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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5월5일2부 예배 본문 : 마태복음5:1-6절 제목 : 팔복으로 기뻐하라[1;2]
기도 : 시무장로 송호성 ♬50.487.495.456.361.
◇ 설립17주년 42번째 2부예배로 영광을! ◇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4:24)
찬 양 : 오전10:40 예배:11시
올 겐 : 고범희 피아노 : 김순복 드 럼 : 송호성 섹소폰 : 이기수 베이스 : 송우성
사 회 및 강 론 : 담임목사 고 승철
제1부 찬양과 영광
묵상영광 / 다 같이 모두찬양
묵상성시 / [갈6:9;10]
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찌니라.
묵상기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기도문 / 다 같 이
영광찬송 / 50 큰 영화로 신 주 (마18:20, 찬양과 경배)
1 큰 영화로 신 주 이곳에 오셔서 이 모인 자들로 주 백성 삼으사
그 중에 항상 계시고 그 중에 항상 계시고 큰 영광 나타내소서
2 이 백성 기도와 또 예물 드림이 향내와 같으니 곧 받으옵소서
주 예수 크신 복음을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만백성 듣게 하소서
3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늘 끝 날까지 주소서
4 주 믿는 만민이 참 도를 지키며 옛 성도들같이 주 찬송하다가
저 천국 보좌 앞에서 저 천국 보좌 앞에서 늘 찬송하게 하소서 아-멘
교 독 문 / 제5번 (시13:1-6절)로 함께 교독합니다.
집례: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 이 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회중: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집례: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회중: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 이 까.
집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회중: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집례: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회중: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 하리이다.
다같이: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 이로다 . 아-멘.
신앙고백 / 사도신경으로 다같이
부름찬송 / 487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요16:23, 기도와 간구)
1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아-멘
부름기도 / 시무장로 : 송호성
5일 12일 본문 : 마태복음5:1-12절 제목 : 팔복으로 기뻐하라[1;2]
0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0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0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제2부 말씀과 은혜
할렐루야!
이라크 여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춘다고 총 맡아 수을 거두고
우리나라 초, 중, 고생 2000명이 도박에 중독되고 있어 문제라고 합니다.
전 세계 태권도인들이 2억 여 명이 되고 우리나라에 180국이 참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풍성하여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꼬꼬무' 선감도로 끌려간 아이들 "우리는 부랑아가 아니다"…
基本權 / Fundamental Rights
헌법에 제시된 국민의 권리.
인권이라는 단어와 흔히 혼용되는데,
인권은 ;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
[1]인 반면 기본권은 '국가가 국민에게 부여하는 권리'이다.
따라서 인권이 원론적으로는 자연법인 반면 기본권은 실정법이다.
때문에 자연권 개념을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
인권 개념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권리가 아니라 '도덕적 요청'이며,
진정한 권리는 ;
'공동체의 계약'인 기본권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기본권은 ;
국민에게 부여하는 권리이므로, 원론적으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외국인에게도 제한적으로 적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권은 인권과 달리 제한될 수 있다.
인권이라는 관점에서는 외국인이든 죄수이든 완전히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는 이를 박탈할 수 없다.
그러나 기본권은 ;
'공동체의 계약'이라는 실정법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제한될 수 있다.
따라서 외국인과 죄수는 기본권 중 각각 참정권과 자유권이 제한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군인 등 특수한 사례의 경우 기본권은 제한될 수 있다.
헌법 제2장의 최고원리
왜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기 때문이라고 답을 내릴 수 있다.
기본권을 보호하는 이유는 ;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 1980년 대?에 ;
현재의 대부도 동남쪽에 있었던 선감도 라는 섬에서 ;
부량아들을 보호하고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는 명목 하에 경기도에서 운영했던 학원인데
그들이 그곳에 간 이유는?
[2024. 4. 19]
1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
'그 섬에 아이들이 있었다.'라는 부제로 선감 학원에 간 아이들의 그날을 추적했다.
1960년대 초, ;
미아리에 살던 일용 씨와 그의 형은 할머니와 함께 시장 나들이를 나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할머니 손을 놓쳐버렸다.
그들 앞에 등장한 경찰. 형제는 집을 찾아달라고 했고 금세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미아보호소 등을 거쳐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답니다.
1969년 여름, 할머니 댁에서 지내던 찰떡 형제는 ;
수원 역에서 큰 형과 놀다가 형이 일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역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찰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갔다.
미아보호소를 거쳐 어딘가로 이동하는 차. 형제는 할머니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
내려달라고 했지만 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뿐이었다.
그리고 이들도 역시 선감도에 도착했다.
수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 ;
엄마가 화장실 간 사이 경찰들은 영수 씨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영수 씨의 이야기에 경찰은 엄마도 조금 있다가 오시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영수 씨가 도착한 곳 역시 선감도였습니다.
그리고 영수 씨는 선감도로 오는 도중 ;
"여기서는 너희 자립시켜 주고 좋은 기술을 가르쳐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선감도의 선감학원.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일용 씨의 형은 왜 사망했을까.
일용 씨는 형의 이상했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답니다.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 형은 입에 담요 조각을 잔뜩 물고 죽었다는 것.
그의 형은 굶주림에 담요 조각을 먹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50년이 지난 후에야 찾았다는 것.
시신이 암매장된 곳에는 분묘가 150구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에 묻혀있는 이들은 ;
선감학원의 피해자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으며 그 인원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선감학원이 밝힌 사망 인원은 20명이지만 분묘는 150구랍니다.
선감학원에 온 아이들은 그중 일부만 학교에 보내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역에 동원됐다.
무려 5000평의 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하고 노동 할당량을 못 채우면 매질과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감학원을 운영한 이는 대부분이 공무원이었다.
또한 원생들 안에 서열을 나눠 아이들을 관리하도록 했답니다.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린 아이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단무지와 새우젓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반찬이었으며 ;
늘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흙을 파먹고 오물을 먹고
나무 열매, 굴, 메뚜기, 쥐, 개구리 등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먹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부랑아라는 것. 선감학원은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랑아가 아니었다.
정부는 법률적 정의와 단속 기준이 없이 아이들을 수집했다.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들은 신원 확인 보호자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허위로 작성된 원아 대장만을 가지고 선감학원에 수용됐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부랑아라는 낙인을 찍고 무려 40년간 운영된 선감학원.
1942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유지된 선감학원.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은 무려 4,689명에 발했다.
그러나 이 숫자조차 정확한 숫자인지도 알 수 없다.
선감학원 아이들은 어둠이 내리면 들리는 곡괭이 자루 끄는 소리에 바들바들 떨었다.
이 소리는 폭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답니다.
그리고 선감학원 원생들은 이보다 더한 짓도 당했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일을 당한 아이들은 힘들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
또한 아이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하는 애들은 극히 소수였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매질을 당하거나 갯벌 상태일 때 뭍으로 가다 밀물이 들어와 그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찰떡 형제 중 형은 동생을 생각하며 ;
견디려고 했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
죽으면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그렇게 형은 약을 하나씩 모았고 이를 다 털어 넣던 그때 직원이 이를 막았다.
그리고 그 후 찰떡 형제는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극단적인 상황이 생겨야 선감학원을 나갈 수 있었던 것.
영수 씨는 ;
수차례 탈출 시도했고 선감학원에서 3년이 흐른 날 다른 시설로 이동하던 중 달아났답니다.
당시 선감학원을 취재한 기자는 내부 제보를 받아 선감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이들에게 인권 유린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보도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날 다시 방문한 선감학원은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몇 차례 문제점이 보도되었지만 개선되는 것은 없었던 것.
이는 이 문제를 알고 있는 이들이 묵인하고 방치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찰떡 형제는 각각 시설에서 도망을 쳤고 다시 만났다.
그리고 진짜 부랑아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가족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영수 씨 가족을 찾으려 애썼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4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형을 다시 만났다.
한눈에 형제임을 알아본 두 사람. 영수 씨는 형에게 자신을 찾았는지 물었다.
이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
영수 씨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지새웠음을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답니다.
형을 만나기 불과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묘를 찾은 영수 씨.
그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용 씨는 가족을 찾지 못했고 찰떡 형제는 다행히도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찰떡 형제의 형은 아직도 가끔 선감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당시 외로움을 함께 견뎌냈던 친구 망치가 그곳에 남아있기 때문.
그리고 지난해 그는 친구를 찾았답니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유해와 유품들 중에서 망치의 유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항상 함께 굴을 까먹을 때 썼던 굴 까던 도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현장으로 찾아간 형은 친구의 유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근 선감학원의 유해 발굴을 직접 추진하기로 한 경기도.
그리고 진화위에서는 선감학원과 관련된 기관에 모두 인권 유린 책임이 있다며 공식적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현재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
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된 상황. 하지만 ;
도의 예산이라. 경기도 거주자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국비 지원을 계속 추진 중이지만 현재 그 일정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기쁨으로 행복을 소원하는 사역자들은!=====>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495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눅17:21, 주와 동행)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후2024년도 표어 :매일매일 기쁘게 살아가는 믿음[하박국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05월 주제 : 팔복으로 기뻐하는 믿음[[마5:1]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한편으로 복은 ;
①‘아주 좋다’거나 ②‘오붓하다’는 말에서 풍기고 있는 것처럼
③필요한 것이 허실(虛失) 없이 두루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복이란 한자는 원래 ;
①‘시(示)’와 ②‘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시’는 ;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복’의 한자 어원도 ;
역시 복의 뜻이 가지는 두 함축, 하고 있다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창세기 1:22절 복을 주어 -라고 하셨습니다.
기본 뜻은 ;
①'무릎 꿇다'(시95:6).
②이 말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찬송하다'(9:26),
③피조물에게 적용될 때에는 '축복하다'(27:33)란 뜻이 됩니다.
여기서 복의 내용은 ;
이어지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풍성케 하는 것인데,
'복주다'란 말 자체에도 '풍족케 하다'(신33:11)란 뜻이 있으므로 증식에 대한 내용이 더욱 강조됩니다.
신명기 33:11절에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막봉사를 의해 구별된 레위지파는 ;
가나안 정복 후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10:9;18:1).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十一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란 말은 ;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라는 의미도 되는 셈입니다.
창세기 2:3절에 일곱째 날을 복 주사 -라고 하셨습니다.
본 구절은 장차 인간에게 주어질 안식일 제도가 인간을 위한(막2:27)
복된 것임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기 싫어도 지켜야만 하는 강제 규정인 것처럼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비극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눅6:20-23)
0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1절에 무리를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십니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 고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 -라고 하셨습니다.
마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입니다.
누가복음에는 ;
이 장소가 평지(눅6:17)로 되어 있어 ;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입니다(눅6:17).
'산'(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
①'산악지역', ②'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
또 ③'평지'가 산 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전승은 ;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
그 산 이름을 핫틴산 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
그것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입니다.
앉으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입니다(13:2;23:2;24:3;눅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입니다.
제자들이 -라고 하셨습니다.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11:2).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도 ;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눅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룹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나아온지라 -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갈이'(출19:12) ;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14:6)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0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5:2절에 입을 열어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행8:35;10:34)으로서 ;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습니다(욥3:1;33:2;단10:16).
이 표현은 ;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
①'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②'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4:4).
가르쳐 -라고 하셨습니다.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
'가르침'(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입니다.
첫째 :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3]
둘째 : 애통하는 자입니다[4]
셋째 : 온유한 자입니다.[5]
넷째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6]
첫째 :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3]
0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3절 심령이 가난한 자(호이 프토코 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
'가난한 자'(눅6:20)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
이 구절은 ;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헬라어('프토코스') “즉”(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
여러 개의 히브리단어 중
가장 중요한('아나 임', 가난한 자)이란 말은 ;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시37:14;40:17;69:29;잠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사57:15;66:2).
더욱이 사61:1은 ;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눅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
①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②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
③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입니다(시69:29;70:5;74:21;사61:1;습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
①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37:14;86:14),
②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시34:6,18;51:17;사66:2).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 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 들면 ;
①'가난', ②'애통', ③'주리고 목마름', ④'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헤 바실레 이아 톤 우라 논)으로 나타냅니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천국은 ;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입니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입니다.
한편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 것은 ;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4:17;8:29;12:28).
❖그러므로 매일매일 기쁨으로 행복을 소원하는 사역자들은!=====>
1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456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창5:24, 인도와 보호)
1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후렴) 한 걸음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첫째 :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3]
둘째 : 애통하는 자입니다[4]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절에 애통하는 자(호이 펜둔테스) -라고 하셨습니다.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입니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4:17)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십니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옵니다.
여기서 '위로'(파라칼레오)라는 말은 ;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
이스라엘의 '위로'(눅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14:16)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7:17;21:4)가 될 것입니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기쁨으로 행복을 소원하는 사역자들은!=====>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456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창5:24, 인도와 보호)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후렴) 한 걸음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첫째 :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3]
둘째 : 애통하는 자입니다[4]
셋째 : 온유한 자입니다.[5]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5절에 온유한 자(호이 프라 에이스) -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이란 말은 ;
시편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온유'란 ;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11:29;약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
'온유란 ;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한편 본 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
팔복은 ;
①하나의 통일체이며
②그 모든 것들이 천국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땅'(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옵니다.
①그것은 유대 땅(2:6),
②이스라엘 땅(2:20,21),
③어느 지역(4:15;9:26,31;11:24;27:45),
④하늘과 땅 (천지) (5:18,35),
⑤하늘과구별 되는 장소(6:10;9:6),
⑥지면(10:29),
⑦흙(13:5,8,23) 육지(14:24),
⑧온 세상(12:40,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의 땅은 시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입니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
새 하늘과 새 땅(사66:22;계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시37:1,11,22,34).
왜냐하면 ;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6:10)가 되고 ;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17).
첫째 :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3]
둘째 : 애통하는 자입니다[4]
셋째 : 온유한 자입니다.[5]
❖그러므로 매일매일 기쁨으로 소원하는 사역자들은!=====>
2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456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창5:24, 인도와 보호)
2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후렴) 한 걸음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넷째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6]
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라고 하셨습니다.
①'심령이 가난함'(3절),
②'온유함'(5절)
③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십니다.
누가복음에는 ;
단순히 '주린 자'(눅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습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킵니다(시42:2;63:1;107:9;암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3:3,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입니다.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종말론적인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칭의'(稱義)라고 주장합니다.
(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 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
세상 적으로는 ;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 는 ;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벧후3:13)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대한 헬라어('코르타스데손타이')는 ;
푸른 잔디(막6:39)를 뜻하는('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요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
①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
②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첫째 :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3]
둘째 : 애통하는 자입니다[4]
셋째 : 온유한 자입니다.[5]
넷째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6]
❖그러므로 매일매일 기쁨으로 소원하는 사역자들은!=====>
4 옛날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456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창5:24, 인도와 보호)
4 옛날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후렴) 한 걸음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제3부 감사의 봉헌으로 축복
봉헌성가 / 361주의 주실 화평 (마5:24, 소명과 헌신)
1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 했나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마라
후렴: 주의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
2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사업을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좇아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3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주의주신기쁨 또 한 그의 사랑 어찌 말로다 형용하랴
예물봉헌 / 송우성 기도와 정성으로
봉헌축도 / 당회장 고 승철목사
축복기도 / 초장에 축복을 더 하소서!
승리외침 / 믿음은 능력의 힘을 주십니다.
❀ 매일매일 기쁨으로 행복합시다.
❀ 매일매일 기쁨으로 형통합시다.
❀ 매일매일 기쁨으로 승리합시다.
주후2024년 5월 생일명단 [생일을 축하합니다.]
송호성 5.10[음4.3]
김승현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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