군했었고, 또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긴 전쟁이었지만, 하나님의 지휘에 따라서 가나안을 정복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땅에 나라를 세웠더랬습니다.
메뚜기의 일사분란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이러한 하나님과 행진하던 때를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들었고 따랐기 때문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어 큰 나라를 이루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큰 나라가 바로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위용을 가졌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나라는 타락하여 위기에 빠져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대적의 사령관이 되시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굴이라는 이름으로 광야와 정복시대처럼 여호와를 사령관으로 삼고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의 지혜라는 것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 가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지휘를 받는 것 곧 그리스도를 참으로 의뢰하고 그의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침내 우리를 저 나라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의 넷째는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라고 합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도마뱀은 손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왕궁들에 있다'(28)라고 역할 수 있습니다. 도마뱀도 가장 지혜로운 것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도마뱀'이라고 한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에 대하여서도 다양한 읽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작고 연약한데 지혜롭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기 때문에 동물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번역대로 도마뱀 즉 집에 사는 작은 도마뱀으로 읽으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왜 도마뱀을 지혜롭다고 합니까? 생각해 봅시다. '도마뱀은 손으로 잡는다'는 말은 사람이 도마뱀을 손으로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손으로 도마뱀을 잡으면 꼬리를 끊고 도망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도마뱀이 맨손으로도 잡을 수 있을만큼 작고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도마뱀을 창이나 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런 추정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고 연약한 것이 '왕궁들에' 있습니다. '왕궁들에'라고 한 것은 하나의 왕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있는 여러 왕궁들을 암시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왕궁들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작고 연약한 도마뱀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즉 도마뱀이 왕궁을 서식지로 삼고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작고 연약한 도마뱀이 왕궁들을 서식지로 삼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왕궁에 사는 도마뱀이 지혜를 보여주는 것은 어떤 측면 때문입니까? 저는 이것을 왕궁의 '안전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왕궁에 있다는 것은 옛 환경을 생각하면 그래도 가장 먹을 것을 얻기에 좋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고기 기름이나 뼈다귀를 많이 맛볼 수 있는 곳이 왕궁이요, 또 식물 부스러기들이 풍부한 곳이 왕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나 나발의 사건에서 추론가능). 일반 백성들에게는 이런 것이 귀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궁은 이런 것이 풍부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도마뱀이 먹을 것을 얻기에 가장 좋은 서식지가 왕궁이라고 생각 됩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런 위험은 일반 백성들의 집에서보다는 훨씬 덜한 곳이 왕궁이라 생각 됩니다. 이러므로 왕궁은 도마뱀에게는 가장 안정된 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피난처인 셈이지요. 도마뱀은 왕궁의 이러한 특성을 알아서 왕궁에 거하면서 안정되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도마뱀이 왕궁에서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사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성소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소로 인하여 존재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성소의 예배가 존종 될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흥왕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소의 예배가 무시되고 형식화되고 마침내 이교의 신전처럼 취급될 때에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후에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 신앙의 타락으로 발생한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에 왕궁에 거하는 작고 연약한 도마뱀은 그 지혜로서 이스라엘에게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날개 그늘에 거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 지혜라는 사실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이 설교는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진리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그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에 거하는 것이 우리의 안정과 평화라는 사실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24-28에서 네 가지 작은 동물들 즉 개미, 사반, 메뚜기, 작은 도마뱀은 참된 지혜를 가리켜 줍니다. 이 지혜는 물론 예수님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여호와의 그늘에 거하는 것이 영생임을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믿게 된 신약의 신자는 작은 미물 곧 개미, 사반, 메뚜기, 작은 도마뱀에게서도 참된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는 이런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자연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입니다(사34: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