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초림하시던 시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었다.”요 3:16은 명백히 과거 시제이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첫 번째로 보내셨다. 초림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할 일을 다 한 후에는 이제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과 친구가 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 적이 된다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선언으로 성경은 야고보서에서 못을 딱 박아 놓는다. 그렇다. 세상은 성경이 그런 선언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일꾼들을 미워해 왔으며, 하나님 역시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으로 보내겠는가? 오히려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언제든 떨어질 준비가 돼 있다. (요 3:36) 때가 차기만 하면 말이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는, 그동안 은혜와 사랑이 전해질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유예 기간도 끝난 상태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은 갈 데까지 다 가고, 인간은 알 거 다 알고, 과학 기술을 통해 개발될 건 다 개발되고, 험한 꼴 처참한 꼴은 될 대로 다 겪어 보고, 단맛 쓴맛 다 봐서 이제 주님 앞에서 더 핑계 댈 게 없이 자포자기한, 그런 때가 될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문제는 결국은 환경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때문이고 죄 때문이었으며, 인간이 악했기 때문이었음이 입증되는 때가 올 것이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초림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심판을 집행할 분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쳐부수고 그들의 피를 밟으며 아마겟돈 전쟁을 종식시킬, 백마 탄 “장군”이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의 초림 관련 예언은 300여 개이지만, “주의 날”이라 표현된 재림 관련 예언은 500여 개나 된다. 성경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 더 많은 셈이다. 초림 관련 예언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듯이, 재림 예언도 그렇게 정확하게 성취될 것이다.
전우주적이며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될 주님의 재림! 그 일이 일어날 정확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가 성경적인 답이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다고 한들, 우리는 세상이 악하고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되, 주님 정하신 때가 되기까지는 세상에서 학교, 군대, 직장 등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성경을 보라. 주님은 사람 거래를 하실 때는 눈이 아주 높으시다. 목자면 목자(다윗), 농부면 농부(아모스), 어부면 어부(베드로)든 자기 생업에 충실히 종사하던 사람을 근무 도중에 불렀다. 그것도 즉시이고, 부모님께 작별 인사하고 올 시간조차 주시지 않았다. “나 좀 써 주세요” 하며 백수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다른 할 일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일이나 해야지”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쓰시는 법이 없다.
종말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재림 일시를 사람이 알고 있다면 그 시기가 되기도 전에 세상이 먼저 종말을 맞았을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 생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교회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건전하지도 않고 결코 성경의 의도가 아니다. 저런 잘못된 움직임은 1992년 다미선교회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시절부터 있었다. “...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 (살후 2:2)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오히려 차분하게 지금의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하자고 권면하는 히 10:25 말씀을 이 시간에 명심하자.
다만, 하나님은 경고도 없이 어마어마한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심판 전에는 반드시 명백한 징조가 따른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보고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고 이에 대비하며 살라”는 성경의 암시는 매우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건대, 오존층 파괴나 해수면 상승, 환경 오염, 운석 충돌 때문에 의인이건 악인이건 가릴 것 없이 인류가 싹 멸망해 버릴 거라는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정말 할 필요 없는 걱정이다. 그렇게 인간 세상이 허무하게 끝나 버리기엔 인간의 죄악이 너무 차 있고 하나님은 너무나 공의로우신 분이다.
주님은 분명히 도둑처럼 갑작스럽게 오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준비만 되어 있다면! “... 너희는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살전 5:4)
마 16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요구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여러 특권을 가진 민족이다. 예수님도 유다 지파의 유대인으로 오셨고, 구약 성경의 기록, 보존과 간수 역시 유대인들이 맡아 왔다. 유대인들은 민족 자체가 할례라는 표적으로써 태동했으며, 이집트에 떨어진 각종 재앙을 비롯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입증하는 표적으로 살아 왔다. 또한 그들은 표적을 요구할 권리도 있다. 바리새, 사두개라는 명칭은 그들의 사상적 취향을 나타내는 말이지 인종 명칭이 아니다. 그들도 물론 유대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비꼬는 듯,
“이 위선자들아, 하늘을 보고 하루 날씨라는 ‘천기’는 분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 내가 이렇게 와서 성경의 초림 예언들을 하나하나 이루고 있는 것 자체가 표적이지 무엇이 더 필요하냐?”
란 요지로 책망하신다.
우리는 오늘날이야말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로워야 한다. 시대의 표적, 그다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주께서 친히 집행하시는 심판으로 주를 알 수 있사오니 ...” (시 9:16) 하나 하나 살펴보자.
오늘날의 인간의 현대 도시 문명을 보자. 성경은 아벨을 죽이고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카인이 도시를 처음으로 세웠다고 기록한다. 카인? 웬지 부정적인 느낌이다. 더 살펴보자. 성경은 바벨 탑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아파트처럼 집을 온통 한데 이어서 땅값 올리고 사람들을 한데 모여 살게 만드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한다. 다 이유가 있다. 땅값! 얼마나 많은 이기주의의 근원이 되었으며, 땀흘려 일해서 돈 버는 사람들의 의욕을 상실시켰는가?
도시 문명은 끊임없이 자연을 혹사하고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환경 오염을 당연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시골에 사는 1, 2차 산업 종사자, 그게 아니면 하다 못해 인건비 싼 못 사는 나라 노동자들의 희생을 빨아먹으며 유지된다. 아무리 부자 될 기회가 누구나 균등하다고 하지만 균등한 게 아니다. 더구나 자본에 의한 발전을 인정하는 사회에서는 돈이 돈을 버는 구조가 당장 효율적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자영업자는 몰락하고 도시 부랑자, 사회의 낙오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지금 낙오자들이 없어지면, 그 다음으로 못 살던 사람들이 낙오자가 될 뿐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보다는 우월하다. 이 덕분에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 삶의 전체적인 질은 분명 나아졌다. 식비 지출이 전체 지출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흉년이라도 들면 당장 올겨울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인간이 더 편해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인간은 오히려 더욱 바빠졌고,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게 잠시도 쉬지 못하고 가슴을 졸여야 하는 상태가 됐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경쟁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재생산, 재투자를 할 여유가 어디 있는가? 미래를 예견하고 멀리 볼 시간도 없다. 자연을 접하고 사색에 잠겨 인생의 지혜를 논할 시간이 없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인간의 시스템을 익히고 거기 적응하는 데만도 여유가 부족하다.
이런 가운데 인간성 상실, 사회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당연히 예고된 것이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 같다. 분명 처음에 만들기는 우리끼리 좀 잘 살아 보자고 이런 도시가 생겼을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런 도시 문명이 한없이 순환하면서 오래 지속되겠는가? 아니다. 끝이 오고 만다.
화석 연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인간은 과학 기술로 대체 에너지를 발명할 것이라고 다들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 석유 기업들이 정부와 결탁해서, 그나마 대체 에너지를 발명한 영세 기업들까지 짓밟고 매수하고 있다. 이게 인간 세상의 현실이다. 이러니 인간이 자초한 패닉 상태는 얼마 못 가 반드시 찾아온다. 주님의 재림 시기는 이 시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기상, 지질학 현상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증거이다. 화성, 금성을 개척해서 물과 산소를 아무리 공급해 본들 지구와 같이 살아 있는 행성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의 우주 개발은 천문학적인 비용 때문에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뜻과도 어긋난다. 본인 역시 지구 밖에 무엇이 있는지 참 궁금하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것에 희망을 거느니 그 연구비로 못 사는 사람들이나 도와 주는 게 더 현실적으로 바람직하겠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 방법은 딴 게 아니다. 홍수, 가뭄, 병충해, 태풍, 지진 등... 이들은 여전히 유효한 심판 방법이며, 인간의 과학 기술로 완전히 극복하지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해 시신이 떠다니는데 동물들은 쥐새끼 시체 하나 안 남기고 싹 대피해 있는 것을 보노라면 더욱 허탈하기 그지없다.
더욱이 전세계적으로 예전보다 빈도도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잦아지고 강도도 더 높아지고 있는 지진을 주목하라! (마24:7) 태풍은 그나마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는 핑곗거리라도 있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 발생하는 지진에 대해서는 과학은 여전히 침묵하고 무기력할 뿐이다.
못 사는 나라 사람들, 특히 돈이 없어 땅값 싸고 지반도 안 좋고 비만 오면 침수되는 곳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먼저 무참히 당하는 것을 보면서, 소위 “도시 문명”에서 나몰라라 하며 사는 사람들은 부디 각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주여,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같은 나약한 소리도 그만 하고, 심판의 원인이 된 자신의 죄악부터 반성하고 제거해야 한다. 성금 모으고 자선행위 하는 것보다도, 거리 설교를 하고 죄와 심판을 경고하고 복음을 전하는 게 그들을 더욱 도와 주는 일인 이유!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모든 시상식은 장려상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심판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이 더욱 죄악을 향해 치닫는다면, 금상, 대상급의 심판을 받을 세상을 향해서는 나중에 훨씬 더 참혹한 환란이 예비될 것이다.
마 24, 눅 17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는 노아가 살던 때, 그리고 소돔에서 살던 롯 주변의 상황과 같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노아의 때가 어땠는가? 땅이 온통 부패하고 폭력으로 가득찼으며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과 결합하여 유전자가 변형된 거인, 반신반인의 괴물이 출현하던 때였다. 다윗의 시절 때까지 있었던 손발가락 여섯 개의 거인 역시 기원이 여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 롯의 때는 어땠는가? 역시나 만만찮다. 사람들이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때였고, 소돔의 악명은 주변 지역에까지 떨쳐지고 있었다. 특히나 동성연애가 만연하여 소돔 주민들이 낯선 남자들로 보이는 천사들과도 성관계를 가지려 했다.
오호라, 지금처럼 이 조건에 부합하는 때가 있을까? TV 프로와 영화는 온통 폭력과 성으로 가득하다. 아무리 음란 사이트, 성매매 같은 걸 근절하겠다고 한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으며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끊어지겠는가? 묻지마 살인, 왕따와 학교 폭력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애 키우기 무서운 세상이다. 또 모르긴 몰라도 아무런 법적 제제 없이 연구에만 전념하면, 인간 복제까지 조만간 실용화될 것만 같다. 인간의 유전자가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추세를 보고 성경이 말한 표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동성애자의 권리를 신장하는 일에 일부 정신나간 목사들까지 나서고 있다.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일대일 결혼의 의무를 지기 싫어하고 혼전 순결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긴다. 신약 시대 이래로 오늘날처럼 성이 상품화하고 문란해진 적은 없었다. 인간이 어쩌다가 짐승보다도 더 퇴화하고 저질이 됐나? 오늘날의 여권 신장, 남녀 평등은 사실 날씬하고 예쁜 여자, “아니면” 정말로 어지간한 일반 남자들보다 훨씬 똑똑한 소수의 슈퍼우먼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다.
사회의 질서, 기강이 문란해지고 무너진다. 예전의 상식이 지금은 안 통한다. 대신 돈과 쾌락으로 모든 게 통할 뿐이다. 이 배후에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있다. 이것만치 사람 정신 건강을 해치고 사회 기강을 문란케 하고 세상을 망쳐 놓은 것도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위 아래 질서, 그리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관념을 깡그리 망가뜨렸다.
절대적인 윤리관과 도덕관이 없이 남들 하는 대로 쫓아가는 사람만치, 사탄 마귀가 좋아하고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몸에 나쁜줄 뻔히 알고도 술· 담배를 하는 이유는 남들과 어울리고 뒤쳐지지 않으려는 상대적 이유 때문이다. 조직의 부정부패가 도무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주위에 남들이 다 몰래 해 먹으니까 자기도 죄의식 없이 거기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왕따 안 되려면!
그 ‘남’이 대체 누구인가? ‘남의 남’, ‘남의 남의 남’을 추적해 보면 결국 그 근원은 인간의 죄성이고 마귀이다! 마귀에게 놀아나는 거다. 재벌, 통치자들을 그렇게도 비판하는 당신은,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청렴 결백 지조를 지켰겠는가? 그럴 리가 없지. 그랬으면 세상이 이 모양 절대 안 됐다.
오늘날은 국민이 자국 통치자를 믿지 못할 뿐 아니라, 교사와 학생의 질서가 깨지고, 목사와 성도, 남편과 아내, 남녀 질서도 깨지고 있다. 노조와 고용주 사이에, 또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질서가 깨진다. 국론이 단합하질 않으며, 권위를 권위로 인정하지 않고 믿질 못해 사회가 엉망진창이 된다. 지금만치 여기에 부합하는 때가 어디 있으랴? 이건 꼭 대통령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의 영을 흐려 놓은 심판의 결과일 뿐이다.
사람 심성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좀더 예로 들자면 요즘 이슈화되고 있는 못박힌 고양이 같은 동물 학대를 들 수도 있고, 아이를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 낳는다고 하며, 낙태되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라 그래도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애를 낳겠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들 수 있다. 사람의 타고난 애정이 식고 있다는 증거이다. 잠 30:11-13, 딤후 3:1-7, 딤후 4:3-4, 마 24 읽어보라. 성경에 다 예고돼 있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총체적 무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근본 원인인 자기 죄를 회개하는 대신, 카리스마적인 해결사인 전세계 단일 정부를 출범시킬 것이다. 기업 CEO, 대학 총장도 능력만 있으면 외국인이고 자국인이고 가리지 않고 뽑는 게 요즘 세태이다. 하물며 그때엔 통치자까지 국적 구분이 없어질 것이다. 국가 관념, 애국심 같은 건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 추종자들에게는 안 통한다. 모든 게 개방되고, 사람들은 멸망의 아들 적그리스도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에게 경배하게 될 것이다.
사회만 망가지는 게 아니다. 그런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할 교회마저 거의 다 같이 망가지고, 종교계에는 각종 이단들이 판을 친다. 역시나 마 24에 기록된 대로 다 이뤄지고 있다.
성경을 지식으로 방어해야 할 신학자들이 오히려 성경을 비평하고 불신자들에게나 듣기 좋은 똑똑한 소리를 하고 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조하여 교회들을 천주교의 치맛자락 아래로 끌고가는데 여념이 없다. 교회는 대형화하면서 갈수록 돈을 사랑하고, 이미지 관리하면서 운영이 기업 운영 스타일을 따라가고 있다.
죄, 심판, 재림, 지옥, 십자가에 대한 뜨거운 설교, 기독교의 생명력이 담긴 “구식” 설교는 덩덜아 사라진다. 이미지 관리에 어긋나니까. 그 반면, 세상을 향한 공격적인 면모는 사라지고,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되고 부자되며, 하나님은 사랑일 뿐이라는 긍정적이고 입에 발린 소리만 해야 교인들이 모이고 헌금이 걷힌단다! 이런 미친!
특히나 한국 교회에 만연한 비성경적 기복 신앙과 은사주의들.. 주 기철 목사님 같은 우리나라의 신앙의 선배들이 보면 강대상을 뒤집어엎으며 불호령을 내리시지 않을까?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놈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신전의 동물들을 내쫓고 환전상을 뒤엎어버리며 분노하시던 우리 주님처럼!
그리고 어디 목사만 잘못인가?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쓴소리를 싫어하며 그런 세상적인 목사들에게 힘을 보태 주는 미지근한 신도들을 하나님은 속게 내버려 두신다. 19세기~20세기에 출현한 몰몬,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등등... 그리고 사탄숭배, 마법 따위도 한때는 음지로 숨어들었으나 지금은 다시 대놓고 활동하고 있으며, 각종 영화와 게임을 통해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
옛날엔 예수 믿다 재산을 몰수 당하고 목숨을 잃는 게 부지기수였다. 옛날의 신자들은 어차피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으니 믿을 게 주님밖에 없었다. 따라야 할 것,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했고, 옳은 것만을 향해 미친듯이 돌진하면 됐다. 오로지 자신의 믿음과 육체의 한계만이 문제될 뿐이었고, 그 정도 문제라면 하나님은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었다. 크리스천은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온몸이 불이 붙고 짐승에게 뜯기고 있는데도 찬송하며 평안히 순교하는 사람들을 보고 불신자들이 오히려 감동받고 크리스천으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무력에 의한 박해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격은 더욱 지능적이고 교묘해졌다. 이제 묻지마 식 탄압은 불신자들조차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걸 안다. 그러니 마귀는 아군 진영을 이간질시키고 적군을 아군으로 보이게 간첩을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숫제 싸우지도 않고 이기려고, 크리스천들을 교묘히 무장 해제시키고 있다.
즉, 성경에 대해 지식으로 불신을 심어 놓는다. 성경을 교묘하게 바꿔 놓는 이단들을 풀어놓는다. 이 세상을 영적 전쟁터가 아니라 살기 좋은 곳이라 부추기며 크리스천들을 배부르게 하고, 경계 태세를 해제시킨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낮추는 게 아니라 자기를 늘 드러내고 남을 경쟁에서 밀어내야 살 수 있게 세상을 자꾸 조인다.
자,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가만히 보고만 계실까? 아니다. 이런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무기도 추가로 주어졌다. 성경의 예언이 차츰차츰 이루어지고, 과학 기술의 발전 덕분에 오히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기도 더 유리해진 것이다. 말세가 가까워 오면서 성경의 비밀 역시 모두 풀려 가고 있으며, 덩달아 불신자들에게 대항할 우리의 무기도 더 강력해졌다.
순교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1세기 안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 믿었었다. 계 2-3의 일곱 교회가 갖는 교회사적 상징이라든가, 성경의 예언, 말세에 대해 지금 우리와 같은 지식은 결코 갖고 있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고 수재였던 다니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예언이 이제는 역사적 사실과 과학 기술의 추세를 통해 현대인들은 그럭저럭 해석할 수 있다. 단 12를 보라.
게다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다시 자기 땅을 되찾고 국가를 이룰 것이라는 예언은 당대의 성경학자들도 믿을 수 없었고 성경을 비웃는 불신자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엄청난 불신을 도로 비웃듯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준비도 다 끝났고, 부지만 확보되면 된다. 이렇듯 성경은 참으로 엄청난 책인 것이다.
전세계 인구가 2억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절엔 2억이나 되는 군대가 전쟁을 치른다는 성경 구절(계 9:16)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체를 전세계 인구가 불과 사흘만에 본다는 사실(계 11:9).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전세계’가 무슨 동네 똥개 이름이냐? 그런데 지금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텔레비전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놀랍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음질하겠고 지식이 증가하리라!” (단 12:4) 신약 시대 이래로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인간이 세계 방방곡곡을 빠르게 왕래하며 지식이 증가한 시대가 있을까? 20세기 초, 마차를 타고 다니며 유년기를 보낸 미국인들은 자동차와 비행기의 발명은 물론, 세계 대전과 사람이 달에 갔다오는 것까지 목도하였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 또 거기에다 컴퓨터, 인터넷,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는 인류의 생활 패러다임을 바꾼 발명임이 틀림없다.
인터넷이 아이들 인성을 망치고, 온갖 악을 통제할 수단이 없이 일파만파로 확산시키는 도구로 악용되고는 있으나 그 긍정적인 영향 또한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글도 인터넷이 전해다 준 것이다. 본인도 킹 제임스 성경을 알게 되고 지금과 같이 영적으로 자란 경로는 인터넷이며, 올바른 교회 역시 전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성경전서는커녕 성경의 책 한 권을 필사하는데도 며칠이 걸리며, 인건비는 둘째치고 종이값도 너무 비싸, 성경 하나 좀 구입해서 보려면 지금 우리 돈으로 수십만 원을 줘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널린 게 성경전서이고 특히나 컴퓨터와 인터넷의 도움으로 원하는 구절, 특정 단어가 나오는 부분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찾을 수도 있다. 이건 정말 성경 한 권 소지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했던 옛 사람들이 보면 까무러치지 않을까? 적군이 강력해졌으면 아군도 덩달아 강력해진 것이다. 이 점을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란다.
18, 19세기에도 수학, 과학, 음악 같은 학문의 발전이 절정이 달했으나, 그때에는 물리학자들조차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체는 존재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라디오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고, 전신기가 무슨 쓸모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사진을 찍히면 자기 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다. 이것을 보고서 과거 사람들이 우매했고,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자만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세상이 이렇게 과거의 전통적인 상식이 안 통하게 바뀌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장단점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결국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지 배후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배후”가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정말로 이것이 인간의 업적이 맞는지,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이 외계인들의 기술을 전수받아 폭발적인 과학 기술 발전을 이룩한 것인지, 세계 정부의 음모는 존재하는지 같은 건, 호기심으로 가볍게만 읽으면 된다. 무엇이 배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자는 어차피 이 세상의 자본과 권력을 쥐고 있는 신이다. 이 신이 원하기만 하면 온 나라를 복권 열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고, 게임만 하고도 남들보다 더 잘 살게 만들 수 있고, 예전엔 하찮은 직업이었던 춤꾼, 노래꾼이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게 만들 수도 있다.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직업 구조쯤은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는 법이다. 그들의 졸개, 하수인이 누구인지는 불문하고!
한 시대를 사는 사람이 다른 시대로 가면 기절초풍하듯, 모든 시대에 통용되게 기록된 성경을 우리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성경은 그 절대적인 중심에 있다. 하나님은 시대별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살게 하신다.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그리고는, 시대가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불문하고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는 성경이 지적하는 바에서 어긋남이 없었음을 하나님은 입증하실 것이다.
이렇듯,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간의 지식과 사고의 스케일은 극치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걸맞게 세상은 극도로 엉망진창이 되고, 거기에다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의 명목으로 특별히 강도를 높이신 질병과 자연 재해로 인해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최악의 시련을 겪을 것이며, 얼마 동안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까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을 앞두고 인류가 특히 극심한 시련을 겪는 시기 7년을 일컬어 대환란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 가지 희소식이 있다. 그 환란이 있기 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환란을 겪지 않고 먼저 하늘로 들려 올라가 주님을 만나뵙게 될 것이다! 이름하여 ‘휴거’이다. 도적이 아무도 모르게 몰래 집에 침입해서 값나가는 물건만 감쪽같이 쏙 빼 가듯, 주님께서도 대환란을 앞두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때에 자신의 신부인 구원받은 성도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데려가 버릴 것이다. 고전 15와 살전 4에 기록된 전지구적이고 전무후무한 대사건이다. 그리고 그냥 휴거되는 게 아니라, 닫힌 문도 그냥 통과하고 이 세상에서 셋째 하늘까지도 순식간에 갔다 오신, 시공간과 온도의 제약이 없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바뀐 채 휴거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 악이 난무하는 “엿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그 크신 팔로 거듭난 성도들이 세상을 역행하며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하고 보호해 주셨다. 그런데 이젠 도가 지나치니 하나님이 소극적으로 그러고만 계실 필요가 없이 직접 세상을 갈아엎어 버리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에 앞서 그 어마어마한 환란으로부터 제외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억대까지는 못 잡더라도 전세계적으로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비행기 안의 승객이 일부 사라질지도 모르고, 심지어 비행기 조종사가 사라지는 사람 중에 포함돼 있을지도 모른다. 생방송 TV 프로를 진행하던 사람, 잘 자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 전세계는 순간적으로 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한편, 휴거된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롬 14:10)에서 주님을 만나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한 회계 보고를 하게 된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를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므로 하늘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은 물론 아니다. 성경대로 살면서 주님을 위해 한 일이 많으면, 노벨 상이나 대통령 훈장보다 더 영화로운 주님의 칭찬과 보상, 또 그에 상응하는 왕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허비만 해 버린 사람은 책망을 받고 겨우 몸만 지옥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마귀 자녀였던 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180도 바꾸어 주었더니 한 게 고작 이거냐?” 살아 생전 그토록 사모했던 주님을 정작 직접 만났는데, 아무 준비도 안 돼 있어 이렇게 서로 민망한 꼴 나면 그 부끄러움을 어찌 감당할까!
그런데 성경 예언과 교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교회 성도들도 계 6-19의 환란을 모두 겪은 뒤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일명 “환란 후 휴거”를 주장하는 진영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
첫째, 대환란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포함한 불신자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진노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던가! 신약 성경 어디든 뒤져 보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진노(징계가 아님)가 임한다는 말이 있는지! 의인인 욥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큰 고난을 겪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은 건 결코 아니었다.
교회의 환란 후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환란이 무슨 천주교의 연옥 정도라도 되는줄로 아는 듯하다. 그러나 대환란의 목적은 교회 성도들을 연단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대환란기로 다가가며 갈수록 세상이 망가지고 성경대로 살기 어려워지고, 의인이 고난 받으며 못 살고, 물가 오르고 애 키우기 힘들어지는 것 자체가 충분한 연단이다. 거기서 그들이 완전히 연단되지 않은 것은 휴거된 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다 해명되고 정화될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신약 성경을 그동안 믿지 않아, 혼나도 싼 유대인들이야말로 초자연적인 대환란에 의한 뼈를 깎는 참혹한 연단을 거친 끝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진정한 선민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살전 1:10의 ‘진노’는 대환란이지 죽은 후의 지옥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은 이미 지옥으로부터는 건짐을 받았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 먼저 휴거된 에녹은 교회 성도들의 휴거를 예표한다. 소돔에다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려던 천사는 롯이 완전히 소돔을 빠져 나가기 전엔 유황불을 내리지도 못했다. 롯은 의인이긴 했지만 보상과 상급을 잃고 구원만 간신히 받는 크리스천의 예표가 아니던가.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 중에서도 세상적으로 살았던 성도들은 휴거 못 되고 남아서 대환란을 겪어야 한다는 말에 겁먹을 필요도 없다. 휴거는 구원의 확신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다. 하다 못해 사람을 지진과 해일로 심판하시기 전에 동물들조차도 먼저 대피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하물며 진노로부터 사랑하는 성도들을 먼저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 내지는 센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둘째, 만에 하나 환란 후 휴거가 맞다면, 신약 성경이 지금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환란기에 출현한 적그리스도의 면상을 보기 전에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맞다면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어야 하나? 주님 오심을 간절히 바라지 말고, 적그리스도의 출현부터 눈 부릅뜨고 살피고 경계하라는 말로 가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방의 천재 마귀가 성육신한 적그리스도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
가짜 휘발유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성분는 진짜 휘발유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외관상으로 가장 닮은 사람은 베드로도, 사도 요한도, 바울도 아닌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 6의 “흰 말 탄 자”를 19장의 예수님과 동일 인물인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만 봐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여기에 대해서 경고하고 “처음에 등장하는 그 예수는 이 예수가 아니니 속지 말라” 같은 구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딛 2:12-13의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은 아직 요원한 소망이어야 할 것이고, 빌 3:20-21, 빌 4:5 역시 좀 순서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휴거에 대한 얘기를 하면 좀 똑똑한 불신자들은 이렇게 응수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나면 네 말이 맞는 줄로 알고 예수 믿을게.”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는데 어찌하리!
살후 2:10-22를 보라. 하나님은 그렇게 양다리 걸치면서 지금 복음을 거부하는 약삭빠른 사람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서 그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만들 거라고 예고한다. 전세계에서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큰 혼란을 느끼고, 성경책을 펴기도 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세로 돌아가겠지만, 결국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건 그건 성경이 말하는 휴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집트의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고 이집트 군사들이 죽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게 되기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옥 간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지금 성경 말씀을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서 사람이 살아 나오더라도 절대로 안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이 사람의 마음을 두고두고 악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씹어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다가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악한 마음을 활용해서 거짓에 속게 만드신다면 이건 불에다 기름 붓는 격이 아니고 무얼까?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서 사람을 속게도 하시는 분이다. (왕상 22) 사람의 자유 의사를 마인드 컨트롤로 조종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사람에 대한 보호막을 확 놓아 버리고 그의 자유 의사를 최대한으로 발휘되게 함으로써 자기 꾀에 자기 스스로 넘어지게끔 조장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본인은 불신자인 당신이 그때에라도 정신 차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길 원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때 하나님이 보낸 미혹하는 영을 이길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본다. 아니, 적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속게 만드는 방편으로서 그 출현을 잠시 허락하신 존재라고 봐야 한다. 인간, 특히나 지금처럼 어려서부터 어려움을 안 겪고 자란 세대들은, 하늘이 노래지는 걸 경험하고 생존 욕구의 일부가 충족되지 못한 상태만 돼도 눈에 보이는 게 없고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지금이 가장 구원받기 쉬운 때이다. 지금 당장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믿기 바란다. 대환란기에는 믿음과 더불어 명백한 행위, 그것도 너무나 힘든 시기를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을 수 있고, 중도 하차하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밑지는 장사 하는 분이 아니다. 휴거라는 엄청난 성경의 증거가 계시된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가 존재한다. 구원받기 훨씬 어려워진다. 부디, 지금 당장 환란과 지옥 심판에서 피하는 티켓을 공짜로 받아 가기 바란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mark)와 이름(name)과 수(number)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아, 크리스천들은 계 4에서 이미 휴거되고 없으므로 이런 것들을 마주칠 일이 없는 고로, 이런 게 있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계 13을 읽어보면, 적그리스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오른손 손바닥이나 이마에다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짐승의 이름이나 숫자 중 어느 하나 이상을 갖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매매할 수 없게 한다고 나온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뒷부분에 나오다시피, 짐승의 표를 신체에 그렇게 받아 버린 사람은 지옥행이다. 엄청난 일이다. 따라서 대환란기에 구원 받으려면 짐승의 표 받길 거부하고 순교하거나, 굶어 죽거나, 오지로 가서 끼리끼리 식량을 자급 자족하며 생존해야 한다.
물건을 사고 팔 수 없다는 것은 경제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적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이 무엇이 되겠나? 컴퓨터가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껏 수~많은 성경 연구가들이, 짐승의 표란 바로 조만간 신분증과 각종 카드가 통합된 형태로 등장할 칩, 그것도 신체에 이식되는 칩이라는 주장을 해 왔다. 너무나도 심증이 가지 않는가! 유비쿼터스 시대를 앞두고 취급하기 불편한 현금은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 충분히 현실성 있다. 그래서 벌써부터 신용 카드나 바코드 같은 것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까지 있다.
그러나 나는 저런 예상이 이미 너무나 만연해 있는 이상, 이런 사람의 정서를 뻔히 아는 적그리스도가 진짜 짐승의 표는 완전히 뒤통수 치고 예상을 뒤엎는 것으로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왔다. 또 그뿐만이 아니다. 저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 수 없게 한다”에 아주 진하게 밑줄을 치고 강조하는데, 짐승의 표가 경제 활동과 직접적이고 독보적인 연관이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성경적으로 좀 문제가 있기도 하다. 보라.
요한계시록의 후반부에서 하나님이 그토록 진노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 일관되게 짐승, 즉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짐승의 표는 차라리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반역,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배가 전제된 후, 그 결과로 개인적으로 주어진 피부의 표식 같은 것이라고 봐야 말이 될 것 같다. 따라서 3번과 같은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짐승의 표가 전세계적인 유행이 되고, 그게 없는 사람은 겉보기로 바로 티가 나니까 “아니, 요즘 세상에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적그리스도님한테 경배도 안 하고 표도 안 받아?” 소리 들을 것이다. 뒤늦게 진리를 알고서 이 추세에 거부하는 사람은, 그때는 완벽한 왕따가 되는 건 물론, 심하면 목숨도 내놓아야 하게 될 것이다. 경제 활동을 못 하는 것은 오히려 딱 한 번 언급된 부가적인 사항일 뿐이다.
물론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스스로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리는 없다. 그가 자신을 스스로 칭하는 이름, 성경이 짐승의 이름이라 부르는 명칭은 따로 있을 것이다. 성경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기묘, 모사, 하나님의 말씀, 신실하신 이 등 여러 별칭이 있듯, 꼭 새로운 고유명사가 아니어도 적그리스도를 칭하는 이름은 있을 것이다. 차마 성경에 그대로 적기에 민망한 신성 모독적인 이름일 수도 있다.
본인은 한때 계 17:3을 보고 여자가 탄 짐승에 적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무엇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별 게 아니다. 로마 카톨릭을 예표하는 여자가 탄 짐승인 만큼, “교황 - 그리스도의 대리자”,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 같은 상식적인 타이틀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심히 노여워할 이름이요, 천주교가 생기기 전에 살았던 사도 요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 신성모독성에 까무러칠 이름이지 않을까. 짐승의 이름도 역시 비슷한 종류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짐승의 수, 즉 666이다. 이건 너무 유명해서 불신자들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육육육’이라는 번호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수효를 나타내는 ‘육백육십육’이라고 읽는 게 맞다.
“짐승의 수”야말로 정말 인간을 약올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이 직접 “여기 지혜가 있으니, 너희가 지각이 있으면 한 번 세어서 그 의미를 따져 보라”고 수수께끼를 내고 있고 있지 않은가! (계 13:18) 여기에 자극을 받아 글자를 수치로 바꾸는 갖가지 수법으로 히틀러, 컴퓨터 따위가 666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심지어 월드 와이드 웹인 www가 히브리 글자로 따지면 666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온 이 구절에 자극 받아, 다른 거 제쳐 두고 숫자놀음에 현혹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성경적이고 아무 근거 없는 숫자놀음에 초신자들이 실족하고, 성경보다 음모론 연구가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되고, 잘못된 종말론에 빠지고, 오늘날의 과학 문명에까지 괜한 겁을 먹고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 자체는 가치관에 중립적이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단지, 대환란기에 진짜 적그리스도가 실제로 나타났을 때, 휴거 후 뒤늦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중에서, 이 구절을 기억하고 “이놈이 적그리스도요!”라고 말하는 등불 같은 사람은 분명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그때까지 아쉽지만 이 구절은 잠시 덮어 두기로 하자.
휴거된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재림하신 예수님은 대환란기를 끝내고 이 땅에 천년왕국을 연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는 불못으로 던져지고, 사탄은 한동안 인간을 속일 수 없게 바닥 없는 구덩이에 결박된다.
아담이 범죄한 후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저주를 받아, 인간은 땀흘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됐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훨씬 더 물가 싸고 소비생활 하기 편한 못 사는 나라 가서 무슨 짓 하는지 살펴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 그 짓 못 하게 하려고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 저주는 지금껏 어떤 과학 기술로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담 이래로 땅에 걸렸던 저주가 풀린다. 오염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지구의 자연 역시 회복된다. 이미 변화된 성도들은 육체의 제약이 없어진 상태이지만, 그렇지 않고 대환란기를 통과한 사람들도 900년이 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6000년 역사가, 원칙이 안 통하고 의인, 착한 사람이 잘 살 수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악한 세상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과 그분의 성도들이 1000년 동안 이 땅에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공의로 통치하는 동안은 진정한 의로움이 현 세상에서 바로 실현되게 된다.
칼뱅주의 등 후천년주의 신학은 그 하나님 왕국(나라)을 교회가, 즉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꿔서 지금 당장 이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많은 오류를 범했다. 특히나 천주교가 이런 신학을 아주 좋아해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죽이고 고문했으며,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까지 심어 놓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요구는 안 하신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고문을 당하고, 더럽고 침침한 감방에서 쥐와 빈대에게 뜯기며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목이 잘려 죽고 화형 당했던 사람들이 이제 부활하여, 예수님으로부터 한 자리 얻어서 미국, 한국, 어디든 구역을 맡아 총독도 되고, 백부장도 된다. 그들의 상급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살아 생전에 주님을 위해서 핍박 받고 손해 보고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일들이 그때는 추억거리로 회자될 것이다.
천년왕국은 예수님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 성도들의 신혼여행 기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크리스천들이 이 지구상에서 합법적으로 거드름 피우며 사는 시대도 한 번쯤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의 보상은 확실하다. 딱딱 맞아 떨어진다.
절대권력이라고 말했다. 천년왕국이 투표와 다수결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세상, 전자 정부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천년왕국은 왕국이다. 예수님이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철장으로 전세계를 자기 뜻대로 다스린다. 철장이란 정감 있게 표현하면 쇠몽둥이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고, 저 사람이 유죄라면 유죄이다. 다만 인간 왕과의 차이는 그 말이 진짜로 100% 공의롭고 옳다는 것이다. 이때 예루살렘은 세계 중심이 되고, 세계 각국에서 하나님에게 경배하러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히브리어가 세계 공용어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거기까진 모르겠다.
그리고 천년왕국에서는 착해도 좀 착해 가지고는 안된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기억하는가? 예수님의 법이 바로 그 법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구약 율법보다도 더하다. 왼뺨 맞으면 오른뺨 돌려대고, 겉옷을 누구 불쌍한 사람이 좀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행동을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왜?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져 있다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그때는 사탄 마귀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때는 혜택도 많은 대신, 구원받으려면 의무도 훨씬 많아지고 강화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지금 믿기만 해서 그분의 의로 바로 쉽게 구원 받을래, 아니면 나중에, 눈으로 보이는 예수님 밑에서 온갖 선행으로 자기 의를 힘들게 직접 입증해서 구원 받을래?” 그 도박일 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천년왕국의 존재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겠다.
“너희들이 6000년 동안 나를 떠나서 너희 식대로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을 살아 봤지만 결국 만신창이가 됐으며, 나의 말, 성경은 변함없이 맞았음이 입증됐다. 이제는 너희도 내 식대로 딱 1000년을 살아 봐라. 특히나 옛날 에덴 동산 시절에 사탄이 출입이 허용되어 이브를 속였기 때문에 사람도 속은 것이라고 불만들 많구나. 지금은 땅도 에덴 동산 시절일 뿐만 아니라 사탄도 특별히 가둬 뒀다. 그러니 이제는 환경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핑계는 절대 댈 수 없다. 어디,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가 스스로 의로울 수 있음을 입증해 보아라.” (물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이 기간이 마음껏 쉬는 기간이다)
천년왕국이라는 낙원에서 벌어지는 하나님과 사람의 내기에서 중도 탈락하는 사람은 대단히 많을 것이다. 인간에 내재된 아담의 본성, 즉 죄성은 환경으로 바뀌는 게 당연히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철저하게 공의와 선이 통용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곧이곧대로 원칙대로만 하는 예수님의 절대 통치에 불만과 싫증을 느낄 것이고, 1000년 후 사탄이 잠시 풀려난 뒤에는 옳다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못 하고, 그냥 묻지마 반항인 셈이다. 그러나 인류의 이 마지막 전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탄의 세력의 패배로 끝나고, 그들에게도 이제 최후가 찾아온다.
인류에게 그토록 고통과 눈물, 시련을 안긴 원수 마귀는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성경은 이 불못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존하는 불”이라고 표현한다. 사탄과 그의 부하는 이 현 세상의 신일 뿐이지, 꼭 누가 말하는 것처럼 지옥에서 사람들을 고문하고 괴롭히기까지 하는 염라대왕은 아니다. 지옥에는 지옥의 열쇠를 가진 예수님(계 1:18) 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다. 물론 지옥도 뜨거운 불로 가득한 곳이지만 지옥 자체도 불못으로 던져질 것이고(계 20:14) 거기에 마귀도 던져지는 것이다. (계 20:10) 천 년 전에 먼저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가 던져져 있는 그곳에!
다음으로, 사람에게도 인류 최후의 심판이 거행된다. 아담 이래로 죄 가운데 죽은 모든 사람, 줄잡아 몇백~몇천 억에 달하는 사람, 또 이미 지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도 온몸이 화상으로 오그라든 흉측한 몰골을 한 채, 크고 흰 왕좌에 앉은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시대를 호령한 유명한 정치인, 백만장자, 연예인이라도 구원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었다면 한 치의 예외가 없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시작된 모든 죄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다. 성경에 혼의 소멸이란 없다. 100년, 만 년도 아니고 불못에서 영원히... ‘영원’이란 말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실감하기 바란다.
이미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통과한 성도들은 이 심판에는 참관인으로만 참석할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 역시 이 심판석에서 북받쳐오르는 슬픔에 다시금 울부짖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들 중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불못으로 던져지고 그들과는 이제 영원히 생이별을 하게 되므로!
나는 옛날에 주 기철 목사님에 대한 전기 만화를 보았다. 그 만화는, 주 목사가 감옥에서 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이제 본향 집에 오너라. 네가 피흘려 죄와 싸워 이기고 죽기까지 신실하였은즉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 (히 12:4; 계 2:10)
순간 나는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고, 이내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듭난 크리스천치고 저 장면에서 어느 누가 눈물을 쏟지 않을까!
그런데, 계 21:4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말은 저런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얘기가 아니다. 저런 눈물은 이미 옛날에 닦였다. 천년왕국 이래로 주 목사님 같은 사람이 저런 슬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은 없다. 그러니 계 20:11-15와 21 사이를 거치고 눈물을 흘릴 일이란, 생이별의 눈물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이별의 슬픔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운정 고운정 들었던 지구와 우주는 맹렬한 불로 원소 하나하나가 분해되어 없어질 것이다. (벧후 3:10) 원자폭탄이 발명되기 전엔 과학자들도 믿지 않고 비웃었던 그 구절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새 예루살렘 성에서 성도들은 황금으로 된 길을 거닐면서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다! (계 21, 22)
여기까지가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에 대한 시나리오이다. 요즘 소위 천국, 지옥을 보고 왔다는 간증은 90% 이상 성경과 어긋나는 사기이니 무시하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또 진짜로 셋째 하늘에 갔다온 경험이 있는 사도 바울(고후 12)의 신뢰성 있는 간증을 통해서만 하늘, 소위 말하는 천국에 대한 조명을 받기로 하자. 사도 바울은 천국을 보고 왔다고 뻐기고 으시대기는커녕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천기를 누설해?” 하는 기분으로, 체험을 한 후 무려 10여 년이 지나서 꼭 남 얘기 하듯이 조심스럽게 간증을 시작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의 자세이다.
크리스천에게는 길어야 7, 80년을 넘지 않게 사는 이 세상이 최악의 지옥이다. 물론, 정말 북한 같은 생지옥도 존재하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는 밥을 굶는 일도 없고 신앙의 자유도 마음껏 누리고 성경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조금 일이 뜻대로 안 되고 불행도 있지만 지옥 치고는 그래도 감사할 거리도 있고 지낼 만한 지옥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는 지금 이 누더기 같은 세상이 최고의 천국이다. 그러니 지금 온갖 나쁜짓을 해서라도 죽기 전에 쾌락 같은 좋은 거 누릴 건 다 누려야 한다. 얼마나 불행한가!
사정이 이러하니 크리스천들은 소망을 가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 다만, 아직은 천년왕국 이후의 이 모든 영광을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때이다. 육신의 욕망,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정말 별 거 아니다. 좀 고상하게 살자. 육신을 억제하고 죄와 싸워 이기고 하늘에서의 신분을 결정할 보상을 많이 만들도록 하자. 죄는 하나님의 능력마저 가로막는 무서운 독소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영에 속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자기가 처한 환경 투정은 무의미하다. 자기 주어진 환경에서 모든 것에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한 뒤, 성경대로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일만 찾아서 행하면 된다. 자기 혼자 자기가 당장 수긍할 수 있는 선함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멀리 보고 주님이 총체적으로 이루시는 선함을 바라봐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고 좋은 일 나쁜 일을 떠나 어떤 일이 일어나든,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통제 하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롬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