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의 프론트맨 이철호는 마이크를 잡은 지 35년 가량 된 뮤지션이다. 나이도 어느덧 50줄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장난꾸러기' 소년을 보는 듯하다. 무대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청중도 가만 놔두지 않고) 종횡무진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50줄에 들어선 물리적 나이가 맞나 싶을 정도이다.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화 콘서트'를 앞두고 연습에 여념이 없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그의 적극적이면서 친절한 답변에 그만 연습할 시간의 일부를 빼앗아야 했다. 인천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피스, 파이오니아스, 영 에이스, 서울 나그네(핫 락스), 사랑과 평화로 이어지는 그의 음악 인생은 '최이철 없는 사랑과 평화'가 어떻게 전설을 계속할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일시 및 장소: 2003년 4월 10일 일산 사랑과 평화 연습실 질문: 신현준, 이용우 정리: 최지선, 이용우, 성무현, 박석, 김대현 펜 대신 마이크를 들고 Q: 생년월일과 출신학교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부터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원래 1951년 12월 30일(음력)에 태어났고 호적상으로는 1952년 2월 15일로 되어 있습니다. 2남 중 첫째입니다. 제가 성장한 곳은 인천인데, 그룹한 음악인들 중에는 김홍탁 형(히 식스)도 그렇고 김태화(라스트 찬스)도 그렇고 인천 출신이 아주 많아요. 학교는 인천 송도 중학교, 동산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Q: 어렸을 때에는 어떻게 음악을 들으셨는지요. - 저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아주 좋아했어요. 노래를 한번 배우면 안 잊어버렸는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제가 갓난쟁이일 때부터 한 스무 곡 정도는 불렀다고 합니다. 기억나는 것은 스윙이나 트위스트가 유행해 최희준 등의 노래를 따라 불렀죠. 중학교 때에는 극단 쇼도 봤는데, 쟈니 리, 정원 같은 사람들이 기억납니다. 라디오로 많은 노래를 들었죠. 집에 전축이 있었어요. Q: 언제부터 직접 악기를 배우고 연주를 하셨나요. - 실제로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친구들 네댓 명이 기타, 드럼, 베이스, 트럼펫 등으로 포지션을 정해 팀을 하나 만들어 음악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전 그때 베이스를 쳤죠. 보컬 그룹을 만든 건데 이름도 없었고 무대도 정해지지 않은 아마추어 그룹이었습니다. 그래도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좋았어요. 하하. 1966, 67년경이겠네요 Q: 베이스는 어떤 분에게 배우셨는지 궁금합니다. - 인천에 노광혁, 중혁 형제가 있었는데, 큰형인 노광혁 형이 유도하던 분으로 그 형을 거친 음악인들이 꽤 많을 겁니다(주: 노광혁은 나중에 키 보이스에서 드럼을 치고 그 뒤에는 김희갑과 한울타리에서도 연주했던 인물이다. 노중혁은 화이브 휭거스에서 기타를 쳤다). 연습은 학원을 간 건 아니고 집에서 연습했죠. Q: 그때 어떤 걸 연습하셨는지, 레파토리 기억나세요. - 벤처스 악단의 곡이나 벤 이 킹(Ben E. King)의 "Stand By Me",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의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같은 곡이었죠. Q: 중학교 때 만든 그룹 활동이 계속 이어진 건가요. - 아뇨. 인천 송도 중학교에서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 탁구 선수하고 경기해서 이기는 바람에 동산 고등학교가 저를 탁구 특기자로 픽업한 겁니다(동산고 선배로는 김홍탁 형이 있죠). 밴드부는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많은 활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죠. Q: 그럼 고등학교 시절 음악 활동은. -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를 안 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벌써 팀을 짜서 파주 선유리로, 그 후 장파리로 갔기 때문이에요. 1968년도인가 69년도인가 그랬을 겁니다. 이때 팀 이름은 피스(Peace)라고 했던 것 같아요. 후일 김석규하고 주성이하고 했을 때도 피스라는 이름으로 했었어요. 그러니까 파주에 있을 때는 김석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때죠. 그때 선유리 파라다이스 클럽에 있을 때에는 그 앞 블루 앤젤에 김태화네 팀(라스트 찬스)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파리는 라스트 찬스 클럽에 라스트 찬스가 거쳐 간 후 나중에 우리가 거기로 갔어요. 저희도 박영걸 형 밑에 있었어요. Q: 이른바 박영걸 사단의 일원이셨다는 말씀이시네요. - 그렇죠. 박영걸 형이나 깨꾸(조성국) 형은 원래 인천에서 아주 친하진 않아도 서로 알았어요. 데블스를 거친, 깨꾸 형인지 더벅이(최진화) 형인지 둘 중에 한 명이 선유리로 가자고 해서 우리가 팀을 짜서 간 거죠. 파주 기지촌의 거의 모든 클럽들을 박영걸 형이 비즈니스 했기 때문에, 가령 라스트 찬스가 어느 클럽에 왔다가 다른 데로 가면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식이었죠. 가끔 미군 부대로도 오픈 밴드로 들어가기도 했죠. 박영걸 형이 이끌던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있었고 저도 참가했는데 누구랑 나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Q: 선유리에 계셨을 때 조용필 님도 계셨을 텐데요. - 1968, 69년경 선유리에 있었을 때 아마 조용필 형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 형을 몰랐죠. 암튼, 선유리, 장파리에 1년 조금 못되게 있었습니다. Q: 1년 정도 계시다가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인천으로 왔을 때 어떻게 해서 김석규를 만났어요. 그때 팀에 김석규(기타), 노승준(건반), 홍성태(드럼)가 있었는데, 곧 노승준이 그만두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왔어요. 회덕에 있을 때 제가 들어간 거죠. Q: 4인조 그룹이었나요. - 4인조... 같은데, 4인조인지 5인지인지는 확실치는 않아요. 건반주자까지 있었다면 5인조 같은데요. 이때가 앞서 말했던 피스라는 이름의 그룹명을 쓴 팀입니다. Q: 피스는 어떤 음악을 했는지요. - 그때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같은 음악을 많이 했죠. "Get Ready"나 "In-A-Gadda-Da-Vida"도 했어요. 그때는 약간 헤비하고 싸이키한 음악이 유행이었어요. 특히 김석규가 지미 헨드릭스 같은 것도 아주 잘했어요. 언제인지는 저야 잘 모르지만 심형섭 형에게 기타를 배운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Q: 이철호 님은 소울 같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요. - 그럼요. 굉장히 좋아했죠. 클럽에서는 흑인 음악을 싫어했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여러 스타일의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한때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의 "Inside Looking Out" 같은 음악도 많이 연주했어요. Q: 언제까지 회덕에서 계셨던 건가요. - 거기서 한두 달 정도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007 클럽 위에 있던 플레이보이 클럽으로 들어갔어요. 그 다음에는 유엔 클럽, 그리고 킹 클럽에 섰습니다. 이태원에 있던 이때가 1969년도 경인데 제 음악이 많이 바뀌었을 때입니다. 이 무렵부터는 박영걸 형하고 관계가 끊어졌어요. 파이오니아스, 브라스 록을 개척하다 Q: 파이오니아스에 들어가신 건 언제죠. - 파이오니아스 이야기를 하려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인천의 중앙동이 일종의 기지촌 비슷한 곳이어서 미군 부대 앞 유엔 클럽이라든지 클럽들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기타를 치던 김경찬 형을 알았습니다. 빅 화이브든가, 김훈과 트리퍼스에도 있었던 유명한 사람이죠. 이 형도 인천 분인데 이 형이 있던 그룹이 클럽에서 연주하면 "형, 나도 노래 한번 합시다" 해서 가끔 노래를 하기도 했어요. 이 때는 고등학생이었던지라 짧은 머리인 채로 했죠. Q: 그때 김경찬 님이 했던 그룹은 하우스 밴드였나요.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정식 오디션을 보고 들어가는 미8군 무대의 밴드가 아니라 하우스 밴드죠. 그리고 고2 때부터 또 알았던 밴드가 있어요. 트루바도스(Troubadours)라고, 이것이 파이오니아스의 모태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이죠. 이 이름은 처음 듣는 거죠? Q: 예. 음유시인이란 뜻 같네요. 그때 트루바도스의 편성이 어떻게 되었나요. - 그때가 문정이 형, 아마 장문정인지 김문정인지 확실치 않네요. 그 형이 건반, 장이순 형이 기타, 김영길 씨가 드럼, 차영수 씨가 트럼펫. 가수는 누구였는지 모르겠네요. Q: 이 분들이 인천에 연주하러 오셨나요. - 부평에서 인천 미군 클럽으로 오기도 했어요. 이때 만나서 노래하기도 했죠. 정식 멤버는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1969년인가 70년 무렵으로 생각되는데, 트루바도스가 대구(왜관)로 가게 되었어요. 제 생각에는 대구에서 미8군이 아니라 기지촌 클럽에서 연주했던 것 같아요. 암튼, 대구에서 파이오니아스라고 이름이 바뀌어서 올라오게 됩니다. Q: 그렇다면 이때 파이오니아스에 들어가신 건가요. -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 이때는 김석규, 주성이하고 피스를 하고 있던 상태였고 플레이보이 클럽에 있다가, 유엔 클럽, 세븐 클럽에도 섰죠. 그런데 유엔 클럽에 있을 때는 밤에는 뉴용산에도 섰어요. 유엔 클럽이랑 뉴용산의 주인이 같았거든요(나중에는 그 주인이 뉴용산하다가 그만두고 해밀턴으로 바꾸었죠. 해밀턴은 이병일이 사랑과 평화를 했던 곳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여러 클럽을 돌다가 세븐 클럽에 있을 때 파이오니아스가 대구에서 아메리카 클럽으로 올라왔습니다. 그곳에 가 봤더니 아주 끝내주더군요. 시카고(Chicago)의 "25 or 6 to 4" 같은 걸 연주했던 걸로 기억해요. 사실 트루바도스 때는 브라스가 강한 음악이 아니라 캄보 비슷한 음악이었는데 그때는 이전과 다르게 시카고 같은 브라스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죠. 그땐 브라스 팀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최초의 고고 클럽 닐바나의 주간지 광고(1972년 6월). 광고 문구는 이렇다. '로크 그룹 4대왕들이 출연하는 동양 최대의 맘모스 고고 센타 모든 것은 「닐바나」에서 시작되었다. 뉴 로크 대왕 윤항기와 키 브러더즈, 소울 대왕 연석원과 데블스, 하드 로크 대왕 박인수와 피닉스, 보컬 대왕 차영수와 파이오니아' Q: (닐바나 광고 포스터를 보며) 심형섭 님 인터뷰에 보면 "우리가 휘닉스란 이름으로 처음 연주를 시작한 곳은 을지로6가에 있던 천지 호텔의 카바레가 고고 클럽으로 바꾸어 오픈할 때였는데 첫 밴드로 지금은 이름이 생각 안 나는 다른 한 팀의 그룹과 함께 연주를 했었습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다른 팀의 기타가 당시 고등학교도 졸업을 안 한 10대 소년 김석규였다"고 하시던데요. - 아마 같이 섰던 다른 그룹이 저희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도 모르겠군요. 을지로 천지 나이트클럽에서 휘닉스 형들은 거기서 만난 겁니다. 이 닐바나 포스터의 휘닉스 사진을 보니 심형섭(기타), 전웅진(드럼), 김민랑(키보드) 등이 보이는 것 같군요. Q: 그럼 정식으로 파이오니아스에 들어가시게 된 건 언제입니까. - 피스가 천지 나이트 클럽에서 할 때 누가 군대를 갔던가 해서 팀이 깨졌던 것 같습니다. 마침 차영수 형이 제게 전화를 했어요. '이재영이 어디로 가버렸으니 네가 좀 봐줘라'고. 그래서 오리엔탈 호텔 닐바나에 서던 파이오니아스로 들어가게 됩니다. Q: 언젠지 모르겠는데, 이철호 님이 노래를 부르고 이재영 님이 베이스를, 김석규 님이 기타를 치던 팀이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 있었던 거 같아요. 연습하던 곳이 어딘지 영등포 어딘가의 매니저 사무실 같기도 하고, 매니저 집인지도 모르겠네요. 하도 오래되어서... 원래 김석규랑 할 때 이재영이 나랑 베이스 쳤었어요. 이재영은 원래 노래하던 친구가 아닌데 대구(왜관)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보컬을 하더라구요. Q: 파이오니아스의 멤버는 어떻게 되는지. - 차영수(기타), 김영길(드럼), 이재영(노래), 조해성(베이스), 장이순(기타, 트럼펫), 장문정인지 김문정인지 문정이 형(트럼본)이었죠. 이재영 대신 제가 들어간 거죠. 아마 이 닐바나 광고 포스터가 나간 직후에 제가 들어간 것 같군요. 그리고 무대에 같이 섰던 팀은 휘닉스, 데블스, 키 브라더스 등 그때 대여섯 팀 있었던 거 같아요. 오리엔탈 호텔 아래위층으로 계속 돌았으니까요. Q: 오리엔탈 호텔 닐바나가 처음 시작할 무렵인가요? 1971년도에 처음 만들어졌다는데요. - 그럼 1971년이겠죠. 그때 하여튼 두 군데서 했는데 팀이 굉장히 많았어요. Q: 파이오니아스가 닐바나에 있다가 풍전으로 옮기지 않았나요. - 풍전 고고 클럽이 처음 개업하면서 스카웃되어 옮겼지요. 1972년쯤 되겠죠? 저희 말고도 템페스트도 갔어요. 유상봉 씨가 마스터하던 오리지널 템페스트죠. 그때 김희갑 악단도 있었는데 거기서 노래하던 가수가 "타타타"를 부른 김국환이었어요. 김희갑 악단도 고고 같은 걸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다음에 센트럴 호텔 고고 클럽에서도 섰었는데 박인수 형이 게스트로 와서 팀에서 노래하기도 했어요. Q: 그럼 밤새서 맞교대로 연주하신 건가요. - 총 네 스테이지 정도 됐을 겁니다. 한 시간하고 한 시간 쉬는 식으로. 그리고 밤을 새죠. 12시 넘어가면 클로즈잖아요(문을 닫고 밤샘 영업을 했다는 의미). 서로 왔다갔다하면서 연주하니까요. Q: 그때부터 수입이 좋아지셨겠네요. - 그때 월급 받았는데 얼마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기지촌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죠. 아휴 기지촌은 먹고 자고 만이천원인가 그랬어요.(좌중 웃음) Q: 레퍼토리는. - 거의 다 가요예요. "꽃집의 아가씨" 같은 재미있는 노래를 비롯해,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노래들을 전부 브라스 섹션을 사용해 편곡하여 사람들이 춤추기에 좋게 만들었어요. 가요라고 하더라도 보통 가요가 아니라 트럼펫, 트럼본을 사용해 연주했으니까 특색이 있었죠. 장이순 형이 전부 편곡 작업을 했어요. Q: 팝송은 어떤 걸 연주했나요. 그 무렵 브라스 록이 유행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시카고,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같은 걸 연주하셨나요. - 트럼펫, 트럼본이 있었으니까 그런 음악들을 많이 했죠. 시카고의 곡은 물론 연주했지요.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는 연주하지 않았어요. 바크맨 터너 오버드라이브(Bachman-Turner Overdrive)의 곡들도 하고. "Knock On Wood"나 "Na Na Hey Hey Kiss Him Goodbye" 같은 노래들도 했어요. Q: 연습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악보로 다 만들어서 연주하셨어요? - 다 따서 악보로 만들어서 연습할 때 다 나누어줬죠. 연습은 새벽에 끝나고 연습하고, 낮에 클럽에서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다 그렇게 했어요. Q: 다들 파이오니아스는 독특했다고 합니다. - 내가 볼 때 그때 브라스 쓰는 팀들 가운데서는 제일 잘 했던 것 같아요. 사실 파이오니아스와 음악성이 비슷한 팀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조금 독특했죠. 드럼 같은 경우에도 김영길이 정말 맛있게 잘 쳤어요. 키 보이스나 키 브라더스와도 음악성이 달랐어요. 데블스는 오리지날 소울 쪽이었던 반면, 파이오니아스는 좀 점잖은 편이었다고나 할까요. Q: 잘하던 팀이었는데, 음반을 못 남겼다는 게 아쉽네요. - 그런데 그런 게 없었어요. 포터블 녹음기도 없던 때였죠. 앰프가 백와트만 돼도 사장이 소리가 크다고 했으니까요. 제가 선유리에서 활동했을 때만 해도 마이크 시스템이 없었어요. 기타와 베이스에 마이크 세 개 앞에다 놓고 하는 게 그게 고작 시스템이었죠. 어쨌거나 내 생각에 그땐 차영수 형이 음반과 관련된 비즈니스 쪽으로 신경을 안 썼던 것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가요계에 나가라는 말을 듣지 않았죠. 그런데 아시겠지만 당시에는 많은 그룹들이 음반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음반을 내자는 음반사도 많지 않았고. 그때 음반을 냈다 그래봐야 전부 외국곡 카피해서 그냥 한국말로 번안하던가 외국 노래 그대로 노래했지, 별로 특별하지가 않았으니까요. Q: 당시 키 보이스 같은 경우는 이종환 님, 데블스나 라스트 찬스는 박영걸 님, 히 식스는 조용호 님이 막후에서 밀어줬다고 할 수 있는데요. 파이오니아스는 특별히 후원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는지요. - 없었습니다. 그냥 차영수 형이 혼자 했어요. Q: 서병후 님 같은 경우는 도움을 주지 않았나요. - 서병후 씨가 어떤 팀이든지 이런 저런 일로 해서 많이 도와줬어요. 클럽 같은 데 오픈 한다던가 하면 연결도 해주었죠. 그런데 서병후 씨가 심형섭 형네 휘닉스하고는 퍽 친했을 겁니다. 파이오니아스하고도 친하기는 했지만 휘닉스 같은 경우라고 볼 수는 없죠. Q: 파이오니어스 말고 음악성이 뛰어났는데 음반을 안 남긴 팀이 있나요? 유일하게 음반이 없는 팀이네요. - 그렇죠. 그런데 또 몰라요. 녹음한 음원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죠. 그게 나타나지를 않고 있을 지도. Q: 그룹 사운드끼리 관계는 돈독했나요. - 옛날에 그룹들은 다 친했어요. 풍전 고고 클럽에서 설 때는 할머니집 같은 곳에 다 모였죠. 남산 식물원 근처에 있던 해장국집도 유명하고, 이태원 오복여관은 말할 것도 없고... Q: 그 때부터 미8군 무대나 기지촌의 클럽 활동 같은 건 안 하신 건가요. - 그쪽은 안 했어요. Q: 파이오니아스 생활을 얼마나 하신 건가요. - 그래도 몇 년 했어요. 중간에 나는 방위를 받았는데 그때도 했어요. 그런데 *** 오픈할 때 조해성하고 이재영이 문제가 생겨서 조해성이 그만두고 대신 원래 노래를 하던 한남현이란 친구가 베이스를 했고, 내가 노래했죠. 한남현은 지금 대전에서 목사하고 있는데 노래도 참 잘 했어요. Q: 그럼 한 2년 정도라고 볼 수 있나요. - 한 일이 년 했어요. 그런데 1973년인가 센트럴 호텔 고고 클럽으로 가면서 조해성하고 이재영하고 다시 파이오니아스로 들어와야 하는데 차영수 형이 "철호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그러더라고요. 나는 꼭 있으라고 하면서. 왜냐하면 가수는 둘 써도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전 누굴 하나 빼야 되는 곤란한 입장이 생기는 게 싫었어요.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고 파이오니아스를 나와 옛날에 같이 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팀을 만들었죠. Q: 그 팀 이름은. - 그래서 애플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죠. 기타가 이병기 씨(최이철이랑 같이 데니스 쇼 하던, 색서폰 불던 분이에요. [황소걸음]인가 음반 하나 냈다던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그리고 베이스가 차종헌, 드럼이 김영진, 건반이 정창교(지금 부산 광안리에서 재즈 클럽하고 있죠). 이렇게 팀을 꾸려 바로 풍전 고고 클럽에서 섰는데 종교문제로 이병기가 그만두어서 내가 기타를 치기도 했어요. 애플스는 풍전에서도 하고 소공동 라스베가스인가에서도 하고 신촌 티티카카에서도 했죠. 애플스에 좀 있다가 다시 파이오니아스로 가게 되었죠. 그리고 풍전에서 일하고 있을 때 영 에이스가 나타났어요. 이때부터 사랑과 평화의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전설의 시작, 영 에이스 Q: 그러면 최이철 님을 만나신 것은 이철호 님께서 파이오니아스 하다가 애플스 하다가 다시 파이오니아스 와서라는 말씀이시군요. 당시 영 에이스의 멤버와 음악 스타일은 어땠나요. - 그때 영 에이스 활동하던 친구들이 더 잘 알지 않겠어요? 최이철이 기타, 이남이 형이 베이스, 휘닉스에 있던 나중에 하와이에서 죽은 박병무가 건반이었고, 드럼은 이름이 기억 안 나네요. 거기에 헬퍼하던 애가 무대에 그냥 올라와 있었어요. 같은 클럽에서 일하게 되었으니까 영 에이스의 연주를 들었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때 영 에이스의 음악은 록이었죠. 최이철이 원래 록이예요. 에드가 윈터(Edgar Winter)나 자니 윈터(Johnny Winter), 쓰리 독 나이트(Three Dog Night) 그런 이들의 음악을 좋아했어요. 제가 최이철 처음 만났을 땐 소울하고는 관련이 없었죠. 암튼, 영 에이스의 음악을 맘에 들어하던 차에, 이남이 형이 날 부르더니 "철호야, 너 우리 팀이랑 같이 할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차영수 형에게 영 에이스에서 하고 싶다고 얘기해서, 그 다음 날부터 영 에이스에 합류했습니다. Q: 영 에이스를 처음 보셨을 때 영 에이스의 보컬은 누구였나요. 파이오니아스는 이철호 님 포함해서 보컬이 두 명이었나요. 또 당시는 밤새워 연주하셨을 테니까 보컬이 아무래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 때문에 보컬을 두 명 쓰고 그랬나요? 그리고 노래가 필요 없는 연주곡 할 때는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파이오니아스는 저하고 한남현, 이렇게 보컬이 두 명이었어요. 이재영은 베이스를 쳤을 거고. 영 에이스는 보컬이 따로 없었어요. 최이철과 이남이 형이 연주하면서 노래했죠. 그때는 힘들기 때문에 보컬을 두 명 쓰기도 했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게 템페스트 같은 경우는 두 명이 아니었잖아요? 혼자인데, 유상봉 형이 노래하고 멤버가 하니깐. 그리고 노래 없을 때는 탬버린을 치고 있었죠. 카우벨이랑. 노래는 안 불러도 무대 위에 있어야죠. Q: 그렇게 영 에이스와의 운명의 만남이 이뤄졌군요. 그게 1973년경이었나요. 또 같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그룹 사이에 멤버가 이동한 건데, 이상할 수도 있었겠는데요. 파이오니아스 멤버들과의 관계도 있고... - 그게 1973년쯤 될 겁니다. 영 에이스를 본 다음날로 제가 영 에이스로 갔으니까 얼마나 이상했겠어요. 하지만 제가 차영수 형한테 말했죠. "형, 나 저 팀이 마음에 드는데 그냥 나 저 팀에서 노래하게 해줘"라구요. 차영수 형은 저하고 하도 친하고 또 그 형 급할 때 제가 도와주고 그랬으니까 "그래 알았다. 철호야 그렇게 해라"라고 했죠. Q: 영 에이스 관련한 멤버 변동이 복잡하던데, 이철호 님 들어가신 이후에 대해 좀 말씀해주세요. 들어가신 이후에 계속 영 에이스를 하신 건가요? 더 멘이 해체되면서 영 에이스와 잠시 이합집산이 있었던 시기도 있었는데요. 신중현, 김기표, 문영배 님이 최이철, 이남이 님과 함께 무대에 섰던 사진도 있구요. 김기표 님은 신중현과 영 에이스라고 기억하시던데. - 풍전에서 영 에이스를 만나서 하다가, 영 에이스가 로얄 호텔로 갑니다. 로얄로 갈 때 드러머 한춘근이 들어옵니다. 그때 김기표와 동포(문영배)는 더 멘에 있었구요. 영 에이스는 로얄에 있다가 대구로 내려갑니다. 대구 반도백화점 지하 무슨 클럽이예요. 거기서 한춘근이 나가고, 동포하고 김기표가 들어왔어요. 더 멘은 깨진 상태였거든요. 그러다가 나는 영 에이스를 나와서 서울로 올라와 다시 파이오니아스로 들어갔습니다. 파이오니아스 하다가 영 에이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다시 만났어요. 그래서 다시 영 에이스 들어갔죠. 최이철, 김기표, 동포, 그리고 저. 이 멤버로 대구로 또 내려간 거죠. 대구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또 찢어진 거예요. 이남이 형, 동포, 김기표 다 관두고 찢어진 거예요. 그리고 최이철, 김태욱 형, 김명곤, 김태흥 형하고 네 명이 영 에이스가 된 거예요. Q: 드디어 김명곤 님이 등장하시는군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멤버 변동이 심했는데, 그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요.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 그렇게 길지는 않았죠. 몇 달 안쪽이예요. 아무튼, 최이철, 김태욱, 김태흥, 김명곤 이렇게 네 명이 대구에 있다가 올라왔다고 하더라구요. 어디 미8군 앞인지... 그런데 이 때 영 에이스가 음악이 바뀌어 가지고 올라왔더라구요. 어떤 음악으로 바뀌었냐면, 재즈 록이었어요. 빌리 코뱀(Billy Cobham),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Average White Band) 그런 거였어요. Q: 칙 코리아도 연주했던가요. - 그런 종류의 음악들이죠. 그런데 클럽에 가는 데마다 쫓겨났죠. 손님들이 춤을 출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음악 감상실이 아닌 다음에야 클럽이라면 그게 안 먹어주거든요. 그때가 전 계속 파이오니아스 일을 할 때고, 아마 이남이 형이 신중현 씨랑 할 때(엽전들) 일 거예요. 좌우지간 그러고 난 다음에 김태욱 형이 나가고 이남이 형이 다시 들어오고, 다시 김명곤하고 다 튕겨 나가고(그만두고), "철호야 같이 하자" 이렇게 해서 제가 다시 들어간 거죠. 5인조였는데... 뜨거운 블랙 뮤직의 행진: 핫 락스/서울 나그네, 그리고 사랑과 평화 서울 나그네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 Q: 그게 서울 나그네겠군요. (서울 나그네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 뒷면 사진 보여주며) 이 멤버인가요. 그리고 그때 소속회사는 아주였고, 박인수 님과 같이 한 적도 있다고 최이철 님이 그러던데요. - 서울 나그네죠. (음반 사진을 보며) 전 어디 있죠? 이게 저예요? 맞네. 언제 내가 또 이러고 사진을 찍었지? 이 앨범 낼 때가 미8군 무대에 설 때예요. 미8군 하면서 우리가 조선 호텔 투모로우 룸에서 연주할 때 그때 우리말 이름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서울 나그네라고 한 거죠. 미8군에서 쓰던 원래 이름은 핫 락스(Hot Rocks). 회사는 아주 맞구요. 글쎄, 박인수 형이 한 건 잠깐이죠, 뭐. Q: 그렇게 5명의 멤버가 확정된 게 대충 언제쯤인가요. 1975년 12월 대마초 후리가리(대대적 단속을 의미하는 당시 은어) 전인지 후인지요. - 대마초 후리가리가 1975년 12월이면, 그 후예요. 제가 방바리(방위) 받고 있을 때니까. 제가 1973년부터 3년을 방위로 했는데도 60일 남아가지고 제대시켜줬잖아요. 방위는 무조건 일수(찍기 같은 거)잖아요. 일단 가면 그건 출석만 부르고 도망가 버리고. Q: 미리 여쭤보는데, 서울 나그네가 조경수 씨 음반도 세션 하신 적 있나요. - 정확하게는 모르겠네요. 뭐, 그때 우린 여기저기 많이 해줬을 겁니다. 김준 형 때문에. 김준 형하고 김명곤이 친했거든요. 장미화 것도 그래서 했을 거고. 김명곤이 김준 형 음반 거의 다 어레인지 했을 겁니다. Q: [고고 생음악 1집]은 어디서 녹음하셨나요. 또 이건 연주 음반인데, 이철호 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역시 퍼커션을 연주하신 건가요. - 그 음반은 마장동 스튜디오 아닌가요? 제 기억엔 그렇습니다. 그거 녹음할 때 저는 퍼커션을 쳤죠. 미8군 하면서부터 퍼커션을 시작한 거예요. 정식으로 배우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음악 듣고 딱 하면 높은 거고, 두둥하면 얕은 거고, 이렇게 하면 이거구나 하다 보면, 뭐 리듬감이 있으니까. Q: 콩가, 봉고 그런 거였나요. - 그렇죠. 봉고, 콩가. 미8군 무대 오디션에서 우리가 스페셜 A 등급 받을 때부터, 제가 특이하게 했거든요. 봉고가 있으면 가운데 좀 빈 공간이 있잖아요. 거기에 스위치를 달은 거예요, 스위치. 그러니까 조명. 발로 눌러서 불 들어오게 하구, 사이렌 소리 나게 하구. 어디 클럽을 가면 불을 꺼 달라고 그런다고. 그러고 나서 내가 노래하면서 발로 조명하고 별거 다했죠. Q: 이철호 님은 서울 나그네 하면서도 검은 나비랑 서울 나그네를 들락날락 했다고 하던데요. - 제가요? 아니죠. 그건 나중이죠. (1980년에) 대마초로 다 달리고 나서. 그러니까 그때는 쭉 검은 나비에서 한 거고요. Q: 핫 락스 하실 때는 조선 호텔 투모로우, 그리고 또 어디서 연주했나요. 미8군 무대는 주로 어디서 연주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 투모로우하고 미8군 클럽이죠. 미8군 무대는 용산에 있는 흑인 클럽, 이름은 뭔지 모르겠는데 거기에 나갔죠. 바로 해방촌 올라가는 길 있고 이태원으로 가는데 하고 밑에는 센트럴 캐피탈 쪽이고 이쪽이 삼각지 가는 데면 거기 바로 모퉁이에 클럽이 있었습니다. 그게 오리지널 흑인 클럽이라고. Q: 거긴 미8군 클럽이인가요, 기지촌 클럽인가요. - 기지촌 아니고 미8군 클럽이죠. 오디션에서 스폐셜 A 등급을 받아서 여기로 온 거죠, 처음에는 영내에 있는 장교 클럽에서 연주했죠. 오디션에서 맨 처음에 B+가 나왔던가. 이 장교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김명곤이 빠지고 이근수가 들어온 겁니다. 김명곤이 방위를 받아야 되어서 나가고, 이근수가 들어온 거죠. 김명곤은 나중에 다시 들어왔지만, 그건 나중이고. 이근수가 들어와서 같이 할 때 오디션에서 스페셜 A 등급을 받은 거죠. 그렇게 해서 의정부, 동두천, 부산 등지를 돌아다녔죠. Q: 그때 핫 락스는 어떤 음악을 주로 연주했나요. - 이건 강조하고 싶어요. 뭐냐면 어떤 팀이든, 가수가 만약에 김종서가 사랑과 평화를 한다면 록 밴드가 되는 거고, 박인수 형이 하면 소울 밴드가 되는 거고, 내가 해도 소울 밴드나 훵키가 되는 거고. 그래서 우리가 오디션을 볼 때 전부 흑인음악만 했어요. 그리고 연주 같은 건 빌리 코뱀 것도 하고,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코모도스(The Commodores),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의 "Funky Stuff" 이런 것들을 한 거죠. 암튼 그래서 흑인 밴드가 된 거예요. 어쨌든 제가 전부 그런 노래를 하니까. Q: 편곡은 어떻게 하셨나요. 협의를 거쳐 했는지, 아님 최이철 님이나 김명곤 님이 주도했는지. - 그 때는 사실상 편곡이라 할만한 게 없었어요. "야, 따자" 이래 가지고, 전 밤새 가사랑 노래 외우고, 이남이 형은 베이스 따고, 각자들 해서 그 다음날 연습하고. 그렇게 해서 흑인 음악을 전적으로 한 거죠. Q: 데블스 정도를 제외하곤 흑인 음악을 전문적으로 한 그룹이 별로 없지 않았나요. - 없었죠. 근데 데블스 같은 경우에는 완전 소울이고. 우리는 그래도 퓨전도 하고 훵키도 하고 뭐 여러 가지를 한 거죠. 대신 흑인인데도 장르가 좀 틀리지 않냐고. Q: 데블스는 좀 올드 스쿨 같고. - 좀 올드 쪽이지. 암튼 우리가 인기가 무지하게 좋았습니다. 미군 애들은 자기네가 음악이 좋다고 생각하면 바깥에 있는 (영외) 클럽을 안 나가요. 우리가 간다고 하면 검은 애들이 차 있는 데까지 와서 악기 다 날라주고 그랬어요. 흑인들은 진짜 음악이 마음에 들면, 저 팀 잘한다 이러면, 딱 좋은 게 뭐냐면, 시작하면 '쿵, 딱' 이렇게 치잖아요. 그러면 백비트가 되고 있는 거예요. 백 비트가 딱 나와버린다고. 그러니까 음악하기가 무지하게 편한 거예요. Q: 한국 사람들은 왜 백 비트를 안친다고 생각하세요. -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죠. 왜냐면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았으니. 하나 치고 쉬고 둘 쉬고 이러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고 비트가 없는 거고. 하나 하고 '딱', 둘하고 '딱' 완전히 세고 이걸 한다고. 뭐 외국도 보면 백인들도 이렇게 치지 이렇게 치지 않는다고. Q: 그럼 노래는 이철호 님께서 주로 하셨나요. 최이철 님도 하고 그러셨는지. - 최이철은 몇 곡 안 불렀죠. 이남이 형도 서너 곡 하고. 어쨌든 내가 메인 보컬이죠. 내가 타악기를 친다고 그래도 타악기 위주가 아니라, 왜냐면 타악기는 노래하면서 같이 치니까. Q: 근데 사랑과 평화 음반에 노래하지 못한 이유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대마초로 또 달리신 것 때문인지. - 대마초 때문에 그랬죠.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퍼시픽 호텔 무겐에서 일할 때, 이장희 형이 와서 판을 내자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 팀이 다 모여서 한 얘기가 있는데, '우리 이렇게 까지 고생했는데 만약 판을 냈는데 누구 하나라도 못 나가면 우린 나가지 말자' 이렇게 하기로 하고 판을 냈어요(주: 사랑과 평화의 데뷔 앨범을 말함). 1집 녹음하면서 난 봉고 치고, 이남이 형은 베이스 쳤어요. 노래만 못 불렀을 뿐이죠. 왜냐면 벌써 저하고 이남이 형하고 옛날에 대마초 했던 게 다 걸려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최철이하고 김명곤하고 노래를 부른 거예요. 그런데 이장희 형이 무겐에 와서 판을 내자고 제안할 때, 따지고 보면 저랑 이남이 형하고 다 있는 사랑과 평화를 보고 '아 이 팀 내보내면 되겠다'고 해서 픽업을 한 거 아니겠어요. 어쨌든 둘(최이철, 김명곤)이 노래를 불러서 판을 냈는데, 그게 딱 히트 쳤고 걔네는 방송에 나가게 되었죠. 애초의 얘기랑 달라지니까, 이남이 형은 팀에서 나간 거고. 저마저 나가면 밤일을 못하니까, 일단 저는 남아 있었죠. 제가 메인 보컬인데, 최이철이 노래 불러봐야 몇 곡이나 부를 수 있겠어요. "한동안 뜸했었지"를 밤새 계속 할 순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한두 달 같이 하다가, 저도 나왔죠. 그리곤 저는 다시 파이오니아스로 간 거죠. 그러다가 이남이 형이 "철호야, 사랑과 평화 리사이틀 하는데 너랑 나랑 도와줘야지 어떻게 하냐. 쟤네들 빚도 있는데" 그래서 콘서트 때 같이 도와준 거죠. 그랬다가 인천 올림푸스하고 명동 마이 하우스에서 하는데, 인천 올림푸스에서 내가 먼저 달린 거지. 걔들도 몇 일 있다가 서울서 달렸고. Q: 대마초로 열 몇 번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죄송해요, 좋은 얘기도 아닌데... - 한 열 세 번 되요. 그럼. 그 얘기들 다 하면 파란만장하죠. 한번은 들어갔는데, 하일부 검사라고 마약 단속으로 유명했던 검사가 있었어요. 가수냐고 물어보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노래 한번 해보라고, 잘 하면 내보내 주겠다고 하대요. 그래서 그때 뭐 CCR의 "Hey Tonight" 이런 거 유행할 때예요. 그래서 그 노래 딱 하니까 "알았어, 잘했어" 그래서 집행유예 받고 나온 적도 있죠. 검은 나비, 청바지 아가씨, 1980년대 Q: 암튼, 그렇게 달리신 후에, 나오고 나서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 검은 나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변호사 비용을 그룹 사운드 실장 이름으로 저한테 변호사 비용이 들어왔어요. 검은 나비의 손학래 형이 실장을 할 때죠. 누군지 모르는데, 그렇게 변호사 비용을 내줬더라구요.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나가고 나면 꼭 신세를 갚겠다고 편지를 썼어요. 그때 사랑과 평화는 대전에 있을 때인데, 최이철, 건반에 정원영, 베이스는 송홍섭인가 잘 기억이 안나고, 드럼에 김태흥 형 멤버가 이랬는데, 중간에 면회도 오고 출소할 때 찾아왔어요. 찾아와서는 나와서 사랑과 평화 같이 하자고 그랬죠. 근데 전 손학래 형한테 신세진 게 있기 때문에, (손학래 형이 리더로 있는) 검은 나비를 도와줘야겠다고 마음으로 굳히고 검은 나비로 간 거죠. 그때 검은 나비가 김태화가 그만 두고, 양남길이랑 어떤 여자애가 보컬이었는데. 그게 1981년이죠. Q: 그때 검은 나비 멤버가 어떻게 되었나요. 1981년경 김현식 님도 검은 나비에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 그건 양남기가 미국 가는 바람에 김현식이 세컨드 싱어로 들어온 거죠. 김석규가 기타 치고, 노승준이 건반하고, 효성이가 베이스 치고, 배수연이 드럼 치고, 손학래 형 있고. Q: 검은 나비는 어느 정도 계셨어요. - 오래 했죠. 한 2~3년 했을 걸요. 그 때 "청바지 아가씨"를 한 거야. 그때 판 낸 거죠(주: [검은 나비 신곡집](1981)을 말함). "허수아비"도 제가 부른 거고. 거기 이영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죠. 제가 대마초 가수니까 본명은 못 넣고. Q: 검은 나비는 어디서 주로 일을 하셨어요. - 크라운서 하다가 홀리데이 인 서울로 갔죠. 이남이 형이 다리를 놔줘서 최봉호 님이 찾아오셨더라구요. 그래서 리버사이드 오픈 멤버로 검은 나비가 들어간 거죠. 리버사이드에 조용필 형, 최성준 악단, 윤시내, 나미 등이 있었어요. 리버사이드 있을 때 양남기가 미국 가는 바람에 김현식이 세컨드 싱어로 들어온 거고. 그후에 세종 호텔로 옮겼는데, 세종 호텔, 국일관, 그리고 청량리에 있는 클럽 이렇게 세 군데를 했어요. 김현식은 자기 노래 몇 개하고 외국 노래들 했고, 세종 호텔 할 때 게스트 싱어로 미애가 결합했는데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같은 거 불렀죠. 미애는 지금 갤러리아 명품관 앞에서 무슨 클럽 한다던데... Q: 검은 나비를 그만두신 이유는. - 거기는 문제가 많았어요. 그래서 중간에 최이철도 들어왔다가 나갔죠. 노승준도 관두고 불새 만들어서 캐피탈 호텔로 가고. 그리고 디스코 나오고 나서부터는 많이 위축되었어요. 고급스러운 데만 생음악 하지, DJ가 그냥 판 돌리는 데가 많았다고. 아, 검은 나비 관두고 몇 달 정도 다른 팀을 한 적이 있었어요. 팀 이름도 모르겠는데, 김광민이 건반 치고, *효성이 베이스 치고, 배수연이 드럼 치고, 김양일이 기타 치고. 김태화가 30분 노래하고, 제가 30분 노래하고 그랬어요. 가수가 둘인데, 반은 록, 반은 소울. 리버사이드 호텔 앞에 무슨 클럽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했죠. 김광민은 그 후에 유학 가고. 제가 여러 팀을 전전한 것 같지만, 많이 한 건 아니예요. 이 팀 저 팀을 다닌 게 아니라, 옛날에 하던 팀들을 좀 왔다갔다 하면서 그냥 계속 한 거죠. Q: 왔다갔다하면서 생계는 괜찮으셨어요. - 그런데 이건 알아야 해요, 그룹 하면 무조건 돈은 못 벌어요. 물론 먹고는 살지. 돈 벌자고 생각했으면 그룹 안 하고, 솔로를 하죠. 다시 사랑과 평화로, 끝없는 전설을 향하여 일산에 있는 사랑과 평화의 연습실 외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 Q: 그 뒤에는 어떻게 되신 건가요. - 그 뒤에 또 몇 번 잡혀갔다 왔어요. 마지막으로 1989년 3월에 나왔는데, 나오던 날 이남이 형이 청주에 왔더라고. 그때 "울고싶어라" 무지하게 떴을 때인데, 이남이 형이 와서는 "너 그러지 말고 이철이랑 그냥 같이 해라" 그렇게 해서 다시 최이철이랑 부산으로 내려간 거죠. 1989년 6월이나 7월쯤 되겠네요. 부산 백악관에 있을 때, 한정호, 최진호가 건반 치고, 이병일이 드럼 치고, 장기호가 베이스, 박성식은 없었어요. Q: 근데 음반은 1992년 5집 [못생겨도 좋아/환상]부터 참여하신 것 같은데. - 그렇죠. 3집, 4집은 안 했어요. 그때도 계속 바뀌었잖아요. 1989년에 환태평양 음악제인가 거기 갔다 오고, 세종 호텔에서 일하다가 전 사랑과 평화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인천으로 가서 혼자 밤 업소를 했어요. 돈은 짭짤하게 버는데, 사는 맛이 안나더라구요. 내가 이래서야 되나, 돈은 버는데 사는 맛이 안난다, 그러고 있는데 느닷없이 최이철이 또 SOS 친 거죠. 그래서 또 도와준 거예요. 1991년경인가? 보니까, 사랑과 평화는 일 한 군데도 안하고 재즈 한다고 해서 대학로에 이성연 씨가 하는 클럽 야누스에서 연주하더라구요. 뭐 개런티도 거의 없이.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Grover Washington Jr.), 칙 코리아(Chick Corea) 같은 퓨전을 했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제가 인천에 일을 잡았죠. 돈은 생겨야 될 거 아니예요. 그래서 부평 '병태야 병태야', 주안역 앞 '바이킹'에 일을 잡아서 거기서 1~2년 했죠. Q: 1995년 6집 [Acoustic Funky]에 대해 말씀해주겠어요? "얼굴 보기 힘든 여자"에서 태평소 부른 김성은, 박성범 님은 어떻게 섭외하신 건지요. - 6집은 캔(Can)에서 한 거예요. 강승호 씨. 문산 킹 녹음실에서 녹음했어요. 태평소 김성은, 박성범 씨는 김수철 씨 소개로 같이 한 거죠. 이병일하고 김수철하고 같이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Q: 1998년인가, 1999년인가에 대학로에서 하셨던 콘서트는 어떠셨어요. - 적자만 면할 정도였죠, 뭐. 그래도 신기한 게 항상 좌석이 차더라구요. 한 5분전이나 10분전에 커텐 젖히고 몰래 객석을 보면 아무도 없어. 근데 공연하려고 무대로 나가보면 항상 꽉 차 있단 말예요. 나이 먹은 사람들이 공연 시작 전에 미리 앉아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암튼, 저는 사람들이 가만있게 놔두질 않아요. 무대에서 방방 뛰면서, 미치게 만들죠. 위쪽 왼쪽이 이철호(보컬, 퍼커션), 오른쪽이 이승수(베이스, 보컬), 아래가 이권희(키보드) Q: 지금 멤버들 사랑과 평화 이전 경력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 드럼 이병일은 오리엔탈 쇼크 출신이고, 키보드 이권희는 라이브 세션 굉장히 많이 했고 사랑과 평화 직전에 강산에 밴드에 있었어요. 베이스 이승수와 기타 송기영은 옥슨 출신이고요. Q: 이철호님은 최이철 님 곡하고 이승수 님 곡 가운데 누구의 곡이 더 자신한테 맞는 것 같아요? - 사실 저는 둘 다 나한테 안 맞는다고 생각해요. 하하. 날 위해 써줬다는 느낌이 없어요.(좌중 웃음. 이승수 님은 이철호 님의 보컬을 의식하고 작곡했다고 말함.) 차라리 박진영 같은 사람이 오히려 더 맞는다고요. 걔들은 어떻든 음악이 소울이든 훵키든 그러니까. 사실 이번 7집에서 쥬비의 곡도 저하고 맞는다고 볼 수 없죠. "Dear Baby" 정도가 그나마 맞는달까. 오죽하면 제가 뺀질거려서 "다시는 울지 않으리" 안 불렀을까. 그 곡을 저보고 부르라 그랬는데, 사실 제가 부르면 욕 얻어먹겠더라구요. 완전 록이니까. 그래서 이승수가 불렀죠. Q: 얘기 나온 김에... "한동안 뜸했었지"는 이펙트를 건 것 같은데요. 그리고 노래를 여러 멤버들이 분담해서 하셨더라구요. - 보코더 쓴 겁니다. 노래는 키보드 이권희가 부른 거구요. 첫 번째 CD는 베스트 앨범이지만, 옛 음원을 그대로 따다가 모아놓은 게 아니라, 전부 다시 연주하고 노래한 거예요. 최이철이 "한동안 뜸했었지", "겨울바다", "어머님의 자장가", "장미"를 불렀구요. 베이스 이승수는 "다시는 울지 않으리", "장미", "변신"을 불렀고, "저 바람", "심술"을 저와 같이 불렀구요. Q: 나쁘다는 얘기는 아닌데, 사람들은 아무래도 최이철 님이랑 이철호 님이 같이 해야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송기영(기타) 님도 잘 하시고, 최이철 님과는 다르게 잘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한텐 다른 게 장점으로 안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까요. - 물론 최이철하고 같이 하면 좋은데... 그렇지만 그런 건 연습으로 극복이 되거든요. 팀 사운드로. 우리 홈페이지에 별 사람 다 들어오는데, 최이철이 빠졌는데 무슨 사랑과 평화냐 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하지만 전 누가 꼭 있어야 사랑과 평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과 평화에 있던 사람이 다른 애한테 물려 줬을 땐 물려받은 애들이 그 음악성을 갖고, 신인을 좋은 사람 픽업해서 대한민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팀이 된다는 책임을 갖고 영원히 사랑과 평화로 남아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요? 사랑과 평화가 1집, 2집은 곡이 테크니컬하고 훵키하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3집, 4집부터 들어보면 훵키가 아닌 거예요. 그래도 이번에 우리가 훵키로 돌아왔어요. 뭐, 반응도 좋은 것 같고, 일단 제가 볼 땐 이번 음반 괜찮은 것 같아요. 2003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