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라 9차시 과제: ‘가짜 비건’에서 ‘비거니즘’을 향해>
백리향
메타포라 9차시 과제는 수업 때 나눌 책 제목이기도 한 ‘살리는 일’에 관한 것이다. 딱히 ‘이거다!’ 하는 에피소드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현재 엄격한 채식을 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정식으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었고 환경오염이나 보호에 관해 각별한 관심으로 활동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3~4년 전 내가 3년째 ‘비건’(지금 돌이켜보면 음식에만 한정된 ‘가짜 비건’이었다)으로 보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즈음 트레드밀을 뛰다 갑자기 왼쪽 새끼발가락 부위에 통증이 오는가 싶더니 붓기 시작했고 결국 난 좌측 다섯 번째 중족골(발가락과 발등 사이의 뼈) 골절 진단을 받았다. 달리기나 점프를 많이 하는 운동선수에게 발생하는 스트레스 골절의 일종인 것 같았지만, 특별히 부딪히거나 발을 헛디디지도 않은 상황에서 진단받은 골절은 내게 불안감을 일으켰다.
아예 걷지 못하거나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체중을 실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과 부기가 거슬렸고 빨리 나아서 정상적인 일상생활과 평소처럼 운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지어준다는 한약도 마다하는 내가 작은 언니에게 전화로 SOS를 요청했다.
“ 거봐라. 네가 고기는커녕 달걀도 우유도 안 먹으니 뼈에 금이 가잖아.”
작은 언니는 이미 예상했었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한약이랑 홍화씨 보내줄 테니 한약도 잘 챙겨 먹고 이제부턴 고기도 좀 먹어.’ 했었다. 설사 엄밀하게는 상관관계가 없더라도 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일이 주에 한 번 정도 그나마 지방이 적은 소고기 안심을 구워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비건식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비건이라고 믿었던 시절 직장 회식이나 가족 모임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의 다른 직원들은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라고 기대한 만큼 회식 메뉴로 ‘소고기’인 경우가 많았다. 도착한 회식 장소가 소고기 외에는 생채 무침만 나오는, 말 그대로 ‘고기’로만 유명한 식당인 걸 알고 급하게 근처 분식집에서 햄과 달걀을 뺀 김밥을 사오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조심스레 된장찌개만 떠먹는 나를 향해, 대표 원장이 구워진 고기를 직접 젓가락으로 한 줌 집어, 내 밥 위로 건네며 ‘한 번만 먹어봐요.’ 해서 어쩔 수 없이 씹어먹은 적도 있었다. 친구랑 식사 약속을 잡아도 늘 나 위주의 샐러드바만 고수하다 보니 내가 돈을 내고도 마음이 쓰였다.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 때 가족 식사를 위한 장소를 고를 때도 은근히 나를 신경 쓰는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오리고기 식당으로 정한 어느 날도 ‘미선아. 여기 야채랑 밑반찬도 나오니 너는 그것 해서 밥 먹으면 되겠지?’ 하고 큰언니가 되물었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메뉴 선택에 제한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단지 내가 먹는 채식 위주의 식단만 존중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음식에 있어서는 꽤 철저한 ‘비건’이었던 내게 어느 날 ‘그러면 너 모피는 왜 입니?’ 하고 작은 언니가 물은 적이 있었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거나 고민해보지 못했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에도 가족 식사 외에는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지만, 불현듯 불교의 5계 중 하나인 ‘살생하지 말라’는 말을 불자로서 실천하고 싶었다. 동시에 당시 온라인 명상을 통해 알게 된 명상과 음식의 관계 및 채식의 필요성도 공감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이전의 피트니스대회를 통해 경험한 절제된 혹은 제한된 식단(물론 육류인 닭가슴살을 먹었지만)이 내게 편했고 채식 위주의 식단이 건강과 몸매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도 조금은 차지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니 나는 불완전한 비건이었다. 즉 내가 먹는 음식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또 ‘비건식’이 나 개인을 넘어 동물 그리고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래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비건’ 혹은 ‘비거니즘’이 뭔지 그리고 ‘동물권’은 또 무엇인지 나아가 그 상관관계까지 알고 싶어졌다.
다음 수업까지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방대하고 깊게 공부할 수는 없었다. 비건과 동물권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환경오염에 대해, 전반적인 내용을 훑고 현주소를 직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면 의미 있을 듯했다.
과제로 준 책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급하게 검색한 끝에 주문한 ‘비거니즘’에 관한 책 한 권을 읽고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본 후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해보았다. 결론적으로 대부분 공장식 축산을 통해, 생각보다도 훨씬 잔인한 방법으로 도축되는 동물 학대가 자행되고 있고 그로 인해 환경오염이나 온실가스 배출, 그리고 돼지 구제역이나 조류 인플루엔자 같은 전염병까지 여러 문제가 발생 되는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동물 학대는 비단 먹기 위한 사육뿐 아니라 입기 위해서도 자행되고 있다는 걸 난 잊고 있었다. 당장 옷장을 뒤졌다. 그리고 옷마다 안감 구석에 숨은 섬유 혼용율을 꼼꼼히 살폈다.
디자인과 길이 그리고 색감이 각기 다른 밍크코트 세 벌(이중 퍼플색 중간 길이 밍크코트는 작은 언니가 내게 사준 것이고 나머지 두 개는 작은언니와 엄마가 각각 입다가 준 것이다) ,칼라와 위 목선까지만 족제비 털로 된 카디건, 100 프로 오리털 꽃무늬 패딩 조끼, 100 프로 오리털 검정 패딩 코트, 100 프로 거위 털 은회색 롱패딩, 100 프로 라쿤털 보라색 패딩 파카, 100 프로 오리털 얇은 녹색 패딩 자켓까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최근까지도 입은 100 프로 양가죽 하늘색 롱코트와 같은 소재의 갈색 자켓까지. 내 옷장은 그야말로 ‘동물 옷장’이었다.
6주 간격으로 일생에 5~15회 손으로 쥐어 뜯긴다는 오리털이, 야생에서는 물속에서 지내지만실제로는 라면 상자 크기의 철창에 갇혀 지내다 CO2나 CO 가스에 노출되어 죽은 후 얻어진 밍크가, 몽둥이로 때리거나 뒷다리를 잡고 바닥에 내려쳐 기절시킨 후 살아있을 때 가죽을 벗긴다는 라쿤 털이 내 옷장 안에 있었다.
동물 학대는 물론 환경오염의 온상이 내 옷장에 가득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위에 열거한 옷들은 최소 5년 이상 되었고 그중 내가 직접 산 옷은 양가죽으로 된 마지막 두 벌이지만 그렇다고 동물 학대의 책임이 경감되거나 그 책임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삼십 대 시절에 비해 평소엔 옷을 자주 사지 않지만) 작년 6월 발리에 가기 직전, 눈에 띄는 색감과 디자인 그리고 가격까지 저렴한 데다 피팅까지 통과한 일곱 벌 이상의 옷을 한꺼번에 구매했었다. 그런데 그 옷의 브랜드가, 현재 환경오염과 노동력 착취의 주범인 패스트 패션의 대표적인 브랜드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의류의 과잉생산과 그로 인한 값싼 노동력및 인권 착취, 또 과잉소비로 이어져 발생하는 섬유 폐기물과 환경오염을 알게 된 이상, 적어도 앞으로는 유행을 좇는 패스트 패션을 소비하는 주체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벼락치기긴 하지만 ‘비건’이 ‘완전 채식’이라는 음식에만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 ‘비거니즘’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공존을 지향하는 방향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막연히 환경보호 차원에서만 생각했던 분리수거와 일회용품사용 줄이기도 비거니즘 실천 중 하나라는 것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신념만 있었던 데 비해 지금은 왜 육식을 줄여야 하는지 동물권과 환경보호까지 연결 지어 이해했기에 다시 시작할 동기가 생겼다. 또 ‘동물복지 인증 마크’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동물권’을 위한 작은 시작이라는 것도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리고 단순히 소비를 줄여 돈을 절약하는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내가 왜 꼭 필요한 옷만 신중하게 사야 하는지, 더 가치 있는 명분이 생겼고 앞으로 소비할 옷에 대한 가치관도 명확해졌다. 동물 털과 가죽이 사용된 의류를 더 이상 구매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화장품도 사기전에 동물 실험이 이루어진 제품은 아닌지 따져볼 작정이다. 그건 곧 일상에서 매 순간 공존의 가치에 중점을 두고 신중하게 소비하는 삶을 살기로 한 나와의 약속이다.
내가 갑자기 캣맘이 되거나 당장에 동물을 구출할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를 무조건 피하기보다, 잠시 멈춰서서 그들의 상태나 주변을 살피는 의도적인 노력은 시도해볼까 한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고 그래서 못한다. 그만큼 정직함이 내겐 중요하고 내 삶에 자연스레 녹아든 신념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비건 지향’을 출발점으로 의도적으로 하나씩 실천해가는 수준이지만, 정직함에 반하는 나의 행동이 스스로 불편하듯 언젠가 ‘비거니즘’도 내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든 내 삶의 철학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즈음, 알고도 모른 척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는 방관자로 살아오지 않은 스스로가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공존’의 의미또한 지금보다 더 실감할 수 있기를.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 가장 가깝게 그리고 먼저 떠오르는 일부터 시작해야지. 글쓰기 수업이나 화실 혹은 출퇴근 길 차 안에 늘 동행했던 펫트병 생수를 대체할 가벼운 친환경 텀블러부터 찾아봐야겠다.
첫댓글 백리향의 다짐과 실천들이 멋져요. 일주일이 참 짧은 시간 같은데, 새로 많은 것을 알아보았을 뿐더러 옷장까지 들춰본 것이 대단히 여겨져요. 완전 비건 한 명 생기는 것보다, 육고기만 지양하는 페스코 열 명 생기는 것이 환경에 훨씬 이득이라던 말이 떠올라요. 저는 많은걸 이미 예전에 접했음에도 논비건 마냥 살고있어 부끄럽지만, 우리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히 해봅시다! 😺
우와! 방금 전 집에 도착했어요! 밤비!!^^
오늘 사실 지하철서 졸다가 지하철 지나쳐서 지각했거든요^^;
수업 시간 내내 제 무릎 찌르며 졸리움을 깨우다
밤비 글 읽는 내내 빵빵 터지며 졸음이 화악 달아났답니다!
모처럼 만에 많이 웃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
밤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블링블링 봄 처녀 같았던(아까 쉬는 시간에 얘기하려다 타이밍을 놓쳤어요 ㅎㅎ)오늘의 밤비가 정말 눈부셨다는 말 전하고 싶네요..
밤비말대로 , 눈에 보이는 그리고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 부터 하나씩 해 나가기로 해요!!
@백리향 백리향, 너무 기분 좋은 말들 고마워요! ㅎㅎ 제 글이 졸음을 깨웠다는 말도, 봄처녀 같다는 말도 너무 좋아요. ㅎㅎㅎㅎㅎ 댓글 본 후에 애인에게도 “메타포라 학인분이 나 봄처녀같았대”하면서 자랑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