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 성형수술의 왕국이었는데
2년 전 귀국해 보니 한국의 성형수술은 한 단계 더 발전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 국민들이 찾는 성형수술의 메카가 되었고
수술의 종류는 간단한 쌍꺼풀과 코 수술 정도가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수술의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해졌다.
피부노화를 방지하고 탄력을 준다는 ‘슈링크’ 시술, 얼굴을 환하고 맑게 해준다는
‘신데렐라’ 주사, 어깨와 목의 곡선을 예쁘게 해준다는 승모근, 쇄골 군살제거 주사,
종아리 지방 축출 주사 등 들어보지도 못한 곳들을 향상시키는 시술은
시술을 받아서 몰라보게 예뻐졌다는 둥, 그런 시술을 하고 보니
한 두 부위만 손대면 정말 완벽한 조각 몸매와 연예인 같은 다리를
가질 수 있다는 둥 유혹은
여기저기서 몰려와 귀에서
아우성처럼 맴돌았다.
한국인들과 서양인들
(내가 주로 시간을 보낸 미국과
영국의 예)이 가지고 있는 미의 기준과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한국의 극심한 외모 지상주의는 남과
자기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듯하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날씬하고 예쁜 연예인들을 보면,
그들이 연예인이기에 거기에 걸맞게 많은 시간,
돈과 노력으로 아름다음을 지키고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예쁜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보다는
다른 점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한국은 그 예쁜이들이 연예인이건 아니건
남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뒤떨어지고
덜 예쁜 것을 인정하기는커녕 그만큼 예쁘지 않은 건
노력 부족이라고 오히려 자신들을 탓하는 분위기이다.
문득 두 경우가 떠올랐다.
언젠가 미국인 남자가 나에게 “한국여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예쁜데,
특별한 날에 더 예뻐 보이는 적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미국영화를 보면 자주 듣는 대화 중 하나가
“오늘은 정말 예쁘네(you look so beautiful today)”라는 말이다.
이 구절은 매일같이 완벽하게 예쁜 한국여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얼마 전 선배언니가 딸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이 에피소드는 한국기준으로 예뻐지고 싶어 하는
갈망과 욕구를 한꺼번에 해소시켜 주었다.
선배언니가 “나 어때(How do I look)?”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딸의 대답이 명언이었다.
“엄마, 방에 다섯 명이 있어요, 그 중 한명은 엄마가
예쁘다 생각할 거고,
다른 한명은 엄마가 못 생겼다
생각할거에요.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상관하지 않아요.”
정말 예쁘다고 해주는
단 한명을 위해서
우리는 이런 시술을 해가며
미적인 기준에 도달하려
애를 써야 하는 걸까.
물론 자기만족이라고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비용과 아픔을 감수하며
이런 시술과 수술을 받아야 할까?
예쁜 얼굴도 매일 보다 보면 더 이상 특별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젊고 예뻐지는 평준화된 미적 기준보다
내 개성대로, 내 나이에 맞는 미적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잣대와 나는 달라도 된다고 자신 있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재진 국제개발금융 투자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