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에 놀러가다
-마치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1
이른 아침 찾아간 망해사는 전날까지 비가 많이 왔음인지 주변이 흐리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숲과 해안선 가까이 퍼져있는 습지 탓에 방문객은 거의 없어 고즈넉했고, 그 흔한 새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무심한 바람만 간간히 바다 쪽에서 불어와 절의 이름이 있게 한 ‘망망대해’가 근처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찰을 구성하는 몇 안 되는 전각들은 간소해서 부담을 주지 않았고, 바다를 바라보는 ‘범종각’은 능소화가 피어 아름다웠으며, 해안가를 따라 드리워진 낮고 긴 기와담은 수령이 오래된 이름 모를 나무와 단아한 오층석탑으로 해서 얌전했다.
그 날 만난 망해사는 조선시대 유수한 집안의 음전한 규수 같았다. 들어서자 나가는 우리 같은 중년부부 한 쌍이 모두였다. 요란하지 않게 경내를 둘러보며 이 깔끔한 자태를 어느 날 좋은 가을날 다시 보고 싶다는 염원을 가만히 발원했다.
2
새만금광역탐방로는 길을 잘못 안내해 숲속에 난 좁은 길과 논두렁길을 달려야 했는데 끝내 길을 찾지 못하고 차만 진흙탕에 딩군것처럼 흙칠갑만 하고 말았다.
3
아리랑문학관에 가면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사랑한 독자들이 필사 릴레이를 한 원고가 어른 키만큼이나 높게 쌓인 무더기를 볼 수 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자칭 ‘황홀한 글감옥’에서 작품 <아리랑> (3부작, 전12권)을 쓰기 위해 하루 이백 자 원고지를 이십 매씩 쓰고, 하루도 쉬지 않은 채 일 년을 매일 썼으며, 그렇게 일관되게 삼 년여의 시간을 보내 마침내 2만 여장의 원고지를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올렸는데, 이 또한 전시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문학은 삶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봉사해야 합니다.
문학의 역할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자 지론이다.
작가는 소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이렇게 3편의 대하소설을 연작함으로서 근대 한국의 형성과 그 역사진행 과정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올바르고 보편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우리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스스로 ‘글감옥’을 만들어 유폐시켜서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현장을 소설로 엮어 그의 평소 지론대로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키는 훌륭한 작가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조정래 작가로 해서 지나간 아프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소중하고 아름답게 저마다의 가슴 속에 묻은 채 현재를 살아나갈 지혜와 용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4
금산사하면 후백제의 왕이자 당시 후삼국시대 권력을 놓고 다투던 인물 중 가장 드라마틱한 말년을 보낸 견훤이 늘 떠오르며 사찰 내 미륵전에 모셔진 3층 높이의 거대한 불상과 맞물리곤 하는데 결국 <그로테스크>로 묘하게 끝나게 된다.
오르다 보니 송월주 스님의 <추모전>이 있음을 알리는 기념관 현수막과 한국 사찰의 아름다움을 칼라 사진을 포함해서 조각, 서적, 그림 등을 모아 기획, 전시하는 전시관도 바라다 보인다.
금산사는 이번에 두 번째 방문이다. 모악산은 증산교, 대종교 등 각종 한국 종교의 본산이자 모태가 되는 곳인데, 옛말 ‘엄뫼’와 ‘큼뫼’라는 말에서 오늘날 ‘모악산’과 ‘금산사’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고 한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과 신도들이 찾아왔다. 오른 길목에 놓인 평상에는 나이 든 사람들이 계곡 하천으로 흘러내려오는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편안히 누워있고, 경내에서는 나처럼 절 내부를 구경하는 사람들과 기도하러 온 신도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과 아기, 손을 잡고 애틋한 얼굴로 올라오는 젊은 연인 등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섞여 편안한 오후 한때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사찰건축과, 음식, 신앙 그리고 언어 일체가 이미 토속화되고 일상 속 문화가 된지 수 천 년이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리라.
*방문코스 : 망해사 – 새만금광역탐방로 – 조정래아리랑문학관 – 아리랑마을 - 금산사
(20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