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비를 찾아서
이병철
따신 이밥 한 그릇에 미역국
13첩 점심 쟁반상 받아
큰길가 담 밑 흐드러진 목단꽃
먼산 따라 비잉 두른 아카시아꽃
사자 회자 주자 의자 잘게 썰어 고명 올려
두들에서 안동 지나 서울 거쳐 평양까지
이밥에 소고기 국 비단 이불 기와집
성냥불처럼 화르르 한여름밤의 꿈
유세차 메이 데이 파르르 오월 무싯날
면 소재지 길가 식당 김씨 아줌마
만 원에 한 상 질펀하게 녹아 있는 인공의 맛
아니야 조선의 맛 찾아 화강암 속에서
나막신 딸그락 딸그락 소리 난다
2024.5.15. 영양 석보면 두들마을 이병철 시비에서
* 이병철 시인하고 첫 만남은 2016년 6월 25일 청계천 헌책방에서 산 오현주 엮음 『해방기의 詩文學』(도서출판 열사람, 1988)에서다. 제일 앞장에 이병철 시 「새벽」을 읽고 곧 방점을 쳤다. 이후 해방기의 프롤레타리아 시문학에 관심을 갖고 여러 시인의 이름과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병철 시인의 고향이 이웃 영양군인 것을 알고는 지연이 당겨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여러 프롤레타리아 시인들의 시집을 모으고, 국립도서관 소장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 전자본을 촬영하여 해독하면서 정서하는 등의 작업을 통해 『새벽길 -해방기프롤레타리아 詩文學시선』을 편집하였다.
이병철 시인의 공식적인 등단작은 『朝光』(1943.12)에 이원조 추천으로 발표한 「落鄕消息」이지만, 활동을 쉬다가 해방 직후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우선 1945년 8월에 「새벽」을 써서 이듬해인 1946년에 『전위시인집』에 「거리에서」 등의 작품과 함께 발표하고, 이어서 1950년 이전의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나막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의식 있는 시인이라면 반드시 참여한 <조선문학가동맹>의 회원으로서 사회주의 조국 건설을 향한 염원을 담은 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이 다르다. 인민이 고통받는 시대라는 토양에 뿌려진 혁명의 씨앗에서 움터 자란 뿌리와 줄기는 같지만 가지가 다르다. 공산주의는 철저한 공동 생산, 공동 소비, 공동 소유, 국유 재산제가 개요이지만 사회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공동성을 강조하되 개별성도 인정하며, 국유재산제를 기본으로 하되 일정한 소규모 사유 재산제 인정이 개요이다. 1946년 8월에 미군정청에서 실시한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설문에 대한 8,456명의 답변자들 중에서 사회주의 70% 6,037명, 자본주의 14% 1,189명, 공산주의 7% 574명, 모른다 8% 653명의 순이었다. 그 당시 조선인들은 각각의 사상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예리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의 절대다수가 독립조선이 지향할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찬성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노선은 7%밖에 되지 않았다. 시인은 시대 변화와 민심의 흐름에 민감하다. 그러므로 해방 공간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생각했다. 이병철 역시 사회주의를 생각했고, 작품에 흐르는 생각과 서정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였다.
그런데 모진 놈 옆에 있다가 정 맞는다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온건한 사람들이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과격한 공산주의자들 옆에 있다가 함께 휩쓸려 고통을 당하고 말았다. 8%밖에 안 되는 공산주의자들이 70% 다수를 물귀신처럼 잡아먹고 말았다. 판이 넓은 유럽은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를 너끈하게 소화할 수 있었으나, 판이 좁은 조선은 온건한 사회주의가 과격한 공산주의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문학판에서도 권력을 탐하는 소수의 과격한 공산주의 문학인들이 다수의 온건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문학인들을 도구로 이용하다가 희생시켰다.
해방 이후 월북한 문인은 약 100명이다. 그중에서 일찍 월북해서 김일성 수령 유일체체에 귀순한 한설야, 이기영 등은 권력의 비호를 받아 승승장구했지만, 1946년 9월 박헌영 체포령과 남로당에 대한 탄압 때문에 월북한 임화, 이원조, 이태준 등 정치성이 강한 문인들은 남로당 지도부와 함께 1953년을 전후하여 숙청당했다. 그러나 박산운 등 정치성이 약한 대부분의 문인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고 북한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다.
이병철 시인은 임화와 함께 월북하지 않고 온건한 사회주의적 시작 태도를 견지하며 합법적인 작가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49년 이용악의 지시로 쓴 시 몇 편이 반정부 선동을 한다는 죄목으로 <남로당 서울시 문련예술과 사건>에 옭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 중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6월 28일 이용악과 함께 석방되었다.
이후 시비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7월 25일 의용군 동원 연설을 하고, 9.28 서울 수복 때 가족을 데리고 월북하였다. 월북해서 종군기자로 활동하였고, 종전 후에는 북한 체제 선전선동에 치중하는 시들을 해마다 『조선문학』에 발표하며 원로급 대우를 받다가 1995년 사망하였다.
이병철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한평생 갖고 살았다. 그래도 1950년까지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시를 썼으나. 전쟁 후에는 일신의 안녕 때문인지 신념인지 사상인지 남쪽의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수령 찬양과 체제 선전시를 꾸준히 발표하였다. 그 정치 체제에서 살아남자면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88년 정한모 문공부장관의 월북 작가들의 작품 해금 조치 이후 월북 이전의 작품들이 대량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특히 함북 경성 출신인 이용악과 평북 정주 출신인 백석 두 시인이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에 반해 그들 못잖게 작품성이 우수한 이병철의 시는 그다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아마 월북 이후 남로당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그나마 가벼운 처벌을 받아 한동안 집필 금지를 당했다가, 이후에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시들을 발표하며 살다가 1971년에 사망한 이용악에 비해 북한 체제에 대한 경사도가 지나쳤기 때문일지 모른다. 해금 조치 이후 한때 박헌영, 임화, 이태준 등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급증했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그들의 당파성과 북한 체제 기여도 등에 대한 비판이 일반화되면서 관심도가 낮아진 게 아닌가 한다.
그들에 비해 당파성이 낮은 이용악의 시는 수능시험에 등장할 정도에 문학상까지 마련되어 있다. 해방 전이나 후나 계속 북한에서 산 백석 또한 조선 고유 서정 언어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며 문학상에 이름을 딴 대학교까지 있다. 그들은 경성과 정주 출신으로 모두 38선 이북 출신인데도 말이다.
1950년까지의 이병철은 무난한 민중시인이었다. 그러나 의용군 동원 연설로 수많은 청년을 낙동강 전선까지 가도록 하고, 종군 기자로 인민군의 사기 고양에 일조했으며, 김일성 수령 유일체제를 찬양하는 시를 쓰며 오래 산 것은 남한 사람들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1950년 이전에 쓴 시들은 시적 진실이 가득 담긴 수작임에는 틀림 없다. 그래서 이병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비록 오래 세월이 걸렸지만 그의 고향 마을에 후인들의 뜻과 노력으로 시비가 세워지게 되었음이 아니겠는가. 이병철 시비를 세우게 되기까지 애쓴 영양문화원 김경종 원장과 여러 회원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시인에게 시비가 무덤이다. 보통사람들은 시신이 묻힌 곳이 무덤이지만 시인의 그의 詩魂이 엉킨 시가 새겨진 시비가 곧 무덤이다. 이병철의 몸은 북녘 땅에 묻혔지만 그의 시비가 세워짐으로써 그의 시혼은 남녘 고향 땅에 돌아왔다.
그런데 두 가지 점에서 고려해볼 게 있다. 먼저, 시비 뒷면에 오자가 있다. 약력 중 1946년에서 ‘상민’은 『전위시인집』에 들어 있지 않다. 인터넷의 ‘이병철 약력’ 검색 자료 중에 어느 하나를 그대로 따온 것 같은데, 그 자료의 참고문헌 2개 중의 하나가 오류이다.
또 한 가지는 시비 안내판이 없어 찾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2022년 시비 건립식에 참여한 모 시인에게 두 번이나 전화로 물었지만 길치라서 찾기가 아둔했다. 시인의 생가가 있었을 두들마을은 재령이씨 집성촌으로 고가들이 즐비하다. 마을 서쪽 아래 입구 부근에 사촌 형인 이병각 시인의 시비와 안내판 3개, 그리고 이병철 시인의 안내판 3개가 서 있었지만 정작 시비는 찾을 수 없었다.
고가들 구경을 하며 두 바퀴 돌고, 그 위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을 두 바퀴나 돌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째 돌다가 사무실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직원에게 물으며 인터넷 시비 사진을 보여 주니 “아 이거요 저기 있어요”하면서 손가락을 가리키는 데를 보니 마을 안이 아니라 서쪽 위 바깥이 아닌가. 재령이씨 두들마을이 아니라 면소재지 쪽 원리마을 큰길 가에 시비가 있었다. 그것도 넓은 터가 아니라 새로 짓는 집 뒷마당 같은 곳이었다. 지번은 석보면 원리리 352-10이다.
생가 마을 입구는 시비 여러 개를 세울 만큼 터가 넓었다. 이병각 시비와 공연장, 조각 작품 여러 개가 있는 걸 보니 공공부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병철 시비는 마을 입구가 아니라 마을 바깥 큰길가에 있었다. 생가 마을 입구에 놓이지 못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박헌영과 글비와 홍명희 글비 등 몇 몇 월북 인사의 비가 그 지역 과격보수 사람들의 반대로 철거 또는 이전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2년이 지났는 데도 안내판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걸 보니 관에서 보는 이병철의 관광 상품 효과가 재령이씨 고가마을인 두들마을과 소설거부 이문열의 고루거각 고대광실에 비해 미미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이병철 시문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두들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날 것이다.
이병철 시인에 대한 평가는 논자마다 다르다. 특히 남북분단과 대치가 심각한 이 시대에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그러나 1947년 『협동』에 발표되고, 2022년 시비에 새겨진 「나막신」 등 몇 작품은 그 깊은 시적 감수성이 우수함에 틀림없다. 많은 월북 시인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그러하듯이 1950년 이후는 접고, 이전의 작품을 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젊은 시인 이병철, 이후 이북에서 늙어가면서 사회주의의 꿈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이후 「나막신」 같은 시를 썼을까 못 썼을까.
해방의 날을 맞아 환희와 희망에 물든 시인의 「새벽」이 79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싱싱하다.
새벽
이병철
네
닭아
가만가만
숨쉬면서
오래 밤을 숨쉬면서
어스럼
벼달 딸아
눈에 삼삼 그리면서
얼마나 이 아침을 기대렸느냐.
삿사치
어둠을 털고 나려와
벼슬
그윽히 목을 뽑아 울어라
하늘까지 울어라
얼마나 이아침을 기대렸드냐.
(一九四五. 八月)
국회소장본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 사진본
2024년 5월 18일 안동 說樂然齋에서
松溪 박희용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