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7일(연중 제5주일) 루카 5, 1-11
고치고 살리는 일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문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행적도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도 그분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군중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과 실천을 반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마음가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과 엎드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인이 하느님 앞에 갖는 자세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 신앙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겐네사렛 호수에서 있었던 ‘기적적 고기잡이’ 이야기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담아서 전합니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atholicnews.co.kr%2Fnews%2Fphoto%2F201602%2F16066_35555_100.jpg) | | (사진 출처 = pixabay.com) |
겐네사렛 호수가 있는 갈릴래아를 무대로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이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들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 중에 오늘 거명된 시몬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원시 신앙공동체가 전하는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이 이야기로 그들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으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구원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립니다. 오늘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뒤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쳤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배 한 척으로 옮기지 못하고, 다른 배를 불러야 할 정도로 고기잡이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일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았다는 사실 보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여기서 ‘낚는다’는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낚는다.’는 뜻은 낚시를 미끼 안에 감춰서 그것을 먹이인 줄 알고 삼키는 물고기를 잡는 행위입니다. 물고기는 속아서 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말씀하실 때,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물고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은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 ‘고기잡이’ 이야기를 먼저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분의 말씀 따라 실천하면,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많이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이 두려워 신앙이라는 대책을 세우는 길이 아닙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안에 두려움을 불어넣고,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교세 확장을 꾀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한으로 행세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기 위해 특수 복장을 하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세를 위해 전대사 한대사를 챙기며 영악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예수님도 그 자비를 실천하고,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 예수님도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 기득권층의 눈치를 보거나 권력을 가진 이들과 사귀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치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풍요롭게 살기 위해 그동안 마련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전향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가 마련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재물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죽어서 내세에서도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그런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소중히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도 베풀며, 살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삽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제자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저항하는 죄인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경악할 사건들이 앞다투어 보도된다. 자식을 찢어 죽이는 것, 몽둥이로 내려쳐 죽이는 것, 그 끔찍한 사건 앞에 할 말을 잃은 우리는 ‘헬조선’의 현실이라 되뇌며 분노한다. 분노는 당연한 듯하지만 거북한 것 또한 사실이다. ‘헬조선’이라 말하면서 우리는 ‘헬조선’을 즐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 땅, 이 사회를 대상화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자신의 본모습이 바로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아이를 학대하거나 죽이는 끔찍한 사건에 온갖 비난을 해대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학원에, 과외에, 입시 지옥에 던져 넣고도 ‘현실’을 핑계로 당당할 수 있는 태도가 있는 한, 우리의 분노는 늘 위선적 자위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는 ‘헬조선’을 우리 일상의 끔찍함을 제거 혹은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즐기는 듯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요즘 우리 주위를 분노케 하는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보다 더 끔찍한 건, 제 현실을 사유하거나 극복하지 못해 현실에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의 두려움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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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를 따르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예수는 가르친다. 가르침 중에 예수는 어부가 아님에도 어부에게 그물 칠 곳을 정확히 가리킨다. 밤새 ‘전문적’으로 고기를 잡고자 했으나 잡지 못했던 시몬은 웬일인지 예수의 ‘비현실적’ 명령을 따르게 된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주석학자는 주님에 대한 제자됨의 절대적 ‘순종’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내려놓음으로써 제자됨의 참모습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주를 이룬 해석이다. 예수의 ‘비현실적’ 명령대로 움직인 시몬은 엄청난 고기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똑똑히 쳐다본다. 스스로 ‘죄인’이라 한다. 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일까. 많은 고기를 보고 겁이나서? 자신의 ‘전문성’이 감당 못할 예수의 신비한 기운이라도 느꼈기 때문에? 아니면 정말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달아서 무조건적인 순종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인이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사유가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자신의 ‘현실’을 포기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죄인이란 고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자기 은폐나 도피에 가깝다. 단순히 절대적 존재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한다고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할 수도 없다. 그런 고백은 찰나의 두렵고 떨리는 순간을 모면하는 비루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 반응일 뿐이다. 참으로 죄인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현실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저항 정신’에서 가능하다. ‘이제껏 잘못 살았구나’,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었어’, ‘내 속에 너무 갇혀 있었구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저항정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힘이다. 그 힘이 또한 현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현실을 도모하기 위해 떠나갈 수 있는 힘으로도 작용될 터이다. 예수는 소위 ‘전문적’이라는 ‘현실’을 떠나게 ‘비전문가’로서 시몬을 불러들인다. 기존의 인식체계와 현실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저항의 길은 누구나에게 ‘비전문적’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길을 닦고 그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이며, 우리 해방을, 우리 구원을 준비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복음서마다 이야기되는 요한 세례자의 존재 이유이며 메시아를 갈망하는 우리 신앙인이 살아갈 이유다. 시몬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낚는다’라는 동사가 그리스말로 ‘조그레오’인데, 그 본디 의미는 ‘살게끔 이끈다, 조종한다’ 이다. 아이들이 끔찍이 죽어 가는 현실 안에 아이들을 살게끔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모색하는 저항 정신이 사람을 낚는 일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의 교육 현실과 같은 지옥을 만든 기성세대는 없다. 창피하고 죄스럽고 미안해해야 할 일들 앞에서 ‘헬조선’이라며 탄식하며 현실을 비난하는 건 비겁하다. 지금의 현실에 저항하며 스스로 죄인이라 말하는 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갖추어야 될 최소한의 예의다. 그 예의를 갖추는 게 신앙이지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실 적응력을 키워내는 데 신앙을 소비하는 건, 민망하거나 추하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무엇을 위해 사순절이 있습니까?
단식과 금육으로 시작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또 습관적으로 사순절을 지내려고 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봅시다. 사순절은 어떤 기간입니까? 무엇을 위해 사순절이 있습니까? 이때 각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 신앙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며
우리 신앙에 대해 근본부터 다시 잠시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셨음에 대해서, 하느님답게 완전하게 충실하셨습니다. 나자렛이라는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으로 자라나셨고, 갈릴래아 호숫가를 중심으로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한 동작 한 동작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완전한 인간입니다. 기준이 무엇이냐고요?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시관을 쓰고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사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는 하느님,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 그래서 인간으로서 죽기까지 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은 십자가 죽음으로써 패배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에 승리를 가져온 첫 인간으로 부활한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소식을 새삼스럽게 접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끝장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어떤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고 많은 상품을 사들여서 사용해 보니 행복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물건만 사용해 보니 실제로 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몇 가지밖에 없더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물건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사로잡혀 허덕이며 살고 있는데, 정말 나와 가족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필수품들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잘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이 육체로만 만족하면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로만?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행복하면 다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집단으로 잘살게 되면 인간은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하여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무한한 욕망 안에, 하느님을 닮은 인간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그 욕망을 완성하자면 제대로 된 올바른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과는 빵점이 되고 맙니다.
인생은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엄청난 선물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도록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그 행복을 스스로 발로 차버리고 떠나서 비참하게 된 인간에게 하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은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서 살도록 우리는 초대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바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인생을 엄청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비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지요.
이제 인생의 근본 문제가 풀리는 이 일이 우리 손에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모든 것을 넘어서서 정신이 팔리지 않을 일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서 집으로,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의 관심을 잠시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기쁨으로 흥에 겨워 우리 어깨가 절로 들먹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온 세상에서 사순절을 함께 진지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수욱 베드로 신부님
[아! 어쩌나] 330. 시련이 꼭 필요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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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의 시련에 대해 이야기들을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시련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인데 왜 시련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신앙생활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복을 주는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정말 시련이란 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요?
답: 시련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란 관점에서 형제님의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님이 지향하는 행복관이 지극히 유아적이라서 몇 가지 조언을 드릴까 합니다.
우선 행복을 편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하기를 바라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해지면 사람의 마음은 관대해지고 만족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지루해 하고 짜증 내고 속이 좁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고인 물처럼 돼서 썩어 가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머문 자리에서 떠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한 행복을 구한다면 불행하게도 무속 신앙인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불행을 가지고 정신적 농락을 하는 무속인들의 노리갯감이 되어 자신이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점을 쳐주는 대로 살아야 하는 정신적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형제님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더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조언은 사람의 인생은 늘 평탄하고 순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인생이란 작은 배를 타고 인생길이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항해하는 동안에는 별의별 일이 다 생기기 마련입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파도는 치고 배는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런 파도를 이겨내면서 유능하고 성숙한 선원이 생겨나듯이 인생의 파도도 잘 이겨낸 사람들이 유능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순탄대로를 걸어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피를 토하는 쓴 경험을 거치고 마음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성공이라는 결실을 얻는 것이지 TV 드라마처럼 신데렐라식의 성공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아서 워드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불운은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기록을 깨뜨리게 만들기도 한다”고 말입니다. 처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지금의 힘겨움이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으면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시간을 되돌려 일어난 일이 원상대로 회복되기만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결말은 무기력함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적인 길로 유혹하는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현명한 선택을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굳혀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계속해 간다면 긍정적인 선택이 축적되어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현명한 선택이란 내가 겪는 시련에 대하여 원망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이아몬드처럼 되기 위한 것이라고 시련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시련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힘겨운 과정을 선택하면 시간이 가면서 내적인 힘이 생기고 그 시간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남태평양 사모아 섬은 바다거북들의 산란 장소로 유명합니다. 봄이면 바다거북들이 해변으로 올라와서 모래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고 깨어난 새끼들이 바다를 향해갑니다. 그런데 한번은 해양학자들이 산란기 바다거북에게 진통제를 주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거북은 고통 없이 알을 낳았지만, 어미 거북은 제가 낳은 알을 다 먹어치우더랍니다. 고통 없이 낳은 알에 대한 모성애가 없어서입니다. 잘 새겨들으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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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
교황은 선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동기로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을 설명했다. ‘한 백성’의 의미는 ‘한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이다. 선교사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태어날 때마다 영적 기쁨에 충만케 된다. 이 기쁨은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을 제공해 준다. 선교사 자신을 선택된 사람으로 느끼게 하여 또 다른 백성을 찾아 나서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복음 선포자는 세상 만민을 모두 하느님 백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세상 끝까지 나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만든다. 베드로 사도가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1베드 2,10).
백성 한가운데서 맛보는 영적 기쁨
교황은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을 맛본 자는 선교 열정의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이 새로운 동인이 되어 복음 선포자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백성 한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그곳에서 백성의 애환을 들어주고, 상처를 치유하여 주며, 그들에게 영원한 삶의 가치를 선포해야 한다. 마음으로 믿고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백성이 생길 때, 그 기쁨은 그 공동체를 더욱 풍요롭고 힘 있게 만든다. 복음 선포자는 그들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교황은 참다운 복음 선포자가 되려면,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머무는 영적인 맛을 들이고, 이것이 더 큰 기쁨의 원천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눈을 떠 다른 이를 알아볼 때, 우리 신앙의 빛이 더욱 밝아져 하느님을 알아 뵙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성 생활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면, 끊임없이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정신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고, 마음의 지평을 열어 주며, 성령의 활동을 더욱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우리의 제한된 영적 도식을 뛰어넘게 해 줍니다. … 다른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다면, 그 누구도 더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삶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272항).
참다운 복음 선포자 예수 그리스도
교황이 설명하는 참다운 복음 선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삶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예수님의 삶은 백성 한가운데 존재하는 삶이었다. 은수자(隱修者, eremita)나 독수자(獨修者, anachorita)로 지내며 수도 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의 뜨거운 시선으로 군중을 바라보시고,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 당신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자비의 눈길을 주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 “예수님께서 눈먼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마르 10,46)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으시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마르 2,16 참조),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다가가기 쉬운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여자가 당신 발에 향유를 바르도록 놓아두실 때(루카 7,36-50 참조),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를 맞이하실 때(요한 3,1-15 참조), 우리는 예수님께서 늘 열려 계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236항).
관리자와 복음 선포자의 차이
일선 본당의 사제들은 최전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과 밀도 있는 만남을 하도록 주문받는다. 예수님 자비의 시선으로 하느님 백성을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 한가운데 존재하기 위해서 가정 방문은 기본이다. 사목자가 가정 방문을 하지 않는다면, 관리자로 머물 뿐이다.
“신자들에게서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다면 그 누구도 더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삶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272). 사목자들은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로 자신을 여겨야 합니다”(273항). -홍기선 히지노 신부님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9.
정치가 없는 경제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지역에서는 국가가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아서, 일부 기업 그룹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혜자의 가면을 쓰고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이 특정 규율로부터 면제된다고 여깁니다”(197항).
교종은 경제 분야에서 ‘수익 극대화의 원리’가 “생산을 증대시키는 동안 앞으로 치를지도 모를 비용에 대해, 곧 미래 자원 및 환경의 건강 관련 비용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비윤리적인 경제 개념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하며 기업 활동의 윤리성 회복을 강조한다. 지금 세대의 우리가 자원을 다 써 버린 대가로 지불해야 할 사회·경제적 비용을 다른 민족이나 미래 세대가 알아내고 지불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시장이든 국가든 자원을 할당하고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다(195항).
이어서 회칙은 인간 완성을 위해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며(189항), 건강한 정치의 역할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허약한 정치는 무엇일까? 첫째, 경제에 종속되거나 아예 경제와 무관한 정치다. 그리되면 국가 그 자체보다도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일부 경제 영역들은 더 큰 책임감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재앙과 환경 문제 해결에 있어 경제적 접근 외의 다른 접근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에도 관심을 두지 못할 것이다(196항). 둘째,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다. 그리되면 건전한 공공 정책들을 법제화하는 일이 보류되거나 일부 기업 그룹들의 사악한 논리를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197항). 셋째, 빈곤과 환경의 타락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경제에 떠넘기고 대신 자기들의 권력을 움켜쥐거나 확장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다(198항).
건강한 정치란 우선, 사회의 각 수준에 현존하는 역량들을 개발할 자유를 부여하며, 공동선에 대한 보다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하는 보조성의 원리를 따르는 정치다. 건강한 정치는 현존하는 재앙과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적 접근 외에도 다양한 접근 방식을 함께 모색할 것이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196항). 둘째,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전략을 세우기 위해, 멀리 내다보며 새롭고 통합적이며 학제 간 제휴하는 자세로 지금까지의 ‘과정 전체’를 재고할 용기를 가진 정치다(197항). 셋째, 공동선을 향해 경제와 대화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형식들을 찾는 정치다(108항).
정치와 경제는 그 목적도 토대도 인간이며 사회다. 정치와 경제는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이다. 이를 위해 각각 윤리적인 경제와 건강한 정치가 요구되며 그 상호작용의 형식들도 찾아내야 한다. 그 실패는 금융 소득에만 관심을 두는 경제와 권력 쟁취와 확장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를 키울 것이며, 그 대가는 무수한 사회적 약자의 양산이며 고통이다(198항). 이를 교회의 사회교리는 ‘죄의 구조들’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또 그러한 행동들에서 비롯되는 구조들은 오늘날 두 가지 범주로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이득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며,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19항).
교종은 정치와 경제가 자기들 각각의 실수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 잘못이란 일부 정치 영역에서 보이는 경제에 종속되어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이며, 일부 경제 영역에서 보이는 비윤리적이며 무책임하며 사악한 논리에 사로잡힌 경제를 말한다. 교종은 동시에 건강한 정치와 윤리적인 경제가 공동선을 향해 상호작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198항).
우리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말이 있다. 규제 완화, 규제 철폐, 규제 개혁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시장에 너무 많은 규제가 있어서 기업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래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발전하지 못하므로, 과감하게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의 경제적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우리의 정치 수준이 한참 뒤떨어져 그 역량을 뒷받침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마침내 정치의 목적이 마치 경제에 봉사하는 데 있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 곧 생태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그 일은 오로지 지금의 경제(시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시장과 경제를 섬기는 것이 정치의 몫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는 시장 혹은 경제의 절대 자율이 만능의 신이라는 믿음과 마찬가지다. 가히 경제의 독재라 부를만하다. 정치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할 때 현실 세계에서 이를 견제할 힘은 어디에 있을까?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atholictimes.org%2Fuploadfile%2FP2981_2016_0207_1602.jpg)
어두운 길의 끝
처음에는 두렵고
어쩌면 싫을 수도 있을 거예요
눈이 부시고
찡그릴지도
하지만,
이 길 끝에 다다르면
더 이상
어둠에 몸을 숨기지 않을 거랍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카 5,8)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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