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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우 시집-목어는 새벽을 깨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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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참 나를 찾아 가는 길 -목어는 새벽을 깨우네
강 영 환(시인) 1. 보통시민이라면 시대가 혼란스럽고 살기가 어려울 때일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자주 나타난다. 그럴 때는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세상을 잊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게 정답이다. 그렇지만 죽지 않고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참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또한 가까운 곳에 있음도 느낀다. 공부가 모자라고 수행이 모자라 희노애락에 쉽게 휩쓸리게 되는 범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새가 아닌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길은 무엇일까. 보우 스님의 시를 읽으면서 첫 번째로 가슴에 파고드는 의문이다. ‘걸림 없는’ ‘끝없는 정진’ “하심의 절‘ ’본래 모습‘ ’비우고 비우란다‘ 등과 같은 시에 등장하는 어휘들이 바로 그런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 전의 작품집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숙제가 나를 기다렸다. 영원한 해탈을 위하여 속세를 거침없이 뒤로하고 총총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 행자는 독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뒷모습에서 쌀쌀한 찬바람이 불어 주변에는 온통 눈이어서 꽃 한 송이 필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곁에 가면 어쩐 일인지 따뜻한 온기가 난다. 온기는 세상을 품어 안는 매이지 않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쉽지가 않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에서 따뜻한 온기가 뿜어져 나오고 향기가 그득하게 넘쳐 난다. 독하다는 생각은 뒤에 남는 자의 몫이고 실지로 수행의 길에 접어 든 행자는 차갑고 따뜻함의 경계 밖에 있다. 그렇기에 모든 이치나 사물이 아름다운 실존으로써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생을 사노라면 거미줄처럼 설키고 엮인 미로가 숙제처럼 다가오며 한 문장 미로를 찾기보다 점점이 그 속에 동화되어 부대끼는 살 냄새 맡으며 체념하듯 무력증 환자 되어 길을 가네 여기 미로처럼 엉킨 라면이 맑은 물을 만나 매듭을 풀듯 우리 삶도 마음속에 맺힌 매듭을 풀고 사노라면 숨소리도 고요히, 고로 사랑하라 「삶의 비유」 전문 시인은 아주 간단한 화두를 제시한다. 우리 삶은 모두 유행가 가사 속에 들어있다는 말과 같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그렇게 접근한다면 잴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그냥 닥치는 대로 느껴 볼 일이 아닌가? 우리는 미로처럼 얽힌 삶을 체념하고 사는 무력증 환자이다. 미로를 풀어나가는 법은 물같이 사는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밖에 있는 매듭을 풀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매듭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만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마음속의 매듭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풀릴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는 것은 쉬워도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운 과제임을 시는 각성시켜 준다. 보우 스님이 시에서 추구하는 것도 바로 경계를 벗어난 사물의 존재이유,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추구라 할 것도 없다. 그것이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처럼 그냥 그곳에 있음을 발견해 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한 곳에 매이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매듭을 해지하는 방법이다. 스님의 모든 행은 보살행이며 수행에 속한다. 시인 스님이라도 어쩔 수 없는 굴레다. 스님으로서 갖는 수행의 목표는 해탈이다. 그러므로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테고 그 중 한 방편으로서 시를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는 해탈의 결과물일 수는 있어도 그 방편으로 삼기에는 너무 벅찬 대상이다. 그것만으로 평생을 참구해도 도저히 이를 수 없는 피안이기 때문이다. 시는 인식의 결과물이며 깨달음의 결과물이다. 스님 시인으로서는 두 가지 고통을 안고 가는 것이다. 그것은 승려와 시인이라는 처절한 자기 수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도달하기도 어렵고 시를 써 나가기도 어렵다. 흙이듯 물이려오 불과 바람이련가 인연의 광장 반죽하듯 나투어 나그네 운신하여 한 벌 옷 건지었네 「옷 한 벌」전문 동양철학에서는 지수화풍이 모여 사물을 이룬다고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내 몸은 지수화풍이 만나 이룬 한 벌 옷과 같다고 시인은 인식한다. 정신에 입힌 옷 한 벌, 그것이 현재 나를 이루고 있는 형체다. 언제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떠날지 모르는 나그네 인생으로서 가장 큰 소망은 바로 나그네 길을 청산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며 깨달음인 것이다. 위 시는 게송이 아니다 철저한 자기 인식을 통해 얻어지는 자기 성찰의 결과다. 해탈 혹은 깨달음에 이른 선지식은 게송을 읊는다. 그 게송은 바로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낸다. 게송의 높낮이를 통해 수행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해 낼 수 있듯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를 통해 시인의 정신적 높이를 가늠해 낼 수 있다. 섣불리 입 밖에 말을 내지 말 것이며 함부로 시를 발표라고 해서 보여 줄 것이 아닌 이유다. 해탈에 이르게 되면 걸림이 없는 마음 덕분에 시는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아니 시가 찾아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그렇지가 않다. 수행하는 스님이 시를 써낼 때는 수행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수행 과정에서 마음에 그려지는 형상들, 혹은 마음의 그림자가 그려 주는 이미지를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고 의식이 숨어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 있다. 그런 것들과 냉정하게 거리를 떨친 게송과는 다른 이유다. 푸른 잎이 삭풍에 말리듯이 곱고 싱그럽던 얼굴 주름이 말린다 머리칼에 달빛 부서지던 칠흑이었는데 명주실 같은 순백의 머리엔 달빛은 볼 수가 없네 「잔영」전문 늙어감에 대한 한탄, 이는 늙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다. 시인은 무엇 때문에 시를 쓸까? 심각하게 고민해 본 시인은 많지 않다. 그것은 고민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빠져야 할 운명처럼 느낀다. 같은 질문처럼 스님은 왜 해탈에 이르려고 할까? 해탈에 이르려고 수행을 할까? 이런 의문과 같은 것은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들이 시가 된다는 리차드 버크의 말에 공감하듯이 시인들은 신체적인 부담을 시로 토해냄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인간의 육체적 활동이 곧 언어로 화한다는 이론을 펼치고 있는 파겟은 <제스츄어 언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을 때는 혀, 목구멍의 근육조직은 그의 잡는 행위를 반영한다고 본다. 이 때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잡는 자세에 <소리>를 줄 때 우리는 그 소리를 언어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할 때에도 그것을 표현하고자하는 입의 근육에 의해 이미 상징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버크는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를 이 이론에 접목시킨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그를 깊이 괴롭히는 세계 곧 <부담 burden>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부담은 질병 같은 육체적 본질을 내포하며 재산을 모아 빚을 갚듯이 이 부담의 축적과 그 축적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생에 대하여 승리하고자 한다. 곧 시인은 자기의 약점 속에 귀속적 이점을 갖게 됨으로써 승리한다는 것이 바로 버크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들, 고통들이 시인의 문체를 태어나게 하고 그 문체는 또한 시인의 육체적 질병과 은밀히 연관된다. 모든 상징적 행위의 주제는 이러한 부담, 육체적 질병을 지향하는 것이다. 곧 <부담>은 문체를 상징하고 문체는 부담을 상징한다. 스님들이 해탈을 추구하는 이유도 좀 더 자유로워 질 수 있기 위한 부담감 때문에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2. 보우 스님이 쓰는 시는 자신이 가야할 수행의 길에서 만난 사물이나 삶의 편린들이 그 대상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사물에 대하여 객관적 시선을 회복하는 일. 갓 태어나 처음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무의 상태에서 만났던 사물들, 그들을 보는 처음 눈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수련의 길이다. 마음에 남아있는 편견이나 아류들을 덜어내는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비운다. 시인의 시에서 보여 지는 것은 바로 마음을 덜어내는 일, 색깔을 빼는 일,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그것이 시를 통한 수행이며 세상을 읽는 방편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전적으로 몇 편의 시를 통해 드러난 세계를 추측할 뿐임을 전제한다. 높다란 가을 하늘 흰 구름 흘러가고 땅 위에 북천강은 푸르고 푸르더라 억새꽃 물결 타고 바닥이 동공이면 백혈은 솟아올라 천년을 밝혀있고 송죽은 주련되어 금당을 호법하니 범종도 맥을 이어 종사에 응답하네. 「백률사의 종소리」 전문 일상인들의 삶에는 항상 고苦가 들어있게 마련이다. 종교인들은 이 불청객을 몰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고는 인간의 행복을 앗아가는 기생충과도 같다. 일상인은 자기가 생활 속에서 고를 느꼈을 때 스스로 사라지게끔 수행을 하거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고를 자신이 내몰아야만 한다. 불교 경전에서도 고를 사성제라하여 이를 떨쳐내기 위한 여러 방편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론적으로 알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 있어도 현실로 내가 처했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직접 부딪혀서 넘어 가야하는 일이다. 깨우침이 그런 것 아닌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곧 객관적인 시선을 갖추는 것이다. 그랬을 때 마음이 문제다. 고통은 생각의 차이에서 온다. 우리가 널리 아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캄캄한 산속에서 밤중에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어보니 바가지에 물이 있어 그 물을 맛있게 먹었다. 자면서 물맛이 어찌 좋은지 아침에 일어나 어제 먹은 물을 찾아보니 해골바가지가 있고 물에는 구더기는 우굴우굴한다. 그걸 보니까 구역질이 났다. '어제는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은 왜 구역질이 나는가?' 해골바가지는 이전부터 거기에 있었고 물도 담겨져 있었다. 그 물을 보지 않고 먹었을 때는 맛이 있었고 아침에 그것을 보고 난 뒤에야 마음이 뒤집혔다. 해골바가지 물이 어떻게 하지는 않았다. 눈으로 보고 더럽단 생각이 나를 괴롭힌 것이지 해골바가지가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세상 모든 이치는 우리가 돌아가는 모든 바깥 대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효선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데 있었던 일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떤 이치에 부딪히면 그 경계에서 느껴볼 일이다. 토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그것을 붙들어 죽도록 패서 구만리 창공으로 던져버리는 일이 바로 수행자가 할 일이다. 높다란 쪽빛 하늘 낮달은 삼계를 아우르고 대지의 초원은 하늘 키 세우며 계절의 바람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 나뭇잎 층계로 붉은 장엄 이루어 산천은 고요히 낙엽의 소풍 길 시월은 또르르 말려 수미단을 오르네 「가을 소풍」 전문 수행의 길에서 만난 모든 사물은 스승이 된다. 낙엽, 억새, 쪽빛하늘, 낮달, 겨울비, 칼바람, 새의 죽음, 방충망에 걸려 죽은 모기의 시체,운무 모든 사물이나 자연 현상이 화두가 되어 다가온다. 보우 시인은 그들과 화해하는 일로 수행의 첫걸음을 삼는다. 3. 스님의 시를 읽다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떠오른다. 마음이 짓는 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형상 있는 것이란 언젠가 변하기 마련이고 남는 것은 오직 정신뿐임을 엄숙하게 느낀다. 그러나 중생들은 어쩔 수 없이 생을 살아야 하는 일에 길들여 있다보니 죽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사라짐과 생겨남을 반복하는 윤회의 삶이 자주 다니는 길처럼 되어버린다.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간직하고 살아온 어리석은 윤회는 다른 길이 없어 습관이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다른 세상으로 가는 과정으로 본다. 다른 세상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윤회다. 몸을 버리고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면 가고 오는 것의 주체는 무엇인가. 몸이 없을 때는 정신도 이 세상에 없다. 잠이 들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정신이 없을 때에는 몸도 느낄 수 없다. 정신이 들었을 때만 내 몸을 느끼게 된다.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몸을 깨우는 자는 누구인가. 정신이 깨어나야만 몸도 깰 수가 있다. 정한 이치이거늘 정신 외에 무엇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몸은 곧 정신이 느끼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곧 정신이 있으므로 몸이 있는 것이다. 앙상한 나목 기다림의 수행인가 가지마다 묵언의 죽비 적막을 깨우네 「봄이 오는 소리」 2연 수행자들이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체험을 통해 전신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몸으로 세상을 감각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이미 마음을 떠난 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수행의 출발은 현실인식에 있다. 존재하는 습관에는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은 수행의 법도에도 있다.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하는 수행에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자세를 지니고 그것이 당도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먼 길도 아니고 가까운 길도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은 자신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 수행자는 오직 수행만을 추구한다. 자신이 홀로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이 될 수 없는 깨달음은 객관적인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음은 보이지 않는 허공과 같다. 허공에는 끝이 없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자가 아니라도 삶이란 오직 영원히 계속되는 수행의 길일뿐이다. 그것을 먼저 깨우친 이가 바로 수행자다. 하늘이 땅인지 땅이 하늘인지 분간 못할 칠흑의 밤 수많은 빗물의 흐름 보며 빗줄기 만강으로 직립하고 바람에 스친 대지의 비뚤어진 행간 다름질 하듯 비를 뿌린다 맑은 하늘 가장자리 한 벌 옷 널 날을 위하여 청송은 여전히 푸르다 「빗줄기」 전문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음에 이르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신이 물질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몸이나 외부 사물이 아니라 내면이어야 한다. 외부를 통해 인식된 이미지가 시인의 관점으로 형상화 된 것이 시라고 한다면 시는 시인의 내면이다. 시를 통해 드러낸 세계는 시인이 주관이며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고스란히 내재되 있을 수밖에 없다. 위 시에서 시적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한 벌 옷을 널 수 있는 청명한 날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 벌 옷이 드러내는 것은 육신이다. 정신의 껍질을 벗어 널어 말리는 순간은 바로 해탈에 이른 때를 말한다. 청명한 날이란 바로 해탈에 이르러 경계가 허물어진 경지다. 비를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것은 해탈이라는 지극히 높고 높은 정신의 높이다. 깨달음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현듯 나타나는 현상이며 물질로는 다가갈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꿈같은 영역이지만 그런 정신의 영역이 있는 것은 확실하므로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보여지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이 깨달은 이가 내뱉는 게송일 것이다. 투명하고 바람같은 깨달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혹은 오해하며 환희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도 ‘너’도 ‘사회’도 ‘삶’도 사라진 채, 오직 깨달음 홀로 남아 적요 속으로 흘러간다. 그런 평화가 있는 길로 끝없이 걸어간다. 우리 삶이 각자하는 해탈 혹은 꿈의 정체이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푸른 공 위 새벽을 열며 솟아 오른 붉은 감 따라가다 서산 감홍시 달마는 소식 없고 어두운 동녘 산위 둥글게 만난 만월을 보며 하얗게 길 위에 부서지는 달빛 눈이 시려 그만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달이련가 달이 눈물일까 방울 속 달이 있어 방황의 걸음 이 뭣꼬는 들리질 않네 「내 머문 자리-수행 2」 전문 주체와 객체가 구분이 없어지는 무분별의 사고 체계 속에서 일체의 방황도 사라지고 지극한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런 평화 속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 길은 고난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의 방향을 옳게 잡았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이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 자신이 경험으로 쌓아 온 오해를 푼다면 그렇다 중생들이 한결같이 믿어 온 것은 자신에게 몸이 있고 세상의 실체가 있으며, 죽음도 있고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커다란 오해인 줄 모르고 근본이 되어있다는 생각이다. 색깔을 구분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인식이다. 색맹은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빨강색으로 그려진 그림을 회색으로 착각하는 것은 그에게는 당연하다. 그는 착각이 착각인줄 모FMS다. 색을 구분하는 사람도 그것이 진정하게 본래 가진 색깔과 자신이 느끼는 색이 같다고 여긴다. 그것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보이는 색은 단지 허상이며 진리는 어떤 색도 본래부터 없다는 것만 깨달으면 된다. 자신이 느끼는 색이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 치료하지 않으면 그 오해는 점점 더 깊어져 간다. 오해를 풀어줄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내 형상의 살결은 흙이었고 내 흐르는 진액은 물이라 내 따뜻한 체온은 불이므로 내 움직임 바람이었네 내 주인공 있지도 없지도 않으니 이를 일러 적멸이라네 「나의 주인공」 전문 물질이나 내 몸을 이룬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잠에서 나를 깨우는 주인공조차 사라지고 말았으니 윤회를 벗어난 해탈에 머무르게 되고 그곳은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 영원한 적멸이다. 수행하는 일은 시작이 중요하다. 잘못된 스승을 만나면 깨닫고 해탈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어리석은 행을 많이 하게 되는 외도에 빠지게 된다. 깨달음은 성적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는 안다. 외도는 스스로 미혹한 줄 알면서도 깨달았다는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 생사를 초월하겠다고 출가를 한 뒤에도 몸뚱어리를 보전하기 위해 미혹에 빠져 헤쳐 나오지 못하는 수행자들이 많다. 오히려 출가하기 전보다 초라해질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구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도가 아닌 것이다. 수행으로 가는 좋은 스승은 자신 밖에 없음을 깨닫는 행복을 지녔다. 깨달음은 몸이나 몸이 내뱉는 말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허공으로써 허공에 들어야 한다. 난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순식간에 건너가서는 허공중에 자유로울 수가 있다. 보우 스님의 시는 수행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다지는 몸의 시를 보여 준다. 어둑새벽 밤바람은 천인사의 뜨락 도량을 쓸고 있고 하늘 만월 아래 도량석 천년을 넘고 넘어 여래의 귓구멍 피안교 건너 천근 눈꺼풀 불이문 열고자 오늘도 목어는 새벽을 깨우네 「새벽을 깨우며」 전문 먼 길을 가야할 사람은 동 트기 훨씬 전부터 서둘러 채비를 해야 한다. 새벽은 목어가 깨우지만 목어를 깨우는 것은 수행자의 몫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깨달음이란 멀고 아득한 곳이다. 안개 속이기도 하고 험한 산 너머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만 먹는다면 그곳에 이르는 길은 많이 있다. 영적으로 진화한 상태와 의식 연구 및 참 나로서의 신의 현존에 대한 각성이라는 주제에 관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적 스승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최근 저서 『내 안의 참 나를 만나다』에서 <스스로를 속박하는 의식의 허상을 넘어 내 안의 진정한 신, '참 나'를 발견하라>고 했다.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길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다.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어 질 것이며 연꽃을 들어 보이신 부처님의 무소설의 법리처럼 지혜있는 자는 수없이 널려있는 깨달음을 쉽게 주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노래와 함께 수행의 길을 가는 시인은 서두르지도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자리에 있어 그 자리의 해탈을 기다릴 뿐인 스님 시인의 시를 만나서 잠시라도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가기를 권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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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제 어느 지인이 백률사에 보우스님 만나고 왔다는 얘길 들었는데 여기서도 보우 스님 소식을 듣는군요,시집도 내시고~어저께는 티브에서도 잠깐 보였습니다,백률사에 한번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