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매기 그녀를 만난 곳은, 이곳 묵호항이다. 아마, 5 년 전 아까시아 꽃망울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봄 날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 해를 온전히 기억하는 이유는, 갈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마다 아카시아 꽃이 필 때쯤이면 꽁치떼가 동해 연안으로 몰려드는데, 그해는 꽁치떼가 동해 연안에서 벗어나 저 멀리 울릉도 근해도 돌아서 남하엤던 것이다. 그래서 꽁치배가 하루 종일 독도 근해로 배를 몰아 하루 종일 작업을 해서 또 하루가 걸려 항구로 돌올 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당연히 꽁치 값이 폭등을 하였다. 어선의 생산비 중에 기름값이 차지하는 비용이 대단했고, 꽁치 또한 신선도가 많이 떨어졌다. 연안에서는 그날 잡아 바로 회로도 먹을 수 있었는데, 그해 꽁치는 도저히 회를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무거운 칼로 꽁치를 뼈채 통채로 두둘겨 짓이기고 거기에 각종 야채와 계란을 집어 넣어 동그랗게 똥그랑땡을 만들어 후라이판네 구어먹엇던 기억이 있다.
대게 철이 끝나고 한 달 정도는 꽁치 장사를 했는데, 그해는 꽁치 장사를 포기하고 묵호 어판장 앞 시장통 술집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 술집에 그녀 갈매기가 나타난 것이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이라는데, 아주 어린 동안이었다. 자그만 키에 가느다란 허리를 가졌다. 순진한 얼굴에 부산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부산 영도 출신이라고 했다. 그녀를 데리고 온 사람은 시장통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명숙이 누나였다. 누나 말에 따르면, 어제 어민 한 사람이 방파제 끝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와 술을 마시다가, 오갈데 없는 그녀를 명숙이 누나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데리고 왔던 것이다. 명숙이 누나 노래방은, 다음 날 날씨가 나빠 배가 나가지 못한 날에는 어민들로 꽉차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오래된 건물에 시설도 형편없지만, 이 동네서는 제법 잘 나가는 가게인 것이다. 나 역시 그곳을 자주 들락거리다가 명숙이 누나와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명숙이 누나가 나에게 갈매기를 인사 시키기 위헤 데리고 왔던 것이다. 명숙이 누나의 노래방에는 온갖 여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왔다가 사라지는 통에 눈 여겨 볼 여자도 없었다. 그런데, 유독 갈매기 그녀 만큼은 오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처음 만난 그녀에게 그녀의 가족사를 들으면서 더욱 확고해지기 시직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12 남매를 낳았다. 갈매기는 그녀의 어머니가 세번째 마지막으로 살았던 경주의 과수원을 하는 사내와의 사이에서 3남매를 낳았는데 거기에서 막내였다. 과수원 사내가 죽고 배 다른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다가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그녀의 고향이었던 부산 영도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서 병든 어머니를 모시다가, 어머니를 여의고 오갈 데 없이 홀로 떠돌다가 이곳 묵호항까지 오게 된것이다.
그녀의 사연을 들으면서 내 얄팍한 마음에는 연민으로 물들었고 그래서 그녀 갈매기와는 마치 누이 동생처럼 가까와 질 수 있었다. 그 후로도 5 년 동안 그녀와의 이야기는, 내 마지막 삶의 현장이 될 이 곳 묵호항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생선 비린내로 시작을 해서 어판장 앞 술집에서 생선 안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이곳은, 갈매기 그녀 뿐만아니라, 과거 오징어로 흥청이던 묵호항에는 전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아가씨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심지어 석탄 경기에 들썩이던 태백 대밭촌 아가씨들 조차 묵호항의 명성에 한 둘씩 오게 되었다.
동해의 구 시가지였던 발한동 삼거리는 미장원과 옷가게와 화장품 가게로 문전성시을 이루었다. 한복 입은 술집아가씨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대낮에도 지금 우리마트 자리에 있었던 보영극장에는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에 시끄러울 정도였다. 밤이면 삼거리 모퉁에 있던 나이트에는 어민들과 술집 아가씨들과 멀리 원양 어선을 타고 나간 남편을 둔 바람난 여자들이 뒤엉켜 시장통을 방불케 했었다. 아가씨들의 싸구려 화장품 냄새와 어민들의 비린애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도저히 상상하기도 힘든 냄새가 났던 기억이 있다.
아침이면, 어판장 앞 시장, 지금은 노인정이었던 자리에 쫄쫄이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침부터 아가씨들이 머리채를 부여잡고 싸우는 광경도 자주 목격이 되었다..
내가 이곳 묵호항의 삼십년도 넘은 과거의 기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춘기 시절의 내 방황 때문이었다. 1978 년 어느 가을 날 나는 이곳 묵호로 전학을 왔다. 대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교 삼년생있었던 내가 잘 나가던 강릉의 명문학교를 때려 치운 것은 순전히 나의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써두었는데 다시 한번 옮겨 보겠다
[1978 년 그 가을 날의 기억]
나는 뛰고 있었다. 뒤에는 놈들이 소리치며 쫒아오고 있었다.
"서어! 서어! 씹쌔끼야!"
"저 새끼 잡앗!"
그날, 햇살 좋았던 가을 날에 나는 묵호 삼거리를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휴일 날 지나가던 사람들은, 관중이 되어 달려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정처없이 맑았다. 햇살의 파편들이 내 눈에 뛰어 들어 따가울 정도였다. 방파제에 나갔다가, 앞 묵호 깡패새끼들을 만난 것이 실수였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강릉 명문고에서 전학 온 내가 괜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놈들은 나에게 복종을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를 묵살했고, 나의 선방에 싸움은 시작되었다. 도저히 놈들의 떼거리를 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도망을 친 것이다.
삼거리에 다달았을 때, 앞에서 놈들의 다른 일행들이 길을 막았다. 도망 칠 수가 없었다. 독 안에 든 쥐였다. 뒤에는 놈들이 숨을 헐떡이며 사냥개 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앞에서 발길질 했던 한 놈의 발을 잡아 삼거리 양복점 쇼윈도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대형 유리창은 박살이 났고, 나는 잽싸게 유리조각 두 개를 잡았다.
양 손에 유리조각을 잡고 나는 소리쳤다.
"덤벼! 덤벼! 덤비란 말이야! 씹쌔끼들아!"
놈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관중들의 표정도 경악을 하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쌕쌕이가 하얀 그림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갑자기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나는 애써 눈물을 참고 다시 소리쳤다. 놈들에게 약점을 보이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빨리 덤벼 개새끼들아!"
그러면서 나는 유리 조각 두개를 양손에 들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놈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관중들도 하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역시, 시골 날깡패새끼들은 순진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앞 묵호 깡패새끼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 학원가로 도망갈 때까지 놈들과 술이나 빨면서 지낼 수 있었다.
1978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정지된 화면 처럼 나의 머리 속에 화석처럼 남아있다. 그 가을 날의 햇살의 파편과, 나를 쫒아왔던 묵호시내 날깡패 새끼들의 욕설과,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관중들과, 하늘을 날았던 쌕쌕이의 하얀그림, 그리고 피가 흐르는 줄 도 모르고 유리조각을 들고 서 있었던 내 모습과, 그때 흘렸던 눈물.......그때, 나는 강릉의 명문고에서 묵호의 삼류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상태였다. 지금은 북평과 묵호가 통합되어 동해시로 되어, 시내 중심이 천곡동으로 옮겨갔지만, 그 당시는 기차역 굴다리를 빠져나와 삼거리가 중심지였다. 묵호는 영동선 기차역의 중요 정차역이었고, 동해안의 유명한 어항이었고, 외국 사람이 들락거렸던 국제항이었다. 대낮에도 묵호극장은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로 시끄러울 정도였고, 앞 묵호 목욕탕과 미용실도 그녀들이 없으면 장사를 못 할 정도였다. 밤이면 삼거리의 카바레는 외항선 탄 남편을 둔, 바람 난 유부녀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굴다리 위 기찻길을 석탄을 실었던 기차가 지나가면, 바람에 까만 먼지가 날아오르곤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묵호는 석탄의 검은색과 술집 아가씨의 빨간 루즈 색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도시였고, 바람 난 유부녀들과 니나노집 한복 아가씨들의 싸구려 향수 냄새와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가 기가 막히게 섞여서, 강한 자극을 주던 도시였다. 어판장의 아줌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고, 항구 위의 달동네에서는 아이들이, 그 밑의 니나노 집에서 쓰레기통에서 뒤진 콘돔을 풍선으로 불면서 노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징어 배가 들어오는 날에는 온 도시가 흥청거렸다. 지나가는 개새끼들 조차 돈을 물고 다닌다고도 했다. 비린 내 나는 돈은 온 도시를 점령했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아이들도 그 당시 학생으로서는 만지기 힘들었던 천원짜리 돈으로 짤짤이를 했고, 그런 돈으로 고등학생이 시내 호프집을 돌아다녀도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때 순진했던 깡패새끼들이 그립다. 얼띠기 사춘기 소년의 유리조각과 내가 흘렸던 빨간 피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박한 권력마저 순순히 내주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작은 권력으로 나를 내리누르려 했지만, 나는 그 당시 그들의 작은 권력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와 기차역에서 번져나왔던 까만 석탄가루,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가 정답게 다가온다. 콘돔을 불고 놀았던 아이들과 악다구니 싸움을 했던 어판장 아줌마들이 사랑스럽다.
분명, 1978 년 그 당시의 묵호의 표정은 십 대 후반의 고등학생에게는 좋지 않는 교육환경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 조차 보수적인 교육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터부시 될 일이다. 나 역시 이성적으로는 바람직한 환경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때의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다녔던 명문고에서의 기억에 대한 억한 심정일 지도 모른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학교는 대학이 전부였다. 네모난 공간에 아이들을 가두어놓고 새벽부터 밤까지 감시를 하며 채찍질 했다.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은 전혀 자율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참지 못하면 문제아가 되었다. 나는 그것에 반항을 하며 뛰쳐나왔다. 그것은 거대한 폭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힘이 아이들을 내리누루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대학을 가야지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교육이었다. 박정희의 파시즘이 교실에도 지배하고 있었다. 깡패새끼들의 작은 권력은 그에 비하면 조죽지혈이었다. 차라리 그 당시 묵호시내의 천박한 표정이 학교의 이성적으로 포장된 네모난 공간보다 인간적이었다.
권력으로 교육을 시키고, 권력을 잡는 것이 최상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 교육이 아니다. 나는 비록 깡패새끼들에게서 작은 권력은 취할 수 있었지만, 학교의 커다란 폭력 앞에서는 어쩌지 못했던 순진한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1978 년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 날의 화면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이곳 묵호항은 나에게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방황했던 나의 사춘기 시절의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이곳에 갈매기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이곳 묵호항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생선을 파는 장삿꾼이 될 것이고, 그래서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졸필로 써내려가기로 작심을 하였다.
과거 몇 년전에 소설책 한권을 달랑 낸 삼류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가 글을 썼던 곳 조차 생소하기도 하다. 앞으로 내 글은 전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 되기도 하고 수필이 되기도 하고 내 얄팍한 인문학과 철학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써내려 갈 것이다. 한글 맞춤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작정이다. 왜냐하면 난 이제 더이상 작가가 아니고 늙은 생선장수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창피한 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의 이야기는 주인공은 갈매기 그녀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