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그리고 54대 경명왕릉이라 전하는 고분 3기가 있어 통칭 삼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달라왕이 2세기 말의 인물이고, 신덕왕과 경명왕은 10세기 초반의 인물로서 그 사이에 700여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그럼에도 왕릉은 하나의 능역에 있어 과연 올바른 능인지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아달라왕과 신덕왕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阿達羅王> 三十一年, 春三月, 王薨.
31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조>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벌휴[발휘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다. 그녀는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왕조>
○<神德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덕왕조>
즉, 아달라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석씨인 벌휴왕이 즉위하였는데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는 상호 모순된 기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왕의 능이 한 능역에 존재할 수가 없다고 보여진다. 뿐만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달라왕과 신덕왕 그리고 경명왕의 장지관련 기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六年, 秋七月, 王薨. 諡曰<神德>, 葬于<竹城>.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덕왕조>
○八年, 秋八月, 王薨. 諡曰<景明>, 葬于<黃福寺>比{北}.
8년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조>
○火葬藏骨于箴峴南.
화장하여 잠현 남쪽에 뼈를 두었다.
<삼국유사 왕력 신덕왕조>
○火葬皇福寺 散骨于省等仍山西.
황복사에서 화장하고 성등잉산 서쪽에 뼈를 뿌렸다.
<삼국유사 왕력 경명왕조>
이처럼 신덕왕과 경명왕의 장지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모두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죽성(竹城)과 황복사(皇福寺) 북쪽이 같은 곳일 수 없으며,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잠현(箴峴) 남쪽과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이 같은 곳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아달라왕과 함께 신덕왕릉과 경명왕릉이 같은 능역에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신라에 박씨 왕은 모두 10명이 있었다. 그중 7명의 왕은 신라 초기의 왕이었고, 3명의 왕이 김씨왕이 세습하던 신라 말기에 나타난다. 하지만 중국쪽 사서에는 이들이 모두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찬술한 김부식은 삼국이 멸망한 원인을 기록하면서 백제의 경우는 의자왕의 사치때문으로, 고구려의 경우는 연개소문의 독재로 인하여, 신라의 경우는 김씨인 경순왕은 고려에 귀부한 것을 두고 백성을 위한 행위로 칭찬한 반면 박씨왕인 경애왕의 주색잡기 때문으로 기록하였다. 경주김씨였던 김부식이 자신의 씨족에 대하여 나쁜 기록을 남길 수 없어 이들을 박씨로 둔갑시킨 것은 아닐까?
삼릉 가운데 신덕왕릉으로 전하는 가운데 무덤이 도굴된 적이 있었다. 도굴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7~8세기 초의 무덤 양식인 횡혈식석실분이었음이 밝혀졌다. 나머지 두 무덤도 양식상으로 볼 때 신덕왕릉과 같은 통일신라초기의 무덤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제일 아래쪽의 경명왕릉 앞에는 유실된 것으로 보이는 봉분이 있어서 또 하나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경명왕릉에 보이는 호석들은 무열왕릉 이후에 나타나는 하나의 양식이며 왕릉이 이처럼 줄지어 세워지는 것도 삼국시대 초기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경주박씨 문중에서 삼릉을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으로 지정한 것은 조선후기의 장자상속제에 따른 사회변화의 하나인 집성촌의 성립과 함께 발달된 촌락과 가족묘의 공간구성 원리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종가집을 중심으로 발달된 집성촌과 조상묘를 중심으로 동일 묘역에 배장(陪葬)하는 습성 때문이다. 경주박씨들은 조선후기의 가족 및 사회제도에 대한 인식을 신라고분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아달라왕과 그의 원손인 신덕왕 그리고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왕의 능이 한 묘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2008.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