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숙(선문대 순결학과) | |
감신대 고 변선환 교수님과 더불어 이단으로 파문당하기까지 했던 용기있고 존경받는 신학자 감신대 홍정수 교수님의 통일교에 대한 비판적 논문(1990년대 초반 작품 같음)을 전문 싣어 봅니다. 연세대 서남동 교수님에 이어 두번째 시도되는 진지한 통일원리 비판 논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통일원리에 대한 이해 수준이 여전히 한국기독교 전체의 낮은 수준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통일원리에 대한 일부 왜곡까지 있어서 우리에게는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학자적 양심에서 나오는 진지한 접근은 그의 신실함을 충분히 옅볼 수 있다고 봅니다. 통일원리가 너무 방대하다 보니 예기치 않은 많은 곡해와 실수가 있지 않았나 여겨지면서도 좀체로 보기 드문 진지한 논문이라 여러분들이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보고 올려 봅니다.
제가 몇 일에 걸쳐 타자한 것입니다. 오타가 다소 있을지라도 널리 양해하시고 좋은 논문이니 기쁜 마음으로 비판적 안목으로 읽어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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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원리“와 기독교 신앙의 비교 연구
홍정수 -감신대/세계신학연구원
Ⅰ. 방법론과 문제의 제기
1954년 5월 1일 서울에서 창립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이 명칭은 성령에 대한 한국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신령”과 “세계기독교의 통일”을 가르키고 있다)는 이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도 기존의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가져야할 만큼 충분한 도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같은 통일교의 성장이 한국 종교들이 일반적으로 맞이한 “종교적 르네상스”의 하나인지, 반공 이념에 편승한 정치. 종교의 비밀스런 결탁에 기인한 것인지, 또는 통일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역량) 때문인지--그런 것을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 혹은 종교학자가 풀어갈 문제이다. 우리는 단지 통일교의 경전이요 조직신학인 “원리강론”을 기독교 신앙과 비교 연구하려 한다.
이같은 신학적 접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통일교의 정체는 그 신학에 있지 아니하고 활동(실천,practice)에 있다. 따라서 “원리강론”의 연구는 무의미하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같이 비판해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꼭같은 논리로 당신 자신의 교회와 신학을 비판해 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도 사랑을 외치나 증오를 실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를 보고 겁이 나서 기독교까지 싫어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보지 않던가? 따라서 통일교가 혹 비겁한 방법이나 교활한 방법으로 포교 활동을 한다 하여, 그들의 주장에 귀기울이는 수고를 거부한다면, 오히려 우리 자신의 옹졸함과 인색함을 폭로시키고 말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신학자들도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하는 이런 시국에, 기독교의 하나인 통일교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편협한 일이요, 현대 신학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니냐고 묻는다. 일리가 있는 염려라고 생각한다. 온 국민이 화합과 통일을 외치고 있고, 기독교인이라면 이같은 좋은 일에 앞장서야 마땅할텐데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국민 총화의 저해 요인이 될 수가 있다. 범인의 인격도 존중해야 하듯, 형제의 신앙과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통일교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은 저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입장에서-- 저들의 모순을 지적해 줌으로써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고, 나아가 알지도 못하면서 현혹되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통일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나서지 아니한다면,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알차적 포교 대상으로 삼지만 않는다면, 통일교와 다른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교는 기존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나섰다. 아니 부정하고 있다. 개종시키고 있다. 따라서 다른 종교의 하나로 여기기에는 사정이 특수하며, 한편 통일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것은 오히려 통일교를 중요하게 진지하게 취급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난 통일교에 관심이 없다. 우리 교회와 교인들은 자신이 있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무사안일적 태도는 이미 중요한 도전 세력으로 성장한 통일교의 사회적 현상과 우리를 향한 저들의 신학적 지적에 대해 눈감아 버리는 게으름을 드러내 줄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통일교는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지금은 민중 신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고 서남동 선생이 쓴 글 "통일교 『원리강론』의 비판적 연구“(1970년 3월)가 아마 신학적인 비판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다른 많은 자료들은 통일교의 활동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거나 일방적인 비방의 것이어서, 통일교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글에서 서 선생은 통일교에서 ”교회 갱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서 선생이 한국 교회의 갱신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통일교를 근본적으로 잘못된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한국적 신학으로서보다는 서구 신학의 한 변형으로 이해함으로써 통일교의 핵심이 되는 신학적 동양성 혹은 한국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 신학 수립이라는 미완성의 과제를 눈 앞에 두고,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한국적“ 신학의 (서투른) 한 형태로 바라보면서 재조명하고, 그것과 상응하는 기독교 신앙의 입장을 약술하고자 한다.
자료로는 1966년에 발행된 익명의 책 『원리강론』을 사용한다. 필요에 따라서 통일교인 훈련 교재로 나온(우리나라에서는 1979년에 초판이 나왔으나, 미국에서는 『원리강론』의 영어 강연 테이프 형태로 그 이전부터 요원 교육용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한 미국인 신학생에 의하면 이 “6시간”강연이 아주 잘 짜여 있다고 했다) 『원리개요』와 창조 원리만을 상술한 『간추린 원리교본』(1981)를 참조한다. 한편 통일교측의 유일한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전 이화여대 교수 김영운의 『통일신학』(1981)을 보충 자료로 사용한다. 후자의 책은 그 내용으로 보나 연대로 보나 앞서 말한 서남동 선생의 긍정적 비판에 용기를 얻어 통일교를 새롭게 변증해낸 작품이다.
『원리강론』을 읽는 우리의 기본 시각의 하나는 이것이 탄생한 한국이라는 “문화적 상황”과 문선명의 “계시” 사건을 발생시킨 한국의 정치 상황 곧 일본 제국이라는 외세 강점의 상황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자아를 표현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나 집단의 작품은 언제나 그것이 처해 있는 문화적, 정치적 맥락과 아울러 생각해야만 그 초점을 놓치지 않는다.
나아가 독자가 『원리강론』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다음 세 가지이다. :(1)이것이 기독교 전통(성서 포함)에 충실히 터잡고 있는가? (2)이것은 오늘날의 한국인의 언어와 세계관에 일치하는가(이해될 수 있는가)? (3)이것은 오늘날 우리들 안팎의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극복해 주는데 도움(실천성)이 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은 모든 기독교 신학과 설교와 행동을 판단할 때 우리가 던져야 할 보편적. 객관적 기준이다.
Ⅱ. 『원리강론』의 비판적 분석과 기독교 신앙
『원리강론』은 1953년에 입교한 유효원이 소위 문선명이 예수께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를 근거로 정리하여 낸 『원리해설』(1957)의 증보판이다.
문선명은 평안북도 태생이며, 장로교인이었다. 그는 그의 나이 16살이 되던 해인 1935년(일제치하)의 부활절(4월 17일)에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인류를 불행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줄 것을 선생에게 간곡히 부탁하셨다”(『통일교회소개』,2)고 한다. 『원리강론』의 내용은 이같은 “계시” 사건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원리개요』,8). 그러나 “예수님의 환상”과 『원리강론』의 내용은 성격상 일치할 수 없다. 민족의 암흑기에 청년 문선명이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 속에서 민족 해방을 동반하는 지상 천국의 미래를 보았다는 것을 지극히 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통일교가 매우 현실적인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종교는 일반적으로 내세지향적인 커다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문선명의 “환상”이 일제 치하에서 발생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원리강론』은 그 계시의 사건(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보여 주신 “새진리”라고 주장한다. 『원리강론』,21.26)을 훨씬 넘어서, 문선명이 경험한 6. 25 전쟁 사건에 상당히 영향받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고 있다)의 싸움을 “마지막 싸움”(『원리강론』,23)이라고 말하고 있음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결과적으로 『원리강론』은 예수 환상의 체험과 6. 25 전쟁의 체험, 두 사건을 근간으로 하여 발전된 사상 체계이다.
우리 주변에 통일교가 왜 그렇게 강한 극우적 반공 이념에 사로 잡혀 있는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원리강론』 자체가 (“계시” 주장과는 별도로) 6. 25 전쟁의 상처 속에서 씌여졌다고 하는 발생 원인의 사회. 정치. 심리적 요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즉 통일교의 “원리” 속에서의 극우적 반공 이념을 사실상 비본질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원리강론』의 발생학적 배경 때문에 승공 투쟁이 통일교의 핵심인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은 그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다같이 불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승공투쟁론은 정치 권력과 종종 밀월 즐겼고, 이 사실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통일교 자체에 대한 불필요한 저항감을 사고 있다.).
이 책은 전후편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편은 신학적 견지에서 보면, 전편의 보충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하다. 후편에는 새로운 선민 의식 곧 “세계의 구원은 한국인을 통해서”가 역사 철학의 형식을 빌어 전개되어 있으며, 문선명의 인류구원사적 역할 또는 위치가 암시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통일교의 신학 또는 사상을 이해하려면 전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곧 하나의 집단 운동으로 이해하려면, 후편의 역사 철학, 한국인의 사명론 그리고 재림론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하에서 우리는 『원리강론』을 편의상 4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 :(1)창조와 하나님, (2)타락과 인간, (3)구원론으로서의 역사관(『원리개요』는 통일교 사상이 창조, 타락, 구원의 3원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4)메시아의 재림과 한국.
1. 창조와 하나님
(1)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본성
희랍 문화와 만나게 된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자족적 존재로 생각해 왔다. 완전한 존재라면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뭔가가 하나님에게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그만큼 모자란 것이 된다. 반면에 하나님이 심심풀이로 뭔가를 꾸미는 장난꾸러기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도 필요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행위에 일관성이 결여되고,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성의 결핍을 뜻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보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도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전능하신 창조주”를 고백하지만, 신학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결국 천지는 하나님의 적극적 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데 그의 충만한 사랑의 우물물이 넘쳐 흘러 저절로 세상이 탄생되었다고 설명해 왔다. 마치 불은 그냥 타오르고 있으나 그 주위가 저절로 더워짐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서 세상을 지으셨겠는가?
이같은 생각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결과로 생겨난 막다른 골목이다. 유대-기독교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사변적 철학이 아니다. 또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과학적 도구로 탐구할 수 있는 이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성서의 창조론이 답변하고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것은 사실 잘못 들어선 길의 여정이었을 뿐이다(“후회하시는 하나님” 『한몸,3호)』. 그런데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희랍적 기독교와는 달리 동양적 혹은 한국적 기독교(?)인 통일교는 아주 선명하게 말한다.
기쁨은 독자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무형이거나 실체이거나 자기의 성상(性相, internal chacacter)과 형상(形狀, external form)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긴다(『원리강론』,52-53. 이하에서는 『강론』으로 씀)
즉 『강론』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셔야만 했다. 하나님은 희랍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절대 자족적 존재는 아니다. 그러한 존재는 있을 수도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불행하다고 본다.
(2)하나님과 세상의 관계
통일교의 사상의 표적인 핵심은 --내면적 핵심은 성(sex)이다.--소위 이성성상(二性性相, dual essentialities)의 원리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면 성상은 무엇이며, 형상은 무엇인가? (왜 일반인이 잘 쓰지 않는 어려운 말을 골랐는지 알 수 없다. 다행히 영문판 『Divine Principle,』을 읽으면, 통일교의 특히 용어들이 전통적 용어의 무엇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외형(外形)과 내성(內性)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그 내성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성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난 그 외형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꼴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를 성상이라고 하고, 후자를 형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상(性相, internal chacacter)과 형상(形狀, external form)은 동일한 존재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형상을 제2의 성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털어서 이성성상(二性性相, dual essentialities)이라고 한다.(『강론』,33)1)=>주석1):성상과 형상이란 용어는 동양 철학에서도 흔히 사용되지 않았다. “형상”이란 말은 비교적 자주 사용하였으나, “성상”이란 말은 논어에 性相近이란 한 귀절이 나오며, 후대의 철인들도 아주 드물게 사용하였다. 반면에 불교의 법화경에도 性相이라는 말이 나오나, 거기에서는 性과 相이 구별되어 사용된다.
사람의 경우 “마음”과 “몸”이 바로 성상과 형상에 해당한다(『강론』,33. 『통일교회소개』,15). 그런데 통일교는 매우 대담하게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의 마음과 몸의 관계와 같은 이성성상의 원리로 파악한다. “피조물은 모두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다”(『강론』,36). 이 말의 뜻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은 우주의 마음이요, 우주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이미 본 대로 우주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성성상의 원리에서 보면, 우주라는 보이는 몸이 없이는 하나님도 존재할 수가 없다. 이렇듯 하나님의 존재와 우주의 존재를 철저히 상대적으로, 상호 의존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통일교 사상의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 기독교는 하나님 창조주에 대한 세상의 의존성은 강력히 주장해 왔지만,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존성을 언제나 부정해 왔다. 그러면 통일교의 하나님은 절대적 신이 아니고 다른 피조물과 같은 부류인가 라고 혹 질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통일교는 이같은 질문을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통일교가 하나님의 상대성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주체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사랑은 그 자체가 관계의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단독자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 하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사랑하도록 유도하고 계실 뿐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통일교는 이같은 이성성상의 원리를 일관성 잇게 적용시키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우선 또 하나의 이성성상 원리에 해당하는 음양의 양성론을 살펴보자.
(3)세계와 인간의 음양 쌍성론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서 존재하게 된다(『강론』,32).
통일교는 “이성성상”이란 말을 ‘음+양’론과 ‘성상+형상’론에 다같이 사용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에도 혼란에 빠져 있다. 음양의 이성성상을 쌍성론이라고 구별해 부르기로 하자. 통일교는 두 가지의 쌍성론에 기초해 있는데, 하나는 개체 존재의 법칙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개체와 개체의 상관 관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성상과 형상의 쌍성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만 분리될 뿐 사실에 있어서는 언제나 동시적으로만 존재한다. 본성이 없는 모양이란 없으며, 모양을 갖추지 못한 순수(?)한 본성도 또한 없다. 그래서 통일교에서 이것을 음양의 쌍성론에 비해 “보다 근본되는”(『강론』,33)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음양의 쌍성론은 머리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통일교는 이해하고 있다. 즉 남자는 100% 양성, 여자는 100%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동양 철학이 양성은 남성성, 음성은 여성성을 가리키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가 음성이고 여자가 양성인 수도 말해왔다. 즉 동양 철학의 음양론은 현실적인 개체 존재의 남자와 여자에게 직선적으로 적용되지 아니했다. 거기에는 미묘한 변증법이 있었다. 그러나 통일교에서는 이같은 복잡성(변증법)을 단순화시켜, 남자는 양성 여자는 음성이라고 풀어나가고 있다. 한편 이성성상론과 음양 쌍성론의 관계가 혼란에 빠져 있음을 뒤늦게 파악한 통일교의 『간추린 원리교본』(1981)은 두 개의 이원론의 관계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과 몸,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이 근본적인 본질이며, 보다 내적인 것이고,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은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의 속성이요 보다 외적인 것이다(26).
그러면 이성성상의 “속성”이요 “외적” 표현인 양성과 음성의 쌍성론은 신학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쌍성은 피조물의 세계에서 직접 발견되는 “보편적인 공통 사실”(전 생물의 성을 가리킴)(『강론』,32)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지적한 이성성상의 원리에 의거하여, 쌍성을 갖추고 있는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내성(성상)”에 해당하는 하나님 자신도 쌍성적 본성을 구비하고 있음이 확실해진다. 이로써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확실히 알 수 있는(인식론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통일교의 하나님은 원리의 모범이며, 원리는 세계 도처에서 특히 인간에게서 아직도(타락에도 불구하고) 발견되고 있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아무리 영적인 사실을 부인하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며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강론』,23)고 믿는 통일교는 “신비없는 종교” 곧 과학과 일치하는 종교를 표방하고 있고, 이같은 합리성 추구는 이성성상의 원리와 쌍성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이성성상의 원리가 존재의 법칙이라면, 음양 쌍성의 원리는 (존재와) 인식의 법칙며, 이 인식 원리에 근거하여 통일교는 “이해할 수 있는”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과감한 도전이다.
하나님 인식의 근거로서의 세계(이것을 신학에서는 “계시신학”과 구별되는 “자연신학”이라 한다. 따라서 통일교는 “계시”를 필요치 않는다. 적어도 그 내적 논리에서 보면.)는 다시 인간과 다른 피조물로 구별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상(形狀)인 형상(形象)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 특권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 대상”일 뿐이다.2)=>주석2):통일교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적 개성진리체(形象적 個性眞理體)라고 하고, 피조물을 상징적 개성진리체라 하여 구분한다(『강론』,37). 하나님의 형상(形狀)에는 간접적인 형상과 직접적인 형상이 있는데. 사람만이 직접적인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분법은 통일교의 일관성을 크게 파괴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形狀)이라면, 같은 하나님에 대하여 꼭같은 “대상”이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이 여럿이 아니라면.
통일교의 제 1원리에 있어서 일관성이 또 크게 파괴되는 것은 “하나님은 무혀이고 초감각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교본』,2)고 말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이 상대적 존재라면 하나님은 무형이 아니라 유형이다. 하나님의 몸, 형태는 이 세계이다. 무형의 존재는 이성성상의 원리 위반이다. 그런데 합리성을 추구하고 있는 통일교가 이같은 큰 실수를 아직도 시정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하나님은 원리의 예외이든가, 유형의 존재이다. 전자의 경우는 통일교가 합리성을 희생시켜야 한다.
(4)창조 원리의 숨은 뜻--“중화(中和)적 주체”이신 하나님
얼핏 보면 통일교는 창조론에서 심오한 철학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서구적 형이상학적 질료와 형상의 이원론을 동양적 형이상학적 음성과 양성의 이원론3)(주석. 밑에)에 성급히 접목시킨 것이다. 나아가 성상과 형상이라는 두 성상이 더 근본적이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창조 원리의 숨어 있는 핵심은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中和)적 주체도로 계신다”(『강론』,35)는 말에 있다.
=>주석3):성상과 형상이 희랍의 이원론이라는 말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에 있어서는, “형상”이 본질(=성상)을 규정하고, 그 본질을 받는 체(體)를 질료라 한다. 그러나 본질과 그것의 꼴을 구분하여 생각한다는 점에서 서구적 이원론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이같은 사유 방식은 유교와 불교에도 다같이 잘 알려져 있다.
서구의 가부장제적(남성지배적) 문화의 토양에서 자란 나무 기독교는 의식. 무의식 중에 하나님을 남성(양성) 일변도로 생각해 왔으며, 이것이 근래에 들어 여성 신학의 세찬 비판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에 비하여 동양적 이원론인 음양의 쌍성론을 하나님에게 직접 적용시키고 있는 통일교의 하나님 이해는 시대를 앞서간 것처럼 보인다. 통일교의 조직 신학자 김영운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통일신학』, 66이하). 그러나 쌍성을 소유하진 하나님론의 숨은 의도는 하나님 이해 자체의 수정을 위해 등장한 것이 결코 아니다.
통일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쌍성(양+음)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창세기 1장 27절이 거짓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形像, 形狀과 形像, 形象은 한자는 다르나 뜻은 같으며, 그래서 한글 성경의 표현은 바뀌어 왔다. 그러나 통일교는 구분하여 사용한다.)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요즘 말로 하면-- 자웅동체적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수수(授受)작용“을 갖는다. 과거의 신학은, 하나님은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다고 가르쳐 왔다. ”받음“은 불완전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적 이원론에 근거한 통일교는 이 점에 있어서 희랍의 이원론이나 페르샤의 이원론에 비해 보다 성서적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에게서 받으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표현상으로는 이렇듯 전통적 기독교의 이해와는 달리 하나님 자신의 쌍성론을 펴고 있기에 매우 혁신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표현은 하나님 자신이 자웅동체적 존재임을 말해주려는 것이(그래서 하나님은 부모이다)이 아니라, 성적 결합이 인간 구원에서 차지하는 신학적 역할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쌍성의 중화적 주체로 강하게 밀고 나가는 진짜 목적은 창조와 인간의 성(Sex)을 결합시키려는 저의 때문이다.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다. 통일교의 창조 이해는 동적이어서, 일시적 창조가 아니라 “소생(번식), 성장, 완성”의 3 단계를 거치는 발전과정이라고 한다(『강론』,63). 그런데 창조의 목적 성취인 이 성장의 완성은 쌍성의 중화적 주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실체 대상” 피조물,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닮아 각각 “중화적 주체”(남성과 여성의 결합)가 되고, 하나님과도 “일체”가 됨으로써 실현된다. 그런데 여기서 통일교는 또다시 쌍성론의 논리적 일관성을 깨뜨린다. 하나님은 “홀로” 부모이시나, 인간은 이성과의 완전한 성적 결합을 이룸(가정+자녀생산)으로써만 창조 목적 곧 구원을 성취한다고 봄으로써, 누구도 인간은 “홀로” 쌍성의 중화적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로써 통일교의 제 1원리인 창조원리(이성성상론과 쌍성론)의 숨은 의도는 “성(性)을 통한 구원”이란 도식을 어렵게 어렵게 이끌어 내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5)삼위일체의 숨은 뜻--선한 가정
배경을 알고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괴롭혀 온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강론』은 역시 매우 극명한 논리로써 부정한다. 통일교에 의하면 “영적”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영적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 를 뜻하는데, 통일교의 진짜 관시은 사람(주체 완성)이 결혼(가정 완성)하여 자녀를 낳음으로써 이상 사회(지상 천국, 세계 평화)--이것을 3대 축복이라 한다--를 건설한다는 데에 있다. 이같은 이상적인 선한 가정이 삼위일체의 모형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성(二姓)과 쌍성(雙性)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통일교는 한 개체 내의 수수(授受)작용이라고 한다. 수수 작용은 결국 단일 개체를 그것의 “대상”과 대립시킨다(천지창조:인간의 경우 남과 여의 대립). 이렇게 나누어진 개체는 다시 “하나”로 돌아가야 완성되는데, 이 회귀 운동을 합(合)이라 한다. 즉 개체로서의 존재(正:인간의 경우 미성년자)는 서로 대상이 되는 존재들로 분립되고(分:인간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대립), 그것은 다시 하나(合:인간의 경우 결혼)가 된다. 이것이 운동의 과정으로 풀어본 만물의 질서(원리)이다.4)(주석. 밑에) 그런데 사람의 경우는 “하나”가 되고 나면 개체의 완성에서 그치지 않고 “자녀”가 생산된다. 따라서 사람 세계의 온전한 하나는 하나님, 남과 여, 그리고 자녀라는 4인자(구성요소)로써 구성되며, 이것을 통일교에서는 “四位基臺의 存在樣相”이라 칭한다. 따라서 사실은 사위일체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녀를 자연스럽게 소산으로 여기면서, “참부모”가 있는 가정을 하나님과 일체가 된 삼위일체라고 해석한다(『강론』,223-224: 42-43. 김영운,214-244).=>주석4):헤겔의 정반합 작용의 모방이다.
“……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난해한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에 대하여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강론』,26)고 강조하고 있는 통일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원칙적으로 곡해 부정하고 있다. 무한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 현현인 예수를 만난 이들의 신앙 고백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 교리를 예수 사건이나 신앙의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가정”의 사건으로 풀어가는 통일교는 삼위일체의 “해명” 약속을 송두리채 저버리고 있다. |
첫댓글 이런 글 올려도 되나 싶네요... 90년대 쓴 비판이라면, 지금 다시 비판적 입장에 쓴다면 어떨까 싶네요.. 위에 글 쓰신 분이 이 글 보시면 부끄러워하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공들여 쓴 글이라도 1년만 지나도 부끄럽던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