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플랫폼에 있는 건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려다 모양변경이 많이 되어 못한 건물인 군회조점을 소개할까한다.
군회조점은 맞배지붕에 일식기와를 올린 벽돌조 2층 건물이다. 1900년대 초기의 사무소 건물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으며, 2층 창문상부의 아치장식이 돋보인다. 또한 상량문이 그대로 남아 있어( ‘明治三十五年十一月十一日郡金三郞’) 이 건물이 1902년에 이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1942년에 건축된 것으로 되어있다.
1층에는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창문을 하나씩 배치하였고
2층에는 3개의 창문을 두었다. 1층 창문은 단순하게 처리했고 2층 창문은 장식적 요소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입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인방은 흰색으로 칠한 콘크리트로 처리했고 창문 좌우에는 벽돌을 내 쌓아 기둥처럼 보이게 했다. 이 건물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은 별도의 건물로 보이나 이 건물과 연결된 단일 건물이며 좌측의 건물은 동방운수주식회사로 사용되었다. 삼우인쇄소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칠통마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량문의 ‘明治三十五年十一月十一日郡金三郞’
상량문에 기록된 코오리킨자부로(郡金三郞)는 무역 및 해운업자로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嚴原)사람이다. 그는 인천 개항초기에 도항하여 무역 및 해운업에 종사했으며 일본우선회사 기선취급점을 겸하였다. 부산에서 크게 성공한 오오이께 츄스께의 일족으로 코오리는 당초 1877년 부산으로 건너와 무역과 수화물 도매를 위해 코오리상점을 열었다. 상점이 번성하자 친동생인 이케다스케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그는 아직 개항하지 않은 인천으로 진출했다. 인천에서 크게 성공하여 하늘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아 사업수단이 뛰어나고 상업회의소, 거류민회의 ㄷ으의 의원으로 매회 당선되어 공공을 위해서 일한다. 그 외 ㄱ오공단체 또는 회사 사업등에 관계되는 일이 많다. 인천에서 원로의 한사람으로 명망가이다.(인천사정 25년사)
그는 1883년 울릉도 탐사선인 진세이마루(鎭西丸)으로 인천항해를 시도하여 인천항내에 출입한 선박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해운업을 시작하였고 갑신정변(1884년) 때에는 그가 주도하여 부인 및 부상자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켰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근거로 1904년에는 인천일본거류민회는 그에게 감사패를 주기도 했다.
그는 인천항 해안 일본거류지에서 군회조점(郡廻漕店)을 운영하고 있었다. (인천사정)
인천의 긴요문제(1903년)와 한실업가명감(1904년)에도 그는 ‘군상점(郡商店)’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의 회사의 위치는 인천항 해안통이며 업종은 해운업 및 무역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 아트플랫폼 A구역에 군회조점 H구역에 주택이 있는 걸로 보인다. 혹 주택이 있는 곳에 상점을 경영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