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최진석 (13)
<04>
사 ------- 철학을 한다는 의미
思 기존의 문법을 넘어서 새 문법을 준비하는 도전,
정해진 모든 것과 갈등을 빚는 저항,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궁금해하는 상상,
이것들이 반역의 삶이라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반역의 삶을 사는 일이다.
국가 발전의 기본은 '철학적 시선'을 갖추는 일
철학적 높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바로 근접한 단계에 도달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을 사명 혹은 시대의식으로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장르'를 형성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그런 능력들의 배후 역량으로서 장르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이 중요하다.
아편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살펴보았듯이 중국도 반식민 상태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철저하고 일관된 노력을 하다가 최종 귀결로 윤리, 사상, 문화, 철학에 집중하였다. 일본도 중국과 형식은 다르지만, 서양을 극복하려는 과감한 도전을 감행한다.
일본은 1867년 봉건시대, 즉 막부시대의 막을 내리고 1868년부터 메이지유신에 들어가는데, 메이지유신을 시작할 때 일본인들은 매우 높은 시선에서 전략적 판단을 하고 온 나라가 이 판단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그 내용이 바로 "아시아를 벗어나서 서양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가진 '탈아입구(脫亞入歐)'다.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한 것으로, 아시아 문화로는 세계 변화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도적인 나라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존의 아시아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서양을 모방하여 서양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압축하면 일본은 서둘러 서양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당시 세계 변화의 중심축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당시 시대적 추세에서 중국이 걸었던 방향이나 일본의 결정은 전략적으로 아주 합당했다. 반면 우리는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일에 실패했다.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근대에 우리가 당한 긴 시간 동안의 치욕은 바로 이 전략적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그런 수준에 있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시작한 지 6~7년 만인 1875년 9월 20일에 일본 군함 운요호를 조선의 강화 해협으로 보내 불법 칩입하면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다. 이는 1853년 쿠로후네를 타고 온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일본이 강제 개항된 지 22년 만이다.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당한 사건을 그대로 따라서 일본은 22년 만에 조선을 강제 개항시켰다. 강제로 개항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1910년 8월에 조선을 병합해버린다.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한 순간에 전략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는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다. 타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아편전쟁 이후 세계의 큰 흐름을 주도적으로 포착하고 그 흐름을 장악하는 시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 흐름을 주도적으로 포착하여 독립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일에 실패하면 이런 치욕은 언제든지 되풀이된다. 혹시 지금 우리는 개항기에 전략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그 모습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철저한 반성을 해야 하는 매우 치명적인 시점이다. 결코 한가한 때가 아니다.
고난의 극복과 찬란한 번영 및 부흥이 한계에 도달한 이 단계에서, 우리가 돌파하여 나아갈 길은 오로지 선진화다. 그리고 선진화라는 목표는 결국 철학적 단계로의 상승과 관련된다. 지식인은 감각과 기능에 갇히지 않는다. 시대의식을 포착하고 거기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지식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는 삶을 살아야
철학적 시선으로 '나'와 '국가'를 끌고 간다는 것은 전략적인 혹은 문화적이거나 예술적인 단계 또는 인문적인 시선의 단계로 상승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문법을 뒤로 하고 선진화라는 새로운 문법을 구축해야 한다.
새로운 문법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의 발전을 넘어서 다음 단계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더 큰 위기가 닥칠 것이고, 그러다가는 그저 여기까지만 살다 갈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는 이런 위기의식과 함께 한 단계 더 상승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 모여 있는 이유다.
건명원 입원식(入苑式) 때 오황택 이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교수님들, 이 젊은이들을 반역자로 키워주십시오!"
"그리고 원생 여러분, 반역자가 되어주십시오!"
반역자는 정해져 굳은 것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그것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반역은 기존의 것에 저항하는 것, 이미 있는 것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더 궁금해하는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려는 도전, 이것이 반역의 삶이다. 모든 창의적 결과들은 다 반역의 결과다. 우리나라처럼 특히 훈고의 기풍들만 채워진 상황에서 이는 더욱 절실하다.
당시 어느 기자가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
"건명원이 성공할 것 같으냐, 성공하지 않을 것 같으냐?"
그 기자뿐만 아니라 건명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공 여부를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다. 꿈과 이상이 있으면 그 꿈과 이상을 실천하고 시도하면 되는 것이지, 그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보통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의 가능성 여부를 먼저 따지려 한다. 그런데 그것을 따질 때 사용하는 논리나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 의미 있는 것들인가? 아니면 지금은 없지만 다가올 것들인가? 우리는 분명 이미 있는 것들을 사용한다. 이미 있는 논리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따지거나 분석하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오겠는가? 현재의 틀로 미래를 재단하면 미래가 제대로 열리겠는가?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문법에 갇혀 있으면 꿈은 항상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꿈꾸는 일을 멈춰버리는 얌전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안전을 추구하기만 하고, 낙오되지 않으려고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꿈은 불가능의 냄새가 더 강하게 나야 진정한 꿈일 가능성이 크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꿈이다. 가능해 보이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괜찮은 계획일 뿐이다.
꿈을 꾸거나 꿈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우선 무모해야 한다. 무모함을 감당할 배짱이 없이는 꿈을 꿀 수 없다. 결국은 용기다. 꿈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 앞에 있는 것은 기존의 익숙한 문법으로 해석될 리 없다. 그 꿈이 이루어지고 형성될 새 문법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꿈은 있는 문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일이다. 인류를 번영시키고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창의적 성취를 이룬 영웅들이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시소를 탄 적이 있던가? 가능과 불가능을 면밀히 분석하며 우왕좌왕한 적이 있던가?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고유한 욕망으로 자기 인생을 채우지 기존에 있는 문법이나 논리로 그것을 해석하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그냥 건너갈 뿐이다.
꿈을 꾸는 삶이란 '나'로 사는 일
꿈을 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자신의 내면적 욕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타인의 꿈을 대신 꾸거나 대신 이루어줄 수 없다. 꿈은 나만의 고유한 동력에서 생긴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서 생긴다.
'나'는 꿈을 꿀 때 비로소 참된 '나'로 존재한다. 이때는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옹골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차돌처럼 존재한다. 자기가 바로 참여자이자 행위자다. 비평가나 비판가로 비켜나 있지 않다. 구경꾼으로 살지 않는다.
어느 조직이나 붕괴하기 시작할 때는 공통의 조짐이 나타난다.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 피판하고 평가하는 등의 분석하는 일을 점점 많이 한다. 구성원들의 이탈 현상이다. 구성원들이 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구경꾼으로 존재한다. 구성원들 가운데 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진다면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조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분야에나 일류 비평가들과 일류 분석가들로 넘쳐난다.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 각자가 책임성 있는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한다.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평이나 분석에 빠지는 제3자적 태도로는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지금은 일류 비평가나 일류 분석가보다도 이류라도 좋으니 1인칭 참여자들이 필요하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는 의지로 뭉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바로 꿈을 꾸는 무모한 사람들 말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묻는 태도는 그럴듯해 보인다. 매우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당사자인 우리에게 이런 분석적인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제3자로서의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등에게는 흥미 있는 질문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이것은 어떤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지,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선진국으로 진입할래? 안 할래?"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싶어? 안 하고 싶어?"
이렇게 욕망의 방향을 설정하고 덤빌 것인지 안 덤빌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 핵심이지, 한가하게 가능성 여부나 묻고 분석하는 것은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건명원의 성공여부도 이와 같을 뿐이다. 각자 건명원에 모인 이유를 스스로 통감하고, 덤빌지 안 덤빌지 그 여부만 따지면 된다. 이는 꿈을 꾸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된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