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로 보는 용연초등학교50년사>
1) 1960대 이전
• 1862년 황암제당 건립
• 1886년 1월 14일 용잠초등학교 기증자 이종만 출생
• 1932년 2월 20일 용연양조장 설립
• 1936년 조구재뻐등에서 한시 백일장 개최
•
(부록 1)용연초등학교 인근의 문화유산
차례
1. 신선산(神仙山)·신선바우
2. 처용암(處容巖)
3. 울주 목도 상록수림(蔚州 目島 常綠樹林)
4. 세죽패총(細竹貝塚)
5. 성암동패총(城岩洞貝塚)
6. 가리봉수대(加里烽燧臺)
7.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
8. 제승정(制勝亭)
9. 체오정(掣鰲亭)
10. 월성이종만공덕기념비(月城李鍾萬功德記念碑)
원래는 이 산을 함월산(含月山)이라고 불렀는데, 공원이 생기면서 신선산체육공원이라 명명하면서 흔히 신선산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수암동 주민들은 함월산 줄기의 봉산(封山)이라 부르며 이 산의 정상을 이루고 있는 바위를 신선바위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 2008년 5월에 농협울산지역본부에서 지어 남구청에 기부한 신선정(神仙亭)이 세워져 있다.
옛날 신선들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하여 신선산, 또는 신선암산(神仙巖山)이라 한다. 또 이 산 정상의 바위를 신선바우, 또는 신선암이라 한다. 이 지명은 선암동이라는 동 명칭으로, 신선여자고등학교에 고스란히 존재한다.
신선산 정상에는 한자로 ‘神’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옛날에 어떤 마음씨 착한 사람이 신선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마침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지게를 벗어놓고 바둑을 서너 판 두는 동안 구경을 했다. 해질녘이 되자 나무를 해서 집에 가야지 하고 지게를 짊어지려고 그것을 만지니까 파삭 삭아 있었다. 또 도끼는 있는데, 잡으니까 자루가 팍 썩어 있었다. 그는 문득 자기의 수염을 살펴보니 새까맣던 수염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가 마을에 내려와 자기 집에 갔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서로 자기 집이라고 주장하다가 차근차근 따져서 계산을 해 보니 결국 본인이 집 주인의 고조부였다고 한다.
한편 중구 성안동에는 이 ‘신선바우’를 바라보고 의연하게 서 있는 바위가 있었다. 주민들은 그 바위가 장군 같다고 하여 ‘장군바우’라고 불렀다.
옛날 신선바우가 아름다운 선녀 같았다. 두 바위가 늘 마주 바라보다가 서로 정이 들게 되었다. 혼담이 이루어져 ‘장군바우’가 ‘신선바우’ 있는 곳으로 장가들게 되었다.
‘장군바우’가 장가드는 날이 다가와 분주하게 서둘렀다.
이때 한 여인이 빨래를 하다가 주위가 떠들썩하여 귀를 기울여보니, ‘장군바우’가 ‘신선바우’에 장가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듣고 그 여인이 무심중에,
“얄궂어라, ‘장군바우’도 장가가는가 배? ”
라고 말해 버렸다.
그 한마디 말이 그만 여름철의 서리가 되어 ‘장군바우’가 굳어 버렸다. 이때 그 ‘장군바우’는 그 여인을 끌어당겨 그만 깔고 앉아 버렸다.
2. 처용암(處容巖)
윤홍명(尹鴻鳴)의『화암실기(花岩實記)』에 대룡암(大龍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성동 산 668-1번지인 처용암은 넓이 622㎡로 신라 때 처용설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명당자리가 있어 이곳에 묘를 들이면 부자가 되지만 마을은 망한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한국전쟁 때 참전한 이 마을 장정들이 거의 전사하여 수상히 여긴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수색한 결과 몰래 묘를 들인 것이 확인되어 파내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 주변엔 미역, 진저리, 몰 등의 해조류와 해삼 등이 풍부했다.
3. 울주 목도 상록수림(蔚州 目島 常綠樹林)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산13번로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모양이 동물의 눈(目)처럼 생겼기 때문에 목도(目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섬의 면적은 15,074㎡이고 상록수로 덮혀 있는데, 이 상록수들은 울산의 자연과 한반도의 난·온대 기후를 대표하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 섬에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다. 신라 때는 이 섬에서 이 섬에서 대나무를 길렀다고 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기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대나무는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등 상록수들이 무성하여 천연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동백나무가 특히 많기 때문에 근처에서는 동백섬, 혹은 춘도(椿島)라고 부르기고 한다.
이 목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실화(實話)가 태종실록에 실려 있다. 이를 용연초등학교 8회 졸업생인 김진곤이 2008년 5월 12일(월요일) 울산매일신문에 <개운포에 빠져죽은 기생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태종실록』에 익사자의 정상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지울주사(知蔚州事) 이복례(李復禮)를 선주(善州. 지금의 경북 선산)로 귀양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경상도 관찰사가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복례에 의하면 염장관(鹽場官) 강유(强愉)가 전 감무(監務) 김양보(金陽普)를 청하여 기생과 종을 각 5명씩 거느리고 목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배와 함께 물에 빠졌다고 했다.
태종은 기생 5명이 함께 탔다면 수령이 알지 못하고 강유만이 잘 놀았겠느냐며 노하여 말했다. 이어 수령도 실제로 참여하고 모르는 체한 것이니 말을 꾸며대고 속인 그 죄는 더할 나위없다고 했다.
좌우에서 이렀게 아뢰었다. 신(臣) 등이 들은 바로는 그 뿐이 아니라 죽은 자가 많은데도 수령이 숨기고 보고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임금이 내 생각에도 거짓이라 짐작하였다.
이어서 이복례를 붙잡아 목에 칼을 씌우고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데려오되,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윽고 이복례를 국문했는데 이렇게 자백했다. 김양보가 강유와 더불어 만호(萬戶) 정사빈(鄭思賓)을 목도로 불러 놓고 기생과 풍악으로 하루 종일 술을 마셨는데, 이복례는 정사빈과 함께 어선을 타고 돌아오고 김양보와 강유는 기생과 종을 거느리고 작은 배를 타고 오다가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죽은 자가 10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복례의 죄가 법령에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과오로 인명을 살상한 죄를 물어 선산으로 귀양 보내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복례의 귀양지는 선산이 그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3일 만에 ‘해진(海珍)’, 즉 지금의 전남 진도로 바뀌게 된다.
사간원 사헌부에서 만약 울산의 백성들이 그가 고향에서 편안하게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속에 분통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 국가의 법령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간언해 임금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로부터 약 1년 후에 태종은 이복례를 포함하여 6명을 용서하고 두 달 후에 고신(告身. 직첩)을 주도록 명함으로써 이복례는 명예 회복을 하게 된다. 이로서 조선 태종 때 발생한 개운포의 익사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원래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필자가 일부를 생략한 것을 생각하면 그 당시에 큰 사건인 것은 틀림없다.
김종직의 『점필재집』에는 이 지방 사람들이 이르기를 목도 안에는 뱀이 많은데, 김양보가 놀이할 때 뱀 한 마리가 나온 것을 죽였다가 이 변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지은 ‘동백도(冬柏島)’라는 한시가 전해오는데, 후반부만 인용하기로 한다.
(상략)해마다 꽃피는 계절이 오면 속절없이 명지(冥紙)를 사라 올려 학성 고을 천년 한을 기생들에게 다 실어 보내네, 이처럼 그는 개운포에 빠져죽은 기생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4. 세죽패총(細竹貝塚)
황성동 620번지 일원에 있는 패총으로 세죽나루 터 일대이다.
동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의 형성 기간은 탄화물을 분석한 결과 BC 5,700~5,100년에 해당되어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패총 가운데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유적의 층위는 13개로 구분되며 크게 4개의 층으로 통합된다. 패총에서 확인된 유구는 둥근 모양의 구덩이로 총 18기가 확인되었다. 낚싯바늘과 석부, 작살, 투박조개로 만든 팔찌 등의 유물과 멧돼지, 사슴, 여우, 고래, 꿩, 참돔, 감성돔, 상어, 숭어, 홍합, 가리비, 피조개, 우럭 등의 자연유물이 출토되었다.
다
5. 성암동패총(城岩洞貝塚)
성암동 451-4번지 일원으로 2000년 11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다
성암동패총은 신석기인들의 생활 폐기물인 조개껍데기와 짐승뼈 물고기뼈, 석기나 토기의 파편 등이 남아 있는 유적으로, 이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과 당시의 자연 환경 등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습된 유물로는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돌도끼((石斧), 그물추(漁網錘), 돌고래뼈, 피뿔고둥, 참굴, 떡조개 등이 있다.
이 패총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앞으로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면 이웃에 있는 황성동 세죽패총과 온산공업단지에 있는 우봉리유적과 함께 울산 지역의 신석기시대의 문화상과 한·중·일 3국의 문화적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6. 가리봉수대(加里烽燧臺)
봉대산 정상인 남화동 산39-1번지에 있었던 봉수대이다. 현재 이 봉수대는 SK가스 울산기지고압가스 시설 보호구역에 위치하고 있다.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너비 8m, 높이 7.5m, 지름 25m의 봉수대로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425년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 조선 전 시대의 각종 울산읍지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봉수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이 봉수대는 남쪽으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의 하산(下山)봉수대에, 동쪽으로 동구 화정동의 천내(川內)봉수대에, 북쪽으로는 관문성 동단에 있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대점(大岾)봉수대에 응신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남쪽으로 하산봉수대까지 23리 17보, 동쪽으로 천내봉수대까지 21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봉수대는 왜구의 출몰이 잦은 동해안의 군사정보를 전달하는 첨병 역할을 했던 곳이다.
현재 1960년대 중반부터 1998년도까지 30여 년 동안 군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정상에는 육안으로 보아 봉수대의 흔적은 볼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하게도 동남쪽에 이 봉수대를 보호했던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름이 약 8m의 토벽(土壁)으로 된 둥근 모양의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유적 한가운데에 지름 약 2m, 높이 약 2m의 등근 기둥 모양의 흙으로 된 구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 옛 용잠초등학교와 용연초등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였던 이곳이 과거에는 군부대에, 지금은 특정 기업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은 출입을 못하는 곳이 되었다.
개운포성지는 성암동 610번지 일대에 있는 성으로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지지자료』에 한자로 [선소성(船所城)]으로 기록되어 있다.(75쪽)
개운포성은 해발 60m 정도의 구릉과 전면에 펼쳐진 갯벌의 경계 평지에 축조되어 있으므로 평지와 산지의 특성을 모두 갖춘 평산성(平山城)이자 포곡성(包谷城)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은 체성(體性), 문지(門址), 치성(雉城), 옹성(甕城), 해자(垓字), 건물지(建物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의 영성이 있던 해군 성터이다. 비슷한 시기에 수군만호의 진성이 여기에 있었다.
이 성은 돌로 쌓은 내성과 흙으로 만든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성이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 해자(垓字)를 둘렀다.
개운포에는 1656년(효종 7년)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군함을 만들고 정박시켰던 선소가 있었다. 지금도 이곳을 선수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때 선수는 선소에서 나온 말이다.
개운포성의 발굴조사는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에서 현재 2차까지 이루어졌다. 1차 조사는 2002년 3월 1일부터 6월 27일까지 이루어졌는데, 동문지, 서문지, 남쪽 체성 2곳을 대상으로 하였다. 2차 조사는 북문지, 남성벽(南城壁), 해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번 조사로 측량도를 계측한 결과 성의 둘레가 1,264m, 면적 102,919㎡로 확인되었다.
한편 남구청의 주관으로 2010년 9월부터 12월 말까지 이 성지를 한 바퀴 돌아보는 탐방로를 조성하였다. 이와 함께 주위에 산재하는 지명들에 대한 33개의 안내판을 설치하여 탐방객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남문지는 지표에서 윤곽을 찾기가 어렵지만 남쪽 체성의 가운데에 위치할 것으로 보이며 개운포성지의 정문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2차 조사 결과 위치와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남문지 근처 성벽 면석(面石)에「 南村 乙(?)未四二九」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성곽의 축조와 관련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누각이나 동문지 인근의 개운포에 있었던 제승정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동문지 서쪽에 있는 구릉부(일명 : 객사먼디)에는 북문지 남쪽 구릉 일대와 함께 기와, 백자, 석재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영성(營城)의 운영에 필요한 건물지가 위치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
다리골, 도치골, 황새골 등에서 나무와 곡식을 이고 지고 진등대비알을 넘어와 쉬는 곳이었다. 북문지에 편편한 바위가 넓고 높이가 알맞아 머릿짐을 내려놓았다가 혼자 다시 이기가 편했다.
서문지는 개운포성지의 서쪽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남쪽과 북쪽의 성곽보다 3-4m정도 낮게 잔존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水」字 銘 磁器와 기와를 비롯하여 백자(白磁) 편 동·식물 유체(遺體), 목기(木器) 등이 수습되었다.
한편 개운포성지에 2010년에 탐방로를 개설한 바 있는데, 그때 개운포성지 주위에 33개의 안내 표지판 해설을 용연초등학교 8회 졸업생인 김진곤이 집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깨불락
‘깨불락’은 큰동네의 마을 입구를 가로질러 흘렀던 개울 앞이라는 뜻이다. 이 개울은 동쪽의‘큰동지골’,‘작은동지골’의 물과 북쪽의‘진실’,‘맨안골’, 서쪽의‘해심골’,‘갓골’의 물이 합쳐‘우직골’로 모여 흐르던 곳이다. 또 북쪽의‘개와장논골’,‘다리골’,‘옹당새미골’과 서쪽의‘도치골’과‘황새골’의 물이 모인‘한지골’의 물도 한꺼번에 모여들었던 곳이다.
이곳의 물은 모두 개운포(開雲浦)로 흘러들었다.
2)동밖(東門外)
‘동밖’은 개운포성에 있었던 동문의 바깥쪽이란 뜻이다. 이는 동문 밖이 줄어 생긴 지명이다. 이곳은 개운포성 동문 터의 동남쪽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명은 북문 안에라는 뜻인‘북문안게’와 안쪽과 바깥쪽으로 대비된다. 이곳은 큰 나무들과 공장들이 없을 때는 지대가 높아‘개운포(開雲浦)’에 들어온 적선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던 곳이다.
3)개운포성 동문(東門) 터
동문 터의 발굴 결과 이곳에서 기와가 많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누각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누각이 사찬 읍지인 <학성지(鶴城誌·1749)> 등에‘개운포(開雲浦)’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제승정(制勝亭)’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동문 터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甕城)이 축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밀양장흥고(密陽長興庫)’라고 새겨진 분청사기 등이 발굴되었다.
4)객사먼디(客舍--)
‘객사먼디’는 개운포성 동문의 안쪽에 객사(客舍)가 있었던 등성이란 뜻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객사란 조선시대에 공적인 업무를 위해 방문한 관리들이 잠자는 숙소를 말한다.
이곳에서 기와, 백자, 석재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발굴조사가 된다면 개운포성의 운영에 필요한 건물 터를 확인할 가능성이 많다.
5)동북쪽 해자(垓子)
해자는 성벽 주변에 호(壕)를 파거나 둔덕을 만들어 적을 막기 위한 시설물이다.
물이 있을 경우에‘해자’라고 하고, 물이 없는 경우에‘황(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황’도 해자라고 부른다.
동쪽의 해자는 깊이가 체성의 높이를 기준으로 하면 6미터 이상이다.
이곳 해자는 경사면에 설치되어 있는데, 파낸 흙으로 외성을 쌓아 깊이를 극대화하였다.
6)동북쪽 치성(雉城)
치성은 적의 접근을 빠르게 관측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이다.
이 치성은 동문 터와 북문 터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양쪽을 훤하게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개운포성에는 치성이 이곳을 포함하여 서북쪽과 남서쪽에 세 곳이 있다.
7)북봉산(北峰山)
‘북봉산’은 성암동의‘본동네’북쪽에 있다고 하여 일컫는 지명이다.
이 산은 개운포성의 동문 터에서 북문 터 체성(體城) 안쪽에 잇대어 있는 넓은 곳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곳은 주민들이 옮겨가기 전에는 산과 밭이 함께 존재한 곳이다.
8)개운포성 북문(北門) 터
북문 터는 발굴조사 전부터 지표에서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옹성(甕城)의 일부를 절개해 길을 내어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 결과 이 주변에서 많은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누각 시설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은 반달 모양의 옹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동문 터와 닮아 있다.
9)북문안게(北門內)
‘북문안게’는 개운포성에 있었던 북문의 안쪽이란 뜻이다.
이 지명은 동문의 바깥쪽이라는 뜻인‘동밖’과는 정반대의 위치이다.
이 성 안에는 2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과 개운포성의 추정 남문지에서 시작되는‘부채골’이다.
이 골짜기의 빗물은 모두 추정되는 서문 터로 모여‘외황강(外隍江)’으로 흘러들고 있다.
10)진등대비알(長嶝---)
‘진’의‘질다’는‘길다’의 울산 사투리이고,‘등대’는‘등성이’의 울산 사투리이다. 또 마찬가지로‘비알’은‘비탈’의 울산 사투리이다.
이곳은 개운포성의 북문 터를 기준으로 하면 북쪽을 향해‘한지골’과‘황새골’이 만나는 지점까지 내려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은‘다릿골’,‘돋치골’,‘황새골’,‘개와장논골’에서 논일을 하거나 나무를 해 올 때 경사가 심해 이렇게 긴 지명이 생겼다.
11)짱버듬
‘짱’은‘장(長)’의 된소리로 추정되며, 접두어로 길다는 뜻이다.
‘버듬’은‘버덩’의 울산 사투리로 높고 편평하여 나무는 없이 잡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한다.
이곳은 개운포성의 북문 터에서 북서쪽으로 나 있는 길로 곧장 가면 오른쪽에 있었다.
‘짱버듬’은 주민들이 삼월 삼짇날에 화전놀이를 하거나 용연초등학교의 소풍 장소로 가끔씩 활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은 면적이 넓어 수군들의 군사 훈련 장소로 추정된다.
12)서북쪽 해자(垓子)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의 발굴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서쪽 해자는 동쪽 해자보다 얕고 쌓은 방식은 동쪽의 해자와 같다
이곳의 해자는 체성(體城)에서 10~15미터 정도로 넓게 조성되어 동북쪽 해자와는 차이가 있다.
개운포성 북문 터의 서쪽 체성부터 해자까지 넓은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다.
13)서북쪽 치성(雉城)
치성은 적의 접근을 빠르게 관측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이다.
이 치성은 개운포성의 서북쪽에 위치하여‘개운포(開雲浦)’와 ‘외황강(外隍江)’을 훤하게 관측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개운포성에는 치성이 이곳을 포함하여 동북쪽과 남서쪽에 세 곳이 있다.
14)외황강(外隍江)
‘외황(外隍)’은 일반적으로 중구 반구동의‘내황(內隍)’의 대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외황’은 개운포성의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에 물이 고이지 않는 황(隍), 즉 해자가 남아 있어 성 밖의 해자라는 뜻으로도 보기도 한다.
이 강은‘문수산’에서 발원하여‘개운포(開雲浦)’에 이른다.
이 강을 일명‘처용강(處容江)’이라고도 한다고 구술조사가 되어 있다. 이는 개운포의 처용설화와 관련된 것이다.
15)추정 개운포성 서문(西門) 터
이곳은 기존의 자료에서는 서문 터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성 안의 물을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수로(水路) 시설과 건물 터가 있는 구조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서문 터인지, 물구멍(水口) 시설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추가로 발굴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이곳에서‘수(水)’자(字)가 새겨진 자기와 기와를 비롯하여 백자 조각, 동물과 식물의 유체(遺體), 나무그릇 등이 수습되었다.
16)수구넘
이유수의 <울산지명사>에는‘북문안게’에 내린 빗물이 모두 추정하는 서문 터로 모여들어 물구멍(水口)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수구넘’은 물구멍이 있는 너머라는 뜻이다.
그러나 개운포성의 서문을 뜻하는‘서구(西口)’가 ‘수구(水口)’로 와전된 것으로 보아 서문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이곳은 추정하는 서문 터 일대를 통틀어 일컫는 지명이다.
17)남서쪽 치성(雉城)
치성은 적의 접근을 빠르게 관측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이다.
이 치성은 개운포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남쪽과 서쪽을 훤하게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개운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하다.
개운포성에는 치성들이 이곳을 포함하여 서북쪽과 동북쪽에 세 곳이 있다.
18)영시끝(營西串)
‘영(營)’은 개운포영성을 말하고,‘시’는‘서(西)’의 와전으로 보아 개운포영성의 서쪽 끝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끝’이란‘곶(串)’을 말한다. 곶은 바다 쪽으로 돌출한 육지 부분이라는 뜻이다.
성암동에는‘영시끝’과‘가시끝’이라는 두 군데의 곶(串)이 있었다.
이곳은 남쪽으로는‘개운포(開雲浦)’, 북쪽으로는‘외황강(外隍江)’이 한눈에 보인다. 따라서 개운포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반드시 감시를 해야 할 곳이다.
19)남쪽 성벽
이곳을 남문 터로 추정하고 발굴조사를 했다. 그러나 좌우의 성벽과 유사한 구조로 이어지고 있어 남문 터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곳 성벽을 쌓은 방식은 회색 뻘층을 고른 후에 기초석을 깔고 그 위에 한 단의 기단석을 쌓았다. 다시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면서 뒷채움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내탁식(內托式) 축조 방식을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바깥으로 약 5미터의 지점에 해자(垓子) 시설이 확인되었다.
20)남쪽 성벽 명문(銘文)
추정했던 남문 터 서쪽 성벽에‘··南村 乙 (?)未四二九··’라고 새겨져 있다.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의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남촌은 부산의 ‘해운포(海雲浦)’에 경상좌수영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남촌과 이 성의 남쪽에 있는‘나무나깍단(南村)’과의 관계는 과제로 남는다.
명문의‘미(未)’ 자(字)가 간지(干支)의 한 글자라면 성을 쌓은 날짜일 가능성이 높다. 또‘사이구(四二九)’라는 글자는 성곽을 축조한 거리를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21)석대(石-)
석대’는‘석둑’이 와전된 것으로 돌을 쌓아 만든 둑이란 뜻이다.
‘개운포(開雲浦)’의 연안 주민들이 대체로 반농반어로 생계를 유지한 반면에 성암동 주민들 거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극소수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이른바‘방배’ 라고 부르는 소형선을 타고 어업에도 종사했다.
이곳은 그들이 배를 대던 나루터였다.
22)가시끝
‘가시끝’은 개운포성 일대에서‘개운포(開雲浦)’를 향해 가장 멀리 뻗어 있었기 때문에 수군들이 반드시 감시를 해야 할 곳이었다.
따라서‘감시(監視)’에서‘가시’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되고, 끝은 곶(串)을 말한다. 곶은 바다 쪽으로 돌출된 육지 부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곳이 흡사 가시처럼 튀어나온 지형이라고 하여 생겨난 지명으로도 볼 수 있다.
성암동에는 곶이 두 군데 있었는데,‘가시끝’과‘영시끝’이다.
23)나무나각단(南門---)
‘나무’는‘남문(南門)’의 와전이고,‘각단’은‘마을’의 울산 사투리이다.
따라서 남문 앞에 있었던 마을을 뜻한다.
이곳은‘산디먼당’의 북쪽 일대에 잇대어 있었다.
이 지명은‘동밖(동문 밖에)’과‘북문안게(북문 안에)’와 함께 개운포성의 성문(城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성암동의‘본동네’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24)산디먼당(山嶝--)
‘산디’는‘산등(山嶝)’의 와전이고,‘먼당’은‘등성이’의 울산 사투리이다.
이곳은 개운포성 남쪽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던 등성이이다.
이곳은 동쪽에‘뒤섶’, 서쪽에‘석대’라는 지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남쪽에는‘가시끝’, 동북쪽에‘나무나각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산디먼당’의 생김새가 마치 자라가‘개운포(開雲浦)’를 향해 진입하려는 것 같아 개운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체오정(掣鼇亭)’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개운교의 동쪽 다릿발이 이곳에 해당된다.
25)염밭둑(鹽田-)
염밭’은‘염전’을 말하고, 여기에‘둑’이 합쳐진 지명이다.
그러나 뒷부분이 비록‘둑’이 붙어 있지만, 주민들은 성암동의 남쪽에 넓게 펼쳐져 있었던 개펄 일대로 인식하고 있다.
조선 시대 수군들은 염전에도 종사해 왔고, 주민들도 염전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지명과‘외황강(外隍江)’의 건너편에 있었던‘마채염전’과의 관계는 과제로 남는다.
26)웃각단
‘웃’은‘위쪽(上)’이라는 뜻이고,‘각단’은‘마을’의 울산 사투리이다.
‘웃각단’은‘본동네’의 북쪽, 즉 개운포성의 남서쪽 체성(體城) 안쪽에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남구 남화동처럼‘웃각단’이 있으면‘아랫각단’도 있다. 그러나 성암동에서는‘아랫각단’은 조사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웃각단’의 위쪽은‘부채골’의 아래쪽과 맞닿아 있다.
27)웃각단새미
성암동의 ‘웃각단’에 있었다고 하여 일컫는 우물이다.
‘본동네’에는 주민들이 함께 이용한 우물로‘웃각단새미’를 비롯하여‘객사새미’,‘깨불락새미’,‘새새미’,‘큰새미’등 5곳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 우물이 수량이 가장 많고 물맛이 좋아 주민들이 많이 이용했다.
지금은 윗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남아 있다.
28)큰새미
큰 우물이라고 하여 일컫는 지명으로 주로‘영시끝’의 주민들이 이용했다.
‘본동네’에는 공동 우물로‘큰새미’를 비롯하여‘웃각단새미’,‘객사새미’,‘깨불락새미’,‘새새미’ 등 5곳이 있었다.
그 중에서‘큰새미’와‘웃각단새미’가 남아 있는데,‘웃각단새미’에 비해 깊지 않다
현재 식수로는 이용할 수 없다.
29)부채골
‘부채골’은 생김새가 부채처럼 생긴 골짜기라고 하여 일컫는 지명이다.
부채는 손에 쥐고 흔들어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덜거나 불을 일으키는 데 쓰는 도구이다.‘골’은‘골짜기’의 줄임말이다.
보통 골짜기는 사다리골인데, 이곳은 반대로 골짜기를 올라갈수록 양쪽으로 넓어지는 지형이다.
개운포성 안에는 골짜기가 두 군데 있는데,‘부채골’과‘부문안게’이다.
30)선수제당(船所祭堂)
‘선수’는 배들 만들고 수리하던‘선소(船所)’가 와전된 것이다. 성암동을 ‘선수’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1928년에 이 제당의 이름을‘오황사(五黃社)’라고 지었는데, 주민들은 단순하게‘제당’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해마다 정월 15일에만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러다가 6.25전쟁 중 전쟁에 나간 자식들이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기 위해 칠월칠석에도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31)점뿐나케(店房--)
‘점뿐’은‘점방(店房)’의 와전이다.‘점방’은‘가게’라는 뜻이다.
따라서‘점뿐나케’는 점방 앞에, 즉 가게 앞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지명의 뜻 그대로 구멍가게가 두 곳이 있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정보를 교환하고 여론을 형성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가면‘나무나각단’이 있었다. 또 마을의 주요 통행로인 서쪽의 골목길을 가면‘웃각단’과‘영시끝’을 만나게 된다.
32)개운포(開雲浦)
통일신라시대 49대 헌강왕이 지금의‘개운포(開雲浦)’에 오게 되었다.
낮에 물가에 쉬고 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 버렸다.
왕이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용의 변덕이오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했다.
그러자 바로 구름과 안개가 흩어졌다고 하여‘개운포’라고 했다.
그 절은 영축산의 망해사(望海寺)이다.
33)추정 체오정(掣鼇亭) 터
사찬 읍지인 <학성지(鶴城誌ㆍ1749)>에‘체오정’이‘개운포(開雲浦)’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세종 병술년(1466)에 수군절도사 홍익성(洪益誠)이 처음 지었다. 그 뒤 절도사 이소(李昭)가 고쳐 지었으나 또 없어졌다고 했다.
여기서‘세종’은‘세조’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체오정’은 그 위치를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홍성민(洪聖民)이‘개운포’를 읊은 한시(漢詩) 등의 기록과 자라를 닳은 지형 등을 볼 때‘산디먼당’ 위쪽으로 추정된다.
8. 제승정(制勝亭)
제승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체오정(掣鰲亭)과는 다르게 개운포(開雲浦)에 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학성지(鶴城誌)』에는 제승정이 개운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조 32년(1832)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제승정은 체오정과 함께 지금은 없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제승정의 위치는 개운포성지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딴 곳에 제승정과 같은 이름을 지닌 정자가 있었는데, 경주읍성과 제주성에 있는 제승정은 성 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개운포에 있었던 제승정은 최소한 성 안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개운포성 동문 안쪽의 평탄 지대에 할석이 확인되고 동문지 발굴조사에서 기와가 많이 출토되어 누각 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많아 객사(客舍)가 있었던 인근으로 추정된다.
이 제승정을 소재로 지은 한시가 전해오는데 다음과 같다.
제승정(制勝亭)
이곡(李穀)
地勝仙遊密
雲開世路通
依俙羅代兩仙翁
曾見盡圖中
舞月婆娑白
欲尋遺跡杳無窮 半帆風
경치 뛰어난 땅에 신선들 빽빽이 놀았고
구름이 개고 세상길이 통했네.
어렴풋이 보이는 신라 때의 두 신선
일찍이 보았던 그림 속의 모습이네.
달빛 속에 추는 춤은 흰 옷자락이 너울거리고
머리에 꽃은 흐드러지게 붉은 빛이네.
남은 흔적 찾으러 해도 끝없이 어둡고
바람에 반쯤 부푼 돛단배를 불러 기다리네.
제승정(制勝亭)
정포(鄭誧)
暎島雲光煖
連江水脈通
人言昔日處容翁
生長碧波中
草帶羅裙緣
花留醉面紅佯
狂世意無窮
恒舞度春風
섬에 비치는 구름 빛은 따뜻하고
연이은 강물은 맥처럼 통한다.
사람들 말이 옛날 처용 옹이
푸른 파도 중에 나고 자랐다고 하네.
풀 띠 두른 치마는 푸르렀고
꽃이 머문 것처럼 취한 얼굴은 붉네.
미친 척 세상을 가지고 놀 뜻이 무궁하여
항상 봄바람 타고 춤을 추었네.
9. 체오정(掣鰲亭)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체오정은 개운포에 있는데, 천순(天順) 병술년(丙戌年)에 수군절도사 홍익성(洪益誠)이 세웠고, 뒤에 절도사 이소(李昭)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학성지(鶴城誌·1749)에는 체오정을 세종 병술년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기록이 모두 정확하지 않지만 종합해 보면 세조 12년에 지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체오정에 대한 기록은 순조 32년(1832)에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기록이 같은데, 다만 체오정이 제승정과 함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당시 체오정의 위치는 현재로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홍성민(洪聖民), 전식(全湜), 김상헌(金尙憲) 등의 개운포를 읊은 한시(漢詩)에서 그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다. 특히 홍성민의 한시 중에 ‘평평한 자라 등에 아직도 백 척 대(臺)가 남았는데’(하략)라는 대목에서 지형의 생김새로 보아 성암동 앞에 홀로 우뚝 서 있었던 산디먼당을 체오정의 위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산디먼당을 동쪽이나 서쪽에서 바라보면 흡사 거대한 자라 한 마리가 방금 뭍에서 바닷물에 앞발을 내민 형국이 개운포 연안에 이곳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은 개운교의 가설로 성암동 쪽 교각 부지에 편입되었다.
10. 월성이종만공덕기념비(月城李鍾萬功德記念碑)
이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2m이고, 가첨석은 87×44×42㎝이다. 비신은 140×97×19㎝이고, 대석은 100×80×16㎝이다.
이 비는 1977년부터 1986년까지 장생포초등학교로 임시로 이전할 때까지 약 10년간 SK가스공장 부지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종만은 1886년 1월 14일에 태어나 1971년 2월 10일 사망했다. 대동광업 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대표이사로 재직했으며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삼척개발 총위원장, 조선광업회 회장, 조선산업건설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종만은 용잠초등학교의 부지와 건물을 모두 기부체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은 지역민들이 그 공을 기려 세운 듯하다.
이 비 앞에 공덕비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1939년 4월 25일 용잠초등학교 개교
· 1942년 5월 30일 학교 건립 공적비 건립
· 1977년 1월 17일 공덕비 해체(폐교)
· 1986년 9월 27일 임시 이전(장생포초등학교 교내)
· 2002년 10월 27일 현지 재건립
이 비의 뒷면에 기록되어 있는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峴峀毓氣 대현의 멧뿌리(加里山)는 기운을 길러내고
龍江儲精 용잠의 앞바다가 정기를 모아
猗歟夫夫 아 아 이 장부(丈夫)를
維此挺生 여기 우뚝 태어나게 했도다.
社會名著 그 이름 세상에 떨치게 됨은
敎壇功成 교육 사업으로 공을 이룩함이요.
所施斯普 베푸는 그 사업 널리 알려져
籍籍令聲 명성이 자자하게 널리 펴졌네.
矧是本面 본면 사람 하물며 존경심이 이렇거늘
孰不艶情 누구인들 그를 사모하지 않으리.
黃金宜鑄 황금으로 주조하여 기림이 마땅커늘
片石猶輕 석비(石碑)가 오히려 그 공적보다는 가벼우리.
昭和 十七年(1942) 五月 日
蔚山郡大峴一面 共立
1939년 4월 22일 황성진흥학원 체육 기념 사진 촬영
4월 25일 용잠초등학교 개교
• 1942년 5월 30일 월성이종만공덕기념비 건립
• 1950년 용연동 제하(提下) 마을 철거(본동 이주)
• 1954년 용연 5일장 개설
2) 1960년대
• 1962년 1월 10일 경제인들이 공업센터 후보지로 울산 건의
1월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공포
2월 3일 울산 특정공업지구 기공식(대현면 매암리 납도)
3월 5일 용연분교장 2학급 개교
3월 7일 울산특별건설국 설치
6월 1일 울산시 승 격
6월 1일 황성동, 성암동, 용연동, 남화동, 용잠동을 장생포출장소에서 관할
11월 24일 용잠초등학교 용연분교장 2학급 인가
• 1963년 2월 8일 용연초등학교로 분리 인가
2월 8일 초대 朴一浩 교장 부임(63. 2. 8~65.9.19)
3월 5일 용연초등학교 2학급 개교
3월 12일 정유공장 건설 공사 착수
• 1964년 3월 1일 입학식
• 1965년 3월 1일 입학식
8월 3일 용연동사무소 및 어업 공동 창고 준공
9월 20일 제2대 李在萬 교장 부임 (65. 9. 20~68. 11. 15)
• 1966년 3월 1일 입학식
• 1967년 3월 1일 입학식
• 1968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회 졸업 (남 66명, 여 52명 계 118명)
11월 1일 용잠 - 남화선 가로 착공
12월 11일 제3대 黃基庠 교장 부임 (68. 12. 11~72. 3. 24)
• 1969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회 졸업
5월 20일 용잠 - 남화선 가로 준공
3) 1970년대
• 1970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3회 졸업
5월 20일 황암 경로당 건립
• 1971년 2월 10일 용잠초등학교 설립자 이종만 사망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4회 졸업
6월 울산특별건설국 철수
10월 1일 용연동과 남화동을 용연동으로, 황성동과 성암동을 황성동으로
행정동을 개편하고 용잠동은 그대로 둠
11월 1일 행정동 개편(1972년 10월 1일)을 실시함
• 1972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5회 졸업
• 1973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6회 졸업
3월 25일 제4대 朴一浩 교장 부임 (72. 3. 25~76. 8. 31)
5월 22일 선경합섬(주) 울산 공장 착공
• 1974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7회 졸업
• 1975년 용잠초등학교 폐교 (한국전력 소음공해로 학습지장 초래)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8회 졸업
• 1976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9회 졸업
9월 1일 제5대 李載雨 교장 부임 (76. 9. 1~81. 8. 31)
• 1977년 1월 17일 이종만 공덕기념비 해체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0회 졸업
7월 5일 용잠동(본동) 폐동
9월14일 - 10월15일 성암 간이급수시설 설치
11월 1일 용잠동 동 명칭 폐지 (주민 수의 희소로 존치 불필요)
• 1978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1회 졸업
• 1979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2회 졸업
6월 15일 성외경로당 건립
3) 1980년대
• 1980년 용연 새각단 및 뻔득마을 완전 철거(이주)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3회 졸업
3월 27일 - 5월 7일 용연동 2,3통 간이 급수시설 설치
• 1981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4회 졸업
9월 1일 제6대 金忠經 교장 부임 (81. 9. 1~83. 2. 28)
• 1982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5회 졸업
2월 28일 성암 경로잔치(마을회관)
• 1983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6회 졸업
3월 1일 제7대 朴榮碩 교장 부임 (83. 3. 1~85. 2.28)
11월 - 1984년 11월 기업체 대상 공해 기여도 조사(간접 보상비)
• 1984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7회 졸업
9월 28일 울산시 조례 제1022호 제정 공포(이주사업에 따른 보상금 및
기타 사업비 특별회계)
• 1985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8회 졸업
3월 1일 제8대 김남석 교장 부임 (85. 3. 1~86. 8. 31)
7월 15일 구제(區制) 실시 공고(성암동, 황성동, 용연동, 대현동 남구에 속함)
9월 정부 이주대책 발표
12월 8일 세죽 마을에 처용가비 제막
• 1986년 1월 6일 울산시 이주지원사업소 설치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19회 졸업
4월 25일 기업체 산정 기준 공청회(간접 보상비)
4월 30일 기업체 분담금 산정기준(안) 통지(간접 보상비)
9월 1일 제9대 鄭禹永 교장 부임 (86. 9. 1~88. 8. 31)
9월 5일 기업체 분담금 확정 시달(간접 보상비)
9월 13일 기업체 분담금 고지서 발송(간접 보상비)
9월 27일 이종만 공덕기념비 임시 이전(장생포초등학교)
• 1987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0회 졸업
7월 1일 - 12월 31일 3단계 이주지역 보상 물건 기본 조사
7월 27일~31일 이주 희망자 조사
• 1988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4회 졸업
6월 남화향우회 발족
6월 남화향우회 창립총회
7월 4일 3단계 보상 대상 물건 열람 통지
9월 1일 제10대 황종기 교장 부임 (88. 9. 1~89. 8. 31)
• 1989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2회 졸업
89년 9월 1일 제11대 황신영 교장 부임 (89. 9. 1~91. 2. 28)
5) 1990년대
• 1990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3회 졸업
용연향우회 결성
• 1991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4회 졸업
3월 1일 제12대 金正浩 교장 부임 (91. 3. 1~92. 2. 28)
5월 1일 환경오염 지역을 통폐합 부곡동, 황성동, 용연동을 통합하여 개운동 설치
5월 3일 남화향우회 정기총회
9월 용연초등학교 학생 550여명 특별 건강진단
• 1992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5회 졸업
3월 1일 제13대 李康基 교장 부임 (92. 3. 1~93. 2. 28)
목도 출입 통제(10년간 휴식년 시작)
• 1993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6회 졸업
3월 1일 제14대 김태현 교장 부임 (93. 3. 1~94. 2. 28)
4월 14일 - 19일 용연 골메기신 천도제 거행
• 1994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7회 졸업
3월 1일 제15대 金昌河 교장 부임 (94. 3. 1~95. 2. 28)
12월 30일 ‘龍淵洞 遷度굿 中 내림’(李相道)발표(향토사보 5집)
• 1995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8회 졸업
3월 1일 제16대 鄭道根 교장 부임 (95. 3. 1~96. 8. 31)
5월 1일 환경오염 지역을 통폐합하여 부곡동, 황성동, 용연동을 통합하여 개운동 설치
• 1996년 가리(加里)저수지 매립 폐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29회 졸업
9월 1일 제17대 김대흥 교장 부임 (96. 9. 1~97. 6. 3)
• 1997년 2월 24일 용연초등학교 제30회 졸업
3월 6일〔울산]용연천에 강알카리성 폐수 다량 유입, 어장 황폐화 우려(부산일보)
5월 8일 ‘성암 매립장 침출수 처리장치 고장 해양오염가중 우려’(경상일보 기사)
7월 7일 제18대 백승효 교장 부임 (97. 7. 7~98. 2. 28)
9월 4일 [울산 용연초등교] 학교주변에 공장 많아 끝내 폐교(조선일보)
9월 4일 [울산] 공해에 찌든 초등교학생 일지로 고발.(부산일보)
9월 5일 공해공단에 둘러싸인 울산 용연초등학교 내년3월 결국 폐교(중앙일보)
9월 5일 [부산/경남] 울산공단 인근학교 공해로 수업중단 잦아(동아일보)
9월 5일 울산 초등교 교실공기 중금속 오염…울산환경 聯 조사(동아일보)
9월 6일 김한태 기자, 울산 초등교 교실 중금속 오염(경향신문사)
9월 6일 울산 초등학교 중금속 비상 ... (중앙일보)
9월 6일 정재락 기자, 환경연합 울산 초등교 중금속 오염 심각(동아일보 )
9월 6일 [울산] 비공해지역도 초등교 중금속 오염 심각(부산일보)
9월 24일 김한태 기자, 울산 초등생 1,037명 정밀진단(경향신문)
10월 14일 한국전력, 철거민들의 향수 달래주는 리플릿 배포(중앙일보)
10월 16일 [부산/경남] 『그리운 옛 울산』사진으로 만나요(동아일보)
10월 27일 울산공단 초등학생 중금속 조사(조선일보)
12월 9일 [울산] 공단 인근 초등교 전국 첫 건강검진(부산일보)
12월 9일 [부산/경남] 울산공단, 초등생 정밀건강진단 실시(동아일보)
12월 17일 울산 환경운동연합, 올해 10대 환경뉴스 선정(부산일보)
• 1998년 2월 18일 울산 공단 지역 초등생들 치명적 중금속 체내 축적(경향신문)
2월 19일 마지막 졸업식 초등교 2 (부산일보)
2월 20일 용연초등학교 제31회 졸업(마지막 회) (남 7명, 여 12명 총 졸업생수 3,158명)
2월 20일 용연초등학교 학적부 및 학무자료 대현초등학교로 이적
2월 20일 [울산] ‘공해학교’ 용연초등 마지막 졸업식(조선일보)
2월 21일 [취재수첩] ‘공해학교’의 마지막 졸업식
2월 28일 용연초등학교 폐교
3월 30일 하나 뿐인 지구 <용연초등학교 폐교 일지>(한겨레신문)
4월 11일 공해로 잃은 학교 이름만이라도 ...(부산일보)
9월 9일 경기불황 여파로 폐교 매각 부진(연합뉴스)
12월 16일 ‘산업폐기물의 공동묘지 울산’(부산일보)
• 1999년 3월 용연초등학교 폐교후 미 졸업자 대현초등학교로 통학실시
4월 1일 용연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칙 제정
4월 15일 ‘공해지역 폐교는 매각’(부산일보)
5월 30일 이주 10주년 맞이 성암향우회 정기총회
1999년-2000년 용연 노하(路下)부락 완전 철거(이주)
6월 27일~7월 2일 황암 골메기신 천도제 거행
6월 이후 용연 신항만 공사 부지(제4공구 공단 부지) 편입
10월 5일 세죽 제당 황죽당 철거
12월 4일 울산화력발전처에서 개운포성 표지석 기증
12월 6일 ‘개운포성 비석 제막식’(경상일보 기사)
12월 30일 ‘흙속에 묻힌 내 고향 돌들을 밝힌다’(李壽雨) 발표(향토사보 10집)
6) 2000년대
• 2000년 3월 황암향우회 결성
5월 8일 성암동 이주민 이야기 ‘마음의 고향 선수’ 발간
6월 24일 울산 미포 - 온산간 연결 도로 개설 부지 내 시굴조사 지도위원회
회의자료 발간(성암동)
11월 9일 성암동패총 등 13건을 기념물로 지정
• 2001년 3월 22일 해안 마을 보조 간선 도로 처용로 등 고시
4월 용연옛터비 비문 씀
4월 용잠옛터비 이상재 고문 발의
4월 용잠 옛터비 부지 물색 및 조사
11월 SK가스 측에 용잠 옛터비 평면도 제출
12월 ‘울산 황성동 세죽 유적’ 발간
• 2002년 3월 7일~6월27일 개운포성지 일대 발굴조사
3월 남화 향우회에서 남화 옛터비 건립 추진 발의
5월 울산화력발전처에 남화옛터비 건립 협조 요청
8월 용잠옛터비 임대차 계약(SK)
8월 용잠옛터비 제작 공사 계약(외동 석재)
9월 용잠옛터비 토목 공사 및 이종만공덕기념비 이설
9월 14일 개운교 준공
10월 27일 이종만공덕기념비를 용잠 옛터비 오른쪽에 재 건립
11월 용잠옛터비 건립(외동석재)
11월 19일 망향공원 조성 사업 간담회
• 2003년 1월 망향공원 조성 사업 특별교부세 5억 원 확보
2월 용잠옛터비 왼쪽 돌고래상 설치
3월 6일 망향공원추진위원회 구성
5월 11일 용잠 향우회 용잠 옛터비 제막식
5월 14일 ‘사또’ 옷입고 역사교육 30년(부산일보)
6월 망향공원 조성 대상지 잠정 결정
6월 망향공원 조성을 위한 남구에서 광역시로 의견 조회
7월 10일 망향공원 조성 매입 대상 토지 선정, 시설 개략적 선정
7월~8월 망향공원 추진에 따른 중기 지방 계획과 투,융자 심사대상
사업으로 시에 제출 및 의뢰
9월 24일 교명선정위원회 열어(경상일보)
9월 24일 내년 개교예정 5개교 문수중등 교명 확정(경상일보)
9월 28일 구 내무위원회 전 의원 망향공원 예정지 답사
10월 30일 망향공원을 성암 공원조성 계획 수립 후 시민 이용도, 적정시설,
규모 등 재검토 추진
10월 31일 남구의회 의원들과의 간담회, 시 망향공원 추진 전반 설명
11월 21일 망향공원추진위원회 회의 개최
12월 남구청으로부터 남화옛터비 부지사용에 대한 회신
• 2004년 1월 1일 2004년 새해 남구 해맞이 축제
1월 8일 울산 초,중,고등학교 3월 11곳 새로 개교(부산일보)
1월 16일 ‘초,중,고교를 한 울타리에’(부산일보)
3월 1일 용연초등학교 복교
3월 1일 용연초등학교 27학급 편성
3월 1일 용연초등학교 권두호 교장 부임
3월 3일 용연초등학교 2004학년도 입학식
5월 4일 용연초등 야음동으로 옮겨 복교식(경상일보)
5월 남화 옛터비 완공, 제막식(경상일보 기사)
5월 6일 울산광역시 교육청 승인 용연초등학교 복교 기념식 거행
울산광역시교육청 최만규 교육감 축사
울산광역시강남교육청 안길원 교육장 치사
용연초등학교 복교 초대 권두호 교장 기념사
용연초등학교 복교 초대 이수우 학교운영위원장
용연초등학교 복교 초대 강영숙 학부모회장
용연초등학교 최해수 동창회장
용연초등학교 복교 교가 작사 : 정용원 교장
용연초등학교 복교 교가 작곡 : 김진덕 선생님
용연초등학교 복교 교표 도안 : 황연숙 선생님
용연초등학교 복교 교화 : 동백나무
5월 6일 용연초등 복교식 기념행사(경상일보)
5월 6일 “폐교의 아픔을 빛는 전통으로”(경상일보)
5월 6일 [부산/경남] 울산 용연초교 ... 7년만에 되찾은 교명(동아일보)
5월 31일 ‘남화동 옛터비 제막식(경상일보 기사)
6월 ‘울산 개운포성지’ 발간
7월 18일~2006년 7월 17일(2년간) 폐교 용연초등학교 대지와 건물 대부 중
8월 15일 현남회 광복절 체육 대회(한국전력 운동장)
8월 18일 ‘공업역사박물관 재 추진’(망향공원조성사업예정부지내) (경상일보)
9월 26일 성암청년회 하반기 행사(다운초등학교)
10월 25일 윤종호, 오종경 울산시 초등생 한자경시대회 금상(경상일보)
12월 13일 용연초등학교가 속해 있는 야음교육단지 2004 우수시설학교 선정
• 2005년 1월 1일 2005년 새해 남구 해맞이 축제(용연공장 조성 지구 부지)
2월 복교 용연초등학교 교지 ‘용연’ 창간호 발간
2월 17일 용연초등학교 제32회(복교1회) 졸업식
3월 10일 ‘남화 부두 내달 초 착공(경상일보 기사)
3월 26일 폐교 활용범위 대폭 확대(경상일보)
3월 28일 ‘환경 이주지역 일부 주민 이주 거부 생업활동(용연동 등)(경상일보)
4월 15일 “울산에 방치된 학교 없나요?”(경상일보)
5월 5일 김진곤, 울산 남구 해안 마을 주민들의 이주사(移住史) 고찰 발표(남구 문화 3집), 울산 남구문화원
8월 23일 “창의력, 울산교육의 희망”(경상일보)
• 2006년 2월 16일 제33회(복교 제2회) 졸업식 (201명)
3월 1일 입학식 (33학급 편성)
• 2007년 2월 19일 제34회(복교 제3회) 졸업식 (201명)
2월 26일 남구 야음2동을 대현동으로 동 명칭 변경
3월 9일 용연초 어린이 울산세관 방문 휴대품 검색등 세관업무 체험(경상일보)
7월 23일 광역시 10년 53곳 개교, 21곳 폐교(경상일보)
7월 23일 <울산 지난 10년간 20개 초등학교 폐교>(연합뉴스)
9월 1일 김옥명 교장 부임
• 2008년 1월 8일 ‘타임’지에 실렸던 옛 용연초등학교 공해 기사(울산매일신문)
(김진곤(8회) 개운포 칼럼)
2월 19일 제35회(복교 제4회) 졸업식 (207명)
3월 1일 입학식 (31학급 편성)
• 2009년 2월 20일 제36회 (복교 제5회) 졸업식 (188명)
3월 1일 심외수 교장 부임
3월 1일 입학식 (29학급 편성)
3월 1일 울산광역시지정 교실 수업방법 개선 정책연구학교 (2009~2010)
9월 18일 용연초등 유네스코 협동학교 지정 현판식(경상일보)
10월 27일 학생회장 선거 매니페스토 선거공약 심사(울산제일일보)
11월 15일 용연초 6학년 김용기군 ‘교과부장관상’(울산신문)
11월 16일 울산 초,중학생 항공우주과학경진대회서 두각(경상일보)
7) 2010년대
• 2010년 2월 17일 37회 (복교 제 6회) 졸업식 (185명)
3월 1일 입학식 (30학급 편성)
6월 3일 해경 바다사랑 그림그리기 대회 용연초 정다인 학생 대상(울산신문)
7월 20일 울산과학교육원 다음달 13일까지 교사 연수(울산제일일보)
• 2011년 2월 19일 제38회 (복교 제7회) 졸업식 (167명)
3월 1일 입학식 (29학급 편성)
4월 6일 “딸 한국생활에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울산제일일보)
6월 1일 김사빈, 이초희 최우수상(울산신문)
7월 19일 [브리핑] 울산 ‘주5일제 수업제’ 시범 운영(부산일보)
9월 1일 백판덕 교장 부임
11월 17일 ‘학교는 두 개 운동장은 한 개’ 참 불편하다(경상일보)
• 2012년 2월 17일 제39회 (복교 제8회) 졸업식
2월 27일 울산 남구문화 제9집 발간(울산제일일보)
3월 1일 입학식 (28학급 편성)
• 2013년 1월 23일(수) 김진곤, 용연초등학교50년사, 울산 현대사의 축소판(칼럼), 울산매 일신문
2월 1일(금) 아침 8시 30분 MBC <굿모닝 새아침입니다.>프로그램에 ‘울산현대사 의 축소판 용연초 50년사’(방송)
2월 6일(수) 저녁 6시 50분 MBC <지금 울산은> 프로그램에 ‘울산현대사의 축 소판 용연초 50년사’(방송)
2월 25일. 이보람 기자, 1998년 환경재앙으로 폐교…6년 후 복교, 울산 용연초 ‘굴곡의 역사’ 책으로 낸다(기사), 세계일보
3월 29일. 김진곤, 울산 현대사를 빼닮은 용연초등학교50년사(기고), 기록인 2013 SPRING+VOL22,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
4월 15일(월). 김정숙 기자, 거대한 산업쓰레기에 갇힌 아이들…공해 학교로 악명(기사), 울산매일신문,
5월 26일(일) 용연초등학교 총동창회 및 개교 50주년 기념 행사
첫댓글 황암옛터비 제막은 빠졌습니다.
황암노인정: 황암분회는 1980년 5월 대한노인회 울산지회 황암분회로 설립되었다가 이주후 자체적으로 폐설됨
황암청년회: 1970년대 구성이 되어 초대 청년회장으로는 청년회의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타지의 이주 및 학교생활로 인해 마을을 떠나면서 활동이 축소되다가 이주시에 자동 폐설됨.
10번. 월성이종만공덕비 비문에 校壇 ( x) -> 敎壇 ( o) 바로 잡아 주세요
수정하였읍니다
1961년 11월 14일 용잠초등학교 용연분교장 2학급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