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케이 기소-박근혜 명예훼손 논란, 박근혜 7시간 의혹, 최태민 정윤회 소문의 진실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이 대통령 박근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것에 대해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 등 외국에서도 우려와 함깨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목소리로 “보도의 자유를 위협하는 사건”이라고 비난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데요.
먼저 박근혜 명예훼손으로 피소된 산케이 전 서울지국장의 기사가 어떤 내용을 담았기에
검찰이 국제적인 비난을 무릅쓰고 외국 언론 기자에게까지 칼을 대는지 살펴봅니다.
카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지국장은 8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가 침몰했을
당일에 누구와 만났을까? 라는 의문과 세간에 떠도는 말들을 정리해 일본판 인터넷에 실었습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세월호 침몰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방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것인데요.
조선일보를 인용한 이 기사의 표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누구와 만났을까?'
였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기혼 상태였다고 전해지는 한 남성과 대통령의 관계에 대한 한국 언론과 증권가에 떠도는
소문을 재언급한 것이었습니다.
그 한 남성은 지난 대선에서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최태민 목사의 사위 정윤회입니다.
최태민 목사와 정윤회에 대해서는 아래 별도로 말씀을 드립니다.
국내 그리고 외국의 여론과 반응
일본의 유력 언론 아사이신문은 “한국은 법령상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기소할 수 없으므로 검찰의 판단에
정권의 의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하고
“보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권이 힘으로 강제해 굴복시키는 것은 폭거”라고 논평했습니다.
또 요미우리신문은 “형사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청와대의 의향에 따른 정치적 기소일 것”이라며 “
보도에 대한 압력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함.
그외 니혼게이자이신문, 마이니치신문, 도쿄신문도 등 다른 일본 언론도 유사한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면서 일부 언론은 군사 정권 시절에 한국에서 있었던 보도·취재 제약이나 기자 추방을 거론하고
이번 사건이 명백한 언론탄압으로 한국의 대외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함.
젠 사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지지하며 매년 내는 인권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관련 법에 대한 염려를 표명해 왔다’고 밝히고 AP통신이나 로이터통신 등이 관련 소식을 상세히
전하는 등 서구 사회도 주목하는 상황입니다.
미국 ABC방송은 "유엔인권연례보고서가 한국의 국가보안법의 적용에 대한 우려와 구마사카 산케이 사장의
이번 기소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용이 저해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국경없는기자회'가 2014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를 180개국 중 57위로 선정한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10일 ‘산케이 서울지국장 기소는 언론자유 하락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검찰의 기소를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박근혜 명예훼손 혐의로 산케이를 기소한 것이 잘못된 이유
- 검찰이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 의혹’을 보도한 산케이 서울지국장을 기소하면서 대한민국의 언론자유가
지구촌의 화제가 됐는데 세계 주요 언론이 한국의 언론 자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 국민이 체감하는 박근혜 정부의 언론자유는 굳이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의 언론자유 순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 한마디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유신시절’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 일반상식처럼 됐다.
- 보도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언론을 옥죄고 재갈을 물리는 것, 이것이 바로 독재.
이쯤되면 과거 군사 독재 정권보다 더한 여왕 독재 정권이라 할 만하다.
- 세월호 참사 당일 소위 박근혜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은 대통령의 사생활이 아닌, 국가적 참사의 순간
대통령으로서 어떤 조치, 어떤 행보를 했느냐는 명백한 공적 영역에 대한 문제이다.
당연히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 역시 공익적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이고 마땅하다.
- 해당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면 청와대가 신속히 그날, 그 시각 대통령 행적에 대해 상세히 밝히면 되는 문제이다.
이를 법적 문제로까지 비화시키는 박근혜 정권의 행태는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에 대한 국민적 의혹만
더욱 부추기는 것이다.
이상의 여론 동향을 살펴보면 검찰이 산케이 전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것은
적지않은 파장이 예상됩니다.
기소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한 미혼여성, 사인 박근혜라면 충분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 공인 박근혜란 점에서 검찰이 사인의 명예훼손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에
국민이나 외국의 동의를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최태민, 정윤회는 누구인가?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 그리고 정윤회라는 이름은 대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속해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네거티브 기사로 많이 나왔던 이슈입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 상당하지만 국민들에게는 많이 퍼진 내용입니다.
최근 정윤회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것은 7월 중순에 언론에서 보도가 나오면서입니다.
박근혜의 남자 정윤회가 부인과 이혼을 한다는 기사였죠.
정윤회는 최태민 목사의 다섯째 부인의 딸 최순실의 남편입니다.
즉 최태민 목사의 사위이죠.
최태민 목사는 박정희 정권에서 보이지 않는 실세로 소문이 났었고 박근혜 대통령과는 오랫동안
특별한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최태민 목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력은 목사와 승려라는 이질적인 종교의 직책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 최태민(崔太敏) 본명이 최도원이라는 것, 1912년 출생해 1994년 사망했다는 것,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입니다.
1949년 이전에는 주로 치안당국에서 근무를 하였으며,
19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대한구국선교회를 조직하였고,
자신은 총재가 되었으며, 박근혜는 명예총재가 되었음.
후에 이 단체는 1976년 구국봉사단, 1979년 새마음봉사단으로 명칭을 바꾸었음.
최태민 목사에 대한 기사가 현정권 들어서 불법시 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관련 내용은
사실성이 담보된 사진과 보도된 신문 기사 캡처로 대신합니다.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다음은 한겨레 2012-07-17 기사입니다.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어쨌건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
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 한겨례 기사 내용임>
반면 정윤회는 최근 인물이고 공식 직책을 가졌기에 프로필이 알려져 있어야 하나
이력이 철저히 숨겨져 있습니다.
포털 인물검색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누군가 삭제 요구를 했다는 의혹이 생길만하죠.
정윤회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박근혜 비서실장을 했습니다.
최태민 목사의 다섯째 부인의 딸 최순실의 남편으로 최태민 목사 사위입니다.
박근혜 국회의원의 비서실장으로 불리고
보좌진과 비서실을 총괄했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탈당,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
정윤회는 박근혜 총재비서실장으로 일했고 2004년 이후부터 전면에서 사라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조직과 최태민 목사 관련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전면에서 물러나게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이나 지금까지
숨겨진 실세, 최측근으로 이름이 거명되고 있네요.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소문의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믿는 사람이 ‘정윤회’와 이상렬 EG 회장이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이상렬은 박정희 수행과장 출신으로 마약복용 혐의로 보호감호 치료를 받던 박지만을
국내 300위대 부자 EG회장으로 만들어준 인물이죠.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대선후보 검증청문회에서 “정윤회 비서가 능력이 있어 실무 도움을 받았다,
법적으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최태민 차를 운전하는 기사로 일했다고도 하는 그의 프로필은
세상에 알려진게 전혀 없습니다.
최태민 딸과 결혼함으로써 최태민의 사위가 되고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까지 되는
수직 출세의 주인공인 정윤회.
언론은 그에 대해 이같이 알리고 있네요.
첫댓글 참 이런 걸 보면 박근혜는 정신적 결함이 있어 보이고, 소문대로라면, 어찌 저런 사기꾼같은
사이비목사 최태민이나 정윤회같은 잡것들과 어울리는지 한심스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경상도 도민들의 합작품도 이제 그 막이 다 돼 갑니다. 참 세월 빠르죠...이제 새 작품의 세상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바그네는 이제 지는 해 입니다. 자 기대합시다. 새로 떠오르는 해를 ....
재미 있는 이야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